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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넋
이 문 열
사라져 그리운 것들 가운데에는 삭자리 깔린 맨 봉당에 술독과 개다리소반이 있는 옛 주막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미 여러 해 전에 고향에서조차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 귀향의 둘째 날 정산 선생의 초당에서 문전 축객을 당한 내가 우울하게 들어선 술집도 옛 주막의 흔적은 전연 없었다. 대도회의 그것처럼 시멘트 바닥을 한 홀에 포마이카 칠한 테이블 서넛과 가운데 연탄을 피우도록 되어 있는 둥근 양철 테이블 두엇이 놓인 대폿집이었다.
아직 초저녁이라 그런지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낯선 주모를 불러 막걸리 한 되와 두부 한 접시를 청했다.
첫 잔을 마시자 나는 아직도 고향 양조장에 안짱다리 김 씨가 일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도회의 술보다 조금 싱겁기는 하지만 전혀 감미료나 약료의 첨가에서 오는 잡맛이 없는 막걸리 때문이었다.
술집에 들어설 때는 우울한 기분이었지만 몇 잔 따르자 술이 오르며 이번에는 조금씩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홀로 마시는 술에는 익숙하지 않을 때였다. 주모라도 불러 최근의 장터거리 얘기라도 들을까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영섭이었다. 면 집안으로 나보다는 서너 살 아래인 동항(同行)이었다. 집안이 별로 넉넉지 못해 몇 해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방 공무원 시험을 쳐 그 무렵에는 면사무소에 서기로 나가고 있었다. 나는 손짓으로 녀석을 불렀다.
“형님 혼자서 웬일이십니까?”
녀석은 약간 뜻밖이라는 듯 자리에 앉자마자 물어 왔다.
“너는 떼 지어 왔어? 그런데 너야말로 초저녁부터 웬일이냐?”
나는 약간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녀석은 왠지 내 웃음을 받아 주지 않았다. 대신 따라 준 술을 단숨에 벌컥벌컥 마시더니 빈 잔을 제자리에 놓으며 침중하게 말했다.
“울적한 일이 있어서요.”
“울적한 일이라니?”
그러자 녀석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종갑 씨가 죽었어요.”
“종갑 씨가 죽었어?”
종갑 씨는 역시 족인(族人)으로 낙이도 50이 넘고 항렬도 상당히 높지만 아이나 어른이나 문중에서는 모두 종갑 씨로만 불렀다. 일생을 떠돌다가 망친 홀아비에 대한 고향의 대우였다.
“네, 방금 행정 전화를 받았어요. 행려사망(行旅死亡) 통고였어요. 오늘 제가 당직이거든요.”
“어디서? 왜?”
“울진입니다. 망양정(望洋亭) 부근인데, 아마 병들고 굶주려 죽은 모양입니 다.”
녀석의 말끝이 약간 떨렸다. 불행하게 떠돌다 죽은 핏줄기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을까.
“기어이…….”
나도 콧등이 시큰해 오면서 말을 맺을 수가 없었다. 침묵 속에 몇 순배 술이 돌고 새 술주전자가 나온 후에야 나는 다시 물었다.
“그 아재 여기 떠난 게 언제냐?”
“지난 사월입니다. 농업 인구 센서스를 맡아 한 후 면(面)에서 돈을 받자마자 떠났으니까요…….”
“또 옥선(玉仙)이를 찾아갔니?”
“그랬겠지요.”
“단소도 가지고.”
“아마…….”
그러고는 다시 대화가 끊겼다. 나는 녀석과 말없이 잔을 주고받으며 생전의 종갑 씨와 함께했던 날들의 회상에 젖어들었다.
종갑 씨에 대한 내 첫 기억은 초등학교 상급반 때의 어떤 정월달에 있었던 조그마한 사건과 얽혀 있다.
그때도 종갑 씨는 이미 뒷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종갑 씨였다. 남편의 방랑벽에 견디다 못한 그의 아내는 어린 딸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고, 단단하다던 부모의 유산도 완전히 거덜나다리 뻗을 방 한 칸 멍석 펼 땅 한 자투리 없었다. 거기다가 처가 덕으로 들어간 군청에서 거액의 공금을 꺼내 쓰고 낙향한 그가 문중의 이 집 저 집을 떠돌며 식객 노릇을 하던 때였으니 다른 잡사에 무슨 겨를이 있었으랴.
그런데 전쟁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문 그해 인근의 민촌(문중이 사는 언덕도 아니고 장사치가 사는 장터거리나 농막이며 드난살이들의 짐이 있는 개골짝도 아닌 보통 농민들의 부락)에서는 오랜만에 걸립패를 꾸몄다. 전문적인 걸립패가 아니라 부락 사람들로 구성돼 그저 정월 한 달 면 내의 각 부락이나 도는 농악대 정도의 성격이었다.
아직 모든 게 넉넉지 못하던 때였으므로 각종 기구(旗具)나 풍물(風物) 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어디서 찾아낸 영기(令旗) 인지 바탕인 남색은 바래져서 ‘令’ 자가 겨우 드러날 정도였고, 수술도 군데군데 빠져 있었다. 용당기는 한지를 몇 겹 발라 먹칠한 것에 조잡한 솜씨로 용을 그려 넣은 것이었고, 농기(農旗)도 꿩장목이나 새로 갈았을까.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의 ‘之’와 ‘大’ 사이가 찢어져 기우뚱했다. 어수화, 고깔은 새로 만들어 그런대로 참을 만했지만 상모에 이르면 한심하였다. 특히 어린 우리들에게 가장 신나는 물채상모는 겨우 둘뿐이었다. 풍물도 비슷한 상태여서 누덕누덕 기운 장구가 아직도 인상 깊게 기억될 정도였다.
그러나 1년 가 봤자 별반 구경거리가 없는 그때의 우리들에게는 그 농악대로도 굉장했다. 걸립이 시작되면서 우리는 10리, 20리 되는 이웃 마을까지 가서 그들이 벌이는 걸궁굿이나 지신밟기를 구경했고 밤중에는 멀리 들판 가운데서 판굿을 벌이는 그들의 풍물 소리와 모닥불에 가슴을 설랬다.
그런데 마침내 그들이 우리 문중 마을에도 들어왔다. 정월 초이렌가 여드렛날 아침 문중 조무라기 패들은 당산 쪽에서 나는 방포(나팔 신호) 소리를 듣고 그리로 달려갔다.
이미 그들은 거기서 신나게 당산굿을 벌이고 있었다. 잠시 후에 영감댁 농막인 매기네 아버지가 집안 어른 분네들을 대신하여 멍석 한 닢과 상(床) 하나를 들고 왔다.
곧 멍석이 펴지고 권선부(勸善簿)를 얹은 상을 마주하여 걸립패의 상쇠와 매기네 아버지가 흥정을 했다. 모금, 숙식비, 체류 기간 등을 협정하는 것 같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자세한 것은 기억에 없지만 어쨌든 걸립패는 오래잖아 언덕 위의 문중 마을로 오르기 시작했다. 변변찮은 풍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열두 차(次) 서른여섯 가락을 멋지게 뽑으면서 행진해 올라갔다. 길군악 반삼채에 사모잡이요, 행진굿 반삼채에 도드리 가락이 흐드러졌다. 강마진으로 신장(神將) 을 부르고, 금쇄진으로 윤무를 돌았다.
따라다니는 우리들에게 가장 신나는 것은 윗놀음이었다. 부들 상모의 외상피놀음에 열두 발 물채상모가 어지럽게 돌아갔다. 대포수와 조리중의 익살도 구경거리였다. 대포수는 죽은 까치 한 마리를 꿰차고 거들거렸고 조리중은 송락 배낭을 메고 주척거렸다.
종가(宗家) 넓은 마당에 이르러 본격적인 지신밟기가 벌어졌다.
“주인 주인 문 여시오.
문 아니 열면 갈라요.”
문굿이 시작되면서 상쇠의 낭랑한 음성 이 두드러졌다. 그 상쇠가 바로 종갑 씨였다.
“에라 만수(萬壽), 에라 대신(大神) 이야.
성주(城主, 상량신) 근본이 어드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로다.
제비원에 솔씨 받아 항장목(長木), 청장목 되었구나.
도리기둥 되었구나
그 재목을 베어다가
이 집 상량(上樑)을 올렸더니
남풍이 건듯 부니
풍경소리 요란하구나.
에라, 만수 대신이야…….”
성주풀이에 이르러 종갑 씨의 음성은 더 낭랑해졌다. 얼굴은 불그스레하게 상기되고, 어깨는 흥에 겨워 주척거렸다. 그렇게 고방굿을 지나고 뒤안굿에 이르렀다.
“질토지신 오방관신 선고한 바,
이댁 규중 자녀 간 거느리고
안과태평, 소원성취 비나이다.
어하라 천룡아 지신밟자 천룡아…….”
그때쯤이었다. 갑자기 둘러싼 구경꾼들을 헤치고 어른 분네 세 분이 나타났다. 세 분 모두 노기로 삼엄한 표정이었는데, 그중 한 분은 자루 달린 바가지에 무언가를 떠 오셨다가 대뜸 종갑 씨에게 퍼부었다. 뒷간에서 펴 온 삭은 오줌이었다.
“이 씨도 잊어버린 놈아. 어디서 풍류질이냐?”
다른 두 분도 노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이놈아 껍데기 아깝다, 껍데기 아까워.”
“거곡장(長)이 이 꼴을 보았으면 구천에서 통곡할 게다.”
거곡은 종갑 씨 부친의 택호(宅號)였다. 갑작스레 오줌 벼락을 맞은 종갑 씨는 한동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정신을 수습한 그는 얼굴을 씻을 것도 잊은 채 참담한 몰골로 놀이판을 빠져나갔다.
“이 철없는 것들아. 이걸 구경하라고 끌어들였느냐? 족인이 사당패가 되어 돌아도 네놈들은 부끄럽지도 않느냐?”
어른분들은 이어 구경하고 있던 중년배의 숙항(叔行) 들에게 질타를 퍼부었다. 불만스럽지만 숙항들은 무안한 얼굴로 하나둘 흩어져버렸다.
지신밟기도 거기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종갑 씨가 빠져 나간 농악대는 간신히 격식 만 갖추고는 서둘러 언덕을 내려갔다.
종갑 씨가 족친이라는 것을 내가 알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전에도 나는 그를 알고는 있었지만 문중의 천대 때문에 타성으로 여겨 왔던 터였다. 그러나 솔직히 그때의 나를 지배한 감정은 일문으로서 민촌 것들과 어울려 풍물을 친 종갑 씨에 대한 분노나 불쾌감이 아니라 흥겨운 구경거리를 순식간에 망쳐 버린 그 어른 분네에 대한 야속함이었다.
그렇지만 그 일이 있은 뒤로도 종갑 씨는 오랫동안 나와 무관한 사람이었다. 천성적인 방랑벽 때문에 1년에 몇 달씩 안 보이는 것을 빼면 종갑 씨는 대개 고향에 머물렀으며 그에 대한 문중의 냉대도 변함없었다.
나중에는 가까운 집안까지도 공으로는 밥을 주지 않게 되어 그는 1년의 태반을 문중의 잡일을 하며 보냈다. 손재주가 있고 머리도 영리해서 그가 밥 얻어먹을 정도의 일거리는 문중 어느 집에든 있었다. 도배 솜씨가 뛰어나고 간단한 구들장일도 했으며 가구나 농구 수선도 곧잘 해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때가 와서 목돈을 손에 쥐게 되면 그는 홀연 고향에서 사라졌다.
그가 목돈을 만지게 되는 것은 대개 무슨 조사나 통계로 면사무소의 일손이 달릴 때였다. 아주 달필이고, 수리에 밝기로 면(面)에서도 이름이 나, 도급 형식으로 면사무소에서 일을 얻어 냈다. 그 무렵은 이미 아무도 애석히 여기지 않는 일제 때의 중학교 4년 중퇴 학력이 밑천이었다.
그가 그렇게 맡은 일은 빈틈없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받는 돈도 상당했다. 보통 한 달쯤 밤낮없이 일을 하면 면서기 몇 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돈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돈으로 한번 도회에 나가면 그는 마지막 동전 한 푼까지 다 쓰고도 또 얼마간 구걸과도 같은 생활을 하다가 완연한 거지꼴로 고향에 돌아왔다. 다시 잡일과 눈칫밥이 시작되고…….
그런 그의 이해 못 할 생활 방식과 성적(性的) 행실에 대한 나쁜 평판은 오히려 젊은 층들에게 어떤 경계심까지 품게 하였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대학에 간 첫해에야 나는 그를 다시 볼 기회를 가졌다.
그해 여름방학의 어떤 아침 나는 느지막이 개울에서 세수를 하고 돌아오다가 우연히 종갑 씨와 마주쳤다. 꾸벅 알은체만 하고 지나치려던 나는 문득 그 뒤를 따라오는 용팔이를 발견했다. 머리가 좀 모자라는 녀석으로 역시 종갑 씨처럼 잡일로 살아갔는데 그날은 술 한 초롱과 돗자리 한 장을 지게에 얹고 종갑 씨를 뒤따르고 있었다.
종갑 씨는 그날따라 말쑥한 한복 차림에 쥘부채까지 하나 들고 있었다. 내게는 좀 낯선 차림이었다. 내가 약간 이상한 기분으로 다시 한 번 종갑 씨를 쳐다보았을 때 문득 종갑 씨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 왔다.
“너, 이제 술 마실 줄 알겠구나.”
“네, 조금…….”
나는 좀 얼떨떨해서 대답했다. 그와 얘기를 나눠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별로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 나를 따라가자.”
“어딜 가는데요?”
“유산(遊山) 간다”
나는 그의 의도가 얼른 이해되지 않았지만 원인 모를 호기심으로 그를 따라나섰다. 그는 말없이 동구를 벗어나더니 조그만 산봉우리에 자리를 잡았다. 앉아서 보니 개울과 들판이 내려뵈는 아주 전방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종갑 씨는 또 한 번 이상한 짓을 했다. 용팔이가 지적한 곳에 돗자리를 깔고 술초롱과 안주 꾸러미를 벌여 놓자 그는 말했다.
“내 왼쪽 조끼 주머니에 든 것을 꺼내라”
용팔이가 시키는 대로 꺼내는 것을 보니 당시로서는 가장 큰돈이던 백 원짜리 한 장이었다.
“네가 가져라. 그리고 해 질녘에 다시 와 돗자리와 술초롱을 돌려줘라.”
나중에 술이 시작된 후에 나는 그게 이상해서 물어보았다.
“행하(行下) 란 손으로 집어 주는 법이 아니다. 그렇다고 봉투를 마련하지도 못했고 돈 담을 쟁반도 없으니……”
옛날 한량들이 술자리에서 행하를 내릴 때 돈을 쟁반에 담아 주었다는 것은 그 후에 들어 알게 됐지만, 그날 일은 확실히 인상적인 데가 있었다. 그때의 내게 더 익숙한 팁 주는 방식은 백 원짜리에 침을 발라 작부의 이마에 붙여 주는 야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등기 이전 서류를 하나 대서해 주었더니 대서료 조로 오백 원을 주길래 오늘은 유산을 나섰다.”
그게 그 술자리의 설명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이 내일이면 당장 잡일이라도 해서 눈칫밥을 얻어먹어야 할 종갑 씨의 생활 방식이었다.
그날 술맛은 정말 각별했다. 안주라야 고작 산나물 한 사발이었지만 둘은 그 한 말 술을 다 마셨다. 술이 오르자 그는 괴춤에서 손수 만든 듯한 단소 한 자루를 꺼내더니 이름도 알 수 없는 곡들을 불어 댔다. 울고 싶을 만큼 애절한 가락이 있는가 하면 저절로 어깻짓이 나는 밝고 아름다운 가락도 있었다. 그중의 한 곡은 그 후 알게 된 잔영산(殘靈山)이 아니었던가 싶다.
둘은 그날 거기서 한잠 쓰러져 자고 해 질 무렵에야 산을 내려왔다.
“너희 집안엔 풍류가 있지. 내가 어렸을 적에 가끔 천전(川前) 형님이 가객들을 청해 창을 들으시던 게 기억나…….”
천전은 내 진외가였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내가 약간 감격스럽게 종갑 씨 얘기를 했더니 형은 냉랭하게 말했다.
“그 짓으로 그 많은 논밭 다 날렸는데 그 정도 멋쯤이야 못 부릴라구.”
그러나 종갑 씨와 본격적으로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은 그 이듬해 내가 고향에 돌아와 건달로 지내게 되면서부터였다.
먼저 상세히 알게 된 것은 그의 전력이었다. 이미 그 유산(遊山) 이후 나는 왠지 그에 대한 고향의 해석에 의심을 품어 왔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입을 통해 들어 보아도 별로 새로운 것은 없었다.
원래 종갑 씨의 집안은 언덕 위의 고가(古家) 중 하나로 몇 백 석추수는 실했다고 한다. 종갑 씨도 어렸을 적에는 인물 좋고 똑똑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그 단적인 예가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도 당시 서울의 명문이던 양정 중학교에 당당하게 입학한 이력이었다.
그러나 중학교 6학년 때부터 종갑 씨는 조금씩 이상해졌다. 공부를 게을리하고 어린 나이로 기방 출입까지 시작했다. 거곡 어른이 인근에 배메기로 갈라 준 암소 백여 마리를 전부 송아지로 바꾸어 머릿수만 채워 놓고 그 차액으로 기생들과 놀아나기 시작한 것이 겨우 열아흡 살 때의 일이었다.
그 때문에 결국 그는 중학교를 졸업 못 하고 4학년 때 완고한 부친에게 서울에서 끌려 내려와 이듬해 결혼했다 그 뒤 스물셋에 거곡 어른이 돌아가실 때까지 잠잠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한번 가장이 되자 옛 행실이 되살아났다. 상복을 벗기도 전에 논 스무 마지기를 팔아 나선 것을 선두로 그는 5년을 넘기기도 전에 수십 마지기 전답에 고가(古家)까지 날렸다.
일이 그쯤 되자 그의 노모는 화병으로 눈을 감고 아내는 어린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재물을 무겁게 여긴 거곡 어른이 살림밖에 볼 것 없는 집안에서 데려온 며느리였다. 당시만 해도 여자 쪽에서 먼저 이혼을 요구하는 것은 생각조차 못 할 때였는데도, 그녀는 아무런 주저 없이 이혼을 요구하며 떠났다.
그 뒤 종갑 씨에게는 꼭 한 번 정상적인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전쟁 때문에 한몫 본 처족과 화해한 그가 촉탁이나마 군청 서기로 일한 때가 그랬다. 그 얼마간 그는 다시 돌아온 처자와 함께 평범한 가정으로 조용히 보냈다.
그러나 채 1년도 안 돼 그는 거액의 공금을 빼돌려 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이 처자와의 마지막이자 결혼 생활의 마지막이었다. 1년 후 그는 여전히 거지와 다름없는 꼴로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 뒤 20년 이미 말한 것과 같은 세월을 보냈다.
그에게 한 가지 독특한 게 있다면 후회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배움이나 외모에 비해 그는 분명 더할 나위 없이 영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도무지 그의 표정에는 불행이나 비참의 그늘이 없었다. 오히려 더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평온과 자족의 기색이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그처럼 고향을 떠나 떠도는가 하는 것은 내 오랜 의문이었다. 내가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 물었을 때에야 그는 마지못한 듯 대답했다.
“옥선(玉仙)이를 찾아서…….”
나도 그때는 그 여자에 관해 들은 것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종갑 씨가 결혼 전에 동거한 적이 있는 기생이었다.
“아, 함께 사신 적이 있다던 그 기생 말입니까?”
나는 무심코 그렇게 반문했다. 그러나 종갑 씨의 반응은 의외로 강렬했다.
“그래, 기생이지. 그러나 네가 알고 있는 지금의 그 화냥 잡것들은 아니야. 내 옥선이는 이조 명기(名妓)의 전통을 이어받은 마지막 기생이야.”
“이조 명기의 전통?”
그러자 그는 열렬한 어조로 말했다.
“너희들은 몰라. 이조의 기생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그녀들은 그 시대의 정화(精華)였어. 가장 지적으로 우월하고 예술적으로 세련되었으며, 동시에 여성들 중 유일하게 사회에 참여하고 있었지.
다른 여자들이 무지와 암흑 속에서 가(家)라는 것에 함몰돼 있는 동안에도 그들은 자기로서 깨어 있었으며 부단히 연마하고 성취해 나갔지.
그녀들은 정신적인 귀족이었어. 어쩌면 우리 양반들보다 더욱, 화랑의 풍류가 우리 남자들에 의해 저열한 탐락(貪樂)이나 천민들의 기예로 전락해 가는 동안에도 그녀들은 그 본질적인 순수성을 보존해 왔어.
내 옥선이는 바로 그런 기생이었어. 생각해 봐 그런 여자들이 부어 주는 술이라면 인생을 바쳐 마신들 무슨 후회가 있겠어?”
그리고 그날을 시작으로 그는 술만 취하면 내게 옥선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삼현육각(三絃六角) 우리 옥선이가 뛰어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만, 특히 가야금이 일품이었지. 그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색이 그녀 손끝에서 조화를 부릴 때면 그대로 선경(仙境)을 헤매는 기분이었어.
그녀가 스스로 취해 우조(羽調) 가락 도드리를 퉁기면 원곡 보허자(步虛子) 를 채집했다는 명인(伶人)이 살아온다 해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내 옥선이의 창(唱)도 더할 나위 없었어. 그녀가 계면조로 뽑는 옥중가는 여름밤에 서리가 치고, 기러기를 날게 할 만큼 미려 청고하고 애원 처절했어. 그녀의 끓는 목은 날카로운 비수가 번득이는 것 같았고, 방울목은 옥반에 구슬이 구르는 것 같았지. 파성(破聲)을 내면 징소리가 깨어지는 것 같고 귀곡성(鬼哭臀)을 내면 수천수만의 귀신이 흐느끼는 것처럼 들렸어…….”
“그녀의 살풀이춤 한 사위를 네게 보일 수 있다면…… 춤을 추는지 머물러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요히 움직이다가 갑자기 우쭐거리며 앞으로 나가고, 변화 있게 돌고, 물러나며…….
온몸으로 말을 하지. 그 신비스럽고 환상적인 선, 모든 동작이 끝난 후에도 남는 황홀한 여운…….
그러나 그녀의 진정한 무기(舞技) 는 역시 춘앵전(春鶯囀)에 있었지. 고운 화관에 노랑 앵삼을 입고 평조회상(乎調會相)에 맞추어 느릿느릿 추어 가면 그야말로 봄날 버들가지에서 지저귀는 꾀꼬리 같았어. 그녀는 나만을 위해 춘앵전을 출 때도 화문석 위가 아니면 추지 않았어…….”
그 무렵 나는 국악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처지였지만 그런 종갑 씨의 얘기에는 어딘가 허구와 과장의 냄새가 짙게 풍겼다. 어떻게 지금 같은 세상에 그런 여자가 이름 없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 그 어느 기예(技藝) 하나만으로 무형 문화재가 된 이들에게서조차 종갑 씨가 묘사한 경지를 나는 보지 못했다.
내 이런 의문에 대해 종갑 씨는 언젠가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녀의 정절 때문이지. 그녀는 오직 나만을 원했을 뿐, 세상의 이름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까.”
그러고는 비로소 피상적으로만 알려져 있던 옥선이라는 여인과의 인연을 얘기해 주었다.
“내가 그녀와 만난 것은 양정 중학교 3학년 때였어. 1년을 쫓아다닌 끝에 나는 그녀를 몸담고 있던 송죽관에서 빼내어 올 수 있었지. 그러나 여기서도 아는 것처럼 어렵게 차린 우리들의 살림은 다섯 달도 안 돼 끝장이 나고 나는 서슬 푸른 아버님 기세에 눌려 고향으로 끌려오는 신세가 됐어.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였지. 그새 나는 결혼을 했지만 그녀는 아직도 나를 위해 정절을 지키며 기다리고 있더군. 정말 감격적인 재회였어. 그 뒤 우리는 5년 가까이 함께 살았지. 산 좋고 물 밝은 곳을 골라 가며 춤과 노래 속에 흘려보낸 꿈 같은 세월이었어. 내 단소도 그때 그녀에게서 배운 거야. 어쩌면 내 인생은 그 5년이 전부일지도 몰라…….
그런데 그럭저럭 견뎌 냈던 돈이 떨어졌어. 아버님께 물려받은 땅 가운데 쓸 만한 땅은 그새 다 없어진 데다 토지개혁 풍문으로 남은 것도 값이 말이 아니었지. 나중에는 그녀의 금비녀며 가락지까지 잡히기 시작했어. 나는 점점 수심에 잠기는 그녀를 보며 결심했지. 그녀를 위해 떠나야 하리라고.
고향에 돌아와 보니 아무것도 없더구먼. 망연자실 고향에서 세월을 보내는 중에 6·25가 터졌어. 그리고 그 혼란 중에 나는 그만 옥선이를 잃어버린 거야. 전쟁이 끝나고 처가 덕에 얼마간 목돈을 쥔 나는 다시 옥선이를 찾아 나섰지. 1년 가까이나 방방곡곡 있을 만한 곳은 다 돌아보았지만 끝내 행방을 알 수가 없었어.
전쟁 통에 혹시, 할른지도 모르지만, 그럴 리는 절대로 없어. 옥선이는 나를 두고는 절대로 죽을 수 없는 여자야. 분명히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야. 우리는 반드시 만나게 될 거야.
작년, 재작년으로 전라도 지방까지 다 돌았어. 이제 남은 곳은 이 땅, 경상도뿐이야. 가까워서 쉽게 만나질 것 같아 남겨 두었던 땅이지. 이번에 다시 한 번 나서면 나는 반드시 옥선이를 만날 것 같아…….”
이미 50에 가까운 중년 남자의 순애보치고는 너무도 감상적이이면서 또한 그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가 그녀를 찾아 고향을 떠나기 시작한 지 20년이 가까울 때였다
그런데 그 뒤 고향을 떠나 도회로 돌아온 나는 다시 한 번 종갑 씨를 만났다.
어느 핸가 D시에 볼일이 있어 내려갔다가 도심 부근의 다방에서 우연히 종갑 씨와 마주쳤다. 그는 몇 년 전 고향에서보다 한결 늙고 지친 표정이었다. 입성도 궁색이 완연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었다.
“이제 옥선이에게 거진 가까워진 것 같애. 곧 만나도록 돼 있어.”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나는 약간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못 미덥기도 해서 물어보았다.
“무슨 소식이라도 들으셨습니까?”
그러자 그는 더욱 희망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소식 정도가 아니야. 바로 옥선이의 제자를 만났어.”
“뭐하는 여잔데요?”
“바로 이 건물 5층에서 고전무용학원을 열고 있는 여자야. 지금 그 여자가 사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어. 빠르면 오늘내일 중이라도 만나게 될지 몰라.”
“잘…… 됐군요.”
나는 어딘가 미심쩍은 기분으로 더듬게 됐다.
“포기하지 않고 쫓아다닌 보람이 있었다고 할까.”
“하지만 지금도 기다리고 있을까요? 이미 50이 넘었을 텐데…….”
“물론이지.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반드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어디 산수 좋은 곳에 조용히 숨어서…… 어쩌면 내가 얼굴도 못 본 내 아들을 기르면서 말이야…….”
“정말 꼭 만나시기를 빌겠습니다.”
“틀림 없대두.”
내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말로 확신하고 있다는 포정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어조에 풀이 죽으면서 더듬거렸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 너, 돈…… 가진 게 있니?”
나도 그를 만난 순간 이미 약간은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입으로 내가 미리 짐작했던 돈 얘기를 듣고 보니 왠지 원인 모를 실망이 느껴졌다
“많이는 없습니다.”
“오천 원만 다오. 급히 쓸 데가 있어서…… 혹 이번에 옥선이를 못 만나더라도 암포에 가서 갚으마.”
“아니, 그냥 쓰십쇼.”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돈을 받은 그는 무슨 긴한 약속이라도 생각났다는 듯 서둘러 일어섰다. 어쩌면 몇 끼를 걸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때문에 다시 그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카운터에서 치르는 종갑 씨의 찻값이었다. 분명 나와 둘이 마신 것뿐인데, 내놓은 오천 원짜리의 거스름은 천 원짜리 한 장과 동전 몇 개였다. 그가 다방 밖으로 나간 후에 나는 종업원 아가씨에게 물어보았다.
“방금 나간 사람 찻값이 왜 그리 많죠?”
“외상값이에요.”
“잘 아는 분이오?”
“그냥 두 달쯤 전서부터 단골이에요. 처음에는 씀씀이도 좋고 차림도 괜찮았는데 요즘 뭐가 잘 안되는가 봐요.”
“하는 일이 뭐람디까?”
“자기는 요 위 무용학원에 있다던데 그런 것 같지도 않대요. 한 번은 차 배달을 가 보니까, 거기 있기는 해도 원장 태도가 여간 쌀쌀맞은 게 아녔어요. 최근에는 거기보다 우리 다방에 더 많이 계셨어요. 누굴 기다린다고 했지만 그가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은 선생님이 처음인걸요.”
그 말을 들은 나는 약간 허전해졌다. 내가 무엇인가 속았다는 것보다는 어쩌면 그가 영영 옥선이라는 여인을 만나지 못하리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과연 그는 그해에도 몇 달 후 결국은 거지꼴로 고향에 돌아왔다는 것이 내가 들은 후문이었다.
“형님, 아까부터 무얼 그리 골똘하게 생각하세요?”
영섭이가 불쑥 술잔을 내밀며 팔을 건드리는 바람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음, 그 여자 옥선이를 생각했다.”
“옥선이? 그 여자를 왜?”
그렇게 문는 영섭의 표정은 옥선이에 대한 고향의 일반적인 지식밖에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아직 구제(舊制) 중학교도 졸업 못한 종갑 씨와 동거한 적이 있는 기생, 그 집의 탄탄한 살림을 거덜 낸 여자 따위.
약간 감상적이 된 나는 앞뒤 없이 옥선이의 얘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가얏고를, 창(唱) 을, 살풀이춤을, 춘앵전(春鶯嚼)을, 그리고 종 씨와의 사랑을.
그런데 얘기를 듣고 있는 영섭은 내 얘기가 얼마 진행되기도 전에 쿡쿡 웃음을 흘렸다. 술이 오른 중에도 무언가 이상한 내막이 있는 것 같았다.
“왜 웃니? 너 그 여자 알아?”
그러자 녀석은 완연히 드러내 놓고 웃어 젖혔다.
“형님은 속고 계셨어요.”
“뭘?”
“그 옥선이란 여자 말예요. 형님이 말한 그런 여자는 이 세상에 있은 적이 없어요. 실제의 옥선이라는 여자는 이곳의 일반적인 소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네가 어떻게 알아?”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요. 새로 온 군(郡) 산업과장이 종갑 씨와 중학 동창이죠. 옥선이도 잘 알아요, 후문까지도.”
“그저 흔한 창기였대요. 두 번째 만나 동거하다 종갑 씨가 돈이 떨어지자 헌신짝 버리듯 도망간 여자예요. 노래도 춤도 모두 종갑 씨가 지어낸 거조.”
“그래 지금도 살아 있다든?”
“아뇨. 어느 포목상의 첩이 되었다가 산욕(産褥)으로 죽었대요. 그것도 벌써 20여 년 전에.”
“종갑 씨도 그걸 알고 있었나?”
“물론이죠. 다시 돈을 마련한 종갑 씨가 그녀를 찾아갔을 때, 그 포목상이 무덤까지 일러 주었다니까요. 바로 시청 공금을 빼돌려 집을 나간 그해에.”
“그런데 왜…….”
나는 종갑 씨가 무엇 때문에 이미 죽은 줄 알면서도 그렇게 열렬히 그녀를 찾아 헤매었는가를 물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물음을 끝맺기도 전에 문득 떠오르는 답이 있었다.
어쩌면 종갑 씨가 그토록 열렬히 찾아 헤맨 것은 옥선이가 아니라 그녀를 통해 언뜻 접하였던 이조 풍류의 잔영(殘影)이 아니었을는지. 그리하여 스러져 가야 할 것이기에 더 아름다운 그것이 알지 못할 향수로 그 고독한 영혼을 일생 동안 내몰았던 것이나 아니었던지 .
(1980년)
2016년 11월 28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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