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네이버 블로그 - 김밤톨의 작은 서재 / 곽재구 - 사평역에서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싸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장을 열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 전문
조그만 간이역에 눈은 푹푹 내려 쌓이고, 푹푹 내려 쌓이는 눈 때문에 막차는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합실에서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고 있다. 부려 둔 보따리나 꾸러미에 기대 누군가는 졸고, 누군가는 담배를 피우고, 누군가는 웅크린 채 쿨럭이기도 한다. 털모자에 점퍼를 입은 사내는 간간이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으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난로 위 주전자는 그렁그렁 끓는 소리를 내며 수증기를 내뿜고, 시계는 자정을 넘어서고…….
시대적 아픔을 아름다운 서정으로 그려 낸 곽재구 시인의 대뷔작 「사평역에서」(1981)를 읽을 때마다 나는 울컥한다. 아름다우면서 서럽고, 힘들면서도 따듯했던 그때 그 시절의 풍경을 소중한 흑백사진처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지난 시절의 희망과 절망이 눈보라로 흩날리고 있다. 모래처럼 톱밥처럼. 그 울컥함이 소설(임철우「사평역에서」), 드라마(TV문학관 「사평역」, 「길 위의 날들」), 노래(김현성 「사평역에서」)로 장르를 달리하며 독자들의 공감을 얻게 했으리라.
이 시는 시인이 20대에 쓴 시답게 감각과 묘사가 풋풋하다. 깜깜한 유리창에 쌓였다 녹는 눈송이들은 흰 보라 수수꽃(라일락)빛이다. 사람들이 그믐처럼 졸고 있다는 표현은 절묘하다. 확 타올랐다 사그라지는 난로 속 불빛은 톱밥을 던져 넣는 청색의 손바닥과 대조를 이룬다. 간헐적으로 내뱉는 기침 소리는 “눈꽃의 화음”을 강조하고, 뿌옇게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담배 연기는 회억(回憶)처럼 떠올랐다 가라앉곤 한다.
한 줌의 톱밥을 던지는 ‘나’는 무슨 사연을 간직한 걸까. 기다리는 막차는 올까. 모든 역들은 어디론가 흘러가기 위한 지나감이고 경계이다. 하여 모든 역들이 고향을 꿈꾸는 것이리라. 사평은 나주 근처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그 사평에 사평역이 없다니. 그래서 우리를 더욱 울컥하게 하는 것이겠지만. < ‘애송시 100편,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1(정끝별 해설, 민음사, 2018)’에서 옮겨 적음. (2019.07.10.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