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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11월12일(토)흐림
오후에 명상 기도하다. 동출스님에게서 안부 인사 오다. 21일쯤 연락하겠단다. 등현스님 오셔서 공양하고 돌아가시다. 본사에 머물기가 불편하여 봉화 현동에 거처를 마련했다고 한다.
My teacher, Ahjan Chah, said that the real Eightfold Path is two eyes, two nostrils, two ears, a mouth, a tongue and a body. It is the actual life that you live. As you sit and as you walk, you are the Eightfold Path. -Jack Kornfield
나의 스승이신 아잔 차 스님 말씀하시되, 진정한 팔정도란 두 눈, 두 콧구멍, 두 귀, 입과 혀와 몸이라 하셨다. 팔정도란 당신이 살아가는 삶의 실제이다. 당신이 앉고 걷는 그대로가 팔정도이다. -잭 콘필드
2022년11월14일(월)맑음
저녁 강의하다.
2022년11월15일(화)맑음
오전에 경림 스님 오셔서 티베트 불교 강의하다. 점심때 일진스님과 홍보살, 민재거사 와서 함께 공양하다. 차담나누고 불교 이야기 꽃피우다. 3시에 돌아가다.
세속과 승의의 광대한 하얀 두 날개로
백조의 왕은 많은 백조를 앞서가서
선행(善行)과 바람의 힘으로써
승자(勝者)의 공덕 바다로 건너갔다. -월칭 존자의 <입중론>
6지보살(六地菩薩)인 백조 왕은 광대한 도의 체계와 심오한 도의 체계, 즉 이제(二諦)의 도(道)인 ‘광대한 하얀 두 날개’로 오랫동안 쌓아온 자량이라는 ‘바람의 힘’을 받아 ‘승자의 공덕 바다’로 건너갔다. 아라한은 보살6지 현전지에서 자리 위주의 열반에 안주하지 않고 대승으로 전향하여 지혜와 방편을 구사하는 대승 보살의 길에 든다.
2022년11월16일(수)맑음
점심 공양하고 선학산 포행하다. 선학사 대위스님과 덕산사 동조스님을 토요일 점심에 초청하다.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은 共貧과 共生共樂을 말씀하셨다. 백낙정 선생은 赤綠동맹(노동운동과 녹색운동)과 적당한 성장론을 주장하신다.
신유학(성리학)에서 벌어진 理氣 논쟁은 二諦원융으로 해결된다. 불교적 사유방식인 二諦雙運이제쌍운으로 보면 氣가 空하니 理로 돌아가고, 理 역시 空하니 氣로 돌아가서, 리기가 서로 雙運된다. 리기는 互根待對호근대대하며 相補相生상보상생한다. 리기 사이에 선후나 우열이란 차등이 없다. 그런데도 조선의 유학자들은 理가 氣에 앞선다느니, 氣가 理에 앞선다느니 하는 논쟁으로 정치적 파당을 지었다. 사실 리기논쟁은 인도 상키야 Samkhya 학파의 푸루샤(原神, Purusha)와 프라크리티(原質, Prakriti)의 중국적 변형에 불과하다. 리기논쟁으로 긴 세월 동안 정력을 소모한 조선 선비들은 얼마나 偏枯편고했으며 고지식하였던가?
2022년11월17일(목)흐림
①Buddha-nature is the luminous, ceaseless, and primordial nature
of mind. “Uncompounded” means that it has not been fabricated or
created by various causes and conditions. It does not dwell as a
separate truly existing entity. It did not begin and therefore it cannot
cease. It is simply the ultimate nature of phenomena.
~Shechen Rabjam Rinpoche. The Great Medicine That Conquers Clinging to the Notion of Reality.
불성-부처의 성품은 끊임없이 빛나는 마음의 본래적 성품이다. ‘뒤섞이지 않음, 조건 지워진 것이 아님(無爲)’이란 조작된 것이 아니며,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에 말미암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전체와 분리된 채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불성은 (어느 날 문득 어떤 이유로) 시작된 것이 아니기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건 다만 현상의 궁극적 성품일 뿐이다.
-세첸 랍잠 린포체 <실재에 대한 관념의 집착을 정복하는 위대한 처방 약>에서
②KHENPO TSULTRIM GYAMTSO
AGING, ILLNESS AND SAMSARA
As long as you don’t realize there is no aging in reality
The suffering of aging is inconceivably hard
If, when you’re old, you don’t remember there’s a Dharma so uplifting
That’s karmic actions from before, just catching up with you
As long as you don’t realize there is no illness in reality
The suffering of illness is inconceivably hard
And since you never know when some illness just might come and strike you down
The thing to do is practice Dharma; that is what will heal the pain
The nature of samsara is not based anywhere
You look at it, but what you find is, you cannot find it
If realized, surprise, surprise, it turns out it's nirvana
The nature of everything is the emptiness
Yogis and yoginis never try to cling to this.
켄포 쑬트림 갸쵸 린포체의 법문 <늙음, 병듦과 윤회>
사실상 늙음이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늙음이란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다.
당신이 늙었을 때 정신을 고양 시켜주는 법이 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전부터 이어져 온 업력이 당신의 멱살을 잡은 것이다.
사실상 병듦이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병듦의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다. 언제 병이 다가와 당신을 때려눕힐지 알지 못하기에, 해야 할 일은 법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고통을 치유할 수 있다.
윤회의 본성은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당신이 윤회를 살펴보면 당신이 발견하는 것은 윤회의 실체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깨닫고 보면 놀라고 놀랄 일이다. 윤회란 곧 열반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에 말이다.
모든 것의 본성은 공성이다. 요기와 요기니는 이것에도 집착하려 하지 말라.
③When a wintry wind strikes and stirs up water,
Though soft, it takes the form of stone.
When concepts attempt to disturb mind’s nature, where ignorance cannot take form,
Appearances become very dense and solid.
From: A Song for the King by the Indian sage Saraha
겨울바람이 물을 때려 흔들 때면
아무리 부드럽게 때린다 해도 돌처럼 느껴진다.
생각이 마음의 본성을 흔들 때면, 무명이 비록 형체가 없지만
현상(色相)은 빽빽해지면서(密度) 딱딱해진다(고체화).
-인도 성자 ‘사라하’가 왕에게 주는 노래
<역사는 엘리트와 카운터-엘리트들의 싸움>을 비판한다.
①네이버 블로그 <별소리>의 블로거가
엄상익 변호사의 글 <파도를 넘는 대통령>을 복사해서 올려놓고 자기의 의견을 덧붙여
<역사는 엘리트와 카운터 엘리트들의 싸움>란 제목을 달아놓았다.
원문 <역사는 엘리트 elite와 카운터-엘리트 counter-elite 들의 싸움>
한밤중에 무심이 텔레비전을 틀었다. 명사 한 분이 기자와 대담하고 있었다. 진행자가 말했다. “조금 전 저의 방송국 기자만 대통령의 전용 비행기에 안 태워 준 것에 대해 한 마디로 정확히 지적해주셨습니다.”
“그렇죠. 밴댕이 소갈딱지죠. 안 태워주면 다른 비행기 타고 가서 취재하세요.”
기자는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방송국의 보도가 불쾌했더라도 속 좁은 대통령실의 행동인 것 같았다. 명사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무능한 건 박근혜를 닮았고요. 재주 피우는 건 이명박을 닮고 기괴함은 전두환을 닮았어요. 그래도 이명박의 경우는 아는 건설사에 이익을 줄 목적이라도 4대강 개발이라는 등 나름대로 명분을 붙였어요. 전두환은 운동권이 돌 던지고 화염병 던지면 너희들 잡아넣는다고 반응이라도 보였어요. 박근혜는 그래도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대통령이 되려고 했어요. 그런데 윤석열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오직 검사가 되기 위해 고시 공부를 했어요. 검찰총장이 돼서 한 가족을 도륙을 내는 걸 보세요. 그냥 대통령이 되고 싶었지 자기가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지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대통령이죠.”
그는 작심하고 방송에 나온 것 같았다. 그의 말이 구체화 되었다.
“용산경찰서의 직원들이 대통령 경호에 집중하느라고 이태원 참사에 신경을 쓰지 못한 겁니다. 그런데도 모든 책임을 경찰에 뒤집어씌우고 있어요. 야당 대표실이 압수수색을 당하고 있는데도 자기는 뉴스를 보고 알았다는 거예요. 그게 말이 됩니까? 정적을 사법기구를 통해 제거하는 경우가 가장 비열하고 나쁜 것으로 정치학 교과서에도 나와 있어요.”
그의 말은 거의 저주에 가까운 것 같았다. 조금 이상했다. 평소에 그 명사의 비판하는 태도는 상당히 이성적이고 지적이었다. 무엇 하나를 말할 때도 근거를 제시하면서 사람들이 납득 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서는 감정의 수위가 높은 것 같았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한 기억이 떠올랐다. 윤석열 대통령이 심복을 통해 그 사회 명사를 제거하려 했던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증오와 분노의 수위를 조절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 또 다른 시사프로를 본 적이 있다. 정치구단이라고 칭하는 전직 국정원장이 나와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지고 총리를 비롯해 내각이 총사퇴해야 합니다.”
인터넷에서는 그를 잡아넣어야 나라가 바로 된다는 글이 떠돌기도 했다.
검사 출신 대통령은 적들이 많은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직업적 운명일지도 모른다. 독침을 맞을 뻔했던 그들은 정권 증오 세력이 됐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노인이 된 나 같은 사람은 역사를 엘리트와 카운터 엘리트들의 싸움이라고 본다. 권력을 빼앗긴 반대 정치세력은 어떤 사건이 터지면 그걸 정치 문제화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 어떤 것도 정치화할 수 있다.
광우병 사태 때 이명박 대통령은 무기력했다.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붉은 촛불의 바다를 보고 겁을 먹었다고 고백했다. 그때 반대 정치세력이 쓴 글을 봤었다. 광장에 백만 명만 모이면 정권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선동의 불길을 높이려고 애쓰는 내용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세월호 사고가 터졌다. 반대 세력이 바로 정치 문제화했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대통령은 굳이 대통령이 대책본부로 가서 노란 조끼를 입었어야 했나? 라고 생각하고 그냥 있었다. 오히려 피해를 준다는 의식이었다. 정치적 반대 세력은 각종 의혹을 제기하면서 광장에 사람들을 모았다. 촛불의 바다가 이루어지고 그 물결이 쓰나미가 되어 청와대를 덮쳤다. 대통령은 파면당하고 감옥으로 갔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태원의 참사가 일어났다. 대통령이 다가오는 파도를 무사히 타고 넘을 것인지 아니면 물에 빠져 익사할 것인지 보고 있다. 세상에 먼지가 날리고 진흙탕이 만들어지고 있다. 집요하고 저열한 공격이 난무하고 정권과 상관없는 대중들은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있다. 대통령이 매일 빈소를 찾아다니며 공감하려고 애쓰고 있다. 국가안전 시스템 점검 회의에서 나름대로 대책 방안을 마련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정치권 권력투쟁의 오염이 여과되지 않고 국민을 뒤덮는다. 사람들이 선동에 휩쓸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졌으면 좋겠다. [2022-11-11, 23:42]
②네이버 별소리는 엄상익 변호사의 글을 끌어와 자기 블로그에 올렸다. 다른 사람의 글을 복사해서 자기 블로그에 올린 것은 블로거 본인도 엄상익 변호사의 견해에 동조한다는 의미이다. 이에 원담은 두 사람의 정치적 관점을 비판한다.
<별소리> 블로거는 기독교 신앙을 견지하는 60대 이상의 남성으로 보입니다. 부패한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기독교 지성인입니다. 그런데 정치적 관점은 기독교적 계몽주의자입니다. 자기가 견지하는 기독교 신앙으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부드럽고 유연하며 지성인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유체이탈입니다.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하지 않고 마치 자기가 관조자나 선지자처럼 사회문제를 본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 정치 사회적 문제상황에서 쏙 빠져나가 마치 아무 책임도 없는 것처럼, 기득권 구조에서 자기가 받는 모든 이익에서 초연한 것처럼, 그리고 그걸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며,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입장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이거야말로 현실에 발을 딛지 않고 10센티만큼 공중에 뜬 채 세상 돌아가는 판에 훈수를 두는 일입니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불공평한 상황을 변화시키려 애쓰지 않고, 불평등한 사회현상을 관조하며 조언하는 태도는 결코 책임지는 지성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지성인은 고통받는 사람의 처지를 공감하고 그들을 어떻게 포용하고 치유할까를 마음 아파해야 합니다. 민중의 고통을 즉문즉답처럼 즉시에 말 한두 마디로 해결해준다는 식은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내뱉고 싶은 말이나 해주고 싶은 말에 앞서 자기 가슴이 먼저 아파야 합니다. 남을 위해 내 마음이 아프지 않고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입니까? 자식이 아프면 어머니는 따라서 아파하듯이 우리가 함께 사는 공동체라면 타인의 고통을 아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사는 엘리트와 반-엘리트의 싸움이 아닙니다. 이런 관점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말씀하신 역사는 我와 非我의 투쟁이라 했던 것을 표절한 것입니다. 블로거의 역사관은 엘리트주의입니다. 민주주의 시대의 역사관으로는 시대착오적입니다. 현대는 민중의 자유가 확대해가는 역사이며 인류 공동체의 공존공생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블로거는 자기가 지도자나 된 듯, 공평무사한 정치평론가인 듯, 아니면 구약성서에 나오는 선지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요하고 저열한 공격이라느니, 정권과 상관없는 대중은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있느니’ 하는 문장은 저자의 정치적 입장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는 친-윤석렬 정권, 친-국민의 힘 쪽입니다. 이태원 참사에 따른 원인 구명과 책임소재 규명은 집요하고 저열한 공격이 아니라 국민의 당연한 요구입니다. ‘정권과 상관없는 대중들은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린다’는 문장은 대중의 정치적 능력을 아주 깔아뭉게는 비민주적 발상입니다. 대중은 항상 정권에 상관합니다. 아니 당연히 정권에 상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국가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민주주의 기본입니다. ‘대중을 선동한다, 대중이 선동에 휩쓸린다, 권력투쟁의 오염이라느니 객관적으로 보는 마음의 눈’이라느니 하는 문장을 살펴봅시다. 대중은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반드시 올바른 방향을 잡고 세상을 이끌어 갑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적 믿음입니다. 대중의 집단지성을 믿는다는 것이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 있다는 기본 말입니다. 대중은 선동당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거짓 정보와 가짜 뉴스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여도 대중은 마침내 진실을 찾아갑니다. 여야 양당 간의 충돌과 불화는 권력투쟁이 아니라 헌법이 보장하는 정당한 정치 행위입니다. 여야 간의 정치적 합의 과정을 권력투쟁이라고 불순하게 본다면 정당정치가 무슨 소용이며 의회민주주의가 무슨 소용이 있게 됩니까? 여야는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확보하고 빈부격차를 줄여 보편적 복지를 위해 싸우는 게 그 존재 이유입니다.
우리가 보수나 진보 어느 한쪽도, 빈자나 부자 어느 한쪽도 편들지 않는 것을 마치 정의롭고, 공평무사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태도는 냉담한 관조자, 무책임한 방관자일 뿐입니다. 진보나 보수, 좌파와 우파, 빈부와 관계없이, 우리 지성인은 사회에서 더 적게 혜택받는 사람, 더 고통받는 사람, 눈에 잘 안 띄는 곳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편에 서야 합니다. 나의 편함과 이익과 나의 즐거움을 타인의 불편함과 고통과 맞바꾸려는 마음 씀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만큼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말과 마음과 행동으로 그들의 삶에 이바지하면서, 대중의 상처받은 마음, 삼독에 물든 마음, 번뇌에 물든 마음을 부처님 마음(하느님 마음)으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그걸 한 생뿐만 아니라 세세생생 하겠다는 것이 바로 보리심의 서원 아니겠습니까? ‘나’에서 벗어나 ‘우리’로 나아가며 공동체의 유대를 생각하는 ‘사회적 마음 챙김’이 필요합니다. 불평등한 사회를 변화시키려 애쓰지는 않고, 불평등한 사회에서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결코 불교적(크리스천 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소위 ‘깨달음’이 욕망 충족 수단으로 쓰일 수도 있다>
소위 ‘깨달은’ 사람이 부와 인기를 얻으면 깨달은 소식을 전하는 효과가 증가할 것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알리는 만큼 세상이 더 맑아지는가, 또는 세상에 고통이 덜어지는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자기 원력대로 행할 뿐이다. 自作自受이다. 행한 대로 거둘 뿐이다. 공성을 깨달았다고 인과법을 벗어나는 건 아니다.
일부 스승은 깨달음을 욕망의 충족 수단으로 이용한다. 그들의 깨달음이 가짜가 아니다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 사실 그들의 깨달음이 진짜처럼 보이는 게 더 문제이다. 일부 스승이 깨달음을 말하면서 깨달은 소식을 전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동기가 순전히 보리심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탐욕에 기인한 것인지 스승 자신은 알 것이다. 아니 그 자신도 모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인데, 그런데도 그들은 번뇌즉 보리, 이사원융, 보살은 욕망을 사용하되 걸리지 않는다는 방편 언어를 구사하면서 비판을 슬쩍 빗겨 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법을 원하는 만큼 전해지지 못하는 이유를 복이 부족하고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출세한 불교계의 유명 인사를 부러워한다. 자신에게 지금보다 부와 인기가 많아지면 포교와 전법에 성공하리라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향기로운 난초가 아무리 깊은 계곡에 피어있더라도 그 향기를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 법이다. 난초는 자기 향기를 맡아줄 사람을 찾으러 다니지 않는다. 오히려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지는 걸 꺼리며, 고이 간직한 향기가 오래가기를 바랄 뿐이다. 空腹高心如餓虎 공복고심여아호-욕심이 높아 배가 고픈 것이 굶주린 호랑이 같다는 경책 말씀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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