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7일 주님 공현 후 월요일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 마태오4,12-17.23-25)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말씀의 초대 요한은 공동체 안에 침투한 거짓 예언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도록 이끄는 것을 경계하라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세상보다 하느님에게 속하도록 노력하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요한 세례자의 활동이 끝나자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로 불리는 곳에서 복음 선포를 하심으로써 ‘이방인의 빛으로 계시된 분’[공현]의 역할을 다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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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하느님께 속한 영’과 이의 반대편에 있는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영’으로 구분된다. 하느님께 속한 이들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안에 머무르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온갖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치유하시며, 하느님 나라의 능력을 드러내신다. 이 기쁜 소식은 소외된 이들의 땅,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에서부터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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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갈릴래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갈릴래아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갈릴래아는 식량 자원이 풍부했음에도 그 모든 것을 빼앗기며 살아왔습니다. 로마 제국에 빼앗겼고, 예루살렘에 빼앗겼습니다. 그러면서 갈릴래아는 정치적으로 소외되었고, 종교적으로는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라며 무시당했습니다. 그래서 민초들의 분노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폭동도 많았습니다. 요컨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에도, 도무지 그곳이 ‘약속의 땅’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곳이 바로 갈릴래아였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자연 속에 가득하였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곳에서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를 개시(開始)하십니다. 말로써만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를 통해 물질적인 빈곤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더 큰 자비를 알려 주십니다. 약속의 땅으로 다가오지 않던 갈릴래아를 약속의 땅으로 느껴지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활동 무대인 갈릴래아는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낮은 곳이었고,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선택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의 근원지가 예수님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소외와 무시, 빈곤에 허덕이는 갈릴래아와 비슷하다면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찾아오실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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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자가 어느 이른 아침, 초췌한 모습으로 저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사업은 망했고, 빚보증마저 잘못 서서 이젠 살 집까지 날아갈 형편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볼 면목도 없습니다.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차를 몰고 전속력으로 무작정 도로를 달렸습니다. 죽는 것만이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제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가난한 신혼부부처럼 새로 시작해 보십시오. 지금까지는 가진 것과 누리는 것으로 행복을 찾았지만, 이제부터는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가족의 온기 안에서 행복을 만나 보십시오. 그때는 주님도 지금까지 만난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수년 뒤 그 가족이 찾아왔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지난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 삶을 이끌어 주시는 주님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달라져 보입니다. 그저 하루하루가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 삶이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은 대부분 자신이 붙잡고 사는 세상의 온갖 우상 때문입니다. 회개는 세속에 오염된 우리의 눈을 돌려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물으며 용기 있게 삶에서 가치의 우선순위를 새롭게 짜는 것이 회개입니다. 세속의 힘과 재물에 의탁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힘을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회개한 사람에게는 그때부터 세상이 달라져 보입니다.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탁하면서 늘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두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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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알리시는 일입니다. 그분께서는 먼저 아픈 이들을 고쳐 주십니다. 치유를 통해 ‘주님의 힘’을 드러내시려는 의도입니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병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주님’을 우선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아픔을 없애 주시는 모습입니다. 육체적 질병만이 아닙니다. 내면 세계의 어둠도 없애시고, ‘나쁜 습관’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악습을 고치는 것이 ‘회개의 본모습’이기도 하다는 가르침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느님의 힘과 능력이 ‘바로 곁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바꾸어야 합니다. ‘정말 주님의 힘이 내 곁에 있을까?’ 이런 생각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기운’을 작게나마 느끼게 됩니다. 그분의 힘이 함께하시면, 우리 곁을 어정거리던 ‘악한 기운’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성체를 많이 모셨으면서도 우리가 바뀌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힘을 못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힘이 삶에 영향을 미치게 해야 합니다. 말씀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것이지요. 그분처럼 사랑하며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봐 주시면 안 될 일이 없습니다. 삶의 태도가 바뀌면 하늘의 힘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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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분의 외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회개와 하늘 나라가 그분 외침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니 회개하면 하늘 나라는 가까이 옵니다. 삶의 자세를 바꾸면 하느님의 힘은 곧바로 함께합니다. 야고보 씨는 작은 식당을 운영합니다. 아내와 함께 시장 어귀에서 몇 년 째 국밥을 팔고 있습니다. 종업원도 없이 부부가 함께 일합니다. 사람 좋은 야고보 씨는 손님들이 행패를 부려도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과가 끝나면 꼭 술을 마십니다. 많이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매일 마시다 보니 뒤치다꺼리는 늘 아내의 몫입니다. 두 사람은 그것 때문에 자주 티격태격합니다. 착한 야고보 씨는 술을 끊으려 몇 번을 시도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 어떡하면 술을 끊을 수 있나요?” 어느 날 야고보 씨는 절실하게 물어 왔습니다.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무어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술을 끊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안 마시는 습관을 들여 보시지요. 완전히 끊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일과가 끝난 뒤에는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해 보세요. 그리고 성모님께 도와 달라고 간청해 보세요.” 언제부터인가 야고보 씨는 술을 끊었습니다. 삶의 태도를 바꾸었기에 은총이 함께했던 것이지요. 주님께서 돌봐 주시면 되지 않을 일이 없습니다. 회개하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옵니다. 삶의 태도를 바꾸면 은총이 곧바로 함께합니다.
이 시대에 회개는?
- 이영선 신부-
회개 하나. 훌륭해 지려고 애쓰지 마라! 이미 하느님 품에 안기신 권정생 선생께서 이천년대를 시작하는 해의 정월에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너보다 더 훌륭해 지려고 애쓰지 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서로 더 훌륭해 지려고 하다 보니 이리 강퍅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는 말씀을 듣고 얼마나 감동했는지! "회개하여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느낌을 지금 이 시대에는 권정생 선생의 '훌륭해지려고 애쓰지 마라.'는 말로 알아듣고 싶습니다.
회개 둘. 함께 기뻐하고 싶습니다. 밤새 울고 아침에 누가 죽었는지 묻는답니다. 그런데 사돈이 논 사면 배 아프답니다. 함께 슬퍼하는 일은 쉬이 하는데 함께 기뻐하는 일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저는 함께 기뻐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여기에 우리 회개의 또 다른 내용이 있다고 여깁니다.
회개 셋. 나는 너와 다릅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다 다릅니다.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비슷할 뿐 다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같아요? 달라요?"라고 여쭈면 "틀려요."라는 대답을 듣습니다. 창의성이 뛰어나긴 하지만 세상에 틀린 존재는 없습니다, 서로 다를 뿐. 세상을 사는 방법도 틀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을 뿐. 틀리는 때는 시험 답안지에만 있습니다. 아, 나는 너와 다르구나. 이 사실을 인정하면 너를 대하는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얼마나 많이 달라질까 상상해 봅니다. 최고만을 인정하고 원하는 이 시대에 회개를 사는 또 하나의 삶이 여기에 있다고 여깁니다.
개미와 코끼리가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커다란 다리가 놓여 있었고, 그들의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이 다리를 건너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둘은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다리의 중간쯤에 이르렀을까요? 다리가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왜 출렁거렸을까요? 바로 코끼리가 워낙 무겁기 때문에 다리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출렁거렸던 것이지요. 하지만 개미는 코끼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코끼리야, 우리 때문에 이 다리가 출렁거리는구나. 우리가 좀 무거운가봐.”
개미 때문에 다리가 출렁거릴 일은 전혀 없습니다. 바로 코끼리 때문에 다리가 출렁거린 것임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미는 자기 역시 출렁거리는데 큰 역할을 한 듯이 말하지요. 그래서 “우리 때문에 다리가 출렁거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개미의 말에 웃음만 나오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이 대단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 그 모습을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 자신이 이 개미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즉, 자기 자신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 우리라는 것이지요.
물론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말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생각만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 자신의 조그만 능력과 재주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면서 스스로를 자랑하기에 바쁜 사람 등등……. 이 세상에는 겸손한 사람보다는 교만하고 자기를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래도 이렇게 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 때문입니다. 주님 때문에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주님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간직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 때문이라는 이유는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나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바로 공생활의 시작이시지요. 만약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신앙 안에서 기쁨과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힘차게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가까이 온 하늘 나라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주님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바로 주님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 나입니다. 주님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나입니다. 그리고 주님 때문에 영원한 행복이 보장되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나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보잘 것 없는 ‘나’를 버리고, ‘주님’을 선택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자신을 설득하게 하라(토마스 칼라일).
<삶의 빛이 바랠 때 마다>
-양승국신부-
수도자들이 일년 내내 눈 빠지게 기다리는 시간이 있습니다. ‘연피정’입니다. 수도회마다 기간은 다른데, 대개 일주일, 혹은 열흘 정도의 재충전시간이 주어집니다. 이때만큼은 평소에 해오던 일상적인 업무나 사도직, 직책 등에서 벗어나 자유롭습니다. 강의를 듣고, 묵상을 하고, 또 평소보다 잘 먹으면서 일 년 동안 살아갈 영적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시간입니다.
이번에 저는 틈만 나면 한적한 시골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리고 돌이켜봤습니다. 내 인생의 별이 되어준 분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나를 구세주 하느님께로 인도한 별빛이 되어주신 분들을 기억하면서 그분들께, 그리고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성공한 인생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남들은 자다 깨어나도 못 오를 최정상에 서는 것일까? 꿈에 그리던 백만장자가 되는 것일까? 아니면 평생을 동경했던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일까? 많은 실적을 쌓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일까?
사실 이런 것들 대부분 지나가는 것들이더군요. 마치 물을 손으로 움켜쥔 것 같습니다. 잡았다 했는데 순식간에 사라져버립니다.
결국 진정한 성공은 하느님께로 다가서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을 통해서 인간에게로 나아가는 일이 아닐까요? 내가, 내 인생이, 내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그 누군가에게 별빛이 되어 주는 일이 아닐까요?
그 누군가가 캄캄한 암흑 속을 헤매다가 나를 통해, 내 삶을 통해, 내 존재를 통해 다시금 힘을 얻고 열심히 제 갈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면 내 인생은 분명 성공한 인생이리라 확신합니다.
오늘날도 상황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멍하니 앉아있습니다.
외관상으로는 분명히 살아있지만 사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들의 인생에는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고 없습니다. 신앙도 없습니다. 하느님도 없습니다. 결국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기만 해도 예수님을 떠오르게 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어둠 속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던져주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삶이 빛을 잃을 때 마다, 그들 인생의 그림이 퇴색될 때 마다, 다시 꺼내보고 싶은 한권의 책처럼 그렇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하늘 나라
-정찬호-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신학적으로 “하늘 나라는 ‘이미’ 왔지만,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늘 나라가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비단 신학적 해석에만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여기, 귀한 신앙고백으로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124위 시복시성 청원 순교자’ 중 한 분이신 백정 출신의 황일광 알렉시오는 당신에게 배교를 강요하는 관원에게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나는 백정으로 태어나 이제껏 사람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천주교인이 됨으로써, 어떤 학문이나 이치가 아닌 신앙의 삶을 통해 천주교가 참됨을 깨우치게 되었다. 나에게는 천국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아직 오르지 못한, 곧 가게 될 ‘이승 너머의 곳’이고, 또 하나는 ‘지금 이 생활’이다. 양반인 천주교 형제들은 금수禽獸와 같이 취급되는 나를 형제라 부르며, 나를 친형제처럼 사랑으로 대해주었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순교자께서는 분명 서슬 시퍼런 ‘죽음의 자리’마저도 하늘 나라로 여기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면의 터질듯한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자리였고, 또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 삶의 중심을 하느님으로 채우는 사람은 ‘지금’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자리’가 곧 하늘 나라입니다.
장막을 걷어라!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부분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잡히시자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이제 공적으로 드러내시고 활동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Coming out”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Coming out 하셔서 이제 당신의 갖가지 능력을 드러내 보이실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 치유의 능력, 빵을 늘리시는 능력, 악령을 퇴치하시는 능력을 보이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정말로 드러내 보이시는 것은 당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러내 보이고자 하신 것이 당신의 능력이었다면 우리 보통의 인간과 똑같은 자기 과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갖가지 능력을 보이심은 자기 과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다는 표시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고 한 다음 예수님의 공생활 제 일성을 소개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당신과 함께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고 당신의 빛으로 그것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더 이상 어둠의 자기 세계에 갇혀 있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고 빛도 비추니 우리가 눈을 뜨기만 하면 볼 수 있고 우리가 문을 열기만 하면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문득 오래 전에 부르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가사가 다 생각나지 않지만 “행복의 나라로 갈 거야”라는 노래지요. “창문을 열어라”인지 “장막을 걷어라.”인지 아무튼 이런 가사로 시작하여 중간에 “태양만 비춘다면”이라는 가사가 있고 “나도 행복의 나라로 갈 거야.”로 끝나는 노래인 것 같습니다.
태양만 비춘다면 우리는 넓은 들판과 푸르른 하늘을 볼 수 있는데, 어제 말씀드린 대로 예수께서 오심으로 신비의 구름을 뚫고 태양빛을 비추시니 우리가 장막을 열어젖히기만 하면 됩니다. 하늘나라, 행복의 나라로 가는 것은 이렇게 간단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어둠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로 나의 창을 여는 것,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일 것입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전삼용신부-
저의 논문 지도 교수님은 성인처럼 사시기로 유명합니다. 옷도 남이 버린 것을 입고 가난한 아프리카 학생들을 위해 당신 돈으로 책을 사 주십니다. 저에게도 여러 권의 책을 사 주셨습니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사비로 책을 사 주는 것은 그 분 외엔 좀체 볼 수 없는 일입니다.
한 번은 수업시간에 교수 신부님께서 주워 입고 온 바지 옆이 뜯어져서 모든 학생들이 그 분의 팬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또 한 번은 앉아서 질문을 하려고 하니 제 옆에 와 눈높이를 맞추려 바닥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교수님은 우리나라 나이로 회갑을 맞으신 신부님입니다.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직접 눈으로 그 분이 어떻게 사시는지 확인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성탄 자정 미사를 함께 드리기 위해서 그 분의 본당으로 갔었습니다.
역시나 그 분 사시는 것은 가난함과 겸손함 그 자체이셨습니다. 특별히 자신의 사제관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에서는 알코올 중독자, 행려자, 노인 등 갈 곳이 없는 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신자라서 함께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갈 곳이 없다고 해서 자신의 사제관에 방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저는 이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제가 그 사제관에서 함께 자고 싶다고 했더니 방을 다른 곳에 마련해 두었다고 그 곳에서 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난방이 되지 않아 밤엔 매우 춥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곳에 사시는 분들은 낮에도 몇 겹의 옷을 껴입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습관이 되어서 괜찮지만 갑자기 춥게 자는 것이 좋지 않으니 우리들을 위해선 호텔방을 마련해 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군대 혹한기 훈련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자도 된다고 했지만 이미 몸은 따듯하고 좋은 호텔방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가난한 사람을 우선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본당에서도 봉성체를 나가는 것보다는 교사들과 술자리 하는 것이 더 기다려졌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사목회 봉사자들과 훨씬 많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나 쓸 것 다 쓰고 남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복음전파를 시작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방부터 복음 전파를 시작하십니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갈릴래아는 이스라엘로 치면 최북단으로 주님의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과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가장 거룩한 도시이고 그것과 멀어질수록 이방인의 지역, 혹은 어둠의 지역이라 생각하여 소외시키거나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갈릴래아는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의 대명사였습니다. 성경에서도 나타나엘이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요한 1,46)하며 갈릴래아 지방을 무시하는 전통적 생각을 표현합니다.
정말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우선으로 선택하고 있을까요? 교황님을 ‘Servus Servorum’, 즉 ‘종들의 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Pater Pauperum’, 즉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교황님부터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가장 낮은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의지적으로라도 낮은 곳, 어두운 곳, 가난한 이들, 아파하는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려는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잡히시자 복음전파를 가장 가난하고 어둠의 그늘 밑에 앉아있는 불쌍한 사람들에게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더 밝게 빛나고 빛의 역할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작 빛이 필요한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라고 하고 또, 백성들 가운데서도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먼저 고쳐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역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찾아가신 사람들이 가난하고 병들고 허약한 사람들임을 알았고 그것이 참다운 사랑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물이 가장 목마른 사람에게 주어져야 하듯이 복음도 더 불행한 이들에게 먼저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들은 고통 받는 이들과 더 함께 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있습니까?
<여백의 아름다움>
-양승국신부-
1월 4일자 동아일보 문화면에는 오랜만에 법정스님의 근황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새해를 맞이하는 독자들을 향해 지면을 통해서나마 작은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올해로 9년째 당신의 거처로 삼고 있는 강원도 첩첩 산골 눈 덮인 오두막집 사진을 배경으로 한 "새해덕담" 보내오셨습니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달 밝고
여름에는 맑은 바람 겨울에는 눈 내리니
부질없는 생각만 마음에 두지 않으면
이것이 인간 세상의 좋은 시절이 아닌가?"
"자신의 욕심 가운데 60-70%만 성취하는 삶을 살고 나머지는 여백으로 남기라"는 말씀, "아이들도 다소 부족한 듯 기르는 것이 올바른 보살핌이다"는 말씀, "자기 내부의 목소리, 영혼의 음성을 듣도록 노력하자"는 말씀, "우리의 일을 백 가지나 천 가지에서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여 최대한 간소하게 살자"는 말씀 등등. 참으로 올 한해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들을 해주셨습니다. 물질만능주의에 휩쓸려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치닫고 있는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시면서 세상을 향해 회개할 것을 요청하십니다."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한다는 말은 상당히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겠지만 제 나름대로 생각할 때 "가던 길이 올바른 길이 아님을 알기에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선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운전을 할 때, 목적지를 지나쳤을 경우, 빨리 1차선으로 붙어 U턴 장소를 찾아 U턴을 하듯이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를 버리고 다시 한번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은 성서에 나타난 회개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일종의 회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이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길, 세상의 가치관을 접고 하느님의 길, 하느님 나라의 가치관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의 전기를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시작한 이후 한평생에 걸친 회개의 여정을 걸어갔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느님과 원만한 관계 안에서만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때로 하느님과 관계가 좋은 상태에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다가도, 때로 하느님과 틀어져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회복하는가 하면 또 다시 불평을 하고, 그리고 또 다시 하느님께 돌아서기를 수 백 번도 더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일 한가지는 하느님은 항상 한결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탓이 아니라 우리편의 문제입니다. 시련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한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회개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돌리시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얼굴을 돌리는 일입니다. 참된 회개는 우리가 수시로 겪는 고통이나 시련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수용할 때 가능합니다. 십자가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사랑의 표현임을 자각하는 순간 진정한 회개가 시작됩니다.
<일주일간의 피정>
-양승국신부-
일주일간의 연피정을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떠나면서 생각해보니 참으로 송구스러웠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로 평신도들께서는 감히 엄두도 못내는 피정을 일주일씩이나 할 수 있다는 것 참으로 황송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피정기간 동안은 더욱 열심히 피정에 참석하고 미약한 기도를 통해서나마 세상의 정화에 기여하는 순간이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들 "회개"란 화두를 하나씩 들고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동료들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습니다.
피정 기간 내내 왜 이렇게 "회개"가 잘 안 되는지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서 돌아서고픈 생각으로 가득한데, 마음뿐입니다. 그 순간뿐입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도 해봤습니다.
아무래도 "하느님 체험 부족", "하느님과의 개별적인 만남 부족"이 그 원인인 듯 했습니다.
"지나온 한해 언제 단 한번이라도 하느님을 생생하게 체험했었던가? 언제 그분의 현존을 생생하게 느꼈었던가? 언제 그분과 1대 1로 만난 적이 있었던가?" 돌아보니 부끄럽게도 없었습니다.
결국 하느님 체험이란 하느님 자비에 대한 체험, 하느님 사랑에 대한 체험이겠습니다. 결국 참된 회개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다 생생하게 느끼는 일이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깊이 느끼면 깊이 느낄수록, 그분의 자비 체험을 확실하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보다 확실히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 치는 농장에서 돼지들 사이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자 마음을 바꾸어 먹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고자 했던 1차적인 목표는 다분히 표면적인 것이었습니다. "여기 그대로 있다가는 굶어죽는 것은 시간문제이겠구나.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좀 많았던가? 빨리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종으로라도 지내면서 우선 이 지긋지긋한 배고픔에서 벗어나자"며 아버지의 집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정확하게 구분하자면 이때 까지 작은 아들은 정확하게 회개의 순간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언제 작은 아들의 회개가 시작되었습니까?
집으로 돌아온 자신을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제나 저제나 작은 아들이 돌아올까 봐 목을 쭉 빼고 기다리시다가 멀리서 작은 아들이 힘없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신 아버지가 맨발로 뛰어나오는 모습-자비의 모습을 보고 둘째 아들은 회개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참된 회개는 우리가 정확한 하느님의 모습, 자비 충만한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비로소 시작됩니다. 결국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하심, 선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회개를 시작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우리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뉘우침이나 눈물도 요청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를 향한 극진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았기에 너무나 기뻐서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과정도 포함됩니다.
이 은혜로운 주님 공현 시기,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 가득한 눈길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응시하시는 아버지의 눈길은 절대로 질책의 시선이나 원망의 시선이 아닙니다. 사랑의 시선이자 화해의 시선, 은총의 시선입니다.
회개하며 산다는 것은
- 이건복 신부-
◆‘회개’란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말입니다. 이 말속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친다.’는 마음의 회개와 더불어 ‘자신의 본 자리로 돌아간다.’는 행동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모른다면 되돌릴 방법도 찾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본래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일까요?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세상에 태어났다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하느님의 선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하느님의 거룩한 성품을 갖추고자 평생을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닮은 성인이 되고자 노력한다는 것은 일생을 두고 회개하는 인간의 모습을 말합니다. 꼭 죄가 있어서 지금 당장 고해성사를 보는 것은 일시적 회개이지만 평생을 회개하며 산다는 것은 우리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더 적극적인 회개입니다. 조선 초기 교회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전국 방방곡곡으로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몸밖에 없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신자라는 신분을 숨겨야 했고, 남의 집에서 품팔이를 하거나 외진 산골짜기에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순교자들은 낯선 타지에 정착해 새로운 신자들을 탄생시켜 전국적인 전교의 기반을 닦게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새로운 신자들은 낯선 타지로 피신해 온 순교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신뢰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하느님의 거룩한 모습으로 성화된 순교자들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도 하느님의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희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죄가 있어서 회개하는 순교자들을 본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본래 모습이어야 할 성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순교자들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선포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인 “회개하여라.”는 “네 자신을 완성하여 성인이 되어 하느님 닮은 본래의 자신을 완성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정연동신부-
논어에 사불급설(駟不及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한번 내뱉은 말은 네 마리가 끄는 빠른 마차로도 따라잡지 못한다.’는 뜻으로 말을 삼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당(唐)나라 때의 명재상인 풍도(馮道)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는 또 다음과 같은 말도 실려 있습니다.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끼요, 말은 혀를 베는 칼이니, 입을 막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이 어느 곳에 있으나 편안할 것이다.’
모두 말조심을 가르쳐 줍니다. 특히 요즘 같은 인터넷 세상 사람들이 새겨야 할 의미인 듯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퍼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도 전해집니다. 삽시간에.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이런 말, 이런 소문 같으면 오히려 얼른 온 세상 두루두루 퍼지면 좋겠습니다.
‘회개, 하늘나라’ 이 말은 소문이 되고, 예수님은 이 소문을 뒷받침 하는 삶을 사십니다.
오늘 우리는 무슨 말을 하며 무슨 소문을 전하고?
또 그 말을 얼마나 뒷받침 하며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들 입에서 나가는 말이 모두 ‘사랑의 말’이면 좋겠고, 하늘나라를 뒷받침 하는 소문이면 좋겠습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갈릴래아로 가신 예수님
-류충희 신부-
예수님은 유다의 수도로 정치·경제·문화·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이나 부유한 도시인 예리코가 아닌 유다 북쪽 변방의 땅인 갈릴래아로 가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마태오 복음 저자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신 이유를 이사야서 8장 23절-9장 1절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갈릴래아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땅의 사람들”이라 하여 종교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또한 갈릴래아 사람들은 순수한 유다인의 핏줄이 아니었기에 정통 유다인들은 이들을 유다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갈릴래아를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신 것은 오늘 복음이 전하는 것처럼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기 위함이었고, 소외받고 멸시당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첫 번째 선교지로 삼으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사명이 무엇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종교적으로 거룩하고 사회적으로 잘난 사람들이 사는 예루살렘이나 예리코가 아닌 가장 천하고 못난 이들이 사는 갈릴래아로 가신 것은 약한 이들을 각별히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섭리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셨다는 사실은 오늘날 교회가 누구를 위한 교회이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새벽을 열며
낡은 바이올린 하나가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아무도 이 낡은 바이올린을 살 것 같지 않았지요. 경매인도 이 일은 시간만 낭비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낡은 바이올린을 빨리 팔고 싶은 마음에 1달러에서부터 경매를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이 ‘1달러’를 불렀습니다. 그 옆의 사람이 다시 ‘2달러’를, 마지막 사람이 ‘3달러’를 불렀습니다. 더 이상 높은 가격은 나오지 않았지요. 마침내 3달러에 낡은 바이올린이 낙찰 될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백발의 한 노인이 성큼 걸어 나오더니 그 낡은 바이올린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먼지를 털어 내고 느슨해진 줄을 팽팽히 조였습니다. 그런 후 명곡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연주가 끝나자 경매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얼마에 사시겠습니까?”라고 다시 물었지요. 그러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높은 금액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천 달러’, ‘2천 달러’, ‘3천 달러.’ 마침내 그 바이올린은 3천 달러에 낙찰이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저 낡은 3달러짜리 바이올린의 가치가 왜 달라진 거야?”
바라 이 말에 어떤 사람이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 바이올린을 잘 아는 사람의 손길이 스쳐갔기 때문이지.”
형편없는 평가를 받았던 바이올린의 가치가 올라간 것은 백발노인의 명연주 덕분이었습니다. 그 연주를 듣고서 바이올린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 것이지요.
우리 주님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 이는 주님을 통해서 커다란 은총을 받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반면에, 또 어떤 이는 주님께서는 내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면서 불평과 원망으로 일관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차별을 하시는 것일까요? 누구만 예뻐하고 사랑하시고, 또 누구는 미워하시고 그가 잘 안되길 바라실까요?
아닙니다. 앞선 바이올린의 가치가 노인의 연주 덕분으로 바뀌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가치를 높여주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당신의 따뜻한 손길을 보내십니다. 문제는 그 손길을 거부하고 믿지 않는 우리들의 마음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며 이렇게 외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인해 하늘 나라는 분명히 가까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가까이 있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선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회개’라는 것이지요. 회개라는 것은 우리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내고 있는 예수님을 거부하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가치는 더욱 더 높아지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의 손길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손길로 인해서 내가 더욱 더 발전되고, 더욱 더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의 변화, 회개를 통해서 하늘 나라는 우리 곁으로 더욱 더 가까이 다가오게 됩니다.
빠다킹신부
방향이 중요하다
-이중섭 신부-
오랫동안 쉬다가 고해성사를 보는 분들의 공통점은 성당 안 나온 것 말고는 죄가 없다고 버티는 것입니다. 쉬던 신자가 고해성사를 보러 오면 신부는 신이 납니다. ‘오늘은 대어를 낚았구나’ 하며 속으로 쾌재를 부릅니다. 사제 생활의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데 성당 안 나온 것 말고는 죄가 없다고 하면 갑자기 맥이 풀립니다. 어떤 아저씨가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며 역에 기차가 도착하면 일어나 밖을 확인하고 ‘끙’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다음 역에서도 또 그 다음 역에서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물었습니다. “아저씨는 역에 닿기만 하면 왜 한숨만 쉬고 다시 앉는 겁니까?” “저는 서울로 가는데 잘못 타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네요. 그런데 내리려니 밖이 너무 추워 엄두가 안 납니다. 따뜻한 기차 안이 좋아 한숨만 내쉬고 다시 앉는 겁니다.”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회개의 중요성을 깨우칩니다. 엉뚱한 기차 안에서 아무리 기도하고 봉사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잘못된 것을 알면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회개를 뜻하는 대표적인 단어 ‘나함’은 ‘슬퍼하다, 뉘우치다’라는 뜻이며, ‘슈브’는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알면서도 돌아가지 못하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께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많은지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먼저 회개를 외치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깁시다
하늘나라를 얻는 길
-주영길 신부-
오래전 공금횡령으로 구속된 형제가 있었다. 공직에서 정년퇴직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그만 횡령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서너 차례 면회를 갔는데 그때마다 거의 울부짖다시피 자신은 결백하다고, 부하 직원이 자신을 물고 늘어진 것이라고 항변하였다. 하지만 결백하다는 물증이 없었기에 그 형제는 재판을 기다리며 오랜 시간 수형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소임 이동으로 그 본당을 떠난 지 이 년 정도 흘렀을 즈음이다. 세월과 함께 그 형제에 대한 일도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형제가 불쑥 찾아왔다. 그것도 해맑은 표정으로! 사건이 뜻대로 잘 해결되었구나 짐작했다. 그러나 그 형제의 고백은 뜻밖이었다. 부하 직원의 거짓 증언으로 혐의를 풀 길이 없어서 결국 퇴직금은 고사하고 빚만 떠안고 풀려난 것이다. 그 형제의 몸과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부하 직원 내외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떤 신부님이 무조건 “부하 직원에게 가서 무릎 꿇고 용서를 청하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결코 받아들일 수 없고 생각도 할 수 없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단다. 시간이 흐를수록 분노는 더 깊어지고 육신은 점점 병들어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부님의 말씀이 귓전에서 맴돌았다는 것이다. 실낱 같은 희망으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그 말씀을 실천했을 때 세상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 형제의 마지막 말이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선포를 전한다. ‘회개하라’는 촉구와 ‘하늘나라의 도래’다. 자신을 끊임없이 합리화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인간의 본성상 ‘회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형제처럼 원수에게 무릎 꿇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것이 회개이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들에게 하늘나라를 선물로 주실 것이다. “형제님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늘나라를 얻었습니다.” 그 형제에게 이 위로의 말을 전한다.
하늘나라를 위한 복음 선포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혹은 수도생활은 하면서 늘 갈등에 사로잡히는 부분이 있다.
활동도 제대로 못하는 것같고 기도도 제대로 못하는 것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늘은 예수님의 활동상을 구체적으로 묵상해 볼 수 있어 좋다.
예수님은 요한이 잡히시고 나서 나자렛을 거쳐 갈릴레아의 저 후미진 곳으로 이동하신다. 그곳에서부터 하느님나라와 회개를 선포하기 시작하신다.
예수님의 활동은 구체적으로 4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1) 두루 돌아다님 (2) 회당에서 가르치심 (3) 복음을 선포하심 (4) 병자와 허약한 자를 고쳐주심.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를 위한 활동은 이렇게 구체적인 것이었다.
1.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당시의 랍비들과는 달리 그냥 앉아서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이 고을 저을 두루 돌아다니시며 구원을 목말라 하는 이들을 찾아다니셨다.
오늘날 우리가 택하고 있는 활동방식은 당시의 랍비들처럼 또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방식인 듯이 느껴진다. 그냥 본당에 오는 신자들 사목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냥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작은 힘이 되는 것으로 만족한다.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더 찾아 다녀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선교사들은 찾아다니는 사목자들이어야 한다. 하느님 나라는 그냥 앉아서 전해야 할 무엇이 아니고 두루 다니면서 전해야 한다.
나도 요즘 몸이 많이 무거워진 듯하다. 세상 사람들 더 많이 만나러 두루 돌아다니는데 더 신경써야겠다. 버스도 좋고, 지하철도 좋고, 시장도 좋고, 극장가도 좋다. 많은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만나야 한다. 귀찮아서 거부해서는 안된다. 귀찮고 게을러서 안주하는 나에게 주님께서는 당신 모범을 통해서 나를 질책하신다. 움직이라고... 만나라고... 방문하라고...
2. 두번째로 주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사목자로서 강론이나 강의는 참으로 마땅한 것이면서도 힘들게 느껴진다. 하지만 힘있게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성당에서 우리 신자들에게부터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 <기회가 좋든 나쁘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점점 강의, 강론 준비에 게을러지는 나를 주님께서는 질책하신다.
3. 세번째로 주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셨다> 내가 전해야 할 것은 복음이다. 기쁜 소식이다. 신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불쾌한 소식, 어두운 소식이 아니라
세상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 구원과 행복의 소식을 전해야 한다. 너무 어두운 소리, 충고의 소리에만 치우쳐 있는 나의 말씀 나눔이 보다 따뜻하고 정감있게 기쁨과 행복과 희망을 전해주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고 질책하신다.
4. 네번째로 주님께서는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셨다> 그렇다. 육신적으로 앓고 있는 이들과 정신적으로 병든 이들, 영혼이 아픈 이들이 우리가 도움과 위로를 베풀어야 할 첫 대상들이다.
가까이 있는 환자들과 영혼이 아파하는 이들에게 금년에는 더 관심을 가지라는 주님의 질책이시다.
주님, 당신이 하셨듯이 나도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피곤하다 하지말고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당신 나라를 곳곳에 전하는 자 되게 하소서.
결코 안주하지 말게 하소서. 강의와 강론을 의무감에서만이 아니라 당신이 회당에서 설교하신 유업을 따르는 일임을 알고 힘차게 준비하고 선포하게 하소서.
무엇보다도 당신 말씀이 살아있는 희망이요 구원이요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게 내 마음과 입술을 다스리소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육간에 앓고 있는 영혼들을 내 활동과 기도에 있어 최우선 대상으로 삼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께서 하신 그 일을 수행함으로써 당신 나라를 건설하는데 나도 동참할 수 있게 하소서.
무엇보다도 당신이 나와 함께 그렇게 활동하심을 늘 깨어 느끼게 하소서.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살인 미소>
-양승국신부-
오늘 오후 오랜만에 TV 앞에 앉았습니다. 집중력이 부족한 탓인지 아니면 TV 알레르기 증세인지 몰라도 저는 5분을 견디기가 힘듭니다. 아무리 흥미진진한 드라마, 아무리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라 할지라도 제게는 상관이 없지요. 5분내에 그냥 잠이 들어버립니다.
오늘도 5분을 넘기지 못하고 정신없이 졸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받으면서 슬쩍 바라다본 TV 화면에는 한 장애인의 삶이 소개되고 있었는데, 완전히 잠이 달아날 정도로 감명 깊은 내용이었습니다.
두 팔이 완전히 없는 장애인 청년이었는데, 중증 장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얼마나 맑고 천진난만하고 건강한 얼굴인지 깜짝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그 청년의 미소가 얼마나 찬란하던지 사람들은 "살인미소"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청년의 의지력이었습니다. 두 팔이 없는 자신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두 발뿐이란 것을 알아차린 청년은 그 순간부터 처절하고도 지루한 "발과의 전쟁"을 시작합니다. 두 발에 모든 것을 겁니다. 두 발을 마지막 희망으로 여기고 두발에 목숨을 겁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장래 희망인 청년은 셀 수도 없이 컴퓨터 분해조립연습을 되풀이했습니다. 순전히 발로 말입니다. 수 만 번에 걸친 연습 끝에 이젠 분해 조립하는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웠습니다. 한쪽 발로 나사를 잡고 다른 한쪽 발로 드라이버를 돌리는 동작이 마치 손으로 하는 것처럼 능숙했습니다.
식구들과 함께 밥상 앞에 앉은 청년의 모습이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해 보였지만, 이젠 아주 능숙하게 밥숟가락을 사용하며, 멀리 있는 반찬까지도 별 어려움 없이 집어오는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웠습니다.
청년의 삶이 세상에 소개되면서 꿈에 그리던 소망이 이루어졌습니다. 취직이 된 것입니다. 컴퓨터 디자이너로 말입니다. 자신이 멋있게 디자인한 학교 팜프렛을 자랑스럽게 펼쳐 보이는 청년의 모습이 너무도 행복해 보였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 서두에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외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후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흘러넘치도록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의 몇 백 배 몇 천 배의 것을 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지난 삶을 조금만 돌아보면 즉시 알 수 있지요.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얼마나 많다는 것을 말입니다.
결국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없는 것, 주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불평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하다보니 자신에게 부여된 모든 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재능이라도 최대한 발휘되도록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마치 오늘 소개해드린 두 발로 모든 것을 다 이루어낸 청년처럼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 실현 불가능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신뢰한다면, 그분의 자비를 믿는다면, 그리고 거기에 우리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하느님 앞에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청하는 것이 이웃의 선익을 위한 것이라면, 세상의 평화와 정의를 위한 것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자. -경규봉 신부-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마태 7,7-8; 18,19).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계명을 지키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항상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행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들어주셨음을 아셨다(요한 8,28-29; 11,42).
이 계명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을 믿고, 형제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형제에 대한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믿음은 사랑의 근거요 사랑은 믿음의 증거이다.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며, 하느님께서도 그 안에 계신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서 그리스도인 안에 계신다는 약속에 대한 하느님의 보증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각종 은사를 주셔서(갈라 5,22-23) 그들로 하여금 의롭게 행하고 서로 사랑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영을 대할 때에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잘 분별하여 받아들여야 한다. 스스로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던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이들의 등장은 종말론적 현상이다(2,18; 마르 13,22). 이들은 그리스도를 반대며, 그리스도인들을 거짓된 가르침으로 유혹한다(마태 24,11; 2테살 2,3; 묵시 20,10).
영을 분별하는 기준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것을 인정하는가에 달려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사람으로 탄생하셨다(1,1-2; 3,1; 5,1; 요한 1,12-14).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인간이신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하느님께 속하지 않고 거짓 영과 사탄의 지배를 받는 자이다. 하느님을 대적하는 그리스도의 적대자들이 이미 세상에 와 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적대자들에게 지배당하지 않고 그들을 물리친다. 이들은 거짓된 교리를 분별할 줄 알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이신 삼위 일체 하느님께서 이들 가운데 함께 하셔서 거짓 예언자들을 이기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거짓 예언자들은 세상에서 나왔으며 세상과 연합하여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복음에 반대되는 사상에 빠져, 거짓된 가르침을 전파하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려 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왔으며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고 있기에 그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진리의 성령과 사람을 속이는 악령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는 사람이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어떤 일을 하던지 사랑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며 판단한다. 설사 옳고 그름의 문제일지라도 그 밑바탕에는 사랑의 관점에서 판단한다. 때문에 그는 사랑이신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산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의 계명을 어길 수 없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곧 믿음과 사랑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지만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고, 이는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때문임을 굳게 믿고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더욱 더 사랑을 거스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사랑의 열매가 맺기를 기도하자. 마음속 깊은 곳에 하느님의 사랑이 자리하기를 기도하자. 우리 안에 가득한 사랑이 흘러 넘쳐 이웃에게도 전해지기를 기도하자.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며 판단할 수 있도록 성령의 은총을 간구하자..............◆
주님과 이웃에 좀 더 충실한 하루를 보내자. -경훈모 신부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은 새해 첫 날 어떤 결심을 하셨습니까?
수시로 자신을 반성하면서 더 열심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겠다. 그래서 가정에 좀 더 충실하고, 이웃과 더 좋은 관계를 만들며, 공동선에 나 하나라도 더 기여하는 삶을 살겠다. 이런 정도의 결심이면 신앙인으로서 어울리는 결심이 아닐까싶습니다.
오늘은 1월 7일! 새해 첫날 무엇인가 새로운 결심을 저마다 했다면, 오늘이 이른바 ‘작심삼일’째 되는 날 입니다. 말처럼 작심삼일로 끝나지 않도록, “나는 매일 새 각오를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하겠다.” 이런 작심이 한 번 더 필요한 오늘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심을 알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보여 주실 때가 왔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이 짧은 말씀을 나름대로 풀어보겠습니다.
“애초에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능력을 널리 잘 사용하지 못했음을 뉘우쳐라. 그래서 사랑의 원리만이 통하는 하늘나라의 삶이 이 땅에서부터 이루어지게 하라. 바로 너부터 그렇게 하라.” 이런 회개와 사랑 실천에 꾸준한 삶이 우리를 참된 행복에로 이끌어 줍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진정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끼고 신앙의 힘으로 삶의 길을 바꾼 두 분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멋진 선배요, 교회 밖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과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그 주인공입니다. 그들에겐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때’가 있었고, 그들은 그때를 잘 살렸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길에서 만난 나병환자를 안아주던 그 순간부터 회심하여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많았던 중세 교회를 쇄신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인도 캘커타에서 너무 불쌍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서, 당시 소속된 로레토 교육 수녀회를 떠나 가난한 이들의 벗, 사랑의 선교회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맨손으로 오직 예수님 닮은 사랑의 마음만 품고 가난하고 허약한 이들과 함께 했고, 전 세계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널리 전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때를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약자들의 동네 갈릴레아로 가셨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주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일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바로 이런 모습의 예수님을 그대로 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현재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가령, 전쟁의 상황 속에서 평화운동이 더 강력하게 전개되는 것이나 큰 자연재해를 겪으면서 환경운동이 설득력을 얻는 것은 그 좋은 예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응답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 상황과 모습은 어떻습니까? 사랑이 점점 메말라 가는 이 세상! 더 많은 사랑의 윤활류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삶을 보면, 사랑의 보물창고인 하늘나라를 차지하려는 열성은 나중 일처럼 보입니다. 지금 당장 내 일, 내 욕심 채우기에 급급해 베풀어야 할 사랑을 도리어 뺏어 오려고만 합니다.
그러니 사랑이 자꾸 고갈되어 세상이 더 삭막해져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지금은 세상일에만 열중하고,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 가서나 내 영혼을 돌보겠다고 합니다. 우리 신자 분들 중에도 이런 분들이 꽤나 많습니다. 그러기에 미사와 결혼식이 겹치면 미사는 나중으로 밀립니다. 아이들에겐 학원 선생님이 예수님보다 앞섭니다. 지적 양식이나 취미 , 교양을 위해 때론 건강을 헤쳐 가면서 하지만, 영적 양식을 위해서는 피곤하다고 뒤로 미룹니다. 아이들의 영혼과 인성은 성적표 다음 순위로 밀려납니다.
오랫동안 절에 다닌 불자가 말합니다. “스님, 제가 절에 다닌 지 벌써 삼십년이 넘었는데, 왜 절하는 모습이 이렇게 어색하지요? 예쁘지가 않습니다.” 큰 스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음...절이란 자고로 머리가 바닥에 닿아야 예쁜 법인데, 선생님은 뱃살이 오겹살이라 구부려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오만가지 욕심들로 가득 차 부글거리고 있는 그 뱃살부터 빼고 나서 절을 해보세요. 그럼 절하는 모습이 예뻐질 것입니다.” 옆에 있던 동자승이 깨닫습니다. “아하...절이란 하심(下心)이로구나! 곧 절이란 마음을 아래로 낮추는 훈련이요, 마음을 비우는 수양이로구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크게 성공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날그날 성실하게 사랑하며 살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오늘 하루도 새해의 각오를 계속 지켜나가는 성실한 하루였으면 합니다. 우리 영혼 돌보는 일과 하늘나라를 향해 한 발짝 더 내 딛는 그런 기분으로 주님과 이웃에 좀 더 충실한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허약함을 바치오니..
-이인옥-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셨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다. 요한은 남부 유다 요르단 강가에서 활동하였지만 예수께서는 북부 갈릴래아 지방을 최초 활동의 근거지를 삼으셨다. 흔히 요한만이 예수님 뒤로 물러나는 겸손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예수님이야말로 요한이 활동을 못하게 된 뒤부터, 그의 주 무대가 아니었던 곳에서 활동하시는 참으로 겸손하신 분이시다. 더구나 요한의 능력과 당신의 능력의 현격한 차이에도 말이다. 우리는 어떤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영역을 인정해주고 때를 기다릴 줄 알고 있는가? 물론 예수께서 갈릴래아로 가신 것이 그런 인간적 이유만은 아니었다. 이사야의 예언서에 언급된 대로 "이방인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 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부터 빛을 비추어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하느님 뜻 안에서(성서 안에서) 주 활동무대를 신중하게 고려하신 결정이다. 요한이 백성을 준비시키는 동안, 예수께서는 공적 활동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치셨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고,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에 승리하셨으며, 활동 장소도 신중하게 검토하시고 때를 기다리셨던 것이다. 하느님 일을 한다는 우리도, 이처럼 철저히 준비하고 있을까? "여러분은 회개하시오. 하늘나라가 다가왔습니다". 마침내 그분의 공생활을 한마디로 축약하는 말씀을 분명하게 선포하신다.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이 무슨 이야긴가? 이제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신다. 예수께서는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모든 질병과 모든 허약함을 고쳐주셨다. 여기서 순서는 아주 중요하다. 즉 먼저 하늘나라에 관한 가르침이 복음 선포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이 어떤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말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표징으로 치유활동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치유는 목적이 아닌 수단일 뿐,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마술적인 행위요 일시적인 신기한 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요즘도 정신적, 육체적 치유를 목적으로 예수께 오는 사람은 많다. 어느 기도 모임에서는 치유받고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다시 재발하거나 다른 곳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문제는 치유받기 위해서 복음을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살아야 지속적인 기쁨 속에서 치유도 부수적으로 얻는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병자를 말끔히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듣고, 온 나라와 이웃 나라에서까지 난치병 병자들이 모두 예수께 몰려온다. 그분은 그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며칠 전, 병원에서 송년미사를 드렸다. 병원 로비에 장사진을 이룬 환자들, 병실의 환자들이 생각난다. 그렇게 전국에서 몰려온 수많은 환자들에게 만일 예수님이 나타난다면? 그리고 여러가지 검사나 수술없이 한번에 고쳐주신다면? 게다가 비용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하늘나라(천국)가 바로 이땅에 실현되는 것 같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육체적 건강만이 행복의 다가 아닌가보다. 마태오복음에는 예수님의 활동 집약문과 열두 제자에게 권능을 주시는 대목에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독특한 표현이 하나 있다. 즉 예수께서는 "모든 질병과 모든 허약함을 고쳐"주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런 권능을 나누어주셨다(4,23;9,35; 10,1) 여기서 모든 허약함에 주목한다. 사실 질병에 걸린 사람이 많다지만 그보다는 건강한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러나 '허약함'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어떤 부분에서든 인간은 모두 나약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그분의 구원이 필요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셈이다. 마태오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손길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적 치유든, 정신적, 영적 나약성의 보강이든 어디까지나 하늘나라가 예수를 통하여 다가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그렇게 모인 사람들을 상대로 이제부터 중요한 가르침을 선포하시기 위한 준비 단계였음을 잊어선 안 된다. 다음 대목에서 곧 ’산상 설교’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게 되어라" 인간의 완성된 모습을 가르쳐주는 산상설교. 모든 이가 참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천국의 길을 가르쳐주는 산상설교. 그 완성의 길로 가기위해, 참 기쁨과 진정한 평화를 누리는 천국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그분의 치유의 손길에 끊임없이 우리의 '병고와 허약함'을 내놓아야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 가르침대로 살다가 또 다른 '허약함'이 드러나면, 다시 그분께 와서 그 약함을 채워야한다.
또 다른 허약함을 발견할 때마다, 그리고 그것을 그분께 가져갈 때마다,
그렇게 나의 생은 차츰 차츰 점진적으로 완성되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완전성에 다가가는 것이다.
예루살렘이 아닌 가파르나움
-박상대신부-
유럽교회가 1월 6일에 기념하는 것과는 달리 북미와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교지역의 교회는 어제 주일에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냈다. 오늘 월요일부터 주님세례축일까지 한 주간의 미사전례는 본기도 몇 개와 감사송을 빼고는 -물론 미사성가는 성탄곡에서 선택할 수 있지만- 어느 것도 성탄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 공현 대축일로 성탄시기를 마감하자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 주간에 봉독되는 미사복음이 주님 성탄과 별 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이번 한 주간도 분명 성탄시기에 속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자주 예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묵상하여야 한다. 한 아기가 갑자기 어른이 될 수 없듯이, 예수께서 어떠한 가정환경과 교육을 통하여 어른으로 성장하였고, 하느님 아들로서의 자의식을 키워나갔으며, 세상구원을 위한 가치관과 생활철학을 만들어갔는가 하는 점들을 묵상하는 것은 우리 영성에도 대단히 유익한 일이다. 비록 성서가 알려주는 예수의 어린 시절에 관한 보도는 단편적이지만(마태 2,23; 루가 2,39-52), 이러한 단편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의 나머지 20년간의 성장과 생활을 짐작해 볼 수 있으며, 이런 부분들을 우리 성장의 역사와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과 첫 전도여행에 관한 보도를 들려준다. 세례자 요한이 활동을 마친 다음 예수께서 비로소 활동을 시작하신 것이다. 그런데 요한의 활동종료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한 강제종료였다. 그것은 헤로데가 요한의 인기를 정치적 위협으로 여겨 두려워했고, 자신의 잘못된 혼인윤리관을 진언(眞言)하는 요한이 마음에 걸려 잡아 가두었기 때문이다.(12절; 마태 14,1-5) 그전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을 떠나 세례자 요한이 활동하던 유다지방의 요르단강으로 가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마태 3,13-17) 그후 예수께서는 유다의 어느 광야에서 40일간 지내시면서 활동의 때를 기다리고 계셨다.(마태 4,1-11) 요한이 잡혀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으로 다시 가셔서 가파르나움에서 활동을 시작하신 것이다.
왜 유다지방이 예수님의 첫 활동의 무대가 아니라 갈릴래아 지방이었을까? 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파르나움인가 하는 말이다. 우리는 먼저 마태오복음의 독자가 대부분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임을 알아야 한다. 마태오복음의 독자들이 모세의 율법과 구약의 예언서를 잘 알고 있는 유다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마태오는 독자들에게 예수를 구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하느님의 아들로, 구약 예언의 철저한 성취자로 가르쳐 갈 의도를 가지고 복음을 썼으며, 복음서에서 자주 "이로써 주께서 예언자들을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1,22; 2,14 등)는 예언성취도식을 사용한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태오는 이사야의 예언(이사 8,23-9,1)을 요약하여 갈릴래아에서 시작되어야 할 예수님의 공생활의 이유와 타당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14-16절)
"갈릴래아에서 올리브를 재배하는 것이 유다에서 한 아이를 기르는 것보다 쉽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갈릴래아 지방은 원래부터 비옥한 땅이었다. 여호수아기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즈불룬과 납달리 지파가 이곳 갈릴래아 지방을 유산으로 받았다.(여호 19,10-16. 32-39) 그러나 이 지역이 이사야 예언자 시대에는 이방인의 땅이 되었고 어두움이 드리운 땅이 되어 있었다. 기원전 933년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졌고, 기원전 721년 북왕조가 비옥한 땅을 차지하려는 앗시리아에 의해 망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이곳에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하느님 나라의 빛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빛은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으로 찾아왔고, 말씀과 기적은 곧 도래한 구원의 표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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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