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토문에서 진실한 믿음으로 발심(發心)한 후, 마음은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듯 가벼웠다. 그 때부터 참으로 신기하게도 믿음과 이해는 가속도가 붙은 것처럼 점점 깊고 넓어졌다. 문득 길을 결정하지 못하고 헤메였던 지난 출가생활이 번뜩 스쳐갔다. 돌이켜 보니 무상한 시간의 흐름에 밀려 어느 덧 출가 햇수도 7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버렸다. 그런데 겉 모습으로는 갓 출가했을 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마음은 혁명적이라 할만한 변화를 실감하면서 정진하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였다. "스스로 깨달아 성불해야한다"고 가르쳤고, 자신도 반드시 그러하리라 다짐했던 내가 정토문으로 회심(回心)하여 깊은 믿음을 얻었으니 출가시절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뒤늦게 깨달은 오직 종교적 신념이었다.
사실 내가 지난 날 스스로 깨달아 성불에 이르겠다고 발심(發心)했던 것은 자신의 업력을 헤아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실성이 결여된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토문으로 회심한 이 마음은 나의 업력과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부처님의 지혜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일으킨 결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진실한 믿음으로 정토문의 도리를 이해하고 발심한 것이다. 뚜렷한 방향과 목표를 정한 후에 바라보는 서쪽 하늘은 맑고 아름답기까지 하였다. 자연은 그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따가운 봄볕은 자비광명이요, 신록과 들풀이며 꽃들은 정토를 바라보는듯 했다. 마음은 어떤 난관이 닥쳐와도 물러섬없이 정진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으로 가득했다.
나는 수행문에서 진실한 믿음으로 발심한 이 마음이 정진과 삶에 얼마나 큰 에너지를 부여하는가는 체험하지 않으면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되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용수대사가 물러섬없는 지위(不退轉地)에 오르기를 그토록 강조하고, 원효성사가 고구정령 발심에 대해 말씀하신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참으로 조사(祖師)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다시는 그 뜻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지난 날 스스로 진실한 믿음으로 발심하지 못했으면서도 신도들에게 발심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 일들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진실하지 못했던 점을 참회하면서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무한한 지혜를 베푸신 정토문의 조사 분들을 향해 수십 번 경배하였다.
나는 출가한지 7년이 흘러서야 겨우 발심한 것이 부끄럽고 한심스럽기까지 했지만, 그나마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왜냐하면 여지껏 끝없는 번뇌에 시달리면서도 그 돈오돈수(頓悟頓修)에 매달려 있었더라면 이런 환희심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말로만 깨달음을 말하는 위선자의 행위가 계속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정토문으로 회심하여 발심하고 위선자의 탈을 벗어버린 것도 번뇌와 죄악이 깊고 무거운 나의 뜻은 아닐 것이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적은 선근복덕으로는 정토문에 들어오기 어렵다" 하셨으니, 그렇다면 정토문으로 들어온 이 공덕은 순전히 나의 부모님으로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치가 이러하니 세상에 정토문을 활짝 열어 보이는 일, 이것은 떳떳하고 진실한 출가생활이요,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이라 굳게 믿었다. 나는 의지와 신념으로 충만하여 원효성사의 <기신론소>와 <정토삼부경> 독경, 그리고 염불정진으로 여념이 없는 나날을 보냈다.
하안거(夏安居) 결제가 얼마남지 않은 어느 날, 그 곳과 인연있는 스님들 그리고 잠시 머물던 도반들이 모여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산방야담(山房野談)이었다. 그런데 한 스님이 조심스럽게 말하기를 "어젯 밤에 무슨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더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스님들도 "맞아, 차소리가 들렸어" 라고 아는듯이 말하였다.
이런 저런 말을 주고받다가, 전에 살던 스님이 말하기를 "한 때는 새벽이면 누군가가 마당에서 목탁을 치고 다녀서 나와보면 아무도 없더라"라고 하였다.
급기야는 내 옆방에서 머물던 스님이 "사실 나는 밤마다 가위에 눌려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면서 "다른 스님도 전에 그 방에서 그런 경우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런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윤회, 귀신, 빙의(憑依) 등 잡다한 화제 거리가 오르고, 그 동네 사람들에게서 전해오는 괴담들까지도 등장하였다. 나는 "열길 물속은 알아도 세치 가슴속은 알기 어렵다"는 속담을 떠 올리며, 어이없다는 생각으로 듣고만 있었다.
이런 대화가 있은 다음 날 새벽부터는 한 스님이 도량석 시간에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큰 소리로 읊어서 함석으로 된 가건물이 울릴 정도였다. 그 스님은 언젠가 내게 훌륭한 스님으로부터 신묘장구대다라니의 위력을 전수받았다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나는 사실 저렇게 큰소리로 읊는 것이 다라니의 위력을 믿고 귀신을 쫓아내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두려움을 떨쳐버리고자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나는 며칠 전 스님들의 대화들을 되새겨 보았지만 진진하게 토론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진실한 믿음으로 발심했을 뿐 아니라, 전에 다툰 일이 떠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못내 이런 생각을 내 뱉고 있었다. “참선도 공(空)에 대한 투철한 이해로 발심하지 않으면 깨달음은 요원한 희망일 뿐입니다. 참선하는 자가 유(有)에 머물러 윤회를 주장하는 것은 바로 그 증거입니다. 많은 대중이 선호하는 신묘장구대다라니는 그 위력이 위대하기 때문에 업장을 소멸하는 데는 효력이 있겠지만,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정토를 염원하는 "나무아미타불" 외의 다른 염불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는 세계관이나 인생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날이 밝고, 또 하루 하루가 쌓여 하안거 결제일에 다다르니 스님들은 선방으로, 대학으로, 자신이 정한 길로 떠나갔다. 그런데 얼마 동안 머물기로 약속했던 스님들도 마음을 돌려 떠나갔는데, 아무래도 귀신이나 영가들이 떠도는 장소라고 의심한 영향이 있는듯 싶었다. 결국 들리는 것은 새소리 바람소리 길을 지나는 자동차 소리 뿐인 나날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나는 외로울 것도 없이 마음을 가다듬고 독경과 염불로 매진하였다.
봄과 여름이 맞닿는 계절이라 날마다 짙은 안개가 자욱하던 어느 날 밤이었다. 뒷산 어두운 숲에서는 참으로 처량한 새울음이 그칠 줄 모르고 울어댔는데,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나는 저 새가 바로 두견새라고 직감하였다. 이런 저런 생각에 한밤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밖에서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는듯 했다. 나는 문득 "드디어 올 놈이 왔구나"하는 생각으로 "아미타불"을 염하면서 조심스레 문을 열고, 긴 대(竹) 막대기를 들고 서서히 마당으로 나갔다. 이른 새벽, 안개로 뒤덮인 마당은 적막하고, 언덕 위 스산한 바람결에 대나무잎 부딪치는 소리 뿐 아무 것도 없었다. 주위를 응시하며 마당를 몇 바퀴 돌다가 모퉁이에서 두견새가 울던 숲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 또 차가 "부웅...."하면서 들어오는듯 하여 마당으로 나왔으나 흔적이 없었다. 그래서 법당 계단에 앉아 들리는 모든 소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차소리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았다. 큰길에 지나가는 차 울림이 숲과 언덕 사이로 뻗은 도로를 따라 절 마당까지 올라와 빙빙 돌고 있었던 것이다. 지형적인 조건, 가건물, 빈집의 영향으로 소리는 크고 오래 머물렀다. 일종의 공명(共鳴)현상 같은 것이었다. 날이 밝으면서는 많은 소리들이 교차하고 안개가 거친 때문에 그런 현상은 사라져버렸다. 며칠 동안의 관찰로 새벽에 울리던 목탁 소리도 역시 저 건너 편 암자의 도량석 울림이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동네 노보살님이 "여기는 옛부터 귀밝은 곳이라고 전해온다"는 말을 듣고, 안개낀 새벽에 찾아온다는 달갑지 않은 불청객의 수사는 일단락되었다.
나는 다시, 밤마다 가위에 눌린다는 방의 정체를 밝히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 방으로 잠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그 방은 유리 창문을 바르지 않해서 낮에는 숲이 보이는 정겨운 광경이었지만, 밤에는 썩 좋지 않은 모습이었다. 더욱이 안개가 자욱하거나, 비오는 날 밤이면 두견새가 울음짖고, 그것도 바로 창 밖의 정면 그 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일주일이나 잠을 자는 동안 나에게 가위는 다가오지 않했다. 물론 나는 매일 그 방에서 독경과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쉬지 않했다. 가위란 잠을 자다가 꿈을 꾸는 가운데 이상한 현상들을 접하거나, 눌임을 당해 놀라거나, 소리를 지르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것은 대개 환경적, 육체적, 정신적인 영향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나타난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영가의 작란(作亂) 혹은 외부의 영향으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나의 이러한 모든 실험은 오직 믿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내가 정토문을 선택하여 정진하면서도 이런 부수적인 일들에 관심을 갖고 관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바른 믿음을 얻기 전에는 전통적인 관습, 신비주의, 귀신, 영가의 장애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바라보고, 진실한 믿음과 발심의 위력을 증명해 보이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모든 방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경우가 비일비재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도들를 탓할 것이 아니라, 출가 수행자가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더욱 안타가운 일이었다.
나는 과학자나 철학자가 아니라, 믿음을 바탕으로 사는 신앙인이요, 수행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어떤 지식인보다 합리적인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였다. 그것은 과학이나 세간적 철학을 뛰어넘는 부처님의 지혜를 진실로 믿고 발심한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사실 오로지 믿음으로 발심한 이후에는 불교 내부에서 의견이 분분한 윤회, 영가의 장애, 구병시식, 신장, 귀신, 사리, 오매일여, 몽중일여, 돈오돈수의 문제 등에 별 관심이 없었다. 정신적 물리적 모든 현상은 불법(佛法)인 인과(因果)와 연기법(緣起法) 안에서 작용하는 것이며, 내가 정토를 염원하여 명호를 부르고 정토의 경계를 관하는 것도 철저히 부처님의 지혜를 믿고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일심으로 염불하면 반드시 감응이 따른다는 믿음으로 발심한 후, 그 위력은 주변에서 스스로도 놀랄만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나는 자비광명에 대한 믿음으로 두려울 것이 없었다. 다만 이 마음을 끊이지 않고 간직할 수 있도록 정진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저 정토의 문을 활짝 여는 날까지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리라 다짐하였다.
첫댓글 08/1
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