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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 & 부소산성 트레킹(약7km)
♣회비 : 4만원 (유람선 5천원,입장료 2천원 포함.목욕없음)
▶화정코스: 부여 구드래 선착장(유람선 승선)- 낙화암(유람선 하선)-고란사- 사자루광장(해설사 합류)-반월루- 군창지-영일루-삼충사-부소산성(주차장)
백제의 향기를 품고 있는 부소산은
세계유산으로 등재 되었으며
660년 백제의 멸망의 안타까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명산으로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떨어져
절개를 지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낙화암과
고란초에서 나오는 약수를 마시면 젊어진다는
전설이 있는 천년고찰 고란사가 있습니다.
부여(扶餘) 라고 하면 우리는 옛 삼국시대의 백제(百濟)를 연상한다.
아름답고 부드럽고 풍요한 문화를 번성하였던 백제는 강성해지는 형님의 나라 고구려에 밀려서
점점 남하하다가 마침내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말발굽 아래 사라져 간 나라이다.
황산벌에서 5천 결사대와 함께 목숨을 바친 계백장군과 낙화암에서 떨어진 삼천궁녀들,
이런 것들이 우리가 백제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이다.
아련한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백제의 마지막 보루였던 부여의 부소산성을 보고 걷기 위하여
우리 모두산악회 회원 35명은 춘천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하여 중앙고속도로-원주 충주간 국도-
충주 평택간 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천안 공주간 고속도로-공주 부여간 국도를 번갈아 타면서
부소산성 입구에 10시30분경에 도착하였다.
부여는 삼국시대 백제의 세 번째 수도로 옛 이름은 사비성이다.
백제의 첫 번째 수도는 위례성(서울 암사동지역)이었으며 두 번째 수도는 웅진(현 공주)이였다.
백제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주몽)의 둘째 부인인 소서노가 주몽의 첫째부인 사이에서 난 친아들
유리가 아버지를 찾아와서 태자가 되자 자기 아들들이 왕을 계승할 수 없을 것으로 알고 비루와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와서 비루는 인천지방에, 온조는 서울지방에서 각각 나라를
세우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비루는 나라를 세울 땅이 적합하지 못하여 병으로 죽고.
온조는 위례성에서 나라를 세운다. 온조가 백제를 세운 후에 21대 왕인 개로왕 까지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영토를 넓히면서 강성 국가 된다.
그러나 서기 475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413~491)이 이끄는 3만 대군이
백제의 도읍인 위례성을 공격하여 백제 21대 개로왕(455~475)을 죽인다.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475~477)은 남쪽으로 후퇴하여 웅진성(현 공주)으로 도읍을 옮긴다.
이후 백제 26대 성왕(523~554)이 백제의 부흥운동을 펼치면서 웅진성을 버리고
538년 (성왕 16년)에 사비성(현 부여)으로 천도하여 백제의 비운의 왕인
의자왕(641~660) 까지 123년간 백제의 도읍이 되었다.
부소산성내에는 부소산문,사비문-삼충사-영일루-군창지-궁녀사-사자루-백화정-낙화암-
고란사-서복사지-반월루-충령사 등 많은 백제시대의 유적이 있어 트레킹을 하면서 둘러보았다.
부여하면 백마강이 뜨오르고 백마강은 백제의 멸망과 연관이 있는 강이다.
흐르는 경음악이 "꿈 꾸는 백마강" 노래이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서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파묻치면은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 지는듯
그 누가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낙화암 달빛만 옛날 같구나.」
부소산성 트레킹 코스
부소산과 백마강. 부여시가지
부소산 원경
부소산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부소산성은 부소산(해발 106m)을 중심으로 둘레 2,200m, 면적 74만㎡ 규모로 축성하여
백제가 멸망할 때 까지 백제의 왕궁을 수호한 최후의 보루였던 중심 산성이었다. 사적 제5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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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 정문인 부소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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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문-부소산문의 뒤 부분
산행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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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문-삼충사의 정문
삼충사는 백제 말의 3충신인 계백, 성충, 흥수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충사 안내원의 설명을 듣는다.
왼쪽부터 계백, 성충, 흥수의 영정이다.
계백은 나당연합 18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장군이이며,
성충은 의자왕 때 좌평으로 의자왕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고,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탄현지역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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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루는 부소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101호이다.
이 자리가 백제시대에는 백제의 임금들이 올라와서 동편 멀리 계룡산 위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국태민안을 기원한 곳이었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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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창지는 만리창이라고 불렀던 곳인데 1915년 땅 속에서 불에 탄 쌀, 보리, 콩등의 곡식들이
발견되어 이곳이 군량미를 비축해 두었던 곳으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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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은 산 정상(봉우리) 부근에만 띠를 두르듯 축조한 테뫼식 산성을 쌓고
그 주위에 성안의 계곡을 품는 포곡식 산성으로 축성한 복합식 토석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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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 둘레길은 울창한 나무 사이로 나있는 소박한 숲길로 트레킹에는 아늑함과
풍요로움을 준다. 숲길이 가파르지 않은 능선으로 되어 있어 걷기에 최상의 길이며
길 바닥과 경계석도 잘 정비하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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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사는 낙화암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은 백제 여인들의 충절을 추모하고 그 뜻을 후세에
널리 기리고자 1965년에 세웠다. 매년 10월 백제문화제 행사 때 제향을 올린다.
궁녀사에 있는 백제 궁녀들의 영정
사자루는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이며 충남 문화재자료 제99호이다.
백제시대에는 왕들이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자리이다.
사자루 건축시에 보물 제196호인 백제시대의 금동석가여래입상(작은 사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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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정은 낙화암 절벽위에 세워진 육각지붕의 정자이다.
백제 멸망 당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삼천궁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1929년 세워진 정자이다. 충남 문화재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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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변의 절벽바위 낙화암 위부분이다.
백제는 660년 당나라 소정방이 이끌고 온 13만 병력과 신라장군 김유신의 5만 병력이 사비성을
진격하여 오므로 백제의 계백장군은 5천명의 병력으로 황산벌에서 용맹한 전투를 벌였음에도
개전 10일 만에 의자왕이 포로로 잡히면서 마지막 날을 맞는다.
나당 연합군에게 사비성이 함락되자 백제의 궁녀와 여인들이 몸을 더럽히지 않고 절개를
지키고자 절벽에서 몸을 던져 백마강으로 떨어져 죽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있다.
이곳에서도 수많은 아름다운 궁녀들이 슬피 울면서 흉악한 적군들에게 굴욕을 당하는 것보다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 하여 이곳 높은 곳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백마강 깊은 물에 몸을 던졌을 것이다.
낙화암 (落花岩) 설명 석판에 있는 글
「백제의 사직이 무너지던 날 (의자왕 20년 AD660년),
백제의 여인들이 적군에게 잡혀 치욕스런 삶을
이어가기 보다는 충절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백마강에
몸을 던졌던 곳으로 삼국유사에 기록하고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이 날리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작자 미상의 낙화암 한시비
낙화암 절벽이다. 절벽 위에 백화정이 보인다.
절벽에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이 쓴 ‘落花岩’ 글씨가 음각(작은 사진)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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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은 금강의 일부 구간으로 부여읍을 지나는 약 16km 구간이다.
백제를 침공한 당나라군 소정방이 백제군을 쫓아 금강을 건너려 할 때 강물 속에 있던 용이
방해 하므로 용이 좋아하는 흰 말을 미끼로 바위 위에서 잡아 올렸다고 하여 강 이름을
백마강이라 하였고 용을 낚시했던 바위를 조용대라고 하였다고 하였다는 전설과
또다른 전설은 소정방이 백말을 이강에서 씻겼다고 하여 백마강이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나
이 백마강은 옛 부터 백제에서 제일 큰 강이므로 백제의 백자를 따서 백마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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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 설명판
고란사는 부소산 낙화암 옆에 있는 절이다.
고란사는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사찰의 유래는 암벽에 자라고 있는 고란초로부터 온 것이라 한다.
고란사는 강변에 있기에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세운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되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조선 정조 21년(1797)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은산 숭각사를 이건한 것이다. 충남 문화제 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보전 법당
고란사의 부처님 옷이 다른 절의 부처님 옷과 다르다.
왼쪽부터 대세지보살. 아미타불. 흰옷 입은 관세음보살
고란사 설명판
고란 약수터.
임금에게 바친 고란약수(皐蘭藥水)와 고란초(皐蘭草)의 전설이 있다.
「백제시대에 임금님은 항상 고란사 뒤편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애용하여, 매일같이
사람을 보내 약수를 떠오게 하였다. 마침 고란약수터 주변에서만 자라는 기이한 풀이 있어
이름을 <고란초>라 불렀다. 약수를 떠오는 사람들이 고란초의 잎을 하나씩 물동이에 띄워
옴으로써 그것이 고란약수라는 것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백제의 임금님이 약수를 즐겨 마셔,
원기가 왕성하고 위장병은 물론 감기도 안 걸리고 사셨다 한다.」
고란 약수에는 갓난아기가 된 할아버지의 전설도 있다.
「아득한 옛적 소부리의 한 마을에 금슬 좋은 노부부가 살았는데 늙도록 자식이 없어 할머니는
늘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을 한탄하며 다시 한 번 회춘하여 자식 갖기를 소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일산(日山:금성산)의 도사로부터 부소산의 강가 고란사 바위에는
고란초의 부드러운 이슬과 바위에서 스며나오는 약수에 놀라운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다음 날 새벽 남편을 보내 그 약수를 마시게 하였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다음 날 일찍 약수터로 찾아가 보니 할아버지가 없고 웬 갓난 아이가
남편의 옷을 입고 누워 있어 깜짝 놀랐다.
할머닌 "아차!" 했다. 도사가 한잔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는 말을 남편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며 갓난아기를 안고 집에 돌아와 고이 길렀는데 후에 이 할아버지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백제시대 최고의 벼슬인 좌평에 올랐다고 한다.」
고란사 후면 암벽에서 자라는 고란초
고란초는 고란사 뒤의 절벽에서 자라는 상록다년초로 전국 강가의 절벽이나
바닷가 숲속에서도 더물게 자란다.
위 사진의 원형 부분을 확대한 사진이며 잎에 점이 있는 것이 고란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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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사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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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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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루는 부소산성 서쪽 봉우리에 있는 정자로 부여읍이 잘 보인다.
부여 출신인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씨의 반월문 휘호로 만든 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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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령사는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친 군경들의 숭고한 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호국영령 927위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1960년에 건립하였고 2004년에 개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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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회회장과 함께
궁남지는 우리나라 연못 가운데 최초의 12만평이나 되는 인공 조원이다.
궁남지는 백제 궁성의 별궁에 딸린 연못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 35년(634년)에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끌어 들이고 사방에 나무를 심고 연못 속에
섬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궁남지는 사적 제135호이며 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인 서동과 관련된 전설이 많다,
궁남지에는 매년 7월에는 연꽃 축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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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남지 설명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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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잎이 사람 얼굴 보다 몇배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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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정은 궁남지에 있는 정자인데 백제 무왕(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포석정의 현판 글씨는 이곳 출신 전 국무총리 김종필씨의 휘호이다.(작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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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가수 수와진이 심장병 어린이 돕기와 불우이웃돕기 자선공연을 하고 있다.
주최측에서 알바이트 학생들을 희안한 옷을 입혀 관람객들과 사진도 찍고 즐겁게하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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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과 선화공주의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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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축제장에 빠짐없이 끼여드는 품바공연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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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장군 동상
계백장군은 나당연합 18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성왕 동상
백제 26대 성왕(523~554)은 백제의 부흥운동을 펼치면서 웅진성(현 공주)에서
538년 (성왕 16년)에 사비성(현 부여)으로 천도하였다.
하산 뒤풀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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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웠고 유익한 트레킹이였습니다.
Jong Y.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