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미워하신 까닭은 두가지다. 아말렉이 하나님 대신 스스로 만든 우상을 섬겼으며, 자기들 보기에 좋게 행하여 공의가 아닌 불법을 합법이라 여기며 살았기 때문이다.
3.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스스로 옳다 여기는 것들을 사상과 신념으로 여기고 그것을 실행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아말렉의 가장 지혜로운 장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가증한 죄인이며 회개의 길이 촉구되는 아들일 뿐이다.
사울왕의 길에 서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들과 타협하는 것이다. 세상 문화와도 타협하고, 세상 사조와도 타협하고, 세상의 가치와도 타협한다. 그들을 자신의 인생에서 배척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
그들은 결코 다윗의 자리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이스라엘을 수성하는 데에 급급했던 사울왕처럼, 다른 주의 사람들을 핍박하며 스스로 곤고한 인생 가운데 사력을 다하다가 죽어갈 것이다.
4. 한동안 자드의 음악만 들었다. 향유의 영역을 넘어섰던 것 같다. 어떤 존재물이든지, 그것이 향유의 선을 넘어서면 중독의 상태에 이른다. 중독은 곧 우상숭배에 다름없다.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결과적으로 거기에 맹신 맹복하게 되어 그것을 섬기게 되는 까닭이다.
삶의 영역에서 이러한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주님 주신 자녀가, 사역지가, 달란트가, 재능이, 외모가, 아내가, 목회자가, 남편이, 그 모든 것들 즉 만물에 속하여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고 혹은 향유하라고 주신 대상들이 하나님 되어버리는, 우상이 되어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5.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저마다 "숨 쉴 구멍"을 갖고 있다. 웹툰, 담배, 술, 영화, 음악, 친구, 티비 프로..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참된 산소호흡기 노릇해 주지 못한다. 실상은 숨 쉬겠다고 외치면서 코막고 물만 들이켜는 격이다. 가빠오는 숨은 점점 격해질 뿐이다. 더 많은 물을 들이킬 수록 더욱 고통으로 초대될 뿐이다.
6. 참된 생명이며 호흡은 주님의 말씀 뿐이다. 인간이란 실존의 양식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 뿐이다(마4:4). 말씀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진리이다(요17:17).
궁극적으로, 어떠한 의도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게 하고, 그 뜻과 자신의 현재를 비추어 보도록 이끌지 못한다면 그 사역은 반쪽일 수 밖에 없다. 어떠한 목적,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든 공의이든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을 찾으려고 성경을 보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그것은 색안경이 되어 그의 신앙을 흐리게 한다.
사랑이 곧 하나님이라고 외쳤던 헤겔이 그랬고, 성경의 본래적 진의보다는 자신들의 주장에 맞게 성경을 끌어오기 원했던 모든 사조와 사상들이 그러했다.
즉, 존재이신 유일한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즐거움을, 하나님이 주신 존재물들을 정당화하고 섬기고 집착하고 존재화하는 것에 천착하게 된다.
마음은 스스로도 숭고함을 느끼고 생활은 거룩을 표방하며, 손은 따뜻해지고 눈은 강렬해지지만 그것은 스스로 쌓은 성이 높아간다는 증거일 뿐 그가 진리안에 거하길 사랑한다는 증명은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나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나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죄를 진단하실 때 판결을 굽게 하지 않는 것이 선한 제사장의 의무이다. 우리는 사람을 위하여 있지 않고 사람들을 하나님께 올바로 인도하기 위하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의 편에서 말씀에 항거할 때 우리는 숭고한 프로메테우스적 존경은 받을 수 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는 실상 사울왕의 자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길을 밟고 섰는 위태함으로 진단하실 것이다.
그러니, 복음의 전달자요 제사장이요 몸된 성도된 우리의 삶과 말과 생각이 어떠해야 하겠는가. 일단 눈에 쓴 안경부터 벗을 일이다. 아무리 오랜동안 공을 들여 얻은 렌즈일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신앙에 해악일 뿐이다.
첫댓글 아멘!
오,주여 순전한 마음으로 말씀앞에 서게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