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4월 14일, 코르도바 출신의 가톨릭 신자이자 지주였던 니세토 알칼라 사모라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위원회가 공화국 임시정부로 전환되었다. 이어 알칼라 사모라가 국가 수반이자 총리로 취임했다. 임시정부 내각은 총리 니세토 알칼라 사모라(자유공화우파), 내무부 장관 미겔 마우라(자유공화우파), 국무부 장관 알레한드로 레룩스(급진공화당), 교통통신부 장관 디에고 마르티네스 바리오(급진공화당), 전쟁부 장관 마누엘 아사냐(공화 행동), 해군부 장관 산티아고 카사레스 키로가(갈리시아 자치당), 경제부 장관 유이스 니콜라우 돌루에르(에스파냐 공산당), 발전부 장관 알바로 데 알보르노스(공화 연합), 교육부 장관 마르셀리노 도밍고(공화 연합), 법무부 장관 페르난도 데 로스 리오스(사회주의노동자당), 재무부 장관 인달레시오 프리에토(사회주의노동자당), 노동 및 사회안전부 장관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사회주의노동자당)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조합은 통합도 협상도 불가능한 조직으로 임시정부의 혼란과 분열을 예고하였다.
공화국 스페인의 국기
공화국 지도자들은 농업 개혁, 비타협적인 군부 문제, 카탈루냐와 바스크의 자치, 그리고 가톨릭교화와 국가의 관계 등 스페인 사회의 뿌리 깊은 난제들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또한 ‘시민들의 공화국’을 만들어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교육 제도 미비라는 어려운 문제와도 씨름해야 했다.
1929년 미국 금융가가 파산한 뒤로 국제 상황도 결코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스페인은 세계적 불황 속에서도 산업이 더 발달했던 다른 나라들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스페인의 전통적 수출품이 창출하던 가치는 거의 반 토막이 나 있었다. 1930년과 1933년 사이에 수출은 거의 반으로 줄었고, 산업 생산은 17%가 감소했다. 생활 수준 하락과 사회 불안이 불러일으킨 대중의 저항은 유럽 전역에서 러시아 혁명에 이어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자아냈다. 이 두려움은 여러 나라에서 독재나 권위주의 체제를 용인하는 분위기를 부추겼다. 이탈리아,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독일에서 그런 체제가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스페인에서 왕정이 붕괴되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는 사실은 국제 은행계에는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모건 은행은 이전 정부와 합의한 6천만 달러의 대부를 당장 취소했다.
새 정부는 또한 국가 지출 프로젝트로 발생한 막대한 부채, 페세타 화 가치 하락 같은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체제에서 발생한 경제 실패의 부정적 결과물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또한 세금 인상과 국가 경제 악화를 예상한 사람들은 대규모 자본을 외국으로 빼돌렸다. 1931년 4월 1일부터 6월 30일 사이에 은행의 총 저축액 가운데 13%가 빠져나갔다. 같은 기간 동안 페세타화의 가치는 20% 하락했다. 정부가 시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사회적 프로그램이 유발할 재정적 효과를 우려한 지주들과 기업가들은 즉각 투자를 줄였다. 이런 우려는 사회주의자인 인달레시오 프리에토가 재무부 장관으로, 역시 사회주의자인 라르고 카바예로가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되자 더욱 증폭되었다. 프리에토는 주식 거래에 세금을 물리고, 자본 유출에 대해 조사를 벌였으며, 미국 정유회사 대신 소련으로부터 더 값싼 원유를 수입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6개 정당의 연합체였던 새 정부는 코르테스를 소집하여 제2공화국 운영에 필요한 헌법 초안을 마련하는 절차를 밟아 나갔다. 1931년 4월과 5월, 6월 내내 그들은 토지 개혁에 관한 법령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이 법령들은 지주들이 소작농을 내쫓는다든지 일용 노동자들을 해당 행정 구역 밖에서 고용하는 것을 금하는 조항 등을 담고 있었다. 또한 하루 8시간 노동을 포함하여 산업 부문에서 합의한 고용의 권리를 농업 노동자들에게까지 확대했다. 5월 21일 정부는 농업 개혁에 관한 법령 초안을 마련하기 위해 ‘농업기술위원회(Comision Tecnica Agraria)'를 설치하고 토지개혁기구를 창설했다. 토지개혁기구는 해마다 6만에서 7만 5천에 이르는 가구를 농촌에 재정착시킨다는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 사업을 실행하는 데 할당된 예산은 턱없이 모자라는 5천만 페세타에 불과했다.
토지개혁을 촉구하는 농민들의 시위
그 다음 주, 새 전쟁부 장관이 된 마누엘 아사냐는 기형적 구조인 군대 편제를 개혁하는데 착수했다. 아사냐는 급료를 다 지불하는 조건으로 장군들과 장교들에게 전역을 종용했다. 또 16개 사령관구를 8개의 유기적인 사단으로 축소 조정하고, 중장 계급을 폐지했으며, 병사들의 의무 복무 기간을 1년으로 단축하고, 사라고사에 있는 육군사관학교를 폐쇄했다.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은 다름 아닌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었다. 그 결과 84명의 장군과 8738명의 장교들이 전역했다. 아사냐의 계획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7600명의 장교와 10만 5천 명의 병사를,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 1700명의 장교와 4만 2천 명의 병사를 유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 조치는 군대의 현대화나 효율성 측면에서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개선하지 못했다. 오히려 불만을 품은 장교들에게 공화국 전복 음모를 꾸미는데 필요한 시간과 기회를 제공했을 뿐이다. 정부는 또한 과격한 진압으로 악명을 떨쳤던 산 후르호 장군을 치안대 사령관으로 그대로 기용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치안대는 총 인원이 3만 명가량 되었고, 군 장교들이 지휘했으며, 출신 지역에 배치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지역 주민들과 어울리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지주와 성직자의 이익만을 보호하는, 외부에서 온 점령군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다. 정부는 또 다른 새로운 준군사 조직을 창설했는데, 이름부터 불길한 느낌을 주는 돌격대(Assault Guard)라는 단체였다. 그들은 ‘아살토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치안대가 주로 농촌 지역을 치안을 담당한 데 비해 돌격대는 주로 도시와 소읍에 배치되었다.
2차대전 이후 치안대의 모습. 삼각모에서 유래한 독특한 모자는 치안대의 상징이다.
제2공화국 시기의 돌격대
카탈루냐의 자치권도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전통적인 카스티야 중심주의자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관심사였는데, 그들은 어떤 식이든 각 지역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것은 스페인의 통일성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다. 4월에 시행된 선거에서 카탈루냐의 좌파 정당 ‘카탈루냐 공화좌파(Esquerra Republicana de Catalunya, ERC)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정당은 본질적으로 중간계급을 대변했으며, 프란세스크 마시아(Francesc Macia)와 유이스 콤파니스(Lluis Companys)가 이끌었다. 두 사람은 4월 14일에 카탈루냐가 곧 연방국가 내의 한 공화국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정확히 말해 산세바스티안 협약에서 합의한 사항은 아니었다. 그래서 3일 후에 3명의 장관이 마시아와 콤파니스를 만나 의회에서 카탈루냐 자치법을 승인할 최선의 방법을 논의하러 바르셀로나로 갔다. 4월 21일에 마시아는 카탈루냐 헤네랄리타트(Generalitat, 중세 시대 카탈루냐가 독립 왕국이었을 때부터 그 지역을 지배하는 카탈루냐 지역 정부를 가리키는데, 독자적인 의회와 내각을 가지고 있었다.)의 수장으로 선출되었다.
카탈루냐 공화좌파의 주요 인물들
프란세스크 마시아
유이스 콤파니스
카탈루냐 헤네랄리타트의 수장으로 선출된 마시아
새로운 세속적 공화국과 가톨릭교회의 관계도 1851년의 정교협약이 아직 유효했기 때문에 간단하지가 않았다. 공화국이 출범한 지 채 보름이 지나지 않아서 스페인의 수좌대주교 페드로 세구라(Pedro Segura) 추기경이 교서를 발표하여 신앙의 자유를 확립하고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려는 새 정부의 의도를 비난했다. 추기경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차후 있을 선거에서 가톨릭을 파괴하려는 정부에게 표를 던지지 말라고 촉구했다. 가톨릭계 신문들도 추기경의 논조를 그대로 따랐다. 가톨릭행동(Accion Catolica)의 기관지 <엘 데바테(El Debate, 토론)>는 교회의 특권을 수호해야 한다며 열을 올렸고, 한편 왕당파 일간지 <아베세(ABC)>는 가장 전통주의적 입장을 지지했다.
페드로 세구라 추기경
스페인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수좌대주교가 공개적으로 저항을 요구하고 나서자 공화국 장관들은 세구라 추기경과, 또 다른 고위 사제인 비토리아의 주교 마테오 무히카(Mateo Mugica)를 국외로 추방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세구라 추기경은 프랑스 남부 지역에 자리 잡고, 스페인 내 사제들에게 교회 재산을 팔아서 그 돈을 페세타화가 아닌 다른 화폐로 보유하라고 지시했다. 교회는 직접 밝힌 것만 해도 2억 4400만 페세타에 이르는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실제 재산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교회는 잘 조직된 문화 재단, 방송국, 자선단체, 교육기관 등을 두고 있었다. 또한 교회는 초등 교육 대부분과 중등 교육 일부, 그리고 기술학교와 대학을 통해 고등 교육의 일부도 장악하고 있었다. 1909년과 1931년 사이에 왕정 하에서 교회는 1만 1128개의 초등학교를 세웠다. 그에 비해 공화국은 첫해에 9600개의 초등학교를 세웠다.
마테오 무히카 주교
세구라의 교서가 발표된 지 2주가 지난 5월 11일, 마드리드의 한 왕당파 클럽 문 밖에서 한 택시 운전수가 “공화국 만세”를 외쳤다고 흠씬 두들겨 맞은 사건이 일어나 심각한 소요로 이어졌다. 사람들이 거리에 모여들었고, 왕당파 계열 신문 <아베세> 사옥이 불에 탔다. 이어 에스파냐 광장 근처에 있는 카르멜 수도회 교회가 공격을 받았으며, 그 후 이틀 동안 점점 더 많은 교회들이 공격을 받았다. 소요는 지중해를 따라 안달루시아 쪽으로 확산되었고, 알리칸테, 말라가, 카디스와 세비야에서도 교회가 불에 탔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우파는 이때 아사냐의 입에서 나왔다고 소문이 돈 말, 즉 자신은 공화주의자 한 명을 다치게 하기보다는 스페인에 있는 교회 전부를 불태워버리겠다고 한 악명 높은 말을 가슴 속 깊이 새겨 넣었다.
6월 3일 스페인의 주교들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비난하고, 학교에서 의무적 종교 교육 폐지에 항의하는 내용의 서신을 정부 수반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압박은 다른 쪽, 특히 절대자유주의적 좌파 쪽에서도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7월 6일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이 이끄는 전국노동연합은 전국 전화국 노동자들의 파업을 선언했고, 그 결과 바르셀로나와 세비야의 통신이 마비되었다. 전국노동연합 노동자들은 또한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정부가 미국의 ITT에 매각해서 미국인 소유였던 ‘텔레포니카 네트워크’에 대해서도 사보타주 행위를 주도했다. 미국 대사는 스페인 정부에 경계 부대 배치를 요구했고, 마드리드 정부는 파업을 주도한 노동자총동맹 간부들을 검거했다.
전국노동연합은 총파업을 선언했으며, 세비야에서는 파업 파괴자에게 살해된 한 노동자의 장례식을 치안대가 무산시킨 일이 발생했다. 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3명의 치안대 대원을 포함하여 사망자가 7명이나 나왔다. 마드리드 정부는 7월 22일 전시 상태를 선언했다. 전통적으로 법과 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해 온 군대와 치안대는 지금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대단히 폭압적이었다. 그들은 ‘도망자의 법칙’, 즉 도망치는 포로들에게는 발포할 수 있다는 원칙을 고수했고, 화력이 세지 않은 경포(輕砲)를 사용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그 결과 30명의 사망자와 200명의 부상자가 나왔고, 수백 명이 구속되었다. 공화국 정부에 큰 희망을 걸었던 스페인 노동자들은 공화정부가 왕정 못지않게 억압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전국노동연합은 전면전을 선언하고 사회 혁명으로 공화 정부를 타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