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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김호정
관심
임윤찬은 20세의 젊은 피아니스트입니다. 2022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18세)로 우승했지요. 그런데 임윤찬의 연주는 뭐가 다르기에 전세계의 극찬을 받는 걸까요. 그의 연주는 뭐가 특별하기에 많은 음악 팬이 열광하는 걸까요. 임윤찬에 대한 평가 중 대표적인 것은 “피아노를 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겁니다. 예원학교, 서울예고, 서울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중앙일보 음악담당 김호정 기자는 그를 ‘건반 위의 피카소’라고 소개합니다. 약관의 임윤찬이 이런 평가를 받는 이유, 김호정 기자가 지금부터 알려드립니다.
①임윤찬 스타일: 건반 위의 피카소, 멜로디보다 화음
'김호정의 더 클래식' 1편의 주인공인 피아니스트 임윤찬. 사진 James Holecrop
이 곡이 이렇게 재밌었나.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연주에 대한 반응입니다. 2023년 5월 뉴욕타임스의 리뷰를 볼까요. 뉴욕타임스는 ‘꿈 같은 연주였다’는 말로 임윤찬의 기량을 극찬했습니다. 하지만 이 리뷰에서 특히 눈에 띄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 곡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 누가 알았나? (Who knew this piece was so funny?)’
임윤찬의 연주가 재밌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중요한 점은 재미입니다. 낯선 곡인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임윤찬 돌풍의 진원지는 바로 이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듣는 아름다움, 감상하는 기쁨을 넘어서 특별한 재미가 있다는 것 말입니다. 경기도 시흥에서 자라며 '친구들 다 태권도 학원에 다니는데 아무것도 안 하기가 좀 그래서' 피아노를 시작한 그가 세계에서 주목받는 피아니스트가 된 비결 중 하나가 바로 ‘듣는 재미’입니다.
그런데 왜 재미있을까요? 무엇이 다르기 때문일까요? 지금부터 그 이유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도대체 임윤찬의 스타일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재미있게 들리는 걸까요.
안 들리던 음들이 튀어나온다
전문가의 많은 리뷰가 임윤찬의 연주에 대해 ‘기술적으로 완벽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재미있게 들리는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임윤찬은 음악의 새로운 지점을 강조하고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모르는 음악도 신선하게 들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잘 알려진 쇼팽의 연습곡 ‘혁명’을 들어보겠습니다. 긴 음표 뒤에 짧은 음표가 나오는 리듬인데요. 임윤찬은 앞의 음은 더 길게, 뒤의 음은 더 짧게 연주합니다. 〈재생이 안 될 경우 33분 36초부터〉
다음 곡을 들어볼까요. 쇼팽 연습곡의 교과서로 불렸던 젊은 시절의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연주를 들어볼까요. 같은 리듬인데도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14초부터〉
그런데 임윤찬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면 아마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는 거니까요. 최근 나온 다큐멘터리 ‘크레센도’의 인터뷰를 보면 모차르트의 곡을 연주한 뒤 “어떤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죠. “아무 생각도요. (Nothing.)”
임윤찬이 쇼팽의 '혁명'을 꼭 이렇게 쳐야겠다가 생각하고 연주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작습니다. 다만 본인이 생각하는 작품의 감정 폭에 이렇게 극대화된 리듬이 맞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임윤찬은 지독한 연습 벌레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무대에서는 극도로 '본능적'입니다.
임윤찬 연주의 또 다른 특징은 좀처럼 들리지 않던 음들이 잘 들린다는 것입니다. 피아니스트는 흔히 여러 개의 음을 한꺼번에 치는데요, 그중에 더 강조하고 싶은 음이 있기 마련이죠. 대부분은 멜로디에 힘을 줍니다. 노래하는 선율이죠. 나머지는 반주로 취급합니다.
하지만 임윤찬의 화음은 균형이 다릅니다. 한 음만 깨끗하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음도 목소리를 냅니다. 그러다가 ‘내성(內聲)’이라고 부르는, 화음 안쪽의 음표들이 툭툭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보통은 잘 들리지 않던 것들입니다.
유튜브에 있는 임윤찬의 쇼팽 연습곡 ‘흑건’을 들어보면 아래 악보의 이 부분을 다른 피아니스트보다 더 거칠게 강조합니다. 붉은 선으로 표시된 대로 안쪽의 목소리죠.
'흑건' 연습곡에서 임윤찬이 강조한 음들. 중간 영역의 음들이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도 보통 들리지 않았던 음들을 강조한 연주가 특징적이었죠.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 2악장의 앞부분입니다. 〈21분 47초부터〉
임윤찬의 연주에서 들리는 음들.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의 음들이 튀어나온다.
역시 원래는 잘 들리지 않는 부분입니다. 많은 피아니스트가 오른쪽 새끼손가락으로 치는 가장 높은 음만 멜로디로 강조해 연주하거든요. 주인공인 멜로디가 돋보이는 거죠. 그런데 임윤찬은 조연이라 할 수 있는 왼손의 엄지손가락 음표가 더 먼저, 더 크게 들리게 연주합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음반이죠,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의 연주로 같은 부분을 들어보겠습니다. 〈4분 9초부터〉
위의 멜로디가 확실하게 들리죠. 임윤찬의 소리들이 중간 부분에서 툭툭 튀어나오면서 혼란스럽게 들리는 데 비해 아쉬케나지의 연주는 잘 정돈된 흐름으로 들립니다. 정석이죠. 그런데 어떤 연주가 더 재미있나요?
같은 악보. 아쉬케나지의 연주에서 들리는 음들. 바깥쪽의 음들이다.
또 베토벤 '황제' 협주곡 3악장에서는 아예 악보에 없는 음을 넣어가면서 새로운 소리를 만듭니다. 왼손을 잘 보세요. 〈4분 59초부터〉
황제 3악장의 왼손. 모두 같은 음이지만 임윤찬은 빨간 원 부분에 낮은 소리를 추가해 연주한다.
이번에는 베토벤 해석의 권위자인 루돌프 부흐빈더의 3악장, 같은 부분입니다. 왼손의 음이 거의 들리지도 않습니다. 〈5분 2초부터〉
임윤찬의 실연에서는 이처럼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된’ 소리들이 더 확실하게 들립니다.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선율 아닌 화음의 피아니스트
손이 좋은 피아니스트여서 그런 걸까요? 물론 손가락 훈련이 고루 잘돼야 이렇게 연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귀에 있습니다. 임윤찬의 귀는 음악을 '노래하는 멜로디+그걸 받쳐주는 반주'로 나눠서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 음들이 한꺼번에 굴러가면서 생기는 거대한 화음의 색채를 듣고 싶어 하는 거죠. 그래서 반주에 불과하던 왼손, 거의 들리지 않고 묻혀 있던 음들에 힘을 실어주면서 전체 음악을 '음덩어리'의 진행으로 파악하는 겁니다. 네, 그는 멜로디가 아닌 화음의 피아니스트입니다.
그래픽 김영옥 기자
이렇게 음표에서 주연, 조연이 따로 없다 보니 어떤 곡은 임윤찬이 직접 작곡한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지난해 7월 한국에서 모차르트 협주곡 20번의 카덴차(피아니스트 혼자 기량을 보여주며 연주하는 부분)를 연주했을 때도 '임윤찬의 작곡 아닌가' 하는 의심의 댓글이 온라인에 올라오곤 했습니다. 베토벤이 이 곡에서 연주하도록 써놓은 카덴차가 있는데 임윤찬은 다른 곡을 친 게 아니냐는 거였죠. 혹은 그 카덴차에서 영감을 얻은 새로운 창작이라고요. 하지만 임윤찬의 연주는 베토벤의 작곡 그대로였습니다.같은 곡인데도 새롭게 들렸던 거죠.아름다운 그림들이 쏟아지던 음악계에, 음악을 해체해 강렬히 조합한 피카소가 등장했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요소들을 붙여 놓거나, 보이지 않던 면을 끌어다 놓습니다. 그림의 대상은 같은데, 보고 나면 허를 찔린 듯한 느낌이 들죠.
임윤찬의 연주가 지루하지 않은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안 들리던 음들, 주인공을 도와주기만 하던 조연의 음표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
다음 회에는 임윤찬의 저돌성에 대해 분석해 보겠습니다. 임윤찬은 컴퓨터처럼 완벽하고 빠르게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아닙니다. 그는 가끔 실수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제 갈 길을 갑니다. 그래서 옛날 스타일의 피아니스트들을 떠올리게 되죠. 스무 살 피아니스트 임윤찬에 대해서는 아직도 할 말이 정말 많답니다.
<기자가 본 임윤찬>
말 할 에너지도 아껴 피아노만 치는 사람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직후의 임윤찬. 사진 다큐멘터리 크레센도
무대 위에서만 날쌘돌이다. 입을 열면 피아노 정도의 음량에, 아다지오(느리게)쯤의 속도다. 2020년 임윤찬과 전화 인터뷰 기사의 첫 문장을 그 말투의 인용으로 시작했다. “아… 저는… 연주는 제 성격하고 달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성격 그대로 피아노를 치면 어휴….” 문장이 이어지겠구나 싶을 때 말은 끝났다. 혹시 전화가 끊어졌는지 확인도 했다. 인터뷰를 즐기지 않는 수준을 넘어 대화를 힘들어한다. 질문이 곧 괴롭힘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듬해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레슨실로 찾아가 만났다.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임윤찬을 13세부터 가르쳤던 손민수 교수는 제자의 재주가 음악이 되도록 이끌었다. 실험적인 시도에서 균형을 잡는 일, 갑작스러운 표현에 한계를 설정하는 것, 인생의 감정을 떠올려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들리는 레슨실이었다. 레슨 내내 거의 말이 없었던 임윤찬은 이런 한 마디를 꺼냈다. “저는 무대보다 연습실이 더 좋아요. 녹음만 하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기도 해요.” 느릿한 꿈속의 말처럼 들렸다.
무대 위의 뜨거움 또한 같은 결에서 그다. 삶의 거의 모든 에너지가 한쪽으로 쏠려있다는 점에서. 전화 인터뷰 당시 곁에 있던 그의 어머니는 당시 14세의 아들에 대해 “그저 하는 거라고는 피아노 연습과 음악 듣는 일 뿐. 음악과 관련 없었던 우리 집에 뜻밖의 아이다”라 했다. 주위에서 체력을 아끼라며 말릴 때까지, 일상이 침범받을 때까지, 머리를 단정히 자를 시간이 없을 때까지 연습한다. 그러다 무대 위에서는 시간을 잊는다. “연주할 때는 다 잊고 자유로워지려 해요. 저도 청중도 없고 음악만 남고, 결국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도록요.”
2022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가 전 세계로 온라인 생중계된 이후 임윤찬은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다. 세계 정상의 오케스트라, 음악 축제, 공연장에서 초청받았다. 한 번 함께 연주한 곳들은 반드시 그를 다시 초청했다. 이 재초청이 연주자 경력의 핵심이다. 따라서 그의 길은 올해와 내년에 더욱 놀라울 것이다. 서구의 언론들은 개성적인 리뷰를 내놓으면서 독특한 연주자를 환영했다. “진짜배기(the real deal)”(더 타임스), “가감 없는 명료함과 명쾌함”(가디언), “눈부시고 독특한 활력”(런던 이브닝 스탠다드). 지휘자 마린 알솝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음악적이며 아주 오래된 영혼과도 같다”고 했다. 어쩌면 가장 알맞은 평은 스승인 손민수의 것이다. “피아노를 치려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또 “음악 안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게 어떤 건지 가르칠 필요가 없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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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