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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흰옷과 치마저고리 History of Korean Traditional Clothes
ysoo 추천 0 조회 36 18.11.01 15: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흰옷과 치마저고리

History of Korean Traditional Clothes


송 기 호 (Ki-Ho Song)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약 력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문학 박사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 역임



전통시대에는 농상(農桑)이 가장 기본적인 산업이었다. 지방 수령이 챙겨야 할 일곱 가지 주요 업무 가운데에도 농상이 들어 있다. 농상이란 농사와 양잠이니, 농사는 먹기 위한 것이요 양잠은 입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뽕나무를 키우고 누에를 쳐서 만드는 비단은 보통 사람이 범접하기 어려운 옷감이었다. 비단은 지체의 상징이었고 서민은 고래로 삼베옷이나 가죽옷 따위를 입었다. 조선 성종 때 기록을 보면, 북방의 병사들은 추운 날씨에도 삼베옷에 갑옷을 입었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에도 평민이 비단 옷을 입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종 9년(1131) 5월에 서울과 지방에서 비단 짜고 수놓는 일을 정지시키고, 10년을 기한으로 평민이 비단 상의와 비단 바지를 입는 것, 도성 안에서 말 타는 것, 노비들이 가죽띠를 띠는 것을 금지하였다
(『고려사』금령(禁令))."


그런데, 비단과 삼베의 간극을 메워준 것이 고려 후기인 1363년에 문익점이 들여 온 목화였다. 남방산물인 목화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에 서양에서는 양털을 대신했다고 해서 ‘나무에 열린 양’ 으로 생각했고, 중국에서는 비단을 대신했다고 해서 ‘나무에 열린 누에고치’ 로 생각했다. 목화는 국내에 들어오자마자 급속히 퍼져나갔다고 한다.


"정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한 필을 짰다.
이웃 마을에 전하여 서로 배워서 한 고을에 보급되었고, 또 10년이 되지 않아서 전국에 두루 퍼졌다
(태조실록 7년<1398> 6월 13일)."


10여 개의 씨앗을 심어 하나만 싹을 틔웠다고 하는데, 이것이 10년 사이에 전국에 퍼졌을 정도이니 목화 도입의 효과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짐작할만하다. 그러기에 조선시대에 목화실로 짠 무명이 화폐로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옷을 만들 때에 따뜻하게 입으려면 명주가 있고 시원하게 입으려면 삼베가 있지만, 모두 무명만 못합니다. 무명은 너무 사치스럽지도 너무 검소하지도 않고 추위나 더위에도 적당하여, 마치 음식물로 흔히 대하는 차, 밥, 콩, 조와 같습니다(정조실록 24년<1800> 2월 22일)."


이렇게 무명이 일반화되었으나, 북방인 함경도에는 면화가 재배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쪽에서 운송해가야 했다. 따라서 무명도 귀할 수밖에 없어서 다른 옷감들이 이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이삼이 아뢰기를“북쪽 병영(兵營)에는 목면이 없어서 백성들이 모두 개가죽 옷을 입습니다. 평안도 병영에는 정목(正木: 품질 좋은 무명)이 제법 여유가 있으니, 북쪽 병영의 삼베 10여 동(同: 50필)을 매년 평안도 병영으로 보내어 10동의 무명과 바꾸어 군관(軍官)의 의복과 상품에 쓸 수 있도록 의정부에 정식으로 분부하소서.”라고 하니, 윤허하였다(영조실록 5년<1729> 5월 6일)."


북방 군사들은 이처럼 개가죽 옷을 입는 경우도 있었지만 종이옷도 입었다.


"평안병사 신응주가 강변을 파수하는 군졸들에게 지의(紙衣)와 유의(襦衣)를 나누어 주고 급히 아뢰기를, “강변의 읍(邑), 진(鎭)에서 동상에 걸릴 근심은 파수꾼이 봉수군보다 더 심하고, 군졸이 장수보다 더 심합니다. 봉수대와 파수막을 막론하고 장수에게는 모두 지의를 주고 파수꾼에게는 모두 유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봉수군의 유의가 부족하여 각 봉수대마다 유의 세 벌과 지의 두 벌을 주어 번갈아입게 하였습니다. … ”고 하였는데, 대개 연말에 유의 385벌과 지의 400벌을 하사했기 때문이다(정조실록 20년<1796> 1월 1일)."


지의는 솜 대신에 종이를 넣어서 만든 옷이다. 유의는 남자 저고리인 동옷으로서 겹옷과 홑옷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솜저고리일 것이다. 조정에서는 군사 의복으로 솜저고리마저 모두 조달하지 못해서 종이를 넣은 옷을 지급하였다.


심지어 과거시험을 치른 뒤에 낙제자 답안지를 변방에 보내서 옷감으로 사용하게 하는 관례도 생겼다.


"국가에서 으레 과거시험장의 낙방지로 납의(衲衣:방한복)를 만들어서 북쪽 변방을 지키는 군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때에 비변사가 아뢰기를, “보통 비변사에서 시험관에게 고지하여 북쪽 변방에 보내는 낙방지를 남김없이 모아 실어보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번 3백장 정도로 책임만 면하고 있으니 아주 온당치 않습니다.

감시(監試: 생원진사과) 초시(初試:첫시험)의 낙방지를 서울과 지방의 시험관들이 자기가 차지하거나 남에게 주는데, 이는 재물 횡령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시험장에 들어왔던 사람 수를 보고해서 사사로이 쓰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하니,아뢴대로 하라고 지시하였다(광해군일기 9년<1617>6월 22일)."


시험지는 원래 응시자가 지참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종이가 귀하다보니 낙방지를 돌려주지 않고 관청용품으로 사용하였고 군사들의 옷감으로도 이용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종이를 빼돌려 사사로이 사용하기도 하였던 모양이다. 과거시험을 자주 볼수록 북방의 군사들은 더욱 혜택을 보았을 것이다. 종이는 이처럼 군사의 옷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고, 여러 겹을 겹치기도 하고, 누비기도 하고, 소금물에 담그기도 해서 종이갑옷을 만들었다. 일반인들도 두터운 종이를 마름질하여 옷을 해 입었다.


그런가 하면, 추위에 떠는 죄수에게 짚으로 만든 섬을 지급한 사례도 보인다.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서울에 번들러 온 군사 가운데 옷이 얇은 자에게 유의를 나누어 주게 하고, 여러 곳의 수비 군졸과 옥중 죄인들에게 빈 섬(空石)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이어 경미한 죄수들은 석방하라고 명령하였다(인조실록 10년<1632> 12월 26일)."


그림 1. 섬의 모습


겨울 추위에 대비하여 병사와 옥중 죄인에게 공석을 나누어주게 하였는데, 공석은 곡식을 담지 않은 빈 섬을 가리킨다. 지금 쓰는 가마니는 근대에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고, 그 이전에 사용한 것이 섬이다(그림 1 참조). 이것도 역시 짚으로 만들었으니, 아마 이불이나 겉옷 대용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더 흥미로운 자료가 있다.


"이들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여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든다.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그 두께가 몇 푼이나 되어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알몸에다 한 자 크기의 베로 앞뒤를 둘러서 형체만 가린다(『삼국지』읍루(挹婁))."


읍루족은 만주 북방에 살던 종족으로 여진족, 말갈족의 먼 조상이 된다. 이들은 여름에 거의 벌거벗고 겨울에는 몸에 돼지기름을 두텁게 발라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그 후예인 물길족은 오줌으로 세수를 하는 풍습도 있었다. 이것은 북방 민족 사이에 유행하던 것으로 오줌에 어떤 기운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한다. 아마 따스한 물로 세수하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대 기록에는 눈에 띄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만주에 살던 부여 사람들이 흰옷을 숭상했다는 대목이다.



"국내에 있을 때에는 흰옷을 좋아한다. 흰옷에 큰 소매가 달린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모직옷을 즐겨 입지만 일상적으로 국내 거주시에는 흰색 옷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당시에 무명도 없었으니 모시처럼 삼베로 흰옷을 만들거나 다른 재료를 사용하였을 터인데, 더러워지기 쉬워 오래 입기 어려운 흰옷을 좋아했다는 것은 여간한 일이 아니다. 신라에서도 관복으로 흰색을 숭상하였다고 한다.


이런 흰옷 전통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까지 끊임없이 내려왔다. 오죽하면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 이라부르겠는가? 조선 말기 서양인의 기행문에 항상 나오는 것이 흰옷 물결이다.


"서울은 한 가지 점을 제외하면 내가 본 도시 중에서 가장 음울한 도시이다. 한 가지 예외란 사람들이 입은 흰옷이다. … 멀리서 보면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흰 겉옷은 확실히 거리를 환하게 만든다(퍼시벌 로웰『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예담,183쪽)."


"코레아인들은 일반적으로 여름이나 겨울을 막론하고 옷을 따뜻하게 입는 편이다. 조끼, 외투, 오버코트 등 온통 흰색 일색으로 층층이 껴입는다.

… 그러나 이 흰옷들도 자세히 보면 더 깨끗한 것도 있고 덜 깨끗한 것도 있어 그 흰 정도가 천차만별이며, … (아손 그렙스트,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걷다』책과 함께, 124쪽)"


과연 조선 백자와 더불어 흰옷은 조선을 상징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이런 복색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어 이목을 끈다. 영조가 오행사상에 따라 흰옷을 푸른옷으로 바꾸도록 조치를 내린 것이다.


"우참찬 이덕수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한 제안자가‘우리나라는 동쪽에 있는 나라인데, 동쪽은 시절로 말하면 봄에 해당하고 색으로 말하면 청색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풍속이 흰옷 입기를 좋아하지만 마땅히 흰옷을 금지하고 푸른옷을 숭상하게해야 합니다.’라고 하였고, 전하께서도 이미 그 말에 따라서 이를 시행하도록 한 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 우리 동방의 풍속에 흰옷을 숭상한 것은 앞 시대의 역사책에 많이 기록되어 있고, 『수서』와『송사』및 명나라 동월(董越)의 기록에도 더욱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대체로 풍속이 이루어진 지 수천년이 되었는데 지금에 와서 고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알 수 없으니, 신은 그만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고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마땅히 생각해 보겠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 지시를 내려 말하기를, “우참찬이 상소한 말을 묵묵히 생각해 보았는데 그의 말은 지나치다고 할 만하다. … 우리나라에서 흰옷을 숭상해 왔다는 것은 비록 옛 선비들이 한 말이지만, 숭상한다고 말한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어찌 요즘처럼 심했겠는가? … 근래에 인심이 경박해져서 남색을 흰색으로 바꾸는 자가 장차 어지럽게 나타날 것이니, 전국에 깨우쳐 타이르도록 하라.”고 하였다(영조실록 14년<1738> 8월 16일)."


그러나 이러한 영조의 지시는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 다음의 정조 때에도 흰옷 문제가 다시 불거졌기 때문이다.


" 좌의정 김이소 등에게 지시하기를, “창의(氅衣)를 푸른색으로 하자는 것과 소매가 넓은 폐단에 대해 영의정이 초기(草記: 간략히 왕에게 아뢰는 문서)에 첨부하여 보고한 일이 있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대체로 창의 문제는 위에서 지시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만일 법령으로 정했다가 준수하지 않아 실행 효과를 보지 못한다면 차라리 법령을 만들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 ”고 하니, 김이소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창의도 조복(朝服: 관리 예복)의 하나이면서 집에서 늘 입는 옷이기도 하여, 사람들이 푸른색과 흰색 두 벌을 갖추어서 관청에 갈 때는 푸른색을 입고 집에 있을 때는 흰색을 입습니다.

진실로 그 이유를 찾자면 대개 우리나라 풍속이 흰색을 숭상하기 때문인데, 지금 만약 흰색을 푸른색으로 바꾸면 예법에 부합될 뿐 아니라 번잡함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신들이 당장 오늘부터 솔선하여 푸른 창의를 입겠습니다. … ”고 하였다(정조실록 17년<1793> 10월 20일)."


창의는 조선 후기에 벼슬아치들이 평상적으로 입던 웃옷이었다. 이를 두 가지 색으로 만들어 집과 바깥에서 각각 달리 입음으로써 규정과 전통을 모두 순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온통 흰옷을 입은 군중이 모여 있는 3·1운동 사진을 보면, 흰옷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비친 흰 옷은 일본인에게 쓸쓸함과 애상을 연상시켰던 데에 비해 서양인에게는 축제와 쾌활함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이와 함께 흰 옷은 일본에 대한 저항 의지의 상징이기도 했다. 근대화란 이름으로 양복과 양장이 보급되자 이에 반발하여 전통의복의 고수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YWCA를 중심으로 ‘흰옷 염색하기’ 를 내세우면서 생활개선 운동을 벌였다. 전라남도에서 나온 색옷 권장 전단에는 “생활 개선은 우선 물든 옷 입는 것으로부터” 라고 하였다. 흰옷은 더러워지기 쉽고 자주 빨래를 해야 하므로 비경제적이니 모두 물들인 옷을 입자고 하였다(『생활속에 담긴 우리옷의 발자취』국립민속박물관, 81쪽). 이처럼 흰옷은 근대까지도 뿌리 깊게 내려와 한국인의 상징물이 되었다.


그런데 흰옷과 더불어 뿌리깊은 전통을 보이는 것이 하나 더 있으니 여성의 치마와 저고리가 그것이다. 우리 옷의 역사를 돌아보면, 외래문화가 들어올 때마다 크게 바뀌어 왔다.

첫 변화는 신라 진덕여왕 2년(648)에 일어났다. 김춘추가 당나라에 갔다가 옷과 허리띠를 가져와 전통 복장을 당나라 복장으로 변경하였다. 문무왕 4년(664)에는 부인 의복도 바꾸어 복식제도가 중국과 동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 충렬왕 4년(1278)에는 원나라 영향을 받아 개체(開剃) 머리를 하였다. 개체는 머리의 가장자리를 깎고 정수리 부분의 머리만 남겨 길게 땋아 늘어뜨리는 것으로 서 변발이라고도 한다. 머리 깎는 방식은 약간 다르지만 청나라 사람 머리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자 옷도 즉시
바뀌었다. 우왕 14년(1388)에는 명나라 사람들이 올 것이라고 해서 개체 머리와 몽고 옷을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그 뒤 청나라가 들어섰을 때에도 만주족 복장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은 물론이다.


여성이 남자 옷을 입는 풍습도 등장하였다. 원래 당나라 측천무후가 권력을 잡았을 때에 사회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여성이 남복을 입는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당나라 그림에는 여성이 남자관복을 입은 모습이 보인다. 이 영향으로 발해 정효공주 무덤 벽화에서도 남장 여성이 등장한다. 공주의 시녀들이 모두 남자의 관복을 입고 서 있는 것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까지도 이런 풍습이 보인다.


"우왕이 서해도로 사냥 갔는데 숙녕옹주와 궁녀들이 모두 남복을 하고 따라갔다(『고려사』우왕 12년 <1386> 2월)."


" 총신들을 각 도에 파견하여 관기로서 얼굴이 예쁘고 기예를 가진 자를 선발하고, 또 성 안의 관비와 무당 가운데 노래와 춤을 잘하는 자를 선발하여 궁중에 등록하게 하였다. 비단 옷을 입히고 말총갓을 씌워서 따로 한 대열을 짓게 하였으며, 이것을 남장(男粧)이라 불렀다(『고려사』사룡(蛇龍))."


"원상의 딸에게 남복을 입혀서 임금 수레를 따르게 했다(태조실록 7년<1398> 2월 29일)."


그런데 여성 옷은 외래문화의 영향에도 꿈쩍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통을 고수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옷은 기본 구조가 상의와 하의로 나누어진 형태이다.
이것은 유목민족이나 추운 지방에 많이 보이는 구조로서, 중국의 원피스 옷과 달랐다. 남자는 바지와 저고리를 입었고 여자는 치마와 저고리를 입었는데, 특히 여성 옷은 고대에 기본형이 만들어진 뒤에 외래영향과 무관하게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태종이 문신들을 불러서 직접 시험을 치를 때에 낸 문제 가운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왕은 이르노라. … 의관(衣冠) 규정은 모두 중국제도를 따르는데 여자 옷만 오히려 옛 풍속을 따르고 있으니, 이것은 과연 다 고칠 수 없는 것인가?(태종 실록 7년<1407> 4월 18일)"


이렇게 유구한 전통을 가진 치마와 저고리도 시대에 따라 형태가 달라졌는데, 특히 저고리의 길이가 크게 변하였다. 고구려 벽화에는 저고리가 엉덩이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고 조선 초기까지도 그런 모습이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후기에 들어가면서 점점 길이가 짧아져 나중에는 젖가슴을 내놓을 정도가 되었다.


"일찍이 어른들의 말을 들으니, 옛날에는 여자 옷을 넉넉하게 만들어서 시집올 때 입었던 옷을 죽어서 염할 때에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산 사람, 죽은 사람, 늙은 사람, 젊은 사람은 신체 크기가 같지 않으니, 그 옷이 좁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서 새 옷을 시험 삼아 입어 보았더니, 소매에 팔을 넣기가 몹시 어려웠고 한 번 팔을 구부리니 솔기가 터졌다.

심지어 간신히 입고 나서 조금 있으면 팔에 혈기가 통하지 않아 부어올라서 벗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소매를 째고 벗기까지 하니 어찌 그리도 요망스런가.


"대개 요즘 유행하는 의복 단장은 모두 창기(娼妓:기생)들의 아양 떠는 자태에서 생긴 것이다. 세상 남자들이 그 요사스러움에 빠져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처와 첩에게 권하여 본받게 하고 서로 전하며 익히게 한 것이다. 오호라, 시(詩)와 예(禮)를 배우지 못해서 규중 부인들이 기생 복장을 하였구나. 부인들은 빨리 이를 고쳐야 한다(『청장관전서』 부의(婦儀))."


그림 2. 여자 옷의 윤곽선 변천(금기숙, 『조선복식미술』43쪽)


이처럼 부인들이 기생의 복장을 모방하면서 좀 더 섹시한 옷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기생들은 예외적으로 옷사치를 인정받았다. 이들의 화려한 옷차림이 부인들의 선망이 되었고, 남편들도 이를 부추겼던 것 같다. 이리하여 치마는 속바지를 겹겹이 받쳐 입어서 점점 풍성해진 반면에 저고리는 길이가 더욱 짧아지면서 입기도 힘들 정도로 좁아짐으로써, 상박하후(上薄下厚)의 실루엣을 보이게 되었다(그림2 참조).

저고리 길이가 19세기 초에 30cm 정도였다가 말엽에 이르면 18cm 정도까지 줄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기획 : 남경필 편집간사



대한토목학회

THE MAGAZINE OF THE KORE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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