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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수업>
글을 쓰기 시작하려니, 내가 올해 10기를 오겠다고 결정했을 때가 생각이 난다.
걱정반, 설렘 반, 누구나 일반적으로 느끼는 감정이겠지만, 그 때의 나에겐 좀 더 크게 다가왔다.
21살/ 22살에 학교를 다시 다닌다는 것은 큰 결심이었다.
이미 나는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다년간의 알바, 인턴 생활을 통해 충분히 사회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제 몫은 하고 사는데 왜 굳이 이런 과정을 겪어야하나 의문이 들었었다.
그러나 고집이 쎈 내가 하반하를 못 이기는 첫 결정했던 이유는 , 아마 나도 미래에 대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내가 사실은 좀 불안했던 것 같다.
12살에 아빠가 암으로 돌아가신 후로, 우리 집은 불행하고 가난하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상실감은 컸고, 그 아픔은 점점 나를 갉아먹었다.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던 아빠가 사라지자,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집이 집 같지 않고 불편하기만 했다.
나와 엄마, 동생, 남은 가족들을 모두 우울증에 걸렸다.
그 때의 엄마는 마흔세였고, 동생은 4살이었다.
우울한 엄마를 감당할 수 없었고 어린 동생은 자꾸만 아빠가 어딨냐고 보챘다.
이런 모든 상활이 힘겨워 나느 겉돌기 시작했다.
무기력해진 나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중학교 땐 3년 내내 전교 꼴찌라는 엄청난 기록도 세웠다.
그래도 그 때까진 최악은 아이니었다.
나의 큰 변화는 고등학교 시절에서 생긴다.
공부에 기초가 없어서 자연스레 특성화 고등학교, 즉 상고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곳은 정글이었다.
온 동네에서 이름 난 문제아들이 모인 곳이었다
고작 공부 못 한다고 올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부분이 교복 입기를 거부했고, 교식 바닥에 침을 뱉었고, 싸움은 일상다반사였다.
그리고 당연히 왕따도 존재했다.
문제아 학교서의 왕따의 삶은 지옥과도 같아보였다.
그 아이는 고개들어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욕설을 듣고 맞았다.
그랫 그 아이든 절대 책상에서 고개를 들지 않고 엎드려만 있었다.
나는 그 대상이 내가 될까봐 앝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치마를 짧게 줄이고, 화장을 진하게 하고, 그들이 술을 마시면 술을 마셨다
매일을 그런 아이들과 어울려 다닐느라 허비했다.
매일 ᄁᆞᆯ깔 웃으며 노래방에서 노래하는 것과 피시방에서 게임하는 것은 내게 생존이었다.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 때의 난 매주 심리상담을 받았고, 정신과에서 약도 받아먹었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암울했다.
분행 중 다행인 건 학교 내신 관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2.0이란 좋은 내신을 갖고 기계과에 입학했다.
아직까지도 그 때의 내가 무슨 생각으로 기계과를 썼는지 모르겠다.
목표와 목적이 없었다.
또한 한 번도 희망찬 미래를 그려본 적이 벗어 아무거나 눈에 보이는 걸 선택했던 것 같다.
그리고 결과는 F, 학사경고였다.
등록금은 등록금대로 내면서 그것은 엄마의 돈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학교 대신 아르바이트를 택해 일만 했다.
돈을 버리면서 돈을 번 셈이다.
1동 동안 주 7일, 하루 최소 12시간씩 일했다.
당연히 몸은 지쳐갔고 점점 신경질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쯔음, 엄마는 하반하를 내게 권하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은 이러해다.
“어차피 너랑 나랑 같이 살면 우리 둘 다에게 불행인 것 같다.
얼굴 안 보고 살면 우리가 좀 더 자유로운 수 맀지 않을까. 돈 내주ㄹ테니 새악해봐라.
그리고 이게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투자임을 기억해라.”
그 때의 엄마는 나로 인해 많이 지쳐있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거절했다.
돈을 벌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3000만원이라는 돈을 쓸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와라와라’라는 이자카야 술집에서 일할 때였다.
이미 너무 지쳐버린 나는 입만 열면 짜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방 실장님께서 화를 벌컥 내셨다.
“수경씨, 제발 그만 좀 하면 안될까?
사람이 어쩜 이렇게 부정적이야?
나는 수경씨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오는 걸 들은 적이 없어.
입만 열면, 오늘 너무 바빴다.
힘들다, 피곤하다, 니쳤다, 짜증난다-
주변 사람들까지 힘 빠지게 왜 이래?
참 함께 살기 힘들다.”
안 그래도 몸이 너무 지쳐 악바리로 버티던 때라 그 순간 발끈했다.
그 자리에서 한참은 싸우다 그만뒀다.
그 즈음 투잡으로 ‘봉구비어’에서도 일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도 사장님이 나를 째려본다고 대판 싸우고 한 달만에 관뒀다.
또 그 즈음 친구들이 내 곁에서 하나 둘씩 떠났다.
나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내 곁에서 하반하는 나의 마지막 도피처였다.
왜 내게만 불행한 일등이 계속 생기는 것인지, 세상이 싫어졌고 신을 원망했다.
나의 문제점을 고칠 생각은 한 번도 안 하고, 밖에서 원인을 찾았다.
오랜 우울과 분노가 나를 지배하고 있던 그 때 하반하 9기를 시작했다.
‘여행’이라고만 알았지 ‘학교’인지는 나중에 알았다.
그냥 학교라는 이름만 달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여행단체인 줄 알았다.
그럼에도 나는 빠르게 적응했다.
일기를 쓰라고 하면 썼고, 영어공부를 하라고 하면 했다.
설거지도 시키면 순순히 했다.
하반하의 모든 일정이 처음부터 그리 어렵진 않았다.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단체생활이었다.
이 것에도 내가 잘나고 쎼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말을 예쁘게 않게 했고 모두를 깔봤다.
나는 처음부터 비호감을 사고 시작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나쁜 짓을 일 삼던 나는 도덕성이 낮았다.
규칙에 협조하지 않았다.
핸드폰이 금지인 학교에서 나느 가져가야겠다고 바락바락 우겼다.
또한 가장 금기인 연애까지 했다.
선생님들께 수차례 혼 나고 경고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연애했다.
항상 남자에 목말라있던 나는 고등학생 때부턴 한 순간도 연애를 쉬지 않았다.
관계를 어떻게 하는지 몰라 주변에 사람이 없던 나는 남자친구와만 관계를 맺었다.
그런 내게 써니쌤, 대장님께선 화가 극에 달하셨다.
거의 매일 혼났던 것 같다.
써니썜의 기분이 안 좋으니 다른 아이들은 점점 써니쌤의 눈치를 많이 보았고 그들이 써니쌤께 혼나는 날에 수경형님 때문에 화나신 거 우리한테 푸신다고 나를 미워했다.
아이들의 멸시가 힘들어서 더더욱 남자친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 멸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악착같이 공부하여 정산했고 워커할 때도 자기할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려 노력했다,
나보다 일 잘하는 세훈이와 호준이, 영어를 더 잘하는 민석이와 민수에게 지지 않으려 치열하게 경쟁했다.
물론 내면에서만 일어난 분쟁이었다.
그래도 노력한 덕에 자기 할 일을 잘한다는 평을 받았다.
아이들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내게 묻기 시작했다.
그런 인정들이 암울한 나를 조금씩 일으켰다.
또한 사고만 치는 나 같은 사람을 계속해서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선생님들을 보고 따뜻함을 느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며 나는 점차 변해갔다.
그 사람들은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살면 좋으지 끊임 없이 알려주었다.
사람을 믿어라, 사랑해라, 기도해라, 긍정적인 생각만 해라,
그 말씀들을 1년간 매일 들으니 나는 어느새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항상 아이들의 눈총이 따가웠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미소도 보여줬다.
일도 늘고 정산도 잘했고, 아이들고 sop 마음을 푸러주어 뭐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도 얻었다.
그러게 9기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나의 변화를 빨리 엄마께 보여드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기쁜 마음으로 살았다.
여행 끝을 2주 남긴 날, 써니쌤께서 우리 모두에게 질문 하나를 던지셨다.
“부모자신 관계, 사제관계, 교우 관계 등 모든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이다.
우리는 1년간 함께 산 가족인데, 이 중에 어령무에 처했을 때 열일 제치고 달려와줄 사람이 있니?”
이때 아이들은 하나 둘 씩 손을 들며 그들만의 신뢰 관계를 자랑했다.
잘 살고 있던 내게 큰 충격이었고 나는 다시 우울해졌다.
1년이란 긴 시간 동안 한 사람도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 잘못 살아왔다고 느꼈다.
또 한 번 여행 끝나기 이틀 전의 일이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덕담을 주고 받던 때였다.
다들 올 한 해 고마웠던 점 변한 점, 작별인사를 나누던 때에 도윤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수경형님은 올해 내내 이해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해가 안 돼요.
이틀 남았지만 서로 이해해보도록 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내가 정말 관계를 못 맺었구나- 하는 씁쓸함이 몰려왔다.
어차피 곧 끝나니까 더 이상 매일 얼굴 볼 일은 없을테니 괜찮다며 자위했다.
이 날엔 또 다른 일도 있었다.
비상파티 준비로 정신이 없었던 때라, 다들 일기를 미뤘다.
고작 한 명인 것에 크게 실망하신 써니쌤꼐서는 무척 화를 내셨다.
“1년간 매일 같이 성실하라, 꾸준해라 가르쳤거능 너희는 자유가 주어지면 이렇게 행동하는구나.
너희는 하반하가 끝나 사회에 나가면 절대 배운대로 살지 않겠구나.
9기는 실패작이다.
매년 열심히 교육했지만 너희처럼 교육의 효과가 없는 애들은 너희 기수가 처음이다.
안타깝다.
앞으로 이틀 남았는데 잘 살다 가고, 사회에 나가서는 그리 행동하지 말아라.”
속상했다.
나는 여전히 남의 말에 쉽게 휘둘리던 사람이라 그 말에 쉽게 동요됐다.
내가 마치 실패작이 된 것 마냥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왜 어제 일기를 안 써서 써니쌤께 실망을 안긴거지?
그렇게 잘보이고 싶어했으면서.’
하며 자책했다.
그래, 비록 실패라고 말씀은 하셨지만, 사회에 나가 잘 사는 것만이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며 마지막을 맞았다.
또 한 번은 여행이 끝나기 이틀 전의 일이었다.
돌아가면서 덕담을 나누던 날이었다.
다들 올 한해 고마웠던 점, 변한 점, 작별 인사를 나눴다.
내 차례가 되고 막내 사랑이부터 덕담을 시작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은 내게 웃는 얼굴이 보기 좋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아하니 잘 살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맨 마지막, 대장님의 차례가 되었다.
대장님께서는 웃으며 말씀을 시작하셨다
“너희들 눈엔 쟤가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보이냐?
그렇다면 너희는 1년간 사람 잘못봤다.
내가 본 수경이는 이 중 가장 겁쟁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쟤가 저렇게 눈치보며 손톱을 물어 뜯겠냐..
수경아, 네가 진정으로 사람 마음을 알고 불안해하지 말고, 사람 믿고, 그렇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이 말씀을 듣고 벙쪘다.
그제야 내가 진심이 아닌 ‘척’이었던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나는 9기에서 긍정적인 마음과 성실히 사는 법을 배웠다.
그l고 관계를 어떻게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ㄱ러나 이 모든게 생존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진심이 없었던 나는 관계가 어려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9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땐, 이제 잘 살아보겠노라 의욕에 가득 찼다.
특별한 경험을 했으니 멋진 새인생을 살 줄 알았다.
뭘 하고 살까 고민해보기 전, 1년 간 밀린 뉴스와 연예인 근황을 찾았다.
핸드폰을 딱 손에 잡자, 억눌려있던 무언가가 화악- 터지는 느낌을 받았다.
핸드폰을 그만 두고 생산적인 일을 해야한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았지만 손이 멈춰지지 않았다.
컴퓨터의 알고리즘은 대단했다.
어찌 그리 내가 흥미로워하는 주제들을 스크린에 띄워주는지,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핸드폰 스크린을 보고 있자미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여행이 끝난지 얼마 안 됐으니 보상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웠던 친구들도 만났다.
만나러 가는 길, 그들에게 얼마나 내가 멋진 경험을 했는지, 얼마나 달라졌는지, 앞으로 어떤 생각을 하며 살지 말해주고, 그들의 생각도 듣고 싶었다.
그새 얼마나 변했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나의 친구들의 모습은 내 기대와는 달랐다.
아니,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나는 만나서 안부를 전한 후,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뭘 할 계획이야?”
친구 넷을 만났는데 그들 중 누구도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진 이는 없었다
은희(가명)는 쉬지 않고 회사 상사 욕을 했고, 그러면서도 떄려칠 용기가 나진 않는다 했다.
이렇게 단순한 서류작업만 평생 할 것은 아니지만 일단 눈 앞의 방법은 없으니 그냥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은희는 알콜 중독이었다.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못했다.
어쩌면 퇴근 후 남자들과 어울리며 술자리 갖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인생의 낙이 되었나보다.
안타까울 뿐이었다.
수현이(가명)는 자신이 우울증이라고 말했다.
2년제 전문대를 졸업하고 간간히 이력서를 내며 챤의점 알바를 하고 있다고 했다.
말만 이력서를 내는 것이지 사실상 집에서 헛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 했다.
한 번은 스타트업 화장품 회사에 취직을 하고는 일주일 만에 관뒀다.
사장님이 자신에게 너무 많은 간섭을 한다는 이유였다.
또한 수현이는 3개월 째 편의점 알바를 하며, 나와 통화하는 날엔 점장, 점장의 딸, 손님들의 욕을 1시간 동안 늘어놓았다.
인생에 대한 불만이 많은 듯 했다.
매일 같이 술 먹자는 연락도 왔었고, 100된 남자친구와의 불화를 들어달라는 요구도 있었다.
그 남자친구와는 3개월 간 50번 헤어졌다 한다.
남자친구와 헤어지면 술 먹자고 연락 오고 다시 재회하면 연락두절 되었다.
남자에 의해 쉽게 흔들리는 듯 했다.
그녀 옆에서 나는 점점 지쳐갔다.
민채(가명)는 대형 화장품 회사 판매직에 일했다.
매일 전화를 돌리며 화장춤을 홍보하고 피부관리 받으러 센터에 오시라며 설득했다.
인센티브제인 영업직을 버티기 버거워보였다.
나는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화장품을 팔아주고 함께 영업도 뛰었다.
이 힘든 시기를 같이 견뎌주는 것이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그녀를 위해 돈도 빌려주었다.
그 돈은 나의 약 두달치 생활비였으나 괜찮았다.
나는 아직까지 모아둔 돈에 여유가 있었다.
그녀는 일이 뜻대로 안 풀리는지 갚겠다고 한 기한을 계속 연기했고, 점점 표정의 생기도 잃어갔다.
사회인들이 다 그렇지 뭐-하며 이해해볼 했으나 점점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갔다.
같이 힘든 시간을 버텨주고 싶었는데 마음이 떠나는 내 모습이 싫었다.
죄책감이 생겼다.
지희(가명)는 그나마 괜찮았다.
나름 인서울 4년제 대학을 다니며 평범한 대학생의 역할을 독특히 해냈다.
학점 관리도 열심히 했으며 주말엔 알바도 하는 듯 했다.
아주 성실했고 그 모습은 지극히 일반적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괴리감을 느꼈다.
우리 중 그녀만이 부모님이 두 분 다 멀쩡하셨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주변에 있는 친구들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고, 집을 나가고, 결국엔 이혼을 했다.
내 주변엔 온통 불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뿐이었다.
그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를 투영해보았다.
그 모습이 내 모습이라니.
나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 꿈꾸는 인생을 살고 싶었는데, 그들은 나는 이상하게 보았다.
대학을 다니던가 돈을 벌던가- 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했다.
죽어있는 영혼들이 말하는 것 같았다.
얘네들이 내 친구라니.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었던 것일까.
작년과 마찬가지로 나는 시작점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22살, 2년차 – 이 타이틀에 대한 타이틀의 기대에 부흥하려 애썼다.
마지막까지 에너지 잃지 않고 멋지 형님으로 기억되려 노력했다.
올해 매일 한 기도제목 중 하나는 ‘모두에게 아쉬운 사람되기’였다.
10기가 끝나고 너와 헤어지는 것을 모두가 아쉬워하면 좋겠다 생각하여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어떤 일이든 나서 궂은 일을 도맡았고, 굳이 안 해도 되는 일까지 하며 내가 쓸모있는 삶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나에게 이렇게 살라고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과하게 힘쓰며 살았다.
그렇다고 체력이 좋지도 않았던 탓에 금세 지쳐갔다.
스스로가 만든 부담감이 어깨를 눌러 무거운 짐은 짊어지고 살았다.
잘하려는 마음은 앞서는데, 결과는 잘 따라주지 않을 때마다 좌절했다.
자책하고 남을 미워했다.
아이들이 보기엔 정산도, 워커도, 리더의 역할도 문제 없이 척척 해내곤 했지만, 나는 내 속의 감정들과 씨름하는데에 꽤 오랜 시간을 썼다.
가장 큰 형님, 1번으로 1년을 살며 수많은 감정들과 부딪혔다.
그리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도, 힘들게 하는 것도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나를 데리고 사는 일이라 한다.
나란 녀석은 언제 어떻게 마음이 변할지, 영문 모를 감정들이 수욱! 차고 올라와 지배할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건 나를 잘 파악하고 통제하는 연습을 했다.
올해 느낀 이 감정들은 하반하에서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릴적 학교와 학원에서 만나는 친구들에게도 같은 감정을 느끼곤 했었고 그 때마다 무너졌었다.
올해 그 감정들을 마주하지 않는법, 다스리는 법, 빨리 내보내는 법, 종국엔 행복해지는 법을 배웠다.
그런 후에 나는 좀 더 가벼워졌음과 자유로움을 느꼈다.
어딘가에서 해방된 것 같았다.
어쩌면 이 감정들을 하반하가 아닌 다른 환경에서도 조우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더 이상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우물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란 것.
<1.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질 때가 있다.>
작년 9기 여행에서 처음 만난 해인이는 내가 사랑하는 친구이자 선생님이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해인이는 내게 동갑 친구를 만나 기쁘다며 잘해보자 하였다.
9기 여행 초,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방황하던 내게 해인이는 끟임 없이 좋은 얘기들과 생활 꿀팀을 주었다.
내게 유익한 말들이었지만 귀에 크게 들어오지 않은 것은 내가 해인이를 좋게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동갑인 선생님이 있다는 것이 내 심기를 건드렸었다.
자존심이 상했으면서, 그렇지 않은 척 연기를 하려니 당연히 행동은 좋게 나가지 않았다.
한 번은 내가 하반하에서 금기인 와이파이를 사용하다가 들킨 적이 있었다.
그 때 써니쌤께 혼나며 들었던 소리는, 내가 이러면 이럴수록 해인이가 힘들어진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해인이는 본인이 선생님이니 관리를 해야하는 걸까, 친구니 봐줘야 하는 걸까- 하는 딜레마에 계속 힘들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사건을 계기로 해인이와 나는 3개월 간 사적인 대화 없이 살았던 것 같아.
시간이 지나며 나는 조금씩 변화했고 그 과정 속 자연스레 우리의 얼음장 같은 관계는 녹아갔다.
마지막엔 모든 것을 서로 나눌 정도로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그런 친구와 10기를 함께 할 생각에 기뻤다.
우리는 여자애들 사이에서 좋은 본보기가 되려 애쓰며, 분위기를 잘 이끌어갔다.
생각보다 순조롭게 일이 잘 풀려갔다.
내가 주가 되어 애들을 이끌며 갔으니, 그것은 완벽하게 내가 그린 모습 그 자체였다.
학생들과 선생님들에게 인정받으니 나는 무척 신이 났다.
그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해인이의 일까지 내가 독차지하려 했다.
해인이는 이미 역할을 잡았으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해인이는 그런 나를 좀 더 돋보이게 하주려 한걸음, 한걸음 뒤로 물러서다보니 우울해졌다고 한다.
해인이는 그 때, 요즘 갈피를 못잡겠다고 나와 자신의 역할이 큰 차이가 없으니, 선생의 역할을 잘 못해내고 있는 것 같다며 고민을 말해왔다.
큰 고민이 었을텐데 그때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3년차 교사이니, 이미 인정받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지도 못한채, 나는 신나게, 해인이는 우울해하며 계속 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즈음, 종하쌤과 합류했다.
나는 작년부터 쭉 거의 매 순간 하반하 스템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줄곧 들어왔다.
나는 엄마가 저렇게까지 원하시는데 꼭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0기 스텝이 좌절되었을 때 나는 체념했다.
학생 1년 잘하고 그 후에 기회를 다시 잡아보겠다고 생각했으나 주변의 여자스텝들을 보며 점점 마음이 불편해져갔다.
제주도 걷기여행 때였다.
그날은 특히나 더운 날이었고 3일간 샤워를 못했을 때였다.
더군다가 비가 온다는 소식에 리조트에 들어가기로 했으나, 가는 길엔 엄청난 등산을 했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날씨가 습해 점점 내 몸은 물 먹어갔고 13kg의 내 배낭은 나를 고문하는 도구였다.
그렇게 고생하여 도착했을 때의 나의 예민함은 극에 달아있었다.
방멤버를 정하는 과정 중 종하쌤은 해인이와 상의해야하니 내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나오라고 하셨다.
평소였다면 대수롭지 않게 비켰을텐데 그 날은 왜 그리 기분이 상했었는지.. 이 뿐만이 아니었다.
세환이가 부모님의 카드를 잃어버리는 일이 있었다.
종하쌤, 지영쌤, 해인이는 바쁘게 핸드폰을 잡고 무언가를 계속 터치했다.
나는 “무슨 일 있어요?” 라고 물었고 돌아오는 대답은 “너는 몰라도 돼” 였다.
나는 그 순간부터 무시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번 그렇게 생각해버리니 끝도 없이 안 좋은 생각만이 떠올랐다가.
왜 나는 14살짜리 사랑이와 같은 대우를 받는지, 왜 저 셋은 방에 들어가 깔깔대는데 나는 단어와 독해를 해야하는지, 다들 늦게까지 핸드폰 하다 잠드는데 나는 11시에 꼼짝 없이 자야하는지, 알 수 없는 분노에 찼고, 질투에 몸서리쳤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학생들 사이에서 진실된 내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나마 여자 선생님들이라고 생각했던지라 속상함이 컸다.
멀리서 들리는 그 속닥거림 소리에 질투가 났던 나는 그 감정을 그들 탓으로 돌리며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달 후 해인이 동생 정인이가 스텝으로 합류했다.
이번엔 나보다 어린 선생이 생긴 것이다.
나이 서열을 중요하게 여기는 하반하임에도 스텝으로 온 정인이보다 뒤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봐도 정인이는 멋진 여자였다.
키는 175cm가 넘고 힘은 장사였다.
미술 전공으로 자신의 프라이드를 하나 갖고 있었고 모든 일을 완벽히 해냈다.
나는 나보다 어린 동생이 모든 걸 해내는 탓에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다.
그 날은 어김없이 여행에 나갔다 들어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우리의 프로젝트란, 여행 보고서를 뜻한다.
코로나로 해외여행에 나가지 못한 우리는 한 두달에 한 번씩 2-3주 정도 국내 여행에 나갔다.
여행의 주제를 잡고 나가서, 학교에 돌아왔을 땐 그를 토대로 보고서를 쓴다.
나무로 된 판자 위에 지도를 그리고, 또 그 위에 핀을 찍어 우리의 목적지들을 표기한 후, 그 위에 설명을 쓴다.
이 ㅈㄱ업엔 기획력, 글솜씨, 미적 감각 등이 필요하다.
이 중 어떤 것에도 큰 재능이 있었던 것이 아닌지라, 우리는 기한 내에 못 만들어냈고, 수정의 수정을 거득하곤 했다.
때는 2번 째 여행이었던 남해안(전라도/경상도 넘나들기) 프로젝트 진행 중이었을 때다.
2주 간의 여행을 토대로 3주 째 만들고 있자 써니썜께서 화가 많이 나셨다.
내게 말씀하시길
“실력도 없으면서 왜 고집을 부리니!
부족한 거 알면 실력있는 정인이에게 도움 받아!”
3주 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속상하긴 했으나 그럴 틈이 없었다.
일단 빨리 도움을 청해 어떤 디자인이 최선일지, 무엇으로 붙일지를 구상했다.
정인이의 도움 덕에 무사히 프로젝트는 넘어갔지만 허무함이 밀려왔다.
나는 여자 학생들, 여자 선생님들 사이에서 겉돌았다.
다들 내게 잘해줬지만 나는 그들이 그저 ‘척’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호의를 무시했다.
내가 ‘척’하는 중였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던 것이다.
아니, ‘척’조차도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숨긴다고 숨겼지만 내 표정과 말투에서 다 티가 났을 것이다.
나는 미성숙하게도 감정을 다 티내며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초반과 다르게 행동하고 표정이 계속 굳어있던 나를 써니쌤께서 부르셨다.
그리고 물으셨다.
“수경이 요즘 뭐가 문제라 그렇게 표정이 굳어있니”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써니쌤의 딸인 종하쌤과 직원인 지영쌤, 해인이가 밉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계속 마음이 답답하던 나는 결국 돌려돌려 털어놓게 되었다.
“저는 제 마음이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자꾸만.. 질투가 나요.
나보다 잘난 그들이 싫어져요.
잘 지내고 싶고 함께 어울리고 싶은데, 바라보기만 하면 괜히 미워져요.
제가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고, 미워하는 제 자신이 미워요.”
나는 말하며 알 수 없는 감정에 울컥하여 목소리가 떨렸다.
사실 나는 그러고도 같은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우리는 2학기가 시작되면 번호순으로 써니쌤과의 개인 상담이 진행된다.
남은 5개월을 어떻게 지내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있고, 계획에 대한 구체화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나는 ‘관계 문제’와 ‘감정’에 대해 고민했고, 써니쌤께선 좋은 해결책을 주셨다.
마지막엔
”네가 스텝이 되고 싶다는 건 알지만 아직이다.
내일 재경이에게도 말하겠지만, 사실 난 재경이와 내년에 함께 일 할 생각이다.
재경이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진 않아도 성실하고 신뢰가 가거든.
재경이가 동의할지 거절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재경이는 옵션을 하나 갖게 된 거지.
하든 안 하든, 사람은 항상 옵션을 갖는 것이 좋아.
수경이는 아직까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글도 2학기 잘- 생활하여 꼭 같이 일하다는 제안 받길 바래.“
라고 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다음 날 재경이를 상담하시며 내년을 잘 부탁한다고 하셨다.
재경이는 크게 기뻐했으나 한편으론 고민하는 듯 했다.
하반하엔 사생활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한 재경이에건 국방의 의무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고민을 듣고 이해는 했지만, 복에 겨운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질투 2탄이 시작되었다.
그 소식 후로 나는 모든 상황에서 재경이와 비교하기 시작했다.
재경이는 나와 위치가 비슷해서 결차는 일정이 많았다.
이벤트를 준비할 때도, 어려운 영어 수업을 들을 때도,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항상 재경이와 함께 했다.
서로 돕고 의지하기 바쁠때에 속으로 엄청난 경쟁을 했다.
재경이보다 단어 1개 더 외우고, 재경이 공부 시간보다 적어도 5분 더 많이 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재경이보다 더 빨리 달려가려 했다.
아이들과 함께 팀을 짜는 일이 생긴다면, 재경이네 팀보다 돋보이려고 애썼다.
나는 이렇게 옹졸한 마음을 쓰며 매순간 견제했다.
착한 재경이는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나를 견제하지 않는 재경이를 보며 내가 경쟁력 없는 사람인가 걱정하기도 했다.
3번 째 여행 ‘자전거 국토 종주’ 때가 생각난다.
여행이 시작된다는 것은 곧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3번 째인만큼 잘 해내고 싶다고 다짐하여 여행 시작과 동시에 수뇌부를 뽑아 회의에 돌입했다.
제주도, 남해안, 국토종주 모두 나와 재경이는 수뇌부를 맡았다.
프로젝트에서 수뇌부의 역할은 여행의 주제를 잡고 그에 대한 의견과 느낀 점을 아이들에게서 모은다.
그것들을 토대로 판을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지 구상하고 재료를 결정하고 만든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총소감문이다.
여행의 느낀점을 긴 글로 풀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수뇌부 중에도 역할을 나눴다.
크게 총소감문, 아이들의 짧은 글들 첨삭, 사진, 그림 등으로 나눴다
2번 째 여행에서 재경이는 총소감문을 맡아 훌륭히 해냈다.
그 부분을 써니쌤께서는 크게 칭찬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3번째 여행 회의를 하고 있을 때, 써니쌤께선 재경이를 수뇌부 회장을 시켜주라고 하셨다.
그 때 재경이에게 졌다- 라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무엇이 부족했는가- 한참을 생각했으나 내 스스로 이유를 찾긴 어려웠다.
한참을 생각했으나 내 스스로 이유를 찾긴 어려웠다.
‘그 글을 내가 쓴다고 하고 재경이에게 판 다지안을 맡길 걸 그랬나?’
‘재경이가 어느새 저렇게 글솜씨가 는 거지? 책을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
‘내년에 스텝 오니까 써니쌤이 밀어주시는 건가’ 하는 생각들이 머리 속에 가득 찼다.
결정적인 일은 그 후의 회의 때다.
재경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이 너무 소중하여 어떤 한 가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성격이 급한 나는 속이 터졌다.
계속 재경이의 허점만을 찾게 되었고, 찾으면 찾을수록 내가 저만도 못한 걸까 자책했다.
리더라면서 총소감문 쓴다고 노트북만 들여다보는 재경이가 답답했다.
결국 이끄는 일을 내가 했고 잘하면 잘하는대로, 못하면 못하는대로 재경이가 책임지는 것이 싫었다.
낵 제일 잘나보이고 싶은 마음, 그려서 내가 더 쓸모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재경이는 그 목표에 가까워지는데 방해물이었다.
우리는 모두 좋든 싫든, 사람과 함께 섞여 살아야 한다.
학교에 가도, 학원에 가도, 직장 생활을 해도, 교회를 가도, 단체 안에 섞여 살아야 한다.
나는 단체 생활을 아주 싫어했다.
세상엔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 내가 싫은 사람과 함께할 필요를 못 느껴 항상 그 단체에서 도망 나오곤 했었다.
하반하하에 2년을 와서 알게 된 것은 어떤 단체에 들어가도 똑같은 사람이 꼭 나타난다는 것이다.
날 이유 없이 실허앟느 사람, 나와 대립관계에 있는 사람, 나보다 못나 답답한 사람 등,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존재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질 때가 있다.
올해엔 여자선생님들과 재경이였다.
나는 올해 하반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랜 시간을 사람을 미워하는 데에 쓸 뻔 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렇게 친구가 될 수도 있지만, 나중엔 가족까지도 미워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군가가 미울 때 생각해봐야 한다.
혹시 내가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진 않은지, 저 사람을 질투하고 있진 않은지, 혹은 내가 그 모습을 하고 있진 않은지 말이다.
나는 내가 이런 감정을 느꼈던 이유를 곰곰이 잘 살펴보면 잘하고 싶은데 나에겐 그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 나는 계속 실력을 쌓아왔다.
나에게 집중하여 어제의 나와 비교하며 생활했을 땐 마음이 편했다.
감정에 빠질 때마다 썼던 방법들을 써보고자 한다.
<1. 감정의 객관화>
나는 종종 알 수 없는 화와 우울에 빠지곤 한다.
이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누군가 무언가에 화풀이하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라면 당황하고 자책할 것 없이 일단 빠르게 멈추면 된다.
그리고 이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일단 지워내야 한다.
감정의 이유를 모르겠다는 건 결국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필요 없는 감정을 지워내기 위해서 우선 몸을 써야한다.
빠르게 할 일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할 일 중, 책읽기 요리하기, 맛있는 것 먹기와 같은 움직임이 적거나 생각을 많이 필요로 하는 일은 안되다.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격렬한 운동, 집안 대청소, 목욕(때밀기)과 같이 육체적인 노동이 상당하여 몸의 진을 어느 정도 빼놓는 것이 좋다.
시간이 흐르고 몸에 힘이 좀 빠지면 바로 그 때, 나를 2개로 분리한다.
아까 그 감정을 겪던 나와 시간이 지난 나로 분리하여 과거의 나를 관찰한다.
그 감정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그 이유가 타당한지, ”너 왜 그래?“ 라고 스스로 물으며 나를 내가 살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내가 부끄럽다면 좋은 일이다.
이제 나는 나를 객관화 시킬 수 있게 된 거니까.
‘반성하는 자가 서있는 땅은 가장 훌륭한 성자가 서있는 땅보다 거룩하다‘
탈무드에 나온 이 명언은 써니쌤께서 내게 자주 해주셨던 말씀이다.
나는 앞전의 내 모습을 살폈을 때 옳지 않았다고 생각이 들면 반성한다
반성이란 막연히 말과 마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반성으로 하여금 결국에 내가 서 있는 그 자리를 빝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반성을 거듭할수록 내 중심을 잃어가는 것처럼 느끼고 좌정하고 절망하는 것은 반성이 아니라 후회다.
감정도 습관과도 같은 것이다.
계속 내 자신을 살펴 감정들을 객관화해야 한다.
그러고 계속 진정한 반성을 통해 내가 서있는 자리를 스스로 거룩하게 여겨야 한다.
내 안에 있는 진짜 멋있는 내가 나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2. 불편한 마음 풀기>
1번과 같은 상황으로 화풀이 중인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유 없는 화풀이가 아니고 정말 화가 나서 화를 낸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타당한 이유를 대며 화를 내지만 점점 흥분하는 나는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내뱉거나 너무 큰 소리르 내거나 오해해 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이 때 나의 화를 듣는 사람은 내게 미안한 마음에 들어는 주지만, 내가 선을 넘으면 기분이 상해버린다.
나는 상대가 잘못해서 화를 내다가도 그 정도가 과해서 도리어 미안한 상황이 생긴다.
그럴 때면 이걸 사과해아 하는 건가, 오히려 더 화를 내서 내가 이만큼 화가 났다는 생황을 보여줘야 하는 걸까 고민에 빠진다.
잠자리에 누워선 어두운 천장을 보며 ’하.. 내가 왜 그랬지‘와 같은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다.
이미 상대와 나의 거리는 멀어졌다.
이런 불편한 감정이 들 땐 바로 당일에 풀어야 한다.
하루가 지나면 어색해져버린 관계를 돌이키기 힘들다.
내가 마음이 불편하다면 빨리 풀어야 한다.
이 과정은 상대에게 져주는 것, 혹은 기분을 풀어주기 위함이 아니다.
’나‘를 위해 상대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이다.
그 잠깐의 어색함과 쑥쓰러움을 이기지 못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도 갈 수 있다.
즉시, 불편한 마음을 푸는 것이 또 다른 부정적인 감정을 낳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3. 사람에 대한 믿음>
나는 경계가 심한 사람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6개월은 상대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관찰한다.
그리고 마음을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나는 경계와 불신을 하면서도 사람을 좋아한다.
상대는 내게 큰 관심이 없는데 나마 상대를 너무 좋아하는 걸까봐, 설령 상대와 친해지더라도 상대가 내게 주는 마음이 ’척‘ 하는 거라 여긴다.
그렇게 여기는 것이 관계가 틀어지거나 실망했을 때 상처를 덜 받는 편이니.
그러니 나는 진심으로 사람을 대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다 나와 같이 생각하겠거니‘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내가 진심이라면 산대도 진심이겠지.
내가 그가 좋다면 상대도 나를 좋아하겠지 하면 편하다.
그리고 내가 먼저 믿어야 상대도 나를 믿어준다.
나의 감정 수업의 첫 단계는 이 3가지 이론을 알고 시작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는 비슷한 얘기를 한다.
생생하게 꿈을 꿔라, 아침형 인간이 되어라, 적절한 운동을 해라 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한다.
모두가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분명 맞는 말이겠지만 이미 따분한 소리라고 치부해버리는 나는 병화가 없었다.
모두가 부자가 되고 싶지만, 모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신뢰‘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를 믿지 못하고 그들의 말도 믿지 못하는, 그래서 행동하지 못하는 문제 말이다.
그래도 나는 이 방법들을 항상 염두해보고 살았다.
써먹지 못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기초가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이 이론들을 나중에 차분히 상황 속에 대입하여 나의 행동들을 수정해나갔다.
<2장. 교만에서 자신감으로>
하반하에서는 공연을 할 일이 많다.
음악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어쩔 수 없이 친해질 수 밖에 없다.
오카리나 수업, 영어노래 수업, 생일파티 때마다 준비하는 공연, 부모님을 위한 공연, 스승의 날 공연, 비상파티 준비, 프리위크 결과물 제출까지.
우리는 매 순간 멜로디를 흥얼거릴 정도로 항상 음악에 노출되어 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음악을 사랑했고 피아노를 남들보다 좀 더 오래 배웠다.
시간을 묻은 만큼, 나는 어릴적부터 음악을 사랑했고 피아노를 남들보다 좀 더 오래 배웠다.
시간을 묻은 만큼 남들보다 아주 쬐-금 실력이 있었다.
피아노를 그만두고부턴 그것을 써먹을 데가 없었다.
그저 집에서 취미생활로 뉴에이지를 치는 것 외엔.
그래도 좋았다.
취미생활도 실력이 있어야 즐길 수 있는 법이다.
나는 즐길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그걸로 만족하며 살던 내가 하반하를 만나 그것을 적극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피아노를 하며 얻은 것은 건반을 두드리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음감, 코드 그리고 콩쿠르와 오케스트라 경험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토대로 하반하에서 많은 공연을 이끌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모여 작은 음악회도 만들었다.
피아노, 플롯, 노래 공연들, 거기에 사회까지 짜며 구성력 있는 음악외를 만들었다.
나는 그 음악회를 시작으로 8월8일 부모님 공연 역시 준비했다.
우리는 수업과 공연 연습을 병행했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모든 일정을 소화해내는 동시에 최선을 보여줄 수 있는 곡을 찾았다.
이제껏 엄마께로부터 오랜 시간 많은 투자를 받아왔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많이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늘 죄송했었다.
그래서 남들이 들었을 때 꽤 화려하다고 느낄만한, 그리고 내가 피아노에 시간을 묻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곳 ’젠가‘를 택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곡을 치려니 손가락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음악회의 날짜는 점점 임박해져 오는데, 나의 실수들은 나아지지 않았다.
점점 조급해져서, 지금이라도 쉬운 곳으로 바꿔야 하나-라고 생각도 했지만, 이 멋진 곡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주 잠깐 겨우 5분이라고 생각되는 시간이 생기기라도 하면 곧장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8월 8일 당일, 사실 난 그 날까지도 단 한 번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쳐내지 못했다.
요란한 피아노 소리는 학교 전체에 울려퍼지니 부모님이 오시고선 연습도 어 이상 하지 못했다.
그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뿐이었다.
’나는 무대파다, 나는 잘할 수 있어, 좋은 모습 보여드려야지.‘ 등등 긍정적인 말들을 계속 읊조렸다.
그리고 본 무대!
긴장감에 손은 땀으로 축축한 채 시작을 했다.
긴장을 풀기 위해 나는 눈을 감고 나의 집을 떠올렸다.
나는 집에서 피아노를 자주 친다.
거의 매일 1-2시간 정도 치는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21살까지 배운 곳을 쫙- 친다.
한 곡의 연주가 끝날 때마다 엄마는 책을 읽다가도, 요리를 하다가도, 청소를 하다가도 뜨거운 박수를 쳐주셨다.
집에는 나와 엄마 둘 뿐이었고, 관객은 엄마 한 분 뿐이었지만, 난 언제나 그 박수에 보답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 연주했다.
’젠가‘연주를 시작했을 때, 난 그 때를 떠올렸다.
나의 최고의 관객, 나의 엄마만을 위해 최선을 보여주겠노라.
나는 본 공연 때 처음으로 한 번의 실수 없이 완벽하게 쳐냈다.
나의 기도와 진심이 통했다고 생각한다.
연주를 마쳤을 때, 엄마가 많은 부모님들 사이에서 홀로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쳐주셨다.
나는 드디어 보답을 한 것만 같아 기뻤다.
공연 이후 많은 부모님들께서 내게 잘 쳤다고 칭찬해주셨다.
효도를 한 것 같아 감사했다.
아무튼 나의 피아노 솔로곡 ’젠가‘와 단체곡 ’You Raise Me Up’등 각종 음악을 지휘했다.
모든 무대들이 준비한대로 잘 보여졌다.
내가 대표로 선 자리는 아니었지만 뒤에서 잘 이끌었다는 사실에 뿌듯하기도 했다.
그 후에도 모든 노래와 악기에 관련된 건 내가 지휘를 맡아 했다.
하반하에서는 워커 역시 중요한 역할이다.
많은 아이들이 기본적인 설거지와 밥상 차리는 일을 어려워한다.
나 역시 처음엔 잘하지 못했다.
알바 경험이 있었더라도 하반하는 더 완벽히 일하기를 요구했다.
9기에서부터 워커장을 해왔지만 실수 투성이였다.
가장 어이없는 실수로는 전 숙소에 수세미 놓고 오기, 써니쌤 숟가락 잃어버리기, 5갤론 냄비 욕조에서 닦아 욕조 까맣게 만들기, 과일 손톱만하게 자르기, 밥 태우기 등등 아주 다양했다.
나는 거의 1년 간 설거지 워커장으로 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을 지지리도 못했는데, 다행히 다른 아이들보다는 아주 조금 나았다.
그럼에도 써니쌤께 거의 매일 혼났다.
혼나며 받은 패널티는 다 함쳐 100$는 족히 넘을 것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다음 번엔 같은 실수는 절대 안 할 것이라며 이를 갈았다.
해외 여행은 특히나 설거지를 배우기에 적합하다.
물이 잘 안 나올 때도 있었고, 아예 주방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엔 멀리서 물을 길러와 사용하고, 풀과 모래를 수세미 삼아 설거지를 했다.
그 땐 설거지가 2시간 씩 걸리기도 했다.
불편했지만, 어려운 경험을 미리 한 덕에 그 후 주방에서 하는 설거지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차곡차곡 쌓인 내 경험들은 10기에서 요긴하게 작용했다.
영월학교는 신식 식기세척기와 싱크대가 2개가 있었다
이런 주방에서 일하는 건 식은죽먹기였다.
작년보다 더 레벨업된 워커장이 된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주며 일했다.
많은 인정 속에서 나는 자신감을 얻으며 겸손해지지 못하고 점점 교만해져갔다.
모든 것을 내가 제일 잘한다는 생각으로 우쭐해졌다.
영어, 음악, 워커, 프로젝트, 노작 등 모든지 잘 해내곤 했다.
그나마 내가 제일 자신 없던 분야는 운동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조깅을 하면 21명 중에 제일 못 뛰던 나라서 나는 운동에는 항상 자신 없고 빠져있었다.
그러던 내가 운동에서까지 잘난체하게 된 것은 우리가 3km 달리기를 하던 날이다.
특전사 군인들은 매일 3km를 달리며 시간을 재곤 하는데, 평균은 15분, 잘 뛰면 13분이라고 한다.
윤쌤은 우리도 한 번 해보자고 하셨다.
그만 좀 뛰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진짜 죽을 듯이 뛰겠다고 마음 먹었다.
하반하라는 작은 사회는 나보다 못난 구석을 발견하면 하이에나가 아기사슴을 만난 듯 물어뜯기 때문이다.
선생님이나 형님의 위치에서 무언가를 못해내면, 설령 그게 달리기라도, 무시받기 십상이다.
나는 못해도 여자 학생들 중에서는 제일 잘 뛰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동시에 출발했지만 당연히 건장한 남자아이들은 훅 치고 나갔다.
나는 페이스 조절을 하며 그들보단 조금 느리게 뛰었다.
그러나 빨리 뛰던 남자애들은 금방 지쳤는지 금새 나에게 잡혔다.
한 명 한 명 마치 퀘스트를 통과하듯 앞에서 뛰는 남자애들을 자는 재미도 뛰다보니 3km는 끝나있었다.
나의 기록은 15분 37초였다.
나는 남자 군인의 평균을 뛰어냈다는 사실에 뿌듯했고, 결정적으로 5등으로 들어왔다ᅟᅳᆫ 것이다.
윤쌤, 재경이, 진성쌤, 상규쌤 다음이 나였다.
물론 나는 악착같이 뛰고 다른 남자애들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었겠지만 이겼다는 생각에 또 우쭐했다.
이 날 여자인 나보다 늦게 들어온 남자애들에게 화가 나신 윤쌤은 남자애들에게 벌을 주었다.
나는 괜한 미안함에 벌로 달리기를 더 하는 남자애들 틈에 껴 같이 뛰어야 하나 라는 생각도 했지만 더 깊은 속에서는 이겼다는 희열감이 더 컸다.
나는 유일하게 자신 없던 운동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더 우쭐해지고 곧 교만해졌다.
곧 나는 내가 못하는 것은 없다고까지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고, 나보다 일을 못하는 애들을 답답해하며 다그쳤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났다는 듯이, 할 일이 너무 많다고 투덜거리며 잘난체하는 왕비마냥 굴었다.
일을 함께 하는데 그 일이 내 성에 안차면 엄청나게 성질내며 다그쳤다.
잘못됐다고 생각지도 못했다.
일을 못한 것에 대한 마땅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한 번은 윤썜이 점점 폭군처럼 구는 내게 너는 할 일을 아주 잘 하고 있으나 내 사람을 만들지 못한다고 지적하셨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나의 교만함 때문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계속 그렇게 살던 내가 제동이 걸린 것은 남해안 여행 중 워커할 때였다.
영월학교에서의 워커는 연습이었다면, 여행은 실전이다.
매일 달라지는 주방에서 완벽히 일을 해내야 한다.
학교에서처럼 그것의 제 위치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 그릇이 무엇인지 구별을 하며 개수를 잘 세어 잃어버리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부산의 김치게스트하우스에 있을 때, 내가 워커였던 날, 샐러드 양을 터무니없이 많이 만들어 써니쌤께서 화가 나셨다.
많은 양의 야채를 사왔어도, 샐러드 소스양을 보고 다른 메뉴와 어울리는지도 봐야지 어떻게 있는거라고 그냥 다 갖다 쓰냐고 혼이 났다.
그러고 이제 식사가 시작되려는데 써니쌤 앞에 낯선 수저가 있는 것이다.
식사 시간을 맞추겠다고 아무 수저가 갖다 놓은 것이다.
비상이었다.
내 작년 경험상 써니쌤 대장님의 수저가 없어지면 찾을 때까지 아무도 밥을 못 먹는다.
그런데 내가 정신 없이 밥만 차리다 수저를 어디에 놨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그 순간 공기는 무거웠고 나는 손발에 땀이 줄줄 났다.
결국 찾아낸 곳은 게스트 하우스의 공용 수저통이었다.
아찔했다.
혼날 각오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일을 왜 이렇게 대충하냐, 워커장이 맞냐 등의 소리를 들었다.
화가 많이 나신 써니쌤께서는 내가 워커장 자경이 없다며 4조 준빈이네 팀의 팀원인 서현이에게 나의 자리를 넘기고 준빈이네 팀의 팀원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나는 그날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게 워커장을 잘리기까지 할 일인다.
내가 서현이보다 못한다.
내가 어떻게 준빈이의 밑에 들어가 일하지- 하는 생각에 눈물이 찔끔 났다.
써니쌤께 미움 받고 있다는 생각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 준빈이 팀에 들어가서도 나의 능력의 최대치를 보여주기로 했다.
준빈이와 처음 호흡 맞춰 일하며 그 팀에는 수정할 것이 많다고 느껴, 내가 아는 모든 꿀팁들을 방출했다.
누구와 일해도 내가 속한 팀이 제일 잘한다는 것을 증명해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날 써니쌤께 불려갔다.
“너 지금 되게 잘못하고 있는 거 알고 있니?
넌 내가 너를 워커장에서 끌어내린 이유를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니 준빈이네 틈에서 네가 워커장 노릇을 하고 있겠지.
수경이 네가 다 잘났다고 생각해 준빈이의 워커장 자리를 뺐으면 안된다.
너 어시스트 하는 거 연습하라고 그 팀 보낸 거야.
네 눈엔 일이 너무 잘보이겠지.
그렇다고 그 팀을 네가 지휘하지는 말아라.
그냥 네가 그 일을 하거나 준빈이에게 제안하는 것이 방법이겠지.
리더도 중요하지만 어시스트도 중요하다.
어시스트가 없으면 리더도 없거든.”
이 때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준빈이네 팀에서 준빈이의 기를 죽이고 잘난체 한 것에 미안해졌다.
나는 최고의 팀을 만들어보겠다는 욕심 섞인 목표를 바꾸기로 했다.
실력있는 워커가 아닌 누구와도 함께 일하기 좋은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곧 나는 팀원인 나의 위치를 낙담하기보다 더 나은 리더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떤 리더가 좋은 리더인지 생각해보았다.
준빈이는 아주 착하고 너그러운 리더였다.
누군가에겐 좋은지 몰라도 나는 조금 날카롭더라도 정확한 리더가 좋다.
그래서 내가 써니쌤을 따르는 것이겠지.
그러나 나는 내 노력을 봐주지 않고 화만 내면 기가 죽을 것 같다.
나는 팀원의 자리에서 내가 팀장일 적을 떠올렸다.
내가 제일 잘났다는 생각에 강압적으로 아이들을 끌고 갔다.
아이들의 의견은 묻지 않고 내가 낸 의견만이 맞는 말이라며 밀어붙였다.
나는 그동안의 교만을 떠올렸다.
그리고 내 주위를 둘러봤을 땐 아무도 없었다.
올해 내 목표 ‘내 사람 만들기’가 실패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위기였다.
나는 되돌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1. 애프터 서비스>
리더는 당연히 성과를 내기 위해서 밑 사람을 다그치거나 화를 낼 때도 있다.
팀원이 협조를 안 하거나 일을 제대로 해오지 않는다면 당연한 일이다.
물론 좋은 말로 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못했다면 다시 찾아가, 가라앉은 말투로 나를 납득시켜야 한다.
내가 어떤 이유로 이 일을 시켰는지, 상대는 왜 그 일을 해야하는지, 그렇게 했을 때 뭐가 좋은지.
납득이 가게 설명해줘야 한다.
특히나 단체로 있을 때가 아닌 단 둘이라면 더 좋은 대화를 나눌 확률이 크다.
대화에선 인사의 3가지 내용을 필수로 언급해줘야 한다.
하나는 안부, 둘 째는 고마워, 셋 째는 미안해 이다.
사람들은 솔직한 사람에게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또한 잊지 않고 고마웠던 점과 미안했던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애프터 서비스의 키 포인트는 잊지 않고 기억하여 얘기하는 것이다.
<2.사람 파악하기>
진정한 리더는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리더는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
때문에 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리더를 하기 어렵다.
리더는 사람마다 대하는 법이 달라야 한다.
각자마다 나의 성향이 있고, 화를 받아낼 수 있는 그릇의 크기도 다르기 때문이다..
준수, 세훈, 승진이로 예를 들어보겠다.
(이 친구들은 나와 최소 6개월 이상 팀을 하며 호흡을 맞췄다)
준수는 일하기를 아주 싫어한다.
심지어는 느긋한 성격을 갖고 있어 성격 급한 나와 충돌이 가장 잦았다.
그러나 일머리가 없지 않고 의리가 있어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일해주곤 한다.
칭찬에 크게 반응하기 때문에, 일하는 도중 준수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칭찬을 남발해줘야 한다.
세훈이는 기가 어마어마하게 쎄서 웬만큼 화내는 것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일하는 것을 좋아하며 일머리가 비상하여 함께 일하기 좋다.
그러나 본인이 잘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어 본인보다 일 못하는 형님이 있다면 말을 듣지 않는다.
승진이는 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아이였다.
행주의 쓰임을 구분해야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주방도구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까지 하나부터 열을 다 설명해야 했다.
답답해서 화를 내도 기죽지 않고 잘 따라오는 것을 보면 잘 배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학기초, 준원이까지 함께 일했었지만, 마찰이 생겨 서로 다른 팀으로 갈리게 되었다.
당시 교만한 워커장이었던 나는 준원이에게 일을 못한다는 이유로 허드렛일을 시키곤 했다.
준원이는 내게 무시 받는다는 생각이 들어 점점 분만이 생기다가 한 번은 확 터져 내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
“형님은 내가 일 못한다고 하는데, 그건 형님 기준이잖아요.
제 생각에 전 일 잘하는 것 같은데 왜 자꾸 뭐라 해요?
저 일 열심히 해요.
그러니까 그만 좀 뭐라 하세요.”
성격이 급하고 놀면서 일하는 걸 싫어하는 나는 흥얼거리고 씨룩대며 일하는 준원이가 마음에 안 들었고, 준원이의 말도 들어주지 않은채, 똑같이 소리를 질렀다.
“워커장은 나야.
일을 잘하고 못하고의 기준은 내가 정할 거고 넌 거기에 맞춰”
“싫어요.
형님이 무슨 왕도 아니고.”
“듣기 싫으면 네가 더 잘해서 워커장 해.”
하- 내가 그렇게 싫으면 다른 팀 애랑 팀 바꿔요.“
점점 격해졌고 결국 우린 팀을 바꿨다.
그렇게 영영 다른 팀이 되었다.
나는 사람을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준원이를 기 쎈 세훈이와 똑같이 다루면 안 됐다.
준원이는 거친 외모와는 달리 섬세한 사람이라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이었다.
또한 화를 내면 되려 틀어지고 칭찬에 반응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준원이에 대한 파악이 부족하여 준원이를 잃었다.
리더가 굳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파악하여 그에 맞춰 대우해야 사람을 얻을 수 있다.
이 경험을 통해 준수와 세훈이, 승진이와는 좋은 호흡을 맞추는 노력을 할 수 있었다.
<3. 말을 힘 갖기>
교만할 때에 더 잘난 체 하고 싶은 마음에 나의 능력치를 마음껏 말하고 다녔다.
나는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나는 매일 이런 걸 해내며 살아.
이 때, 절대 나의 말에서 모순이 없게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만약 내가 매일 싱크대를 정리하는 사람이라고 했으면, 하루도 빠짐 없이 해야 한다.
하루라도 거르게 된다면 말의 모순이 생김으로 더 이상 내 말을 신뢰할 수 없은 것이다.
사람을 얻는 첫 단계는 신뢰이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은 가까이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이 방법 3가지를 떠올린 후로부턴 나의 교만함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곤 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에 대한 이유도 알게 되었다.
이 3가지를 모두 지키지 못 했으니까.
이 3가지를 의식하고 실천하려 노력했다.
그랬더니 확실한 차이가 보였다.
나를 무대포, 성질 급한 형님으로만 보던 아이들은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점차 이해해주기 시작했다.
오히려 애들은 더 다가와주었다.
점점 관계에서의 변화가 생겼다.
나 잘난맛에 살던 나는 언제나 관계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그랬던 내가 ‘교만함’이라는 문제점을 파악하고, 내 속에서 없애려 하니 자연스레 그 불만은 사라졌다.
교만함을 빼니 자연스레 자신감만이 남았고, 자연스레 관계문제가 해결되니 또 다른 자신감이 생겼다.
자신감은 내가 뭔가 해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도전 정신을 낳았다.
세상이 두렵지 않으니 난 무엇이라도 해볼 수 있고, 설령 어려움과 실패가 있더라도 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도 생겼다.
하반하에서 이런 충돌을 겪었기에 내가 교만했다는 사실도 알았고, 그것 없애려는 노력도 있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참 감사하다.
<3장. 장점과 단점은 한 끗 차이>
우리는 매년 서로의 장단점을 말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작년의 나는 이 시간이 가장 두려웠다.
나의 부끄러운 모습까지 낱낱이 모두의 앞에서 발표되는 것이 싫었다.
모두의 미움을 사고 있던 나라서 좋은 소리가 안 나올 것이 뻔했기에.
나는 의 부족한 점을 알고 싶지 않았다.
평생을 회피하며 살아온 나라서.
정면승부는 버거웠다.
두렵다고 그 시간이 없어지는 건 아니였고, 결국 구 시간에 쓴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날의 자극으로 난 더 악착 같이 변화하려고 애썼고 그 결과로 다른 사람이 됐다는 평을 들었다.
좋은 자극제 됐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 돌아온 장단점 시간이 두렵지 않았다.
작년 한 해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갔다면 올해는 나를 확실히 알고 고쳐나가야겠다고 마음 먹었기에 정면승부를 하기로 했다.
아이들의 평을 이러했다.
장점 | 단점 |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이 있음 | 목표에 눈이 멀어 옆이 안 보임 |
리더쉽이 있고 행동력이 있음 | 남을 답답해하고 깔봄 |
직설적이고 큰 목소리로 명료히, 하고 싶은 말을 다 함 | 자기 말만 하고 화내는 말투 소유 |
카리스마와 통솔력 | 주변 사람들을 쪼그라들게 함 |
팀원을 잘 챙김 | 언성을 높임 |
목표 의식이 뚜렷함 | 개인 성과 추구 |
나에게 어떤 변화가 필요할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내 장단점을 나열하고 보면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지 약간 난감하다.
장점에서 약간 핀트가 나가면 단점이 되고, 단점에서 약-간만 방향을 틀면 장점이 된다.
괜찮은 사람의 기준은 이 장점-------단점 이 사이의 중간 지점을 잘 찾는 사람 같다.
저기에 나열한 모든 단점들의 원인은 ‘과다 열정’ 이라는 것이다.
너무 악착같이 이를 악 물고 열정을 미련하게 쏟아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옆 사람이 그만큼 안 따라와주면 화가 났고, 아주 열정적으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너무 악착 같이 앞만 보고 달렸다.
나는 올해 몸에 힘을 좀 빼고 여유를 가지려 애썼다.
그러나 어린 시절 매순간을 ‘생존’으로 살던 나는 악착 같음이 습관이 되어있었다.
한라산 등반 때다.
긴 마라톤을 하듯 천천히 모두 다 같이 속도를 맞추며 등산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쉼터인 진달래 대피소에서부턴 개인전이었다.
나는 선두인 윤쌤의 바로 뒤를 따라갔다.
비포장길인 돌길과 계단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 길을 윤쌤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빠르게 앞서가셨다.
숨은 턱 밑까지 차오르고, 숨을 너무 거칠게 내쉰 탓에 머리가 다 띵할 지경이었다.
안개로 인해 앞이 흐려져 윤쌤의 뒷모습은 나의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갔다.
나는 더 다급히 쫒았다.
그렇게까지 악착같이 오른 것은 단지 학생들 중에서 1등으로 도착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끝이 나오질 않아 헉헉대며 네 발로 기어갈 쯤에 재경이가 원숭이가 산책하듯 휘릭- 하고 나를 지나쳐갔다.
자극 받아 다시 두 발로 오르려다 또 다시 팔을 손잡이에 두고 팔 힘으로 내 몸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 때 또 찬영이가 날 한 번 보고 씩 웃고는 거침 없는 발걸음으로 나를 지나쳤다.
나는오래도록 끝이 나오지 않는 한라산을 더 이상 누군가에게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 쫒기듯이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정상!
나는 4등을 했다.
내가 이길 수 없는 체력왕 3명이였던지라 그들 위에 바로 들어온 내가 스스로 너무 자랑스러웠다.
빨리 누구에게든 나의 등수를 자랑하고 싶었다.
써니쌤께서 올라오셨을 때 물을 건네며 나의 등수를 말씀드렸다.
나는 말하며 무척 기뻐했다.
내가 예상했던 답변은 ”오~ 대단한데!“ 와 같은 감탄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수경이 너뭄 등수에 너무 집착해.
너는 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해.“
나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벙쪘다.
무엇 때문에 모든 애들을 경쟁 상태로 여기며 견제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더 나아보이고 싶은 마음, 오직 그것 하나 뿐이었다.
또 한 번은 국토종주 때다.
그 날은 108km를 타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국토종주를 시작한지 나흘 밖에 안 됐던 지라 다들 자전거 초보였다.
그 와중에 또 잘나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떤 오르막에도 절대 뒤처지지 않으려 얼굴이 터지도록 패달을 밟았다.
그 날을 특히나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곳으로 단연 재경이가 1등으로 달리고 있었다.
나는 또 그 뒤로 열심히 쫒아갔다.
나의 체력이 얼마나 늘었는지도 보여주고 싶었다.
한 명 한 명 재낄 때마다 희열감을 느꼈다.
마침내 산의 정상이었다!
1등으로 올라온 재경이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재경이는 산책 나온 듯 멀쩡 했지만, 나는 땀에 절여지고 얼굴이 벌개져 마치 토마토 위에 미열을 얹은 꼴이었다.
그 때 재경이가 한 말이 기억이 난다.
”정말 악바리시네요.“
순간 다시 반성했다.
아, 또 ‘과다 열정’이었다- 싶었다.
나는 그 순간 나에게 제동을 걸었다.
계속 나에게 내가 부담을 주며 엉뚱한 데에 열정을 쏟으며 피곤하게 살아왔다고 느꼈다.
그 즈음부터 남은 국토종주 여행을 내가 살아온 삶들과 내가 어떤 생각인지를 생각하며 패달을 밟았다.
나의 장점은 악착같이 무언가를 해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단점은 너무 악착 같이 한다는 것이다.
장점이자 단점인 나의 이 성격은 평생을 날 괴롭혔다.
열심히 안 살면 죄책감이 들어, 여유부리기가 미안했다.
나는 올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았다.
나는 남을 좀 의식하고 누구보다 위에서 리드하고 싶으면서도 내가 가진 걸 베풀고 나누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장점을 발전시켜 단점을 가리는, 그런 식으로 나를 본격적으로 키워보고 싶었다.
뒤도 돌아보면서, 옆도 살펴보면서.
내가 어떻게 가느냐, 어떤 모습이냐, 그 길 위에 누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4장. 예쁜 사람>
날카로워 보이는 내가 순해지고 안정을 찾은 건 의외로 농활을 할 때였다.
9월 쯤 윗집 아저씨의 고추밭 수확을 도와주는 것을 시작으로 고추, 감자, 더덕, 도라지, 수수, 콩, 사과, 배투 수확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하루 12시간 풀타임으로 일하던 알바경력으로 밖에 나가 몸을 쓰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농사일은 보통이 아니었다.
온 손톱에 때가 껴 까매진 손은 기본이고 모공 하나하나에 흙이꽉 들어찼고, 허리와 무릎은 끊길 것 같았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도 이를 악물고 버티며 일했던 것은, 나보다 일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농활의 후유증은 컸다.
한참 더덕밭에서 12시간을 땅을 파던 나는 어느날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왼손이 오른 손을 붙잡고 이렇게 글씨를 써야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저녁도 간신히 먹고 바로 잡에 들곤 했다.
힘은 들어도 어떤 프리위크보다, 주말보다 나의 정신이 건강하고 안정적이라고 느꼈을 때가 바로 이 때다.
중학교 시절 공부를 너무 못해 고등학교를 올라가려면 봉사활동 점수를 채워야했다.
급히 인터넷을 뒤졌다.
봉사활동을 하러 가는 것인데 뭐 이리 경쟁률이 쎈지, 인기 아이돌 콘서트의 티켓팅 같았다.
그나마 가장 인기가 없고 후기가 좋지 않은 ‘노인주간보호센터’를 지원하게 됐다.
그곳은 약 50명의 어르신을 모시는 곳이었다.
직장을 다니느라 부모를 봉양하기 힘든 30/40대가 보내는 노인 유치원 같은 곳이었다.
약 두 달을 주 5회를 꼬박꼬박 갔나보다.
청소부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사장님께서 일을 직원보다 열심히 한다며 어르신 분들의 말동무가 되어드리거나 병원에 간호사 선생님을 따라가는 일을 부여받게 되었다.
두 달 동안 거의 매일 얼굴을 비춰도 어르신들을 내게 눈길도 주지 않으셨다.
이미 너무 많은 봉사활동자가 다녀갔었을테고, 무엇보다 더 이상 생을 살고 싶어하지 않으셨다.
끝끝내 눈길을 주지 않으신 분들도 계셨지만 내가 그곳을 떠날 쯤엔 내 손을 붙잡고 아쉬워 하는 분도 계셨고 환히 웃으며 또 오라고 인사해주시는 분도 계셨다.
나는 그 때, 마음이 힘들고 닫힌 사람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전교 꼴찌, 꼴통이던 내가 처음으로 ‘사회복지사’라는 꿈을 갖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꿈꿨던 모습들은 다시 다 잊고 살아갔다.
그렇게 꿈이 없어져, 아니, 기억하지 않고 찾으려 하지 않아 방황하였다.
하반하 9기에서 좋은 가치관과 여러 실력들을 갖추고, 10기를 1번으로 다시 오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것, 줄 수 있는 것을 찾았다.
우선, 내가 가진 행동력으로 5월 1일 입학식 공연을 만들어냈다.
그 때의 공연 내용은 각자의 꿈을 하나씩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해외 봉사 단원’이 되고 싶다고 말을 했다.
급히 꿈을 생각하여 연극 대본을 짜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번뜩 해외 봉사를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종하쌤의 코이카 경력이 떠올랐던 것 같다.
그 순간부터 ‘봉사’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본격적인 농활을 하며, 안정을 찾은 첫 번 째 이유는 몸이 너무 피곤해서 고민거리가 생길 틈이 없었다.
머리가 너무 복잡할 땐 여유를 두며 생각의 시간을 갖기 보다는 몸을 더 움직여 나를 피곤하게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 째는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원래라면 일당을 7-10만원 정도받는데 우리는 학생 일꾼이고 일 실력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5만원만 받았다.
하루종일 막노동하고 5만원은 적은 돈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몸값을 올리지 않고 계속 5만원만 받았던 것은 주 목적이 ‘봉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20명이 모여 한 번에 봉금을 받으면 100만원으로 적은 돈이 아니었다.
우리는 1500만원 만드는 것을 금방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인력이 부족한 시골의 ‘청년일꾼’이 되었다는 사실이 좋았다.
시골엔 농사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인력이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나는 학교 앞 텃밭에서 유기농 작물들을 키우며 농사에는 제 때가 있었다.
해서 수확의 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시골에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이고, 인력센터에도 연세가 좀 드신 분들이거나 베트남/말레이시아 외노자였다.
만 평, 이만평 아무리 큰 땅을 농사 지어도 수확할 수 없다면 전부 말짱 도루묵이다.
나를 포함해 우리 학생들이 일해주어 가면 항상 고맙다고 해주시는 것이 감사했고, 그 덕에 내가 의미 있는 일은 한다는 사실에 뿌듯해졌다.
고추를 따고, 감자 캐고, 더덕을 캐는 일은 비교적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진짜 어려운 일은 그 수확물들이 꽉 찬 자루를 드는 일이 어려운 것이 족히 20kg는 했다.
감자밭 수확이 일주일동안 이어졌을 때의 일이다.
12000평의 감자밭을 소유중이신 사장님께서는 빨리 수확을 해야 한다며 많은 인력을 불러들이셨다.
그래서 나는 그곳의 농촌에서 일하시는 어머님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농촌에서 일하는 분들은 까만 썬캡, 화려한 꽃무늬 방수복, 튀는 색의 장화를 신고 계셨다.
처음엔 그 모습이 촌스러운 시골 사람들의 모습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고 여자임을 느꼈다.
같은 곺무늬 옷을 입더라도 국화일지 들꽃일지 비교하는 사는 모습, 얼굴이 탄다고 썬크림을 자주 바르시는 모습에서 나와 똑같이 멋을 포기하지 않는 분들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농촌 일을 하기 이전에는 시골에서 번듯한 직장을 다니셨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일에 대한 거리감이 사라졌다.
그 분들은 오히려 전문성을 보여주셨다.
예쁜 옷을 입고 오셨다가도 일할 시간이 되면 작업복을 딱 입고 진지하게 임하시는 모습과 추운 날에는 비닐장갑을 LR고 그 위에 목장갑을 끼시는 등 확실하게 일하는 자세를 보여주셨다.
일하시는 분들을 보며 시골에 대한 편견과 거리감이 사라졌고 이렇게 힘든 일을 해주시는 분들이 있기에 우리가 편히 마트에서 농잡물들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내가 어떨 때 가장 기쁘고 의미 있는 삶은 살았나- 하고 돌아보면 나는 누군가와 함께하며 무언가를 나눌 때, 도울 때 가장 살아있음을 느낀다.
농촌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지어는 같은 정산팀원들에게 리워드를 더 많의 주고 싶다는 욕심으로 더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좋았다.
10기는 내가 빛이 날 수 있는 무대였다.
이렇게 많은 인정과 칭찬을 받아볼 기회가 흔치 않을텐데, 나는 올해 마음껏 누볐다.
9기의 경험으로 어렵지 않은 하반하 생활, 배운대로 행동했더니 어떤 농활을 가서도 돌아오는 칭찬세례.
점점 나 자신에 대한 확신과 세상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각박하게 살던 내게 ‘여유’라는 게 생기던 해였다.
실력을 쌓아온 것이 내게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실력과 능력을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형태로든 나누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에필로그>
얼굴에 묻어있던 심술보와 찌푸림은 2년 새에 사라져갓다.
마음을 좋게 쓰려 하고 가치관이 변하며 ‘예뻐졌다‘라는 말을 엄청 많이 들었다.
불만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하니 점점 표정이 밝아졌나보다.
점점 예뻐졌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렇다면 진짜 에쁜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생각해보았다.
너그럽고, 베푸는 여유가 있고 따뜻한 사람이 내겐 이상적인 예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어떨 때 가장 기쁘고 의미 있는 삶은 살았나- 하고 돌아보면 나는 누군가와 함께하며 무언가를 나눌 때, 도울 때 가장 살아있음을 느낀다.
농촌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지어는 같은 정산팀원들에게 리워드를 더 많의 주고 싶다는 욕심으로 더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좋았다.
이 문집을 쓰며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알고 싶어 아이들에게 내가 따뜻한 사람이냐 물었다.
약 10명 정도에게 물었는데 아무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노력했지만 아직 그 경지까지 오르진 못한 것 같아서 약간의 씁쓸함이 생겼다.
그래도 1년 내내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어 그에 방해되는 감정들을 물리치는 데에 성공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성장해나가는 것이 나는 앞으로의 가능성을 본다.
따뜻한 사람, 최수경이 되기 위해 오늘로 나는 한발짝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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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경아 참 많이 애썼구나.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너의 글을 읽는 내내 웃다가 울다가 결국 마음속에서 따뜻함이 올라오더라.
고마워. ^^
너무나 솔찍한 글에 당황도
되면서 척을 뺀 너의마음이라
생각하니 고맙다
진정으로 원한다면
어느 날 그것에 다달을 수
있다지
너의 바램이 빠른 시간안에
이루어지길 늘 응원한다
화이팅
이솔직함. 그냥 없는듯 아닌것처럼 살수도 있는데 바짓속 주머니를 뒤집어 사이에 낀 먼지 하나도 용납하지않겠다는듯한 수경이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 깨끗해진 마음 주머니에 아무거나 넣는것이 아닌 선별하고 고민해서 건강하고 생산적인 것들을 채워나갈것아 기대가된다.
아플수있다는건 그만큼 수경이가 최선을 다해 치열했다는 반증일거야.
가만히 움크리고 있었으면 아플일도 내자신의 모습을 보며 힘들일도 없었을테니까. 멋지다!!!
수경아 이번 문집들은 솔직히 탈탈 틀기였나?ㅎㅎ너의 속마음을 난 왜이렇게 재미가있는지ᆢ사람은 누구나 그럴거라 생각돼~끝없는 고뇌와 노력에 박수를보내고싶다 점점 예뻐지는 수경 짱♡
수경아,
질투, 분노, 미움, 자괴감, 서운함과 같은 너가 하반하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글로 풀어내는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내. 너를 지배하던 부정적인 감정들의 원인을 스스로 잘 알고 있고 그러한 감정들을 극복해 나가려는 의지를 다지고 너에게 맞는 방법을 적용해 스스로를 개선해 나간 10개월간의 드라마가 해피엔딩이어서 같이 기뻐해 주고 싶어.
나는 "ㅇㅇㅇ런 사람이야" 라는 틀에 자신을 묶어두지 말고 스스로에게 당당하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수경이가 되길 바래!!
언제나 수경이를 지지하고 응원할게!
수경아 치열한 마음속의 전쟁
그것을 글로 표현한 글솜씨
이렇게 힘들고 아픈 만큼
너와 같은 이들을 잘 도울 수 있을거야
따뜻함마저 갖춘다면
너무 완벽해지는 거 아니니?
근데 있잖아 세월이 지나갈수록
힘을 빼는 연습을 하게 되는 것 같아
자연스러움~
수경이를 마음속 깊이 응원한다♡
마음을 비워내며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구나. 질투가 너의 힘이였다면 이제 수용이 너의 힘이 될거야. 마음 속에서 여러사람들과 투쟁했지만 결국 수경이 자신의 싸움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구나. 점점 더 다른 사람의 단점보다 장점을 알아채고 있는 것 같아. 스텝 최수경의 2021년 응원해
눈이 넘 예쁜 수경아~~
이번문집에서 너의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내가 나의 감정을 들어다보면서
알아차림도 정말 중요하다고 느끼거든.
올한해 스텝으로서 다른사람의 감정도 잘 헤아려주리라 믿어의심치않아.
동생들 잘 보살펴줘서 항상 고마워~~~
'22살 수경의 인생 드라마'를 보는듯 하구나..속질 담백하며, 꾸밈이 없는 수경...
2년 동안 스스로의 싸움에서 당당하게 이겨낸 모습... 앞으로 스텝의 모습도 기대가 된다.
21년에는 자신을 더 사랑하고 아끼고..새로운 기수 아이들을 한 번더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다가가면 더 멋진 선생님으로 거듭
날 수 있을것 같은걸.. 올해 리더로써 아이들 일일이 챙기다고 진심으로 수고 많았다~^^ (유민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