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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펌)성경섭 칼럼 <12> 무한도전 / 이영칠
그대 그리고 나/포항 추천 0 조회 175 16.10.05 10: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성경섭 칼럼 <12> 무한도전 / 이영칠
 
  작성자: 사색의향기   /  작성일 : 2016-10-04 14:09
무한도전 / "진정한 실패는 도전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영칠 / 호른 주자에서 세계적 지휘자 반열에 오르다
 
 
- 성경섭 방송인
 
 
무한도전 / "진정한 실패는 도전을 포기하는 것이다"
  
리숙한 연예인들이 무리지어 나와 무모해 보이는 도전과제를 풀겠다며 중구난방으로 ‘들이대는’ 예능프로그램이 있다. 목욕탕 욕조 물 퍼내기, 지하철과 달리기 경주, 굴삭기와 땅파기 시합, 프로 스포츠 선수들과 맞대결을 벌인다.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이 이들의 도전과제다. 프로그램 역사도 꽤 길다. 2006년 첫 방송이 나갔으니 상당한 ‘장수프로그램’이다. 방송사로 볼 때도 ‘효자 브랜드’다. 프로그램 몰입도 1등에 광고수익뿐 아니라 음원 매출과 달력 판매로도 수입을 올린다. 연간 경제적 효과는 무려 천억 원이 넘는다.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이 보여주는 핵심 코드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끊임없는 도전이다. 첫 방송의 시청률은 4%..당시 ‘화면조정시간’에 나가는 애국가 시청률 수준으로 굴욕에 가까웠다. 최고 전성기를 맞고 있던 상대사의 예능프로그램과 겨루기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굴하지 않았다. 3대 안팎이던 카메라를 8대로 늘려 출연자들의 캐릭터를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잡아냈다. 출연자들의 생각까지 잡아내 자막을 달았다. 재미있다고 재탕, 삼탕은   절대 하지 않았다. 실패가 두려워 도전을 포기했다면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은 일찌감치 시청자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선풍기.jpg

원형기둥 위에 뻥 뚫린 고리에서 마술처럼 바람이 나온다. 어디에도 바람 날개는 눈에 띄지 않는다. 날개 없이 바람을 만들어내는 선풍기 'Dyson Air Multiplier'다. 영국 출신의 디자이너 제임스 다이슨(James Dyson)이 이 선풍기를 만드는 다이슨사의 창업자다. 다이슨을 세계에 알린 것은 먼지봉투 없는 진공청소기다. 당시만 해도 먼지봉투를 달아 쓰던 청소기가 구멍이 자주 막혀 흡입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잦았다. 다이슨은 먼지봉투 없는 청소기 아이디어를 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오기가 발동한 다이슨은 자기 손으로 청소기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 창고에 쳐 박혀 3년 동안 무려 5127개의 시제품을 만들고 부숴가며 원심분리기를 단 먼지봉투 없는 진공청소기 개발에 성공을 거둔다.
 
창업자 다이슨의 도전정신을 본받은 다이슨사는 독창적인 제품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회사다. 먼지봉투 없는 진공청소기, 날개 없는 선풍기, 탱크처럼 턱을 넘을 수 있는 로봇청소기 같이 평범한 제품을 차별화시켜 비싼 값을 받는다. 어떤 아이디어도 이상하거나 ‘크레이지’하다고 받아들이지 않고 제품으로 만들기 위해 도전한다. 이른바 ‘크레이지 제품’들이다. 사람들은 잊을만하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제임스 다이슨이 이번에는 또 어떤 사고를 칠지 관심 속에 지켜보고 있다.
도전적인 성격은 유전자의 작용일까, 환경의 영향일까?
 
성격연구가들은 초기에는 도전적인 성격이 유전과 환경이 모두 작용한 결과로 인식했지만 요즘은 환경보다는 유전적인 요인 쪽에 더 무게를 두는 추세다. 얼굴 모습이나 기질은 부모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특성들이다. 염색체에 있는 유전자의 분자구조가 성격이나 기질을 결정하는 중요인자라고 보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인간의 성격 형성에 유전이나 환경 외에도 수많은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출생순서를 무시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베스트셀러 ‘미움 받을 용기’로 잘 알려진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출생 순서에 따라 인간의 성격이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첫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애정을 독점하고, 모든 것에 우선권을 갖기 때문에 독단적이고 야심적이며 책임감이 높다. 반면 둘째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놓고 형이나 누나 등과 경쟁관계로 대립한다. 이 때문에 둘째들은 부모의 관심을 얻기 위해 경쟁심이 강하고 도전적인 기질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도전과 이에 대한 응전의 문명을 탄생시켰다.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연구’에서 중국 고대문명의 생성을 도전과 응전의 논리로 풀어냈다.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양자강과 황하 중에서 문명을 탄생 시킨 것은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토지가 있는 양자강이 아닌 반복되는 범람으로 많은 생명과 재산피해를 냈던 황하의 열악한 지역이었다. 문명을 일으킨 자연환경은 안락한 환경이 아니라 대부분 가혹한 환경이었다. 척박한 환경이 도전정신을 북돋우고 응전능력을 키워준 것이다. 따지고 보면 척박한 땅에 기반을 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도 마찬가지다. 척박한 환경을 탓하면서 실패가 두려워 도전을 포기했다면 오늘날 인류의 삶은 아마도 더욱 팍팍해지지 않았을까?
 
 
이영칠 / 호른 주자에서 세계적 지휘자 반열에 오르다

이영칠.jpg

가리아 소피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이영칠 종신객원지휘자는 16살에 음악을 처음 접하고 19살에 호른이란 관악기에 처음 도전했으며, 31살에 오케스트라 지휘를 시작해 유럽 15개국 50여 개 오케스트라에서 객원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영칠이 19살이란 ‘늦은 나이’에 호른이란 악기에 도전한 것은 순전히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이었다. 음악가 집안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고 출신도 아니었다. 본인의 고백에  따르면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던 차’에 호른만 잘 불면 대학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솔깃해서 시작했다. 꿈꾸는 듯한 소리를 낸다는 호른은 호흡과 음정을 맞추기가 어려워 여간해서는 다루기 힘든 악기다. 대학에 가기 위해 뒤늦게 ‘고생길’에 접어든 셈이다.
하지만 호른 연주자로서의 그의 첫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무엇보다 호른을 잘 불었다. 오케스트라 주 테마곡 가운데 호른 독주가 많아 호른 연주자는 오케스트라 내에서도 대우를 받는 위치다, 미국에서 호른연주로 박사학위를 따고 돌아와 국내에서 3년 간 연주활동을 하며 대학 강단에도 섰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적인 상황과 맞닥뜨린다. 어제 저녁까지도 멀쩡했던 호른이 아침나절에 예전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다. 호른은 치아의 각도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 악기다. 이영칠은 이를 깎고 생니도 뽑아 봤지만 여전히 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좌절해서 음악을 포기하려던 그에게 친한 친구가 불가리아의 호른 연주자를 소개해주며 경험 삼아 불가리아에서 지휘를 한번 해볼 것을 권유했다. 불가리아 소피아의 음악 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난 그는 재능을 인정받아 31살이던 2004년 지휘자로 데뷔했다.
지휘자로의 두 번째 도전도 성공적이었다. 2013년과 2014년 독일 함부르크 제야·신년 음악회에서 독일인들이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연주할 때는 관객들이 전원 기립해 환호했다. 2011년과 2013년에는 정명훈 이후 두 번째로 일본 최고의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 초청 지휘봉 잡아 ‘영칠 사마’라는 존칭을 얻기도 했다. 소피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종신객원지휘자가 된 것도 명성 덕분이다. 객원은 일 년에 2~3차례 지휘하는 것이 관례지만, 초청받아 연주할 때마다 관객 반응이 좋다 보니 종신객원지휘자 된 것이다.
 
클래식의 종주국으로 동양인에게는 벽이 높았던 보수적인 동유럽 음악계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뜨거운 열정과 끊임없는 도전정신에 힘입은 것이다.
그가 지휘봉을 잡은 초창기 동구권 오케스트라에는 돈을 주고 연습 삼아 지휘석에 서는 아시아인들이 적지 않았다. 전문가보다는 아마추어가 많다보니 자존심이 강한 현지인 단원들에게 무시당하는 적이 많았다. 그런 경우 단원들은 지휘자보다는 터줏대감 격인 악장을 보고 연주하기 일쑤였다. 그럴 경우 아마추어 지휘자는 오히려 단원들의 연주를 따라가는 격이 된다.  이영칠 지휘자는 달랐다. 단호하게 연주를 멈추고 악장에게 지휘봉을 넘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오케스트라 관계자들이 나서고 단원들이 사과하기 전까지는 지휘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모스크바 연주 당시에는 모스크바 주재 대사관 직원 중 무당을 연구하던 사람이 있었다. 이영칠 지휘자의 연주를 보고 “마치 굿거리장단처럼 무당이 춤추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평했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음악에 빠지는 그의 열정을 알아본 것이다. “내가 만족하지 못하고 감동을 받지 못하면 실패한 연주다. 지휘자의 감동이 단원들의 감동을 부르고, 다시 관객들의 감동을 부른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본인은 한국인이 가진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 덕이라고 하지만 그의 연주일정을 들여다보면 해답이 나온다. 1년에 60회 연주에 리허설 기간을 3일 치면 180일 연주와 연습 모든 연주에 전투적으로 임하고 최선을 다한다. 한 달에 5차례 해외연주여행에 나서기도 하는 그는 3개 항공사의 골드카드를 가지고 있고, 마일리지도 상당하다. 일정이 바쁠 때는 연주 전날 이동하기도 하고 연습 없이 당일 오전에 리허설을 하고 바로 연주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가 연주하는 레퍼토리만 200개가 넘는다. 짧은 지휘기간에 이처럼 레퍼토리를 늘릴 수 있었던 것은 같은 곡 연주보다 새로운 곡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바쁜 일정에 어떻게 그 많은 곡을 다 익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한다. “난 음악을 가슴으로 익히고 가슴으로 연주한다.”
 
호른에 도전하고 지휘에 도전하면서 음악인 이영칠은 전쟁을 치르듯 전투적으로 살았다. 최고가 되겠다고 ‘악에 바쳐서’ 뛰어왔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성취를 이룬 지금은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게 그의 주된 관심사다. 외국 초정연주회 때마다 한국 음악의 우수성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임준희 작곡가의 심포니 ‘한강’ ‘댄싱 아리랑’을 유럽무대에서 연주하고 소피아 필과 ‘한오백년’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해 ‘태평소와 피리 협연을 가진 적도 있다.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양성하고 후원해서 자신처럼 세계로 향한 도전의 길을 열어 주고 싶은 게 그의 세 번째 도전과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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