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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여 가천대학교 총장이 11일 인천 연수구 가천박물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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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말 총장님을 오랜만에 만났어요. 보통 그 연세이면 추억을 곱씹거나 건강 이야기를 하지 않나요. 그런데 총장님 입에서는 AI, 챗GPT가 가장 많이 나왔어요.”(윤은기 한국협업진흥협회장)
이길여(92) 가천대 총장을 두고 “젊다”고까지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체력·주름·걸음걸이 같은 외연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일수록 “새로움과 내일에 대한 호기심이 진짜 건강 비결”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 총장의 집은 작은 뉴스룸이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늘 신문이 수북이 쌓여 있다. 매일 아침 신문 10여 종을 헤드라인이라도 훑는 게 중요한 일과다. 주요 일간지의 경우 사설 읽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즐겨 보는 TV 프로그램 역시 뉴스다. 지상파 외에 종합편성 채널이 생기면서 “뉴스 하나가 끝나면 채널을 돌려 다른 뉴스를 보는” 시청 패턴이 굳어졌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이 총장이 뉴스 마니아를 자처하는 건 다양한 분야의 이슈에서 메가 트렌드를 파악하고 업무에 적용하려는 목적에서다. 실제 아침 신문에 ‘전기차 시대에 대학은 내연기관을 가르친다’는 기사가 나온 날, 그는 곧장 관련 학과 회의를 소집해 ‘우리는 뭘 가르치는지’ ‘우리는 잘하고 있는지’ 진단해 보라고 지시했다. 좀 더 깊이 있는 주제일 땐 관련 전문가를 초빙해 세미나를 하기도 한다.
미래를 보고 일을 벌인 대표적 사례가 가천대 통합이다. 1998년 경원대를 인수하고 2000년 총장에 취임한 그는 가천의대와 가천길대학(전문대)을 통합했고, 경원대와 경원전문대를 합쳤다. 2012년엔 가천의대와 경원대를 통합해 가천대로 일원화했다.
왜 그랬을까. “학령인구라는 말도 없던 20년 전부터 학생 수 감소를 생각했어요. ‘죽기 전에 10대 사학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이루려면 학생 수가 많은 대학, 그리고 의대를 통해 발전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죠.” 방법은 통합뿐이었다.
이 총장(오른쪽)은 고 이어령 교수(왼쪽) 생전에 서로 교유하며 생명철학 등을 공유했다. [사진 가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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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천대는 변화를 멈추지 않았다. 다음은 공대 확대였다. 인공지능(AI), 스마트시티, 차세대반도체, 배터리 등 공학 계열 학과를 신설했다. 이 대학 공학 계열 입학 정원은 2060명(2024 기준)으로 국내 최다다. 2022년엔 창업을 지원하는 ‘코코네스쿨’을 만들어 재학생이 창업하면 학점을 인정하고 졸업시켜주는 제도를 도입했다. 1997년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 경원대는 111개 대학 중 92위로 최하위권이었지만, 2023년 가천대는 27위에 올랐다.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대학 위상의 큰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이 총장을 오래 지켜본 대학 및 병원 관계자들은 “신기할 만큼 미래를 보는 눈이 있다”고 말한다. 가령 김대중 대통령 시절 초고속인터넷 사업이 추진되자 소프트웨어학과를 만들어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AI 붐이 시작될 것으로 보고 2020년 국내 최초 AI학과를 만들었고 AI인문대학도 출범을 앞뒀다. 90대 나이에도 트렌드를 놓치지 않기 위한 꾸준한 학습이 비결이다.
소통과 토론은 이 총장의 또 다른 지식 채널이다. 토요일마다 조카 부부인 이태훈 길병원 의료원장과 최미리 가천대 수석부총장이 이 총장 집을 찾는다. 오후 5시쯤 저녁을 마치고 차 한잔을 나누고 나면 이른바 ‘위켄드 콘퍼런스’가 이어진다. 세 사람이 병원과 학교에 대해 한 주간 중요했던 일, 다음 주 업무 등에 관해 서로 의견을 나누는 자리다. 여기에 이 총장의 미래를 향한 식견이 더해진다.
이런 콘퍼런스가 팬데믹 전까지는 집 밖에서도 있었다. 고 이어령 교수, 김병종(가천대 석좌교수) 화백과의 만남이었다. 김 화백은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생명’으로 통했다”고 회고했다. 이 교수는 생전 ‘생명 자본주의’를 주창하며,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복원함으로써 자연이 경제 활동의 자본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꾸준히 펴 온 인물이다. 김 화백도 ‘생명’이라는 주제로 연작을 선보였다.
“이 총장님도 생명을 받아내는 의사이자 그 생명이 성장하도록 돕는 교육자라는 점에서 다를 바 없죠. 셋이 만나면 생명 철학과 비전을 많이 공유했습니다.” 이 교수가 2019년 암 진단을 받으면서 대화는 더 무르익었다. 생명의 탄생만이 아니라 소멸까지 폭넓게 다뤄졌다. 김 화백은 “호기심 많은 두 어른이다 보니 ‘미래는 어떨 것인가’라는 화두만으로 두세 시간이 흘렀다”고 기억했다. “달변가인 이 교수님이 90% 말씀하셨지만, 총장님도 짧게 의견을 내고 아이디어를 주시곤 했죠. 문학·사학·철학이 통하는 사람끼리의 지식향연, 그 자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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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여’라는 이름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건 언제부터일까.
전국 단위 일간지 기준으로 보면 1998년부터 그의 이름이 나오는 기사 수가 갑자기 많아진다. 이전까지는 길병원 행사를 소개하는 단신 기사에 이름이 한두 번 나오는 정도였다. 하지만 1998년 가천의대를 설립하고, 경원대까지 인수하면서 언론은 이길여라는 이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98년 12월 8일자 중앙일보는 이 총장에 대해 “교육계 진출 4년 만에 거물”이 됐다고 표현했다.
1998년 12월 8일자 중앙일보 지면
의사였던 그가 대학 교육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나이는 66세. 당시 경원대는 이사장의 200억원대 등록금 횡령 등으로 위기에 빠져 있었다. 이 총장은 이 돈을 대신 보전해 주기로 하고 대학을 맡았다.
이후 경원대 등 4개 대학을 통합해 출범한 가천대는 대학가에서도 흔치 않은 혁신 사례로 꼽히며 변신을 거듭해 왔다. 이 총장은 2027년까지 국내 톱10 대학이 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그는 왜 위기 대학을 거액을 들여 인수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20여 년 만에 완전히 다른 대학으로 탈바꿈시켰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