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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chair)의 서정, 삶으로 향하는 반복의 힘
김학중
우리는 반복되는 것보다 새로운 것을 더 좋아한다. 새로운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고 감각적인 쾌락을 주기도 한다. 자기에게 익숙해진 것에 편안함만이 아니라 지루함도 깃들어 있다는 것, 그것이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를 이끌어내는지도 모른다. 현대 산업사회는 이런 우리들의 태도를 파고들어 ‘새로움’을 무기로 삼아 우리들의 일상을 공략해온다. 우리는 늘 신상품 앞에 놓이고 새로운 제품을 구매하라는 유혹 앞에 자신의 삶을 내맡기고 있다. 엄청난 양의 진열된 상품들, 그 상품들의 다양성에 매혹된 현대인들은 ‘새로움’을 상품들에게 위탁하고 그것을 구매하기 위한 삶을 꾸리기 위해 매일 고된 노동을 한다. 그러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진열될 수 있는 것인 마냥 과시한다. 하지만 그러한 삶 가운데에서 과연 어떤 것이 새로운 것인가? 그리고 과연 새로움은 그 자체로서 새로울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 앞에 자신을 마주하게 할 때 우리는 어떤 아포리아에 도달하게 된다. 거기서 우리는 반복이라는 말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반복은 즉각적으로 삶을 환기한다. 우리의 삶이야말로 우리에게 늘 반복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으로 구성된 우리의 신체가 그러한 삶에 반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이러한 삶에 대하여 우리가 사유하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움으로 향하는 일종의 에너지는 실은 삶에 대해 사유하는 것에 대한 방어로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이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묻는 질문, 그 질문에 대한 지향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것을 통해 삶 그 자체를 새롭게 할 수 있는가를 묻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그러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의 자리, 삶 그 자체를 새로움으로 반복하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리에 시가 자리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귀향”이란 바로 삶 그 자체를 새롭게 밝힐 수 있는 그러한 자리로 지향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시는 그러한 지향을 가능하게 하는 행위인 것이다.
“귀향”은 그러한 점에서 반복을 이미 내재한다. 이 부분은 현재 우리 문학에서 잊혀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리 문학에서 ‘새로움’이 이해되고 있는 것을 살피는 것으로 간략화할 수 있다. 우리 문학에서 ‘새로움’은 끝임없이 추구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유보되는 예술적, 미학적 가치로 이해되고 있다. 우리 시를 논의함에 있어서 최근까지 뜨겁게 논의되었던 ‘주체의 시대’에 대한 논의도 크게 보면 이 맥락에 위치하고 있다. 동시에 이는 문학사적 갱신이라는 우리 민족문학의 역사주의적 진보, 바로 이 거대한 테제에 기대고 있다. 이에 따르면 전통적 서정은 어떤 의미에서 역사주의적 진보에 따라 볼 때 충분히 지루해진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주의적 진보는 진보에 대해서 가강 깊은 사유를 펼친 헤겔과 마르크스가 왜 그토록 진지하게 반복에 대해 논의했는지에 대해서는 잊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 시에서 전통적 서정은 황무지와 같은 자리로 위치지어져 있다. 그러나 서정은 “귀향”을 동력으로 하는 본질적인 행위이다.
서정은 삶이 우리를 만지고 동시에 우리가 삶으로 향하게 하는데 매개로 작용한다. 그것은 우리가 겪은 각각의 경험들로 인해 축적되고 그것으로 인해 변하며 그 변화의 구체화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것은 객관화되지는 않지만 소통되는 가능성을 품는다. 서정의 이러한 가능성은 시로 발현된다. 그런 점에서 시는 우리의 살(chair)이 서정을 통해 육화된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여기서 살(chair)이란 미셸 앙리가 논하는 것으로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을 스스로 겪는 우리의 신체”(『육화, 살의 철학』)를 말한다. 앙리가 말하는 살은 그런 점에서 객관화되지 않는 신체이며 우리가 삶으로 지향성을 갖게 하는 그러한 신체이다. 즉, 서정은 그러한 살이 “스스로를 느끼고, 고통을 느끼고, 자신을 감내하”는 것을 통해 살에 축적되는 삶에 대한 지향성의 한 양상이라고 읽을 수 있겠다.
이러한 서정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반복을 내재한다. 삶에의 지향이 삶을 능동적으로 이해하도록 이끌어가는 힘이 바로 서정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서정은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문학에서 회자하는 그러한 서정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근본적 서정이야 말로 반복에 의해 새로움으로 지향하게 하는 힘을 야기시킨다고 볼 수 있다. 새로움에 대한 “귀향”,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은폐시켜 놓고 오래된 것으로 밀쳐놓은 서정의 근본적인 힘이다. 이를 여기서 살의 서정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이번에 살펴볼 윤중목과 김금희의 신작시에는 살의 서정이 엿보인다. 두 시인 모두 일상에서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단단한 서정을 구축해 보이고 있다. 윤중목은 기존에 발표한 시들에서 보여준 노동과 일상에 대한 구체적인 사유와 그에 기댄 비판적 시선을 바탕으로 시를 구축한다. 김금희도 2011년 등단 이후 서정시 고유의 미덕에 천착해오고 있는 모습을 이어간다. 그러면서도 여성적 시선이 지닌 따듯함 속에 자연과 사물,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아 단아한 시로 빚어 올리는 작법은 조금 더 세련되어지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두 시인의 신작시는 서로 명백하게 다른 색을 띄고 있다. 윤중목의 시는 남성적이고 약간 거친 그러면서 시적 화자의 거친 목소리가 그대로 묻어난다. 반면 김금희의 시는 단아하고 정돈된 아름다운 시어로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담아낸다. 그렇지만 이들의 서정은 살의 서정이 지닌 삶에의 귀향과 그로 인해 새롭게 드러나는 삶의 국면을 날카롭게 짚어낸다는 점에서 함께 논의할 만한 것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윤중목의 시를 보자.
눈밭 고단한 고단한
저 발자국을 보라
웅크린 어깨 위로
수북수북 쌓이는
캄캄한 새벽을 털며
단잠 깊은 아이들의
해말간 얼굴을 털며
일 나간 아비의 총총한
저 발자국, 발자국을 보라
발자국에 뽀득뽀득 묻어나는
아비의 흰 살점을 보라
살점 속에 꽉 들어박힌
한생 바친 노동의
피멍 진 못 자국을 보라
─「발자국」 전문
이 시는 눈이 많이 내린 날, 날이 밝기도 전에 어두운 새벽녘에 출근한 아버지가 남긴 발자국에 주목한다. 아마 이 발자국은 시인 자신의 발자국이거나 이웃의 누군가가 눈에 남겨둔 발자국일 것이다. 발자국, 그것은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반복해 옮기는 발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어떤 점에서 이동하기 위해 남긴 자취에 불과하다. 그것은 사실 그 이동의 맥락에서만 보더라도 “고단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은 아직 곤한 잠에 취해 있는 시간에 노동을 위해 몸을 일으켜 출근한다. 그는 “단잠 깊은 아이들의/해말간 얼굴을 털며” 눈길을 헤치고 간다. 그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 주변의 대부분의 가난한 아버지들의 모습이다. 그는 눈이 온 오늘 만이 아니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에도 그렇게 나갔을 것이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가슴을 찡하게 하지만 사실 시적으로 그리 새로운 발견은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맥락에서 삶은 우리를 먹먹하게 한다. 결코 멋지지도 새롭지도 대단하지도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가 지닌 힘은 바로 그러한 삶을 눈밭 속의 발자국에서, 그리고 그 발자국을 남기고 간 아버지의 신발에 묻은 눈에서 우리 삶의 반복성이 보여주는 작은 가치를 발견했다는 것에 있다. 그것은 아주 미세한 것이나 우리를 삶과 엮어주고 우리의 고통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을 그 누구의 삶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삶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아비의 흰 살점”이 바로 그것이다.
“발자국에 뽀득뽀득 묻어나는/아비의 흰 살점”은 아주 작은 살점이다. 게다가 그것은 내린 눈이 아니라면 드러날 일도 없는 살이다. 그러나 그 “흰 살점”은 눈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부이며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꽉 들어박힌/한생 바친 노동”을 드러내는 것이다. “흰 살점”에는 “한생”이 모두 담겨있다. 그러한 점에서 “흰 살점”은 단순히 일상의 경험 또는 일상의 노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삶 전체를 가리킨다. 고통과 고난을 견딘 살의 현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한 삶은 비가시적이며 동시에 가시적이다. 이를 윤중목은 강하고 단단한 명령조의 목소리로 환기한다.
이 뜨거운 서정은 그의 다른 시편에서도 잘 드러난다. 시인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술회하는 「돌잡이」에서는 삶 전체의 윤곽을 ‘돌잡이’를 통해 드러낸다. 시인의 현재의 삶은 조간신문에서라도 작은 위안을 찾지만 그것마저도 실패하는 삶이다. 또한 이웃들이 TV드라마에 열중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드라마 속의 환상이 주는 위안에 골몰하는 것에 냉소적이면서도 그들이 냉정한 현실에서 고통받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시인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은 지천명이 되어서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시인은 돌잡이를 이야기하면서 지금 현재의 삶에 대해 되묻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돌잡이」는 단순히 돌잡이를 이야기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새 나 훌쩍 지천명의 문지방에 올라선 나이거늘/남은 평생 이제라도 무언가 새삼 움켜잡으려 악쓸 것 없이/그저 또 공수거(空手去)로 살다 가면 되겠더란 얘긴데”라고 말하는 것은 다시 내일 마주해야 할 하루하루의 삶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긴 작품인 것이다.
삶을 반복하면서 그것을 새롭게 하는 것, 그 비가시적인 것을 우리 앞에 마주시키기는 것, 그것이 바로 살의 서정이 지닌 힘이다. 이러한 살의 서정은 시로써 우리에게 전달되는데 본질적으로 구전되는 것과 같이 그것이 이야기되고 그 이야기가 이야기됨으로서 드러날 때에만 우리에게 다가온다. 김금희의 시에서는 그것이 “설화(說話)”라고 표현된다. 여기서 “설화”란 일반적인 의미에서 설화가 아니다. 김금희의 “설화”는 “하다”라는 행위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설화”는 말함으로서 그것을 이야기화하는 것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김금희에게서 시 쓰기일 것이다.
“설화하기”를 통해서 삶은 구전된다. 그러한 점에서 삶은 내적으로 전달되지 못할 가능성, 즉 죽음의 그림자를 내포한다. 김금희의 시에서 이러한 죽음의 웅덩이가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을이 생기기 전부터 웅성거렸을 그는
달빛 없는 무덤보다 음산해 보였다
푸른 하늘이 뭔지 모르는 잿빛 얼굴에
접근금지, 오래된 금지어 같은 그는
자궁의 불안을 씻기려는 앳된 고사리손과
흔들리는 방망이의 불규칙한 동요와
나풀거리는 비눗방울과
흐느적거리는 푸른 이끼를
마법의 묘약처럼 삐끗!
순식간에 잡아 삼키는 하데스였다
─「둠벙을 설화(說話)하다」 부분
이 시에서 “그”로 의인화되고 있는 것은 “둠벙”이다. 시의 주석에서 알 수 있듯이 “둠벙”은 웅덩이를 말한다. 주산지의 풍경에서 발견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웅덩이는 죽음을 체화한 것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그것은 “마을이 생기기 전부터” 존재했고, “하데스”의 화신처럼 모든 것을 삼키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매장된 “달빛 없는 무덤보다 음산해 보”이는 것이다. 이 죽음은 생산하는 “자궁”과는 반대에 놓인다. 그럼에도 그것은 어떤 생명의 가능성을 환기하는 지점에 놓여있다. “주문 외듯 밤마다 읽어 내려간 동화/사과꽃 따라 큰소리로 환생해”라는 진술은 그러한 차원을 가리키고 있다. 시의 마무리에 보이는 “연꽃무늬 퍼지듯/텀벙텀벙 잘도 가고 있다”에 이르면 죽음은 “동화” 혹은 “시”를 통해 환생하는 것을 통해 우리를 향해 “텀벙텀벙” 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 이르면 “그”로 표상되는 죽음은 어떤 활달함까지 띠게 된다.
이러한 활달함은 「워메 너 그거 할라고야」에서도 나타난다. 이 시는 “잘 나가던 철강회사 사장 자리 내던지고/낙향해, 맘 상한 사람들 우산이 돼야겠다”고 해 고향에서 치매 노인들을 돌보는 한 사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노인 중 한 분의 죽음에 슬퍼하는 사내의 모습을 꽃 피기 전 “이슬방울”과 같은 진달래꽃에 오버랩시킨다. 그리고 나아가 진달래꽃에 “사내”를 일치시킨다. 그런 까닭에 애도의 분위기는 “신기루처럼 웃고 서 있는 사내”로 이러지면서 생명력과 생명력이 주는 위안으로 변모한다. 죽음은 우리의 삶을 대지에 귀속시키지만 다시 그 대지로부터 피어난다. 이는 자연의 법칙이다. 즉 삶의 법칙이다. 그런데 이는 김금희에게서 “설화하기”란 적극적인 시 쓰기에 의해 드러나는 그러한 자연적 법칙이다. 죽음과 삶을 겹쳐놓는 것, 그것을 시로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김금희에게 있어서 서정이기 때문이다.
“설화하기”, 그것은 그런 점에서 시화(詩話)하기이다. 그것은 죽음의 웅덩이에서 운동성을 지닌 삶을 꺼내오는 힘, 바로 그것을 말한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 삶에 “우산”이 되어 줄 어떤 위안이자 본질적인 위로이다. 그것은 「풀씨」에서 노래되듯이 생명을 품은 작은 씨앗일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게 될 것이다. “낡은 기차 바퀴 속 가을이/적조현상으로 가득한 영산강을 벗어나/풀씨를 묻을 수 없어 그만 철퍼덕 지나쳐 버린” 그러한 황무지 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 속에서도 다시 풀씨가 날고 어딘가, 누군가의 가슴속에 묻혀 새로 싹을 틔울 때까지 삶의 깊은 “둠벙”에 잠겨 있을 것이다. 「낙엽들의 퇴근」에서 낙엽에 오버랩되는 노숙자들처럼 어쩌면 그러한 삶은 늘 누추하고 보잘것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삶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무언가로 그것을 가리고자 할 것이다. 그것은 사막과 같은 것이며 오래된 웅덩이 같은 것이므로. 하지만 그 어떤 상품으로도, 드라마의 환상으로도 그것을 가릴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바로 그 누추함 속에서 구전되며 그것들은 우리가 가리고자 하는 그 어떤 새로움도 만들어내지 못할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살의 서정이 풀씨가 되어 다시 새로운 꽃을 피운다. 그 꽃들은 늘 피던 것이지만 늘 새롭다. 삶으로 향하는 반복의 힘. 시는 거기에서 항상 새로워질 것이다.
─문학 무크 『시에티카』 2013년 · 상반기 제8호
김학중
서울 출생. 2009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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