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름들(2)
사도들은 모세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
내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고 부르자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마4:18-22).
예수를 따르며 함께 거함은 천국 백성으로 세워지는 일이다.
이는 모세의 말을 따르던 종(머슴)에서 예수의 말을 따르는 아들(자녀)로 세워지는 일이다.
이는 다윗왕국 백성에서 천국 백성으로 세워지는 일이다.
이처럼 예수의 제자가 된 후에 사도들은 모세의 말이 아니라 예수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
모세가 명한 성전제사나 십일조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라고 말한다(갈1:6-7).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 내용이 그러하며(마5:1-27, 23:1-39),
바울도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
곧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은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한다(갈1:8-9).
이는 모세가 명한 성전제사나 제사장 제도, 십일조와 같은 조항이나(갈4:1-3),
모세가 규정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지 말라는 경고이다(갈4:9-10).
왜 사도들은 모세율법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경고하는가?
모세율법으로 돌아감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기 때문이다.
왜 모세율법을 따라 행함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일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율법 아래에서 구원하신 일이기 때문이다(갈4:4-5).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 아래의 제자들과 백성들을
율법과 상관이 없는 하나님 아들(자녀)로 세우신 일이다.
그러므로 612개 율법 항목 중 하나인 십일조를 행함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일이다.
이는 종말의 하나님 뜻을 대적하는 일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유대교로 변질시키는 일이다.
하나님의 이름 : 엘, 엘로힘
하나님의 이름은 창세기 1장에서 최초로 언급된다.
창세기 1장에서 언급된 이름이 엘로힘이다.
엘로힘은 하나님께서 최초로 자신을 나타내신 칭호이다.
이는 창조 사역과 함께 언급되는 이름이다.
하나님께서는 엘로힘이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다.
따라서 엘로힘의 의미를 알고자 한다면 창세기 1장 문맥에서 생각해야 한다.
엘로힘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날에서 여섯째 날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세상 창조를 이루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세상의 창조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 일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지혜가 즉시에 구현된 일이다.
세상 창조는 세상의 기본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성부께서 만유를 공급하시고 성자께서 만상으로 빚으시며
성령께서 생명을 공급하셔서 완성하신 삼위 하나님 사역이다.
따라서 엘로힘은 하나님의 뜻과 지혜대로 세상 창조를 이루신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지으신 이름이다.
이는 인간을 통해서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케 하신 이름이다(창1:26).
이는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 호칭이다(창1:29).
이처럼 엘로힘은 인간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인간과 만물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이다.
하나님의 이름 : 여호와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은 창세기 2장에서 등장한다.
창세기 2장은 구원역사의 시작을 기술한다.
이는 창조된 세상의 경영 문제를 말하고 있다.
이는 창조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경영방식을 언급하고 있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함께 창조된 세상을 경영하심을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창조된 세상을 경영하는 일에 아담을 동반자로 세우신다.
따라서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의 세상 경영을 위한 동반자이다.
이러한 사실을 말하기 위하여 창세기 2장은 창조된 세상의 부족과 결핍을 언급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경작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들에는 초목이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창2:5-6).
그래서 여호와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자세하게 기록한다(창2:7).
여호와께서는 아담을 에덴의 동산에 세우신다.
여호와께서는 아담과 선악과를 금하는 언약을 맺으신다(창2:16-17).
선악과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체결된 협정이다.
이는 아담의 삶의 터전인 에덴과 아담에게 속한 창조된 옛 세상의 통치질서이다.
여호와께서는 언약에 신실하셔서 아담의 하나님 역할에 충실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언약 당사자인 아담도 여호와의 언약에 충실하기를 바라신다.
이러한 사실을 나타내기 위하여 창세기 2장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여호와께서는 창조된 세계를 그 완성으로 이끄신다.
창조된 세상을 경영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경륜은 인간을 동반자로 세우셔서 집행하신다.
이러한 일을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신다.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자신의 형상인 아담을 세우신다.
아담과 선악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를 돕는 배필로 하와를 지으신다(창2:16-25).
이처럼 창조된 세상을 완성하시려는 구원역사의 출발을 말하는 창세기 2장에서,
아담과 체결한 선악과 언약이 언급되는 창세기 2장에서,
아담과 함께 창조된 세상에 대한 경륜의 출발을 말하는 창세기 2장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집중적으로 언급된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하나님 이름은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 강조하고자 할 때 언급된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 언약을 파기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언약에 신실하셔서 아담의 하나님이심을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는 생명으로 함께 하셔서 아담의 자손들이 생육하고 번성케 하신다.
아담의 후손 가운데서 노아를 택하셔서 하나님으로 역사하신다(창6:8-10).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되심이 완성됨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은 노아와 아브라함을 거쳐서 모세에게서 열매를 맺는다.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선포하셔서 나라를 설립하시기 때문이다.
모세를 통한 경륜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심을 포기하지 않으신 결과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언약에 신실하신 결과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을 여호와로 나타내신다(출4:5, 6:2-9).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다.
나 여호와는 너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리라”
고 말씀하신다(출6:2-7).
이처럼 여호와라는 호칭은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심을 강조할 때 언급된다.
이는 창조된 세상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름이다.
옛 세상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나타내신 이름이다.
이러한 여호와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은 종말에 그 아들을 유대 땅에 보내심에서 완성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심이 종말에 그 아들을 보내심에서 확증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동류가 됨을 통해서 확증되었다는 말이다.
이처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이 된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으로 하나님이 되시는 일이다.
믿는 자의 아버지가 되심이 참으로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시는 일이다.
하나님 이름의 의미는 문맥에서 해석해야 함
하나님의 이름은 남성 복수이다.
그런데 하나님 이름이 언급된 문장의 동사는 단수이다.
왜 주어는 복수인데 동사는 단수인가?
어떤 이는 유대인의 종교는 유일신교인데
왜 하나님에 대한 호칭은 복수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하나님 호칭은 문법적인 구조나 문학적으로 생각하면 아니된다.
하나님의 호칭은 언급된 문맥에서 해석하는 것이 바르다.
엘로힘은 창세기 1장의 문맥과 말하는 바를 따라,
여호와는 창세기 2장의 문맥과 말하는 바를 따라,
하나님 이름이 언급된 문맥에서 해석함이 합당하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에서 자기를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이름의 등장은 하나님 자신의 나타남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주심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엘로힘으로 나타나심이 만물의 등장이다.
이는 엘로힘의 나타남이 만물의 창조로 귀결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창세기 1장에서의 엘로힘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안식일에는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이처럼 엘로힘에 대한 의미는 그 이름이 언급된 문맥,
곧 세상 창조를 말하는 창세기 1장의 내용에 한하는 것이 합당하다.
나중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신 위에 높으신 분으로,
곧 장엄의 복수 개념으로 언급된다.
그런데 엘로힘과 야웨와 같은 이름이 대명사처럼 사용되는 칭호가 아도나이이다.
아도나이라는 칭호는 70인 역에서 번역되어서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70인 역에서 사용되는 주라는 칭호를 사도들은 예수께 적용하였다.
구약에서의 구원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은 여호와를 찾고 의지한다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이 곧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에서의 구원은 모세 제도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이는 죄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는 구원과 생명이라는 말이다.
사도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으리라”
고 말한다(롬10:13).
베드로도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우리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고 말한다(행2:36).
여기에서 주라는 말은 그리스도라는 말과 등치개념이다.
이는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 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주라는 호칭의 핵심은 부활하신 주의 존엄함이다.
부활하신 주는 시내산에 나타난 여호와와 연결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광은 시내산에서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 정도가 아니다.
따라서 주라는 호칭일지라도 신구약에서의 의미가 다르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신약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이름에도 구원 역사적인 변천과 발전이 있기 때문이다.
신약에서의 하나님 이름
신약에서의 명칭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신약에서의 호칭에는 하나님, 주, 아버지가 있다.
이는 구약의 엘로힘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의미는 그 이름이 언급된 문맥에서 살펴야 한다.
하나님의 칭호가 언급된 문맥에서 그 의미를 살펴야 한다.
보통 “주”라는 칭호는 “여호와”의 번역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호칭은 여호와의 번역 정도가 아니다.
주라는 호칭은 단순히 예수를 가리키는 정도가 아니다.
이는 항상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연계되어서 언급된다.
예수에게 주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은 70인 역에서 언급된다.
이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변경한 호칭인 아도나이를
70인 역에서는 주라고 칭하였으며
이를 사도들은 예수께 대입하였다.
따라서 주라는 호칭은 부활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존엄함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하늘에 속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