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은해사. 동화사 처럼 대구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가람이지만 언제라도 갈 수 있다는 이유로 자주 가지 못하는 절집의 한 곳이다. 나역시 다녀온지가 10년은 넘은 듯하다. 출입 동선은 바뀌었고 부도전만 기억에 남아 있을뿐 대웅전을 비롯 전각은 오히려 낯설다.
일부 내용을 제외하고는 한국전통사찰정보와 은해사 홈페이지 글을 가져왔다. 여러차례 답사기를 썼었으며, 특히 내게 안목이 없는 현판 글씨와 탱화 위주로 우리님들에게 소개하고프기 때문이다.
"신라 41대 헌덕왕이 즉위한 809년에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헌덕왕은 조카인 40대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했다. 당시 정쟁의 피바람 속에서 숨진 원혼을 달래며 왕의 참회를 돕고 나아가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창건한 사찰이 은해사의 시초가 되는 해안사이다. 운부암에 가는 길 부근인 해안평이 그 해안사 절터이니 운부암을 가는 길에 한번 관심있게 살펴보기 바란다.
해안사 창건후 고려시대 1270년(원종 11년)에 홍진국사가 중창하였고, 1275년 충렬왕 때 원참스님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도 1485년 성종 16년에 죽청스님과 의찬스님이 묘봉암을 중창하였으나, 1545년 인종 원년에 큰 화재가 발생해 사찰이 전소되었다. 이듬해 1546년 명종 원년에 나라에서 하사한 보조금으로 천교화상이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이 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
1563년 화재로 소실되고 이듬해에 묘진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589년 선조 22년에 법영대사가 법당을 현재의 자리에 크게 중창하고 사찰의 규모를 확장하는 일대 불사를 이루어 내었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있었지만 1651년 효종 2년에 각 전각들이 단청 불사를 시행한 기록으로 보아 왜란을 격으면서도 큰 피해는 입지 않은 듯 하다. 1712년 숙종 38년에는 은해사를 종친부에 귀속시켰고, 1714년에는 사찰 입구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다. 지금의 은해사 앞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그때에 심어진 것으로, 3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들이다. 1761년 천왕문을 세우고 1772년에는 자암스님이 대웅전 불상을 개금하였으며 도봉스님이 영산전과 시왕전의 불상을 개분했다. 영조는 왕자시절에 이 은해사를 잘 수호하라는 완문을 지어 보낸 일이 있었다. 이것은 영조 등극후에 어제완문이라 하여 이절을 수호하는데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1847년 헌종 13년에 은해사 창건이래 가장 큰불이 났다. 이때의 화재는 너무 가혹한 것이어서 극락전을 제외한 천여 칸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러자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며 영조의 어제수호 완문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인 은해사를 중창하고자 당시 영천 군수 김기철이 300궤미의 돈을 박봉에서 털어내 시주했으며, 대구감영과 서울 왕실의 시주가 계속 답지하였다. 그리하여 수만냥의 재원을 확보하여 3년여간의 불사 끝에 헌종 15년 1849년에 중창불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 때 지어진 건물이 대웅전, 향실, 고간, 심검당, 설선당, 청풍료, 보화루, 옹호문, 안양전, 동별당, 만월당, 향적각, 공객주 등인데 이 중에서 대웅전과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로 채워졌다.
그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은해사는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도전
은해사의 중건과 중수에 관한 문헌에서 보화루(寶華樓) 명칭이 처음 나오는 건 1862년 혼허 지조 스님이 지은 「은해사중건기」가 처음이다. 이 글에서 1848년(헌종 14)에 「대웅전」·「불광각」과 함께 「보화루」 현판을 추사 김정희가 썼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보화루라는 이름은 아니지만 1651년(효종 2)과 1712년(숙종 38)에 ‘누각’을 단청했다는 말이 「영천군북습면은해사고적조」·「영천군은해사사적」에 각각 보이고 있으므로 누각의 존재가 문헌 기록에 의해 확인되는 시기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물론 처음 누각이 세워진 것은 이보다 훨씬 오래전이었을 것은 분명할 듯하다.
1847년 화재로 극락전을 제회한 모든 당우가 없어졌는데, 이 때 누각도 소실되었다. 지금의 보화루는 그 이듬해 중건된 것이고, 추사 김정희가 현판문을 썼다. 그리고 1849∼1850년에 걸쳐 석연(碩演) 스님이 시주가 되어 보화루를 중수했으며, 태백산인(太白山人)이 단청을 했다. 또한 1920년에도 한 차례 수리되었다.
건물 정면에 걸려 있는 「보화루」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크기는 가로 235㎝, 세로 100㎝이다.
은해사 중정. 보화루를 누하진입하여 중정에 서면 대웅전과 보화루가 맞보고 심검당과 설선당이 맞보는 口자형 산지가람의 전형구조이다. 예전에 석탑이 없었던가?
조선시대 후기인 1847년(헌종 13) 화재로 인해 전 당우가 소실된 후 팔봉(八峰)·해월(海月) 스님 등 은해사의 모든 스님들과 당시 군수 김기철(金箕哲)의 후원으로 이룩한 중창 때 새로 지은 건물이며, 그 뒤 1920년에 지석담 주지 스님 등이 중수한 바 있다. 대웅전의 규모는 앞면과 옆면 각 3칸이며 다포계 팔작지붕에 겹처마를 하고 있다.
대웅전 앞면 위에 걸려 있는 「대웅전(大雄殿)」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서, 서울 봉은사(奉恩寺) 의 「판전(板殿)」이라는 추사의 마지막 작품과 함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투박하면서도 웅건한 기상이 엿보이는 대작이다.추사는 실학사상가 가운데 북학파(北學派)의 영향을 입은 사람이지만 불교와는 상당히 호의적인 관련을 맺은 인물이었다.그는 1816년 잠시 경상감사(慶尙監司)를 맡은 적이 있는데, 그 때 은해사에 머무르면서 「대웅전」을 비롯해서 「보화루(寶華樓)」·「불광(佛光)」 등의 명필 편액을 남겼다.
아미타불
대웅전 주존으로 아미타여래와 그 좌우로 관음·세지 보살상이 협시하고 있다. 중앙의 아미타여래상은 높이 136㎝로서 목조로 제작되었다. 후불탱의 구도로 보아서는 본래부터 삼존상으로 조성된 듯한데, 언제인가 좌우 협시보살상은 없어졌다가, 최근에 관음·세지보살상을 봉안하여 지금처럼 삼존상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대웅전에는 석가여래가 봉안되는 것이 원칙인데 지금처럼 아미타여래가 모셔진 것은 1847년의 화재와 관계있는 듯하다. 1862년(철종 13) 혼허 지조 스님이 지은 「은해사중건기」에 따르면 1847년에 극락전을 제외한 전 당우가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해에 바로 중건 불사에 들어갔는데, 이 때 극락전에 있던 아미타여래 및 탱화들을 새로 지은 대웅전으로 이운해 온 듯하다.
극락전은 화재를 모면했다고는 하지만 좌우 협시보살상은 이 때 어떤 손상을 입은 듯, 이운 과정에서 삼존불이 함께 대웅전에 봉안되지 못한 채 본존만 이운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아미타여래상은 1589년(선조 22)의 극락전 중건시, 혹은 1797년(정조 21)에 극락전을 중수할 당시 조성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불상의 양식상으로 본다면 1589년 중건 당시에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미타 후불탱
아미타후불탱으로, 구도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군도식(群圖式)이 아니라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관음과 대세지보살이 좌우에 협시하는 삼존만의 간단한 구도인 것이 특이하다. 아미타여래는 원형 두광에 거신광(擧身光)의 신광을 하고 있는데, 원만한 얼굴에 머리 위에는 정상계주가 있다.
왼손은 배 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고 오른손은 밑으로 내리고 있다. 불의는 통견으로서 옷 끝이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거신광 안에도 모란·연꽃 등이 도안화 되어 있다.관음보살은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고, 대세지보살은 정병이 든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서책이 놓인 연봉(蓮棒)을 잡고 있다.
이 후불탱에는 그림의 봉안년도를 비롯해서 봉안 목적, 그림을 그린 화사(畵師) 등에 대한 내용이 보이는 화기가 불단 뒤쪽으로 깊숙하게 내려져 있어 화기를 살펴보기가 매우 어렵다. 다만 그 일부 내용이 단편적으로 전해지는데, 제작년대는 1750년(영조 26)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대웅전 안에 봉안되어 있었던 극락구품회탱은 1750년 성청(性淸)·옥련 금어가 그린 뛰어난 작품인데, 현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신중탱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선신(善神)을 도상화한 그림을 신중탱화라고 합니다. 많은 신들을 배치하여 그리므로 다양하고 복잡한 구도를 보이는 이 신중탱화는 일반적으로 제석(帝釋)과 하늘의 군사인 천룡(天龍)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무장을 한 신중들을 배치합니다. 붉은 바탕에 금니로 선묘하여 얼굴만 하얗게 채색하였습니다.
삼장탱
그림 중앙의 천장보살(天藏菩薩)을 중심으로 좌우에 지장보살(地藏菩薩)·지지보살(地持菩薩)의 세 보살이 배치된 그림으로서, 1755년(영조 31)에 조성되었다. 그림의 구도는 화면을 2단으로 나누어 상단에 세 보살좌상 및 좌우 상하에 그 권속을, 하단에는 각 보살의 협시를 그렸다.
천장 보살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으며, 왼손으로 경함(經函)을 들고 있다. 광배 주위로 천장 보살의 권속인 사공천중(四空天衆)·십팔천중(十八天衆)·육욕천중(六欲天衆)·일월천중(日月天衆)·제성군중(諸星君衆)·오통선중(五通仙衆) 가운데 12권속이 둘러서 있으며, 그 아래로 진주보살(眞珠菩薩)·대진주보살(大眞珠菩薩)의 두 협시가 있다.
지장 보살은 오른손으로 보주를, 왼손으로 석장을 들고 있다. 광배 주위로 판관(判官)·외호신중(外護神衆)·대왕(大王) 등의 권속이 둘러서 있고, 그 아래에 무독귀왕(無毒鬼王)·도명존자(道明尊者)의 두 협시가 있다.
지지 보살은 천장 보살과 마찬가지로 설법인을 취하고 있고, 왼손에 경책(經冊)을 들고 있다. 광배 주위로 견뢰신중(牽牢神衆)·금강신중(金剛神衆)·팔부신중(八部神衆)·용왕신중(龍王神衆)·아수라신중(阿修羅神衆)·대야차중(大夜叉衆)·나찰파중(羅刹婆衆)·귀자모중(鬼子母衆)·대하천중(大河天衆) 등의 8권속이 둘러서 있으며, 그 아래로 용수보살(龍樹菩薩)·다라니보살(陀羅尼菩薩)의 두 협시가 있다.
세 보살의 광배는 각각 이중의 원으로 구성된 두광과 신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밖에 삼장보살 위에 주로 지장탱에서 나타나는 관세음보살·용수보살·상비보살(常悲菩薩)·다라니보살·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지지보살 등의 6대보살이 좌우대칭으로 각 3분씩 그려져 있다.
그림 하단에 있는 화기에 이 그림을 그린 상오(常悟)·관령(貫伶)·성청(性淸)·성징(性澄)·처일(處一)·취우(就愚)·승한(勝閑)·영정(影淨)·성찬(性贊)·치행(致行)·정심(淨心)·법성(法性) 등의 화원(畵員) 이름이 보인다. 성찬 스님은 1744년 김천 직지사(直指寺) 시왕도를 그린 화원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53년에 조성한 칠성탱화
괘불
1750년(건융15)으로 경자년 영조 26년에 화원(火員) 보총(普摠) 처일(處一)에 의하여 제작된 것으로 아미타불 독존형입니다. 재료는 견본(絹本)이며, 크기는 가로 5.59m 세로 10.16m의 보기 드문 초대형의 걸작입니다. 좌우상단에는 봉황을 배치하고, 그 아래로는 목단과 연꽃을 장식하여 장엄한 모습입니다. 특히 하단 좌우는 연꽃이 있는 연못을 표현하여 극락세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색조는 녹색과 홍색 위주로 상당히 우아한 기품이 있으며, 상호(相號)는 원만한 편으로 조선 후기 영정조시대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줍니다. 선의 흐름이 매우 유연하고 18세기의 불교미술 발전상을 잘 알 수 있고 그림 좌우 테두리는 범자(梵字)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단서각. 낯선 전각명이지만 나반존자가 계신 전각임을 수 있다. 천태각으로 된 전각도 종종 보이는 독성각의 별칭이다.
단서각(單棲閣)은 대웅전 서북쪽에 있으며,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이다. 김달현(金達鉉)이 지은 「은해사중수기」에 따르면 지석담 주지가 1920년에 대웅전·계삼당(器三堂)·보화루·창고 등과 함께 단서각을 수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19세기 말에 처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단서각. 석조 지장보살과 관음보살.
성보 박물관
문이 닫혔다. 전국의 모든 박물관 처럼 월요일은 휴관이었다.
은해사 성보박물관은 1996년 12월23일 착공하여 2003년 4월 19일에 준공하였고, 2005년 5월에 개관하였다. 성보박물관은 건평 140여평의 전면 9칸, 측면 5칸의 전통목조건축 형식에 실내전시공간을 비롯하여 학예실, 수장고등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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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佛光. 박물관에 보관중인 추사의 글씨이다. 추사와 은해사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졌을까?
조선조 영조와 정조시대에 은해사는 영파성규 대사가 주석하면서 화엄종지를 크게 드날리고 있었다. 이 때 추사는 경상감사로 부임한 그 생부 김노경 공을 따라서 경상도 일원의 명승지를 여행하면서 이 은해사 일대도 들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헌종 13년의 대 화재 뒤 헌종 15년에 마무리 지은 불사때 지어진 건물 중에서 대웅전,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라서 마치 화엄루각과 같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뒤 고종 16년(1879)에 영천군수 이학래가 다시 쓴 '은해사 연혁변'에서는 '문액의 은해사와 불당의 대웅전, 정각의 보화루가 모두 추사 김시랑의 글씨이고 노전을 일로향각이라 했는데 역시 추사의 예서체이다'라고 하고 있다.
추사 선생은 안동 김씨와의 세도 다툼에 패하여 55세 나던 헌종 6년(1840) 9월 2일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 세월을 보낸 다음 헌종 14년(1848) 방면되어 다음해 봄에 64세의 노인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유배중에 불교에 더욱 깊이 귀의하게 된 추사 선생은 영파대사의 옛터이며 또 자신의 진 외고조인 영조대왕의 어제 수호완문을 보장하고 있는 묵은 인연이 있음을 생각하고 현판과 문액을 기꺼이 써 주기로 작정하였던 것 같다.
이렇듯 거듭되는 인연에 제주도 유배기간 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최고로 발휘한 추사의 글씨가 새로 지은 전각들의 편액을 장식함으로써 과연 화엄루각의 장엄을 이루게 되었다. 1851년 추사는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불과 2년 남짓의 짧은 서울 생활 동안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추사의 글씨가 다섯점이나 은해사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은해사와 추사의 인연이 깊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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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추사선생 글씨 중 "은해사"의 글씨를 이렇게 평했다.
무르익을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 듯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둥글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을 구부려 놓은 듯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뗀 것 같은데 기수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얼핏 결구에 무관심한 듯하지만 필획의 태세 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성보박물관과 맺지 못한 연을 뒤로 하고 산내암자로 향했다.
인연. 그 인연을 찾아 다시 발걸음 할 것이다.
올해가 가기전에......
2009.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