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도 디자이너도 작가도 ‘농업’에 꽂혔다
이젠 문화도 ‘농업 시대’
문화를 의미하는 영단어 ‘컬처(culture)’의 어원을 따라가면 경작·재배를 뜻하는 라틴어 ‘쿨투스(cultus)’가 나온다고 한다. 애초에 농업과 문화는 불가분의 관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농업이나 농촌에 주목하는 움직임이 요즘 들어 문화계 전반에서 다양하게 관찰되고 있다. 과거 농업과 농촌을 다룬 작품들은 대개 농업의 불합리한 현실을 고발하거나 농촌을 낭만적 이상향으로 그렸다. 이런 시선과 달리 최근의 흐름은 농촌을 도시와 단절된 공간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과밀한 도시, 기후변화 같은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키워드로 농촌과 농업이 주목받고 있다.
일본의 세계적 디자이너 하라 켄야가 주도하는 주거 문화 순회전 ‘하우스비전’이 2013·2016년 도쿄, 2018년 베이징에 이어 지난해 충북 진천에서 열렸다. 주제는 ‘농(農)’. 수도권에 과도하게 집중된 한국 도시 공간의 미래를 농업의 관점에서 전망한다는 취지다.
건축가 김대균이 설계한 충북 진천 ‘재배의 집’ 내부. 스마트팜 기업 만나CEA의 복합 문화 공간이다. ‘문화가 자라는 온실’이라는 개념을 담았다. /사진가 김동규
6명의 건축가·디자이너가 제시한 대안적 공간을 실물 크기 집으로 지었다. 특히 눈에 띄는 곳은 건축가 김대균이 스마트팜 기업 만나CEA의 복합 문화 공간으로 디자인한 ‘재배의 집’. 온실을 닮은 건물에서 식물원처럼 고사리가 자라고 만나CEA에서 키운 장어로 덮밥도 만들어 판다. 문화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있지만 공간이 부족한 농촌의 현실에 착안해 전시나 음악회, 결혼식을 여는 공간도 마련했다. “농사만 짓는 농촌이 아니라,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한번 살아보고 싶어지는 농촌”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크고 세련된 전원주택 대신 소박한 농막(農幕)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달 출간된 ‘주말엔 여섯 평 농막으로 갑니다’(사이드웨이)는 변호사 장한별씨가 한때 꿈꿨던 전원주택 대신 농막을 마련하고 ‘파트타임 취미 농부’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았다. LG전자도 이달 초 조립식 소형 주택 시제품을 공개하면서 5도 2촌(닷새는 도시에, 이틀은 농촌에 거주)처럼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주말엔 여섯 평 농막으로 갑니다' 저자 장한별씨의 농막 내부. 창 너머로 밭이 보인다. /사이드웨이
도시인에게 농업은 새로운 삶의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한다. 종일 모니터만 노려보는 게 아니라 정직하게 몸을 움직인 만큼 거두는 삶. 일본 소설가 다키와 아사코의 신간 ‘아스파라거스 꽃다발’(위즈덤하우스)은 그런 판타지를 정확하게 공략한다. ‘채소 소설’을 표방한 이 작품은 홋카이도의 감자, 군마현의 양상추처럼 실제 일본의 채소 명산지를 배경으로 “채소 기르는 여자들이 땀 흘려 일하고 맛있게 먹는 이야기” 8편을 엮었다. 주인공뿐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흙냄새를 맡으며 치유받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곡물집’에서 열린 토종 곡물 경험 워크숍. 곡물집은 소비자들이 토종 곡물을 다각도로 접할 수 있게 해, 명맥을 겨우 이어가는 토종 곡물의 현대적 쓰임을 발견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곡물집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충남 공주로 내려가 ‘곡물집’을 창업한 김현정·천재박씨 부부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 창업 당시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삶”을 꿈꿨고, 그렇게 사는 이들이 대부분 “뭔가를 스스로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걸 발견했다고 한다. 토종 농업에 주목한 것은 “유통·공급망에 덜 얽매이고 씨앗 관리부터 모든 걸 농부가 주체적으로 하기 때문”이었다.
토종 콩을 고르는 모습. /곡물집 제공
곡물집은 농부들과 협력해 토종 곡물과 관련된 경험을 다각도로 제공한다. 원두에 ‘등틔기콩’을 섞어 커피를 만들고, 소비자들이 토종 곡물을 하나씩 맛보며 느낌을 나누고 잡곡밥을 해 먹는 워크숍을 열기도 한다. 우리의 것을 지켜야 한다는 단순한 차원이 아니다. 천재박씨는 “이제는 잊혀가는 토종 곡물의 이야기, 뛰어난 맛과 향을 귀하게 여기는 시대가 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