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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인협회 DMZ 탐방
일시:2014년 4월 19일 토요일
장소:허준 묘, 도라산역, 도라산 전망대, 제3땅굴, 캠프그리브스
* 허준 묘
운현궁 앞에서 버스 3대에 나누어 탄 한국시인협회가 맨 처음 간 곳은 허준 묘다.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오른 후에야 허준 묘에 다다랐다. 허준의 묘는 경기도 기념물 제128호다. 묘역은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에 있다. 허준(?∼1615)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명의다. 유의태에게 의학을 배우고 선조 7년 1574년에 내의원에 장원으로 급제한 사람이다. 그 후 혜민서를 거쳐 선조 34년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여러 의학서를 편찬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어의로 왕을 의주까지 모셔 호성공신이 되었다. 광해군 2년 1610년에는 16년간의 연구 끝에 25권의 방대한 의학서인 '동의보감'을 완성하였다. 동의보감은 드라마로도 방영하여 허준과 유의태에 대하여 책에서보다 더 가까이 알게 되었다. 사망한 후에는 관직 최고의 영예인 보국숭록대부에 올랐다. 그의 묘는 임진강 건너 비무장 지대 해발 159m에 위치하고 있다. 왜 이런 곳에 있을까 안타깝기도 했다. 묘역은 50여 평 규모로 좌측 묘는 허준, 우측 묘는 부인인 안동 김씨로 추정된다. 쌍분 위에는 허준의 생모로 추정되는 묘 1기가 더 있다. 산속 고즈넉한 곳에 묘가 3개 오롯이 있다. 북서향인 이들 묘는 양천허씨족보의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1991년 고문헌 연구가 이양재씨 등의 연구에 의해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쌍분으로 보이는 봉분은 이미 도굴되어 형태를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그 주위에는 묘비나 문인석 등이 흩어져 있었다. 묘비는 두 쪽으로 잘라져 있었지만 마모된 비문 가운데 ‘양평군’, ‘호성공신’, ‘허준’이라는 등의 글자가 음각된 점에서 허준의 묘역임이 확인되었다. 묘비는 113×41×12㎝의 규모로 조촐하다. 묘 주변에 쓰러져 있는 2개의 문인석은 높이 203㎝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다. 상석은 중앙에서 정북서 방향으로 놓여 있는데, 크기는 가로 152㎝, 세로 93㎝다. 이 묘를 통하여 허준의 생애와 그의 사후에 대한 단서를 부분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다. 돌비가 예전 그대로 허름하게 세워져 있다. 사람은 갔지만 한적한 산속에 덩그러니 누워 오늘날 우리에게도 건강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았다.
* 통일촌 장단콩 마을 식당
허준 묘에서 하산하여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간 곳은 장단콩 마을 식당이다. 장단콩이라는 이름이 독특하여 신기했다. 장단콩에서 ‘장단’이란 콩의 품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파주 장단 지역의 콩이란 뜻이다. 지금은 파주시 장단면이란 지명으로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전쟁 전에는 경기도 장단군이었다. 1940년대 6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던 제법 큰 군이었다. 예전 장단군의 상당 부분은 민통선 안에 있다. 통일촌 안에는 장단콩 식당 외 장단콩 체험 단지도 있다. 장단콩이란 이름이 생긴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이다. 일제는 장단 지역에서 수집한 재래종 콩에서 '장단백목'이라는 장려품종을 선발하였다. 콩의 색깔은 노랗고 껍질이 얇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단백목’은 한반도 최초의 콩 보급품종이다. 해방 이후에도 이 ‘장단백목’을 이용하여 장려품종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이 ‘장단백목’이 재배되지는 않는다. 수확성이나 품질에서 더 나은 품종이 보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장단콩은 한국전쟁 후 사라졌었다. 장단 지역 대부분이 민간인이 들어갈 수 없는 민간인 통제구역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1973년 정부에서 통일촌 사업으로 이 장단 일대 민통선 지역에 마을을 조성하고 민간인이 들어가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였다. 그때 민통선 내 100헥타르의 농지에 콩을 재배하게 하였다. 그러나 인삼 등 다른 작물에 밀려 콩 재배면적은 해마다 줄어들었다. 1990년대 들어 지역경제 활성화 정책의 하나로 파주시에서 장단콩 브랜드 육성사업에 나섰다. 1997년부터는 임진각 광장에서 장단콩 축제를 열었다. '신토불이 바람'과 함께 이 축제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콩 재배면적은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오늘날은 가을 수확기에 장단콩을 사러 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우리는 초가집 등 잘 꾸며진 옛스런 이곳 식당에서 장단콩으로 요리한 두부전골 등 여러가지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 도라산 역
도라산 역에 도착하니 철로가 먼저 반긴다. 조금 걸어가니 도라산 역이라는 역명이 크게 기차역 벽면에 걸려있다.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도라산리 민통선 안에 있는 최북단 역인 도라산 역은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 철도의 역 중 하나다. 비무장지대 (DMZ) 남방한계선에서 700여m 떨어져 있다. 평양까지 205km, 서울까지 56km 거리에 있다. 이 역은 당초 DMZ에 복원하기로 했던 장단역이 취소되면서 남쪽의 문산역과 북쪽의 봉동역 사이에 신설되었다. 2000년 9월 남북합의로 시작된 경의선 복원사업으로 2001년 4월 착공, 2002년 3월 말 완공되었다. 해발 156m의 도라산에서 역 이름을 지었다. 2002년 2월 부시 대통령 때 김대중 대통령과 방한한 미국 부시 대통령이 도라산역을 방문하여 연설하고 철도 침목에 서명하는 행사를 갖음으로써 한반도 통일 염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가 되었다. 역 안으로 들어가니 '타는 곳 평양 방면'이라는 문구가 가슴을 뜨겁게 한다. 금방이라도 평양행 열차를 탈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다.
도라산은 신라 1000년 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바치고,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와 결혼한 경순왕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다. 낙랑공주는 마음이 우울했던 경순왕을 위로하고자 이 산에 암자를 지었고, 경순왕은 조석으로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 경주를 그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도라산都羅山'이라고 불렸다. 도라산 역은 남북분단의 단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경의선이 연결되는 희망을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02년 2월 설 연휴 기간에는 문산역 북쪽으로 철도 운행이 중지된 1950년 이후 처음으로 특별 망배열차가 운행돼 700여 명의 이산가족들이 찾기도 했다. 도라산 역에는 도라 전망대, 제3땅굴, 판문점 등 안보 관련 시설들이 밀집해 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도라산 역사는 모두 100억 원의 건축 공사비가 투입돼 대합실, 역무실 등 역사 시설과 향후 남북 왕래에 대비한 간이출입장인 통관검사소도 마련되었다. 현대식 우람한 도라산 역 건물을 돌아보며 머지않아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철도가 개통되리라는 신념과 더 나아가 유라시아 횡단 철도가 이어지리라는 희망을 확신하게 되었다.
* 도라 전망대
도라산 역에서 도라 전망대로 이동했다.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에 있는 전망대다. 서부전선 한반도의 군사 분계선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도라 전망대'라는 돌비와 '분단의 끝 통일의 시작'이라는 커다란 문구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먼저 도라 전망대 2층으로 올라가 관람석에 앉아 설명을 들었다. 유리창 너머에는 비무장 지대 DMZ 남북한 경계선과 북한의 개성시와 송악산 등이 보인다. 남한으로 2Km, 북한으로 2Km의 울창한 숲이 비무장지대다. TV에서 철책선으로 따라 총을 겨누며 경계근무를 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던 곳이 바로 여기다. 북한으로 달려가는 뽀얀 도로도 왼쪽으로 보인다. 여기서 개성까지는 겨우 12Km의 아주 가까운 거리로 10여분 정도 가면 도달한다. 개성공단도 보인다. 개서시 외곽의 전시용 높은 아파트도 보인다. 가장 가슴 서늘한 광경은 153평의 세계최고 160m 높이로 세워둔 북한 인공기다. 우리나라 국기 태극기는 겨우 67평으로 100m 높이에서 휘날리고 있다.
이곳은 송악산 관측소가 폐쇄된 후 1986년 사업비 약 3억 원을 들여 국방부가 설치한 통일안보 관광지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1987년 1월부터다. 건물 총면적은 803.31㎡로, 관람석 500석,·VIP실·상황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옥상에는 망원경 32 대가 설치되어 있다.이 곳은 민간인출입통제구역 내에 있기 때문에 안보관광 외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도라산 역 안보관광으로만 이용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개성공단과 개성시 변두리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며, 그밖에 송학산, 금암골 협동농장, 장단역, 북한선전마을 기정동, 김일성 동상 등이 바라다보인다. 전망대 바로 옆에는 제3땅굴이 있고, 땅굴 내부관람도 가능하며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이 지역은 민간인통제지역으로 승용차의 출입이 제한되기 때문에 관람을 원하면 파주시의 ‘DMZ 안보연계견학’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한다. 임진각 관광지 또는 도라산 역에서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관람이 이루어지는데 탐방코스는 도라 전망대-제3땅굴-도라산 역-통일촌마을로 구성된다. 통일대교를 지나 검문소 앞에 이르면 검문을 하기 때문에 신분증을 꼭 지니고 있어야 한다. 월요일과 법정 공휴일에는 셔틀버스가 운행되지 않지만 추석, 설날 연휴에는 특별운행되며, 견학에 걸리는 시간은 약 2시간 30분이다. 남한과 북한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눈으로 바라만 보아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세계여행 중에도 허름한 국경선을 넘나드는 버스가 참으로 부러웠는데, 오늘 이곳 가슴 아픈 분단의 현장에서 우리나라도 하루 속히 그런 날이 오길 기원했다.
* 제3 땅굴
도라 전망대 바로 옆에는 1978년 10월 17일에 발견된 제3땅굴이 있다. 1974년 남한에 간첩으로 침투하였다가 자수한 귀순자 김부성씨에 의해 첩보를 받아 수색작업을 시작했다. 자신이 북한 개성근처에 머물면서 대남혁명 전술의 일환으로 땅굴을 굴착하는 일을 했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리하여 제3 땅굴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판문점 남방 4km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된 이 땅굴은 아치형으로 1시간에 3만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규모다. 모노레일을 타거나 걸어서 땅굴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우리 한국시인협회는 120여 명의 많은 인원으로 모노레일을 한번에 타지 못하여 두 파트로 나누어서 탔다. 굴 내부의 통로가 좁아 머리를 다치지 않도록 비치해 놓은 헬멧을 쓰라고 한다. 가방, 핸드폰,카메라 등 일체의 소지품은 보관소에 맡겼다. 모노레일은 지하 70m까지 내려가므로 고혈압이나 심장병, 진폐증이 있는 사람은 타지 말라고 안내한다. 모노레일은 경사가 가파른 200m 길이의 레일을 따라 서서히 내려간다. 서늘한 기온이 전신을 휘감는다. 한동안 내려간 모노레일이 정차하고, 그곳에서 내려서 북한이 파놓은 제3 땅굴을 걸어서 돌아나왔다. 제3 땅굴은 길이 1,635m, 높이 2m, 폭 2m 규모다. 탄광으로 위장하려고 벽면에 검은 칠을 했다. 또한 침수한 물이 북한으로 흘러들도록 남한 쪽은 높게, 북한 쪽은 낮게 만들었다. 비무장지대 밑으로 파고 들어온 땅굴을 걸으며 소름이 돋았다. 다시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왔다. 땅굴 앞에는 분단의 역사와 자연생태계 영상을 담은 입체영상물을 상영하는 DMZ영상관이 있다. 그곳에서 영상자료를 관람했다. 비무장지대 관련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는 전시관, 상징모형물, 기념품판매장 등의 시설도 설치되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과 외국 사람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전쟁에 대한, 분단에 대한 아픔을 체험하며 이 지구상에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기를 기원했다.
* 캠프 그리브스 견학
캠프 그리브스는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미군이 주둔하던 기지라는 것을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우리나라의 경제발전과 도시인구 증가와 지역개발로 주한미군 환경문제와 주한미군 기지 및 훈련장에 대한 민원이 증가하게 되었다. 미국측도 산재한 기지를 통폐합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껴 주한미군 측은 1999년 ‘연합토지 관리계획’을 마련했다. 2001년부터 미군 공여지 반환과 관련하여 한국 국방부 용산사업단과 협상에 들어갔다. 그 결과 2002년 전국 28개 미군기지 및 시설과 경기도 내 3개 미군훈련장 등 총 4114만 평을 2011년까지 우리 측에 반환하는 내용에 서명하였다. 이에 따라 미군은 전국 34개 기지 1,218만 평과 3개 미군훈련장 3,949만 평 등 모두 5,167만 평 총 공여지의 64%를 우리 측에 반환하기로 하였다. 또 의정부, 동두천, 파주, 춘천, 부산 등 5개 도시의 도심에 있는 미군기지는 반환하기로 하였다. 동두천과 의정부로 통합하고, 주요부대는 평택, 군산 등으로 이전하는 등 크게 두 가지다. 2003년 용산 부지가 최초로 반환된 이후, 9개 기지에 대한 반환이 이뤄졌다. 이후 2007년에는 파주의 캠프 그리브스 등 주한미군기지 14곳이 한국에 반환되었다. 반환 받은 부지 중 캠프 그리브스는 한국군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캠프 그리브스는 기본 건물 일부만 사람들이 드나들고, 산 곳곳에 놓은 부대 건물이 폐허가 되어 방치되어 있다. 귀신 나올 것 같은 허름한 건물인데 50년이 지났어도 아직 튼튼하단다. 캠프 그리브스에 도착하여 한국시인협회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산길을 따라 장교 카페였던 산 정상의 건물로 올라갔다. 상큼한 공기와 주변 풍경이 아름답다. 그래서 경기도에서는 이곳 미군 주둔 기지였던 건물들을 보수하여 청소년 수련장 등으로 운영하려는 방침이라고 한다. 임진강이 훤히 보이는 정상에 서니 강 건너 우리나라의 부대 초소 건물이 보인다. 임진각도 보인다. 평화로운 정경이지만 언제 무서운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경각심으로 철통 같은 수비태세다. 카페 건물 안으로 들러가니 폐허로 흉칙하다. 바닥에 앉아서 금년 39대 한국시인협회 회장인이신 김종철 회장님 외 몇 시인의 시낭송 시간을 가졌다. 새삼 분단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며 하산하였다.
* 돌아오는 길
한국시인협회 DMZ 탐방을 미치고 통일대교를 지나 맡겨 놓았던 주민등록증을 찾아 서울로 향했다. 통일대교 아래 임진강은 남북한의 분단 아픔을 품고 서럽게 흐른다. 내 조국의 동강난 허리에서 전쟁의 고통과 후유중이 후손에게까지 얼마나 뼈저린 고통인지 실감하며 돌아왔다. 서러운 철조망도 거두었으면, 총부리를 겨누는 비통함도 소멸 되었으며, 임진강변을 달리며 가슴 뭉클한 소망이 용솟음쳤했다. 소망하면 이루어진다던다. 언젠가 남북한이 하나가 되어 다 무너져내린 DMZ 비무장지대에서 축복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그날이 오기를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