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시에서 두 시간 모자란 시간에 나는 태어났다
시계추가 열 번을 치는 대신
마당의 커다란 오동나무가 무거워진 열매를 떨어뜨렸다
겨울이라고 상상해도 좋다
어쨌든 아버지가 그 날 밤 모자이크처럼 조각난 얼음 밑에서
방심하고 잠든 모래무지를 건져내기도 했으니까
할아버지는 기념식수 대신 못 쓰는 우물을 메웠다
자물쇠로 잠긴 우물, 어린 손자가 빠질까봐 라고 했지만
무엇인가가 우물에서 빠져나올까 봐 두려운 거였다
덤불 속에서 첩자를 피한 적이 있는 할아버지는
용기보다 두려움이 많아졌고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삶을 택했다
멧새들도 습관이 있다
하나의 가지를 정해놓고 매우 정확한 시간에 울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멧새의 울음소리로 하루의 길흉을 점쳤다
내가 태어난 날에는 새가 울지 않았다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 가 할아버지의 점괘였지만
운과 불운은 이미 내 꿈의 질료
달이 뜨지 않는 밤, 그물 무늬의 우물을 들여다보면
횟수도 알 수 없는 자신의 전생이 비쳐 나온다
머나먼 과거에는 코끼리머리를 가진 신이 사람이 되기 위해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버리고
짧고 덧없는 인간의 시간을 택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새의 머리와 뱀의 꼬리를 가진 인간이 태어나도 이상할 건 없다
선택권을 가진 건 우물이 아니라 우물에 비친 얼굴이니까
이미 더럽혀져 있는 나뭇잎 위로 바람이 지나갈 때
나는 구둣발에 밟히는 구름의 숨소리를 듣는다
쪼개지고 쪼개져서 물의 모양을 잃은 수증기가
다시 하늘로 올라갈 때
나는 증발하는 공기를 끈으로 묶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긴 머리카락은 근심스럽게 세상을 가리고
나는 더 이상 너를 원치 않는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조용히 미쳐 가는 것, 그게 일상다반사이다
나 자신을 향해 난 모든 길은 끝없는 의심이 뒤따른다
금호강의 네 줄기 흐름, 나의 꿈은 그 어느 지류로도 돌아오지 못하고
꿈 밖으로 순례를 나선 여자는 강의 잔잔한 물살에도 홀로 멱을 감는다
사랑은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자연스럽게 떼어놓듯
침묵을 깨고
너를 밀치고 나를 밀치고 흘러간다
단지 너여야만 하는 이유를 나만이 모른 채
강물이 강물을 좇듯 구름이 구름을 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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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판식 1973년 경남 함양 출생.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200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밤의 피치카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