동양의 여성사
조선 초까지 비교적 관대했던 여성문화
서양 문명이 카톨릭 사상을 바탕으로 형성된 반면 동양은 불교와 유교를 중심으로 문화가 형성되었다.
우리 할머니,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대우받아왔으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서양과 마찬가지로 원시공동체 사회에서는 씨족 구성원이 모두 수렵과 채집 등 경제활동에 참여했으므로 남녀의 차별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능을 하고, 이로 인해 풍요를 기원하는 제천의식의 집행자였다. 신라시대에 남해 차차웅의 누이인 아로(阿老)는 시조묘의 주제자(主祭者)였으며, 박혁거세의 비 알영(閼英)은 농상을 독려하여 박혁거세와 함께 존경을 받았다.
그러다가 청동기와 철기 등 금속문화의 등장과 더불어 여성의 역할은 축소되고 남성중심의 가부장권이 생겨났다. 이후부터 여성의 예속은 강화되어 고조선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인정되었고, 여자의 투기는 처벌의 대상이 되는 등 여자의 정숙이 강조되었다. 부여에서 투기한 여자는 사형에 처했고, 백제에서도 간음한 여자는 노비로 삼았다.
고구려나 옥저는 여성에게 관대한 편이었고, 신라시대에는 선덕, 진덕, 진성의 3명의 여왕이 나오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출가여부에 관계없이 딸에게도 재산을 분배하였고, 여손의 계승권도 인정하였다. 여성에 대한 이러한 지위는 조선 초까지도 이어졌다.
유교-여자는 문서(文書)없는 종
그런데 고려말 유입된 유학으로 인해 서서히 남녀차별의 제도가 마련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여성의 행동을 규제하는 규범들이 마련되었다. 삼종지도(三從之道), 칠거지악(七去之惡) 등 남존여비의 성차별문화는 사회전반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여자는 옥내노동만 할 수 있었고, 수절이 강조되었다. 또한 내외법(문무 양반부녀는 가까운 친척을 제외하고는 외부인과 만나지 못함), 외출규제, 복장규제(외출시 얼굴을 가리도록 함), 영실제도(營室制度, 가옥을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하여 남녀가족의 자유로운 출입을 금함) 등으로 여성의 행동을 철저하게 규제했다.
유교에서는 사회체제를 성립하고 유지하기 위해 남성은 지배, 강건, 존귀의 존재로, 이에 반해 여성은 복종, 유순, 비천 등의 뚜렷한 차별구도로 여성과 남성을 구분했다. 그리고 성종 때에는 ‘재가녀자손금고법(再嫁女子孫禁錮法)’을 제정하여 재혼하거나 행실이 나쁜 여자의 자손 및 서얼 자손은 문과, 생원, 진사과 시험에 응시할 수 없으며, 그 자손은 요직에 임명하지 않는다는 것을 법제화했다. 이 때부터 여성은 수절을 자신의 생명보다도 소중히 여기기 시작했는데 이는 바로 남편과 자식의 출세를 위해서였고, 가문의 명예와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17세기 중반부터는 장남우대, 남녀 차별적 상속, 장자 제사 모시기 등이 관습으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이런 제도는 벼슬과 인연이 없는 일반 백성에게는 실효성이 없었다. 그러자 국가에서는 수절을 유도하기 위해 정절을 지킨 여성의 집 앞에는 정려문을 세우고 세금을 면제해 주고, 상금을 주기도 했으며 신분을 해방시켜 주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다. 그리하여 여성들은 가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열녀로서 살수 밖에 없었다.
유교윤리로 인해 여성은 성적, 경제적, 정신적으로 남자에게 철저히 의존하며 살 수밖에 없었으며, 여성의 모든 일거수일투족, 말 한마디마저 사회규범에 제약받았다.
삼종지도(三從之道)라 하여, 여성은 시집가기 전에는 부모를 따르고 혼인한 후에는 남편을 따르고, 늙어서는 자식을 따라야 했다. 거기다 출가외인이 되면 혈연가족으로부터도 배제되고, 시가에선 소외당하며 시집살이를 해야했다. 시집살이의 질곡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 봉사 삼년으로 그 모진 역경을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칠거지악(七去之惡), 즉 아내를 내쫓을 7가지 조건을 만들어 여성을 종속시키고 옭아맸다.
그리고 여성은 친정과 시가 어느 쪽 족보에도 기재되지 않아, 보이지 않는 존재로 취급받았다. 간혹 기록되어 있는 역사서에도 여자는 김씨, 이씨, 박씨 등 성(姓)만 있을 뿐 이름은 무의미했다.
유교사회에서 여성이란 아들을 생산하여 대를 잇고, 가족들의 밥상을 차리고, 봉제사(奉祭祀)를 하는 무보수의 큰 일꾼일 뿐이었다.
불교-출가한 지 100년이 되는 비구니라도 동자승에게 경의를 표할 것
불교는 모든 중생이 해탈하는 것을 기본 가르침으로 한다. 본래 석가모니의 가르침에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차별이란 없었으며, 출신 성분에 관계없이 완전히 평등하다고 보았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똑같이 해탈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교에 여성의 경시풍조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석가모니 붓다의 직제자 시대가 지난 후 붓다가 신격화되면서부터였다. 『대지도론大智度論』과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여인오장설女人五障說’은 여인은 전륜성왕, 제석천, 마왕, 범천, 불신이 될 수 없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인불성불(女人不成佛)’이 등장했다.
‘여인불성불’ 사상은 초기 대승불교로 옮겨지면서 여인은 성불은 하지만 남자의 몸으로 변하여 성불한다는 ‘변성남자(變成男子)’라는 사상으로 바뀐다. 기원전 1세기경의 『대아미타경(大阿彌陀經)』 에서는 ‘내가 성불하면 여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나의 불국토에서 왕생하려는 여성은 모두 남성으로 변신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불가에서 여자가 출가할 때 지켜야할 계율인 ‘팔경법(八敬法)’에서는 여성이 불가의 법도와 청정행을 깨뜨리지나 않을까 우려하면서 여성(비구니)은 남성(비구)에게 마땅히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 남성과 달리 여성이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기 위해서는 팔경계(八敬戒) 외에도 팔기계(八棄戒), 육법(六法)을 더 수료해야만 비로소 비구니가 될 수 있다.
이슬람교-외간남자에게는 머리카락도 감춰라?
마호메트가 출현하기 전, 초기 사막지방에서 여성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다. 가난한 가족에서 태어난 여아는 출생하자마자 매장되었다. 이는 그 아이가 앞으로 당할 운명을 피하고 또 언젠가 그 딸이 그 가족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슬람교가 등장하면서 이런 악습은 사라졌다.
이슬람교의 교리 자체는 카톨릭에 비해 여성을 억압하기보다는 오히려 보호하려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이슬람교가 발생하기 직전이나 초기 이슬람교 시대만 해도 여성들은 지금과는 달리 훨씬 자유롭고 독립적이었다. 당시는 모계 중심의 가정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여성들이 남편을 직접 선택하였고, 남편의 부당한 대우에는 얼마든지 친정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코란』의 가르침이 현실에서 지나치게 실천되면서 여성을 압제하는 수단으로 작용되었다. 우훗(Uhud) 전투 이후 수많은 미망인과 고아가 발생하여 『코란』은 부인을 네 명까지 허용한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이슬람 사회에서는 부의 상징이 되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은 아직도 그 어느 지역보다도 강하게 남아있다. 이슬람 사회에선 남녀칠세부동석, 여성의 외출금지, 차도르 착용, 하렘(집안의 외진 곳에 후궁이나 딸을 가두어 놓고 가까운 혈족이 아니면 접근하지 못함, 외출 시 차도르 착용)설치, 심지어는 순결테스트를 하는 등 여성에 대한 억압이 지나칠 정도로 심하다.
차도르의 착용관습은 나라별로 조금씩 다른데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머리에 두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루를 뒤집어쓰고 눈 부분만 그물망으로 만들어서 쓰고 다닌다. ‘부르콰’라고 부르는 이것을 쓰지 않고 외출했다가는 심한 경우에는 돌로 쳐죽이는 사례도 있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 지역, 아프리카 등지에는 아직도 할례의식이 행해지는 곳이 많다. 할례는 남녀에게 모두 행해지지만 남자는 할례를 통해 남성답게 변모한다는 의미에서 성대하게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치르지만 여성은 다르다. 여성의 할례는 여성이 성적 쾌락을 맛보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함으로써 일부다처제 속에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확고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책략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개혁주의자들과 여성해방운동가들에 의해 차도르나, 하렘, 할례 의식 등이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이며 완화되고 있다. 하지만 전통을 고수하려는 보수파와 개혁파들의 대립은 계속되고 있다.
언어에서도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
여성에 대한 지배와 억압이 생활문화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한자나 한글, 영어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언어는 너무나 많이 보여진다. 우선 여자를 나타내는 ‘계집 女’를 보면, 그 형상이 사람이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모습, 두 손을 얌전히 포개고 무릎을 꿇은 여성을 본떴다고 한다. 이는 여성은 남성 앞에서 항상 정숙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계집 여(女)자가 들어가는 말 치고 과히 좋은 말은 없다. 간사할 간(姦), 괴이할 요(妖), 망령될 망(妄), 간통할 간(奸), 늙은이 질(姪) 등에서 보듯 여성은 사회를 혼란케 하는 존재로 취급되었다. 또 노비(奴婢)라는 단어에 女자가 각각 들어가는데, 이는 여자는 일이나 하는 노예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엄 위(威)자는 술(戌)자와 여(女)가 결합되어 여자는 개처럼 집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역사를 ‘history’라고 하는데 이는 he와 story가 결합된 말로 한마디로 남자의 이야기, 남자만이 역사의 주체라는 뜻이다. 그리고 ‘아담(adam)’이란 말도 본래는 히브리어에서 사람(man)이라는 일반 명사로 쓰이는 말이었다. 즉 아담이 사람이고 아담은 하느님이 창조했으며,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 남자보다 한 단계 낮은 부류의 존재라는 것이다.
결혼한 여성을 나타내는 ‘woman’ 은 ‘wife+man’ 으로 여성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남자(man)에 종속되어있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man’에는 남자라는 의미도 있지만 사람, 인류, 인간을 나타내는 말로 동시에 쓰이고 있다. 즉, 고대나 중세 역사에서 보듯이 ‘인간’ 속에는 남자만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으로 ○○여자고등학교라는 말은 있어도 ○○남자고등학교라는 말은 없다. 남자고등학교는 그냥 ○○고등학교로 통한다. 즉 학생이라는 말이 남학생을 뜻하는 말로 종종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policeman(경찰관), fireman(소방관), manager(경영자) 등의 단어에서도 남자를 나타내는 man이 보통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 예들이다. 그래서 근래에는 a여권운동에 의해 policeperson, fireperson, womanager 등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또한 남자는 결혼 전이나 결혼 후나 Mr.(미스터)라고 불리는 반면 여성은 결혼 전에는 Miss.(미스)로 불리다가 결혼 후에는 Mrs.(미세스)라 불렸는데, 이는 명백한 남녀차별을 나타낸다. 그래서 여권운동가들에 의해 요즘은 Ms.(미즈)라는 말로 통칭하여 부르고 있는 추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