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영화 속 잿빛 풍경 전당포
지금 대학생중에 전당포를 경험한, 아니 전당포가 뭐하는 곳인지 아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요.
경제 사정이 어려웠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자주 들락날락했던 곳이 바로 전당포였습니다.
자취나 하숙을 하는 대학생들은 입학선물로 받은 시계 등을 전당포에 맡기고 급한 생활비를 조달했지요.
청춘 남녀들 또한 이 곳에서 곧잘 데이트 비용을 마련하기도 했고, 부도 등 경제적 위기를 맞은 사람들은
금붙이 등을 저당 잡혀 마련한 돈을 재기의 발판으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맡긴 애장품을 언젠가는 되찾아가겠다는 고객들의 다짐은 괜한 소리로 끝나기 일쑤였던 게
저간의 사정입니다. 그런가 하면 고리대금업을 하는 등 전당포에 대한 부정적 인식 또한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담보 없이 소액의 돈을 융통해주는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제도가
도입되면서 전당포 위상이 위축되고 만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급전 마련이 마땅찮은 서민들에게 전당포는 나름대로 금고 역할을 해왔음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전당포가 이탈리아의 한 신부에 의해 1428년 첫선을 보인 이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금융으로
영향력을 발휘해온 것도 같은 맥락에서일 것입니다.
글로벌 경제 위기가 몰아닥치면서 전당포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합니다.
출장 감정을 비롯 사채 대출,온라인 쇼핑몰 운영 등으로 사업 영역이 다양해지고 있으며,'인터넷 전당포'와
고가의 물품만 취급하는 '명품 전당포'까지 성업 중이라는 소식입니다.
하루하루 생활에 쪼들리던 지지리도 가난하던 1960~70년대, 전당포는
서민들의 절절한 사연이 서려 있는 애환의 공간이었습니다.
쌀값을 마련하기 위해 혼수 은비녀를 뽑아온 아내,
밀린 학비를 내라며 장롱 깊숙이 묻어뒀던 금가락지를 꺼내던 어머니,
병원비를 구하려고 입고 있던 양복까지 잡히던 남편….
은행 문턱이 높았던 그 시절, 한 푼이 급해 전당포를 찾은 서민들은
소중한 보물과 눈물을 함께 잡혔습니다.
80년대 과외금지조치가 내려지면서 주머니가 가벼워진 대학생들도
막걸리 한잔에 전당포를 드나들었습니다.
부모님이 매월 보내 주신 돈으로 하숙비도 내고 책도 사지만 직장에 다니던 형이나 누나에게
손을 벌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돈이 다 떨어지면 어김없이 전당포를 찾았습니다.
소니 미니 카세트도 맡기고 세이코 시계도 잡히고 카시오 전자계산기도 전당표로 바뀌었습니다.
돈 생기면 꼭 찾아가겠노라고 번번이 다짐하면서도 기한이 지나 새 주인을 찾아 떠난 물건들도 많았습니다.
개항과 함께 1887년부터 부산을 비롯해 인천, 원산 등지에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전당포가 하나둘 생겨난 이후
전당포는 급전이 필요한 서민들의 탈출구이자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요즘 전당포
"요즘도 전당포가 있어?" 다들 그런 반응이죠.
'1970~80년대에나 있던 게 전당포 아니었나?' 이렇게 생각하죠.
요즘은 신용카드로 대출을 받는 시대잖아요. 그런데 웬걸요. 막상 찾으려 하니까 가는 곳마다
전당포가 있네요. 서울의 종로와 청담동.압구정동은 물론이고 신촌이나 신림 사거리에도 어김없이
'전.당.포'라고 새겨진 간판이 걸려 있습니다.
궁금하네요. 요즘 전당포는 어떤지 말이죠. 갓난애를 업고 온 새댁이 우유값이 없어 가락지를 맡기던 시절은
옛말입니다. 학사주점에서 막걸리를 마신 뒤 돈이 없어 전당포를 찾던 대학생들도 이젠 옛말입니다.
딱하고 애절한 사연들이 줄을 잇던 전당포가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
1970년대 초
▶ 명절에 고향 갈 때 손목시계를 차면 성공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땐 날짜판이 있으면 고급시계였다. 그래서 시계판에 네모로 구멍을 내고 종이를 받쳐서
'17'이란 날짜를 새겨 넣곤 했다. 그럼 그 시계는 1년 내내 '17일'만 표시했다.
'오리엔트'와 '시티즌' 등 수입한 부품으로 만든 국산 조립시계의 전성기였다.
80년대 초
▶ 70년대 초만 해도 몇 달치 월급을 모아야 시계를 샀다. 그런데 전자 시계가 나오면서
가격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결혼 예물로 비로소 시계가 등장했다. '오리엔트 갤럭시' '오메가' '라도' 등의
브랜드가 나오면서 홍콩산 가짜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조악한 수준이라
속일 수도 없었다.
90년대 초
▶ 국민소득 상승과 함께 해외 여행객이 증가했다. 롤렉스 등의 명품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덩달아 모방 제품들이 생겨났다. 롤렉스.불가리.샤넬의 모방 제품은 꽤 고가였다. 전에는 멀리서 봐도
판별이 됐는데 이젠 케이스와 바늘.무게.촉감 등 세심하게 감정해야 할 수준이 됐다.
2000년대
▶ 이젠 '가짜 시장'과 '진짜 시장'이 따로 존재한다. 모방 제품에 대한 명품 제조사의 태도도 달라졌다.
가령 롤렉스 측은 모방 제품에 대한 단속 의뢰를 안 한다. 가짜에 대한 수요층을 진품에 대한 잠재 수요층으로
보기 때문이다. 정교한 가짜 때문에 피해를 보는 전당포도 생겨났다.
◆ 21세기 전당포
700만원짜리 양복 1억원짜리 시계…명품족이 주고객
전당포는 돈 없는 서민들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탈출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수입은 줄어들고,쓸 돈 구할 길은 막막하니 서민으로선 어쩔 도리가 없을 것으로 짐작은 가지만
전당포의 호황 소식이 달갑지 않은 요즘입니다. 좀처럼 회복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경제 사정이
언제쯤 풀릴지 걱정스럽습니다.
역전전당포
김영자
스무 살의 나, 젊음이 너무 뜨거워 역전 전당포로 찾아 갔네
날마다 불덩이가 몸속에서 치솟아 올랐네
아무도 내가 화상 입는 것을 모르고 있어요
공부도 못하던 것들 대학 가서 미팅한다고
나비처럼 날아다닐 때
혼자 앓고 있는 스무 살 저당 잡어 주실래요
나이가 너무 무거워 청춘이 너무 어두워 견딜 수가 없어요
한참 뜸 들이던 전당포 영감은 돋보기를 꺼내들고
스무 살 내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네
값어치는 얼마 안 되지만 맡겨 놓고 가봐 언제 찾아갈 건데
내 스무 살 전당포에 맡겨졌네 젊음이 저당 잡혔네
전당포를 나선 나는 이십대의 오십대 아줌마의
전선으로 기차를 타고 떠났었네
삼십대의 칠십대 할머니처럼
죽음과 마주하며 이승 저승을 여행하고 있었네
마흔을 넘기고서야 역전전당포로 가는 기차를 탔네
역전전당포에는 돋보기로 내 나이를 살펴보던
영감대신 청년이 앉아있네 할아버지 어디 가셨지요
무슨 소리야 내가 수십 년 여기 지키고 있었어
맡겨놓은 내 스무 살 찾으러 왔어요
그때 그 청춘 찾아가고 싶어요
오래전에 유효기간이 끝났어 찾아가지 않아 내가 가졌어
나는 젊음만 저당 잡았거든 영원히 늙지 않는 역전전당포
내 젊음 다시는 찾지 못하네
내상 깊은 스무 살 청춘은 간 곳이 없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역전 전당포 전당포만 남아있네.
신용카드 대중화와 함께 우리 사회가 신용 사회로 접어든 10여년 전부터 가장 '보수적인' 금융 거래인
전당업은 첨단 금융 상품에 밀려 도태되고 말았습니다.
'무이자'와 '빠르게'를 앞세운 저금리의 일본계 자본이 몰려오면서
전당포는 흑백영화 속 잿빛 풍경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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