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 이면지에 빼곡히 적힌 펜션과 민박집 이름들을 하나하나 지워가며 전화를 했습니다.
"이번 주말에 방 있습니까?"
"없어요~~"
몇 개 안 남은 펜션 이름에 또 빨간 줄이 그어집니다.
"이번 주말에 방.....없죠?"
"그럼요. 다 예약 끝났습니다."
3-4개밖에 안 남은 펜션을 보면서 눈앞이 캄캄 해줬습니다.
한 달 전부터 이번 여름휴가는 벌초 겸 부모님 고향이자 저의 고향으로 가기로 하고 숙소도
지인에게 부탁해서 인근에 이름 있는 콘도로 예약을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콘도가
안될 거 같다는 말을 듣고도 느긋한 성격 탓에 펜션이나 민박집 알아보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일주일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2시간째 컴퓨터앞에 앉아 여기저기 펜션들에
전화를 해보고 백여 개에 달하는 펜션과 민박집에 빨간 줄을 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집을 남겨 놓고 있는 시점에서 어젯밤 아내와의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숙소 정하긴 정한 거야? 왜 말을 안 해줘? 콘도 안된다며? 뭐 대책을 있어?"
아내의 다그침에 그만
"걱정하지마~~~~이번 휴가는 내가 다 알아서 한다 그랬잖아~~~~당신 나 못 믿어? 어?"
예기치 못한 저의 큰소리에 아내가 움찔하면서 꼬리를 내립니다. 그러면서 넌지시 말합니다.
"오....자신 있나 보네...알았어 당신을 믿을게요..." 기어들어 가는 아내의 목소리에 마른침을
꼴깍 넘기려는 순간 아내의 뒷말이 이어집니다.
"단.....어떤 차질이라도 있을시에는.....용서하지 않겠어" 순간 아내의 손에 들려 있는
효자손이 번쩍이며 이런 주문이 들리는 듯합니다.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널~~용서하지 않겠어]
컴퓨터 모니터에 무능하고 한심한 40대 아저씨가 문득 비칩니다. 그리고 힘없이 전화기를 돌립니다.
"안녕하세요 혹시...이번 주...주말 방.....없겠죠?"
저의 힘없는 물음에 무릉도원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한마디
"몇명인데요?"
귓가에서 환희의 찬가가 울리고 순식간에 예약을 끝내고 가뿐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수화기를
내려 놓고 깊은 숨을 몰아쉬는데 마음 한구석에 어렴풋이 뭔가가 올라왔습니다.
[방이 왜 있지? 없어야 정상 아닌가? 가장 피크인 이번 주에 주말을 4일 남기고 왜 방이 남아
있을까...뭐 이상한데 아니야? 혹시 사기? 계약금 받고 끝 아니야...아니면 차마 사람들이
묵을 수 없는 그런 꾸리꾸리한 곳?]
숙소를 구한 기쁨도 잠시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정신을 가다듬고 홈페이지에
접속을 했습니다. 홈페이지에 사진들은 그럴싸했습니다. 하지만, 다년간의 경험으로 미뤄
홈피 사진은 절대 믿을게 못된다는 걸 알기에 방문 후기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방문 후기가 한 개도 없었습니다. 달랑 관리자 한마디...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검색 사이트를 다 동원해 봤지만 제가 계약한 리조트는 홈페이지
말고는 다른 정보가 없었습니다. 다만, 일층에 있다는 식당만 간간이 검색이 됐습니다.
계약금이 문제가 아니라 휴가 당일날 가족들의 실망스런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일단
세일러문의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그렇게 혼자 끙끙거리며 4일을 보내고 저희 부모님 그리고 남매 우리 부부 이렇게 여섯 명의
식구는 새벽에 일어나 4시간에 걸친 이동으로 고향에 도착했습니다.
1시간에 걸친 벌초를 끝내고 점심을 먹고 숙소로 향했습니다.
내비가 점점 목적지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드디어 빨간 깃발이 화면에 들어옵니다.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내쉽니다. 아내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한마디 합니다.
"이제 숙소 이름이라도 한번 가르쳐주지?" 싸늘한 아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비가 좌회전을
외칩니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리조트 이정표가 보입니다. 그런데 이정표에 녹이 슬어 있습니다.
23년 전 고등학교 시절 야자시간에 담치기 하다 교련 선생님과 마주쳤을 때 마지막으로 제 입에서
흘러나오고 잊어버렸던 단어 하나가 갑자기 지금 제 입가에서 맴돕니다.
'조...때...다'
이런 제 맘도 모르고 차는 산속으로 올라갑니다. 아이들의 짜증 섞인 말들이 들립니다.
"아빠 또 저번처럼 컨테이너 같은 데는 아니지? 그러면 나 정말 그냥 집에 갈 거야~~"
아들 녀석의 협박이 더 이어지려고 할 때 제 눈에 뭔가가 들어왔습니다.
괜찮네...
이때부터 아내와 아이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친절한 주인아주머니의 안내를 받고 올라간 방 현관에서 바라본 뒷산
아내가 감탄을 합니다.
발코니에서 바라본 전경...그리고 수영장
아내와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셨던 아버지가 눈가를 매만지며 한마디 하십니다.
"내가 오면서 긴가민가했는데 여기서 내려다보니 확실하구나...엄마 아버지 돌아가시고 내가
이 동네에서 어린 시절 몇 년을 보냈는데 죽기 전에 꼭 한번 와 보고 싶었는데....우리 아들
덕분에 소원 이뤘네 고맙다. 여긴 어떻게 알아냐?"
아직 현관에서 신발도 벗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저를 식구들이 쳐다보고 있습니다.
남매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웁니다. 아내의 입이 귀를 돌아 정수리에 걸쳤습니다. 아버지의
눈가가 촉촉해져 있습니다. 어머니는 벌써 편안한 침구에 누우셔서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저를 쳐다보고 있는 다섯 개의 시선을 향해 조용히 한마디 했습니다.
"써.........써...써프라이즈~~~~~"
식구들이 믿어줄지는 모르겠지만....어쨋든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 받지는 않았습니다. ㅎ
첫댓글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