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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편, 양 방수 이벽 성조님 천묘식 기록영화 제작하다●
李 檗(이 벽) 성조님의 유해가 1979년 6월 21일 오후 7시 혜화동 성당에 도착하여 모셨다.
혜화동 성당은 이벽 성조께서 1783년 초 가을에 이승훈 선생을 북경에 보내어 조선교회의 주춧돌 역할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오자. 이듬해 1784년 봄에 돌아오신 이승훈 선생님은 이곳에서, 이벽 성조님에게 [세자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 유서 깊은 곳이다.
이날 사도예절 시간에 후손 자부님의 감명 깊은 증언이 있었다. 강원도 횡성에서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자가 되어, 신부님의 강론 시간에 이벽 성조님의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훌륭한 선조님을 두신 자손들은 영광일거라고 부러워 했는데,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간증을 하게되어 감격하여 눈물로 인사하였고,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유 홍렬 박사님의 교회사 이야기를 진지하게 강론하시면서 1779년 강학회 당시 이벽 성조님께서 지어 남겨 주신 천주공경가를 처음으로 발표하면서 감격하여 떠듬떠듬 발표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그 모습이 생생하다.
장소: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 500번지 앵자산 아래의 천진사에서 1779년 己亥(기해)년 講學會(강학회)가 끝난 뒤에 李檗(이벽)은 天主恭敬歌(천주공경가)를 丁若銓(정약전)은 十誡命歌(십계명가)를 각각 지어 오늘날 까지 傳(전)하고 있다.
아래는 李檗(이벽) 天主恭敬歌(천주공경가).
어와세상 벗님네야, 이내말씀 들어보소 ! 집안에는 어른있고, 나라에는 임금있네 !
내몸에는 영혼있고, 하늘에는 천주있네 !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네 !
삼강오륜 지켜가자, 천주공경 으뜸일세 ! 어와세상 벗님네야, 이내말씀 들어보소 !
이내몸은 죽어저도, 영혼남아 무궁하리 ! 인륜도덕 천주공경, 영혼불멸 모르면은 !
살아서는 목석이요, 죽어서는 지옥이라 ! 어와세상 벗님네야, 이내말씀 들어보소 !
천주있다 알고서도, 불사공경 하지마소 ! 알고서도 아니하면, 죄만점점 쌓인다네 !
죄짓고서 두려운자, 천주없다 시비마소 ! 아비없는 자식봤나, 양지없는 음지있나 !
임금용안 못뵈었다, 나라백성 아니런가 ! 천당지옥 가보았나, 세상사람 시비마소 !
있는천당 모른선비, 천당없다 어이아노 ! 시비마소 천주공경, 믿어보고 깨달으면 !
영원무궁 영광일세, 영원무궁 영광일세 !
아래는 丁若鍾(정약종)의 十誡命歌(십계명가).
세상사람 선비님네 이 아니 우수운가 ! 사람나자 한평생에 무슨귀신 그리많노 !
아침저녁 종일토록 합장배례 주문외고 ! 있는 돈 귀한재물 던져주고 바쳐주고 !
자고깨자 행신언동 각자귀신 모셔봐도 ! 허망하다 마귀미신 위대한건 사람일세 !
허위허례 마귀미신 믿지말고 천주믿세 ! 하늘위의 계신천주 벌레같은 우리보소 !
광대무한 이우주에 인간목숨 내어주셔 ! 지혜자가 깨달으며 우주섭리 알고나면 !
천주은혜 밝은빛을 무궁토록 받들련가 ! 사람지혜 우둔하여 꼭두각시 나무신막 !
외고우러 복받드냐 절한다고 효자되냐 ! 잘되어서 내복이라 못되면은 남탓이네 !
朝鮮敎會(조선교회)의 요한 洗者(세자) 李檗(이벽)은 요르단강에서 예수님께 물로 세례를 준 선지자 요한 洗者(세자)와 같이 이 땅에 구세주가 오시는 길을 예비하였다 하여 요한 洗者(세자)와 같은 뜻으로, 李檗(이벽)은 李承薰(이승훈)에게 요한(축일 6월 24일)이라는 본명으로 자기집인 水標橋(수표교:지금의 혜화동 성당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다며, 老軀(노구)에도 불구하시고, 유홍렬 박사님의 더듬 거리는 특유의 말씀으로 설명하시는 감격스러운 말씀으로 같이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었다.
李檗(이벽)은 慶州李氏(경주이씨) 文定公派(문정공파) 68세손으로 壬辰倭亂(임진왜란)때의 功臣(공신)이며, 東閣雜記(동각잡기)의 著作者(저작자)로 이름난 휼륭한 性理學者(성리학자) 知退堂(지퇴당) 李廷馨(이정형)의 7대손이며, 李檗(이벽)의 5대조 李慶相(이경상:1603-1647)은 丙子胡亂(병자호란)때 侍講院文學(시강원문학)으로서 昭顯世子(소현세자)를 모시고, 淸(청)나라 瀋陽(심양)에 가서 8년 동안 볼모[人質(인질)]살이를 같이 하면서 많은 서책을 가지고온 경위를 유 홍렬 박사님의 더듬 거리는 특유한 말씀으로 이어 갔던 강론을 정리 해 본다.
昭顯世子(소현세자)가 北京(북경)으로 가 아담샬 신부를 만날 때 李慶相(이경상)도 함께 따라가 일찍이 天主敎(천주교)에 접할수 있었고. 그의 後孫(후손)중에서 朝鮮敎會(조선교회)의 創設者(창설자)인 李檗(이벽)이 나오게 된것도 결코 우연히 아닌 하느님의 커다란 섭리로 그때에 불모에서 풀려난 소현세자는 繼母(계모)의 농간에 의하여 사살 당하자. 소현세자의 꿈은 깨지고, 소현세자를 따라온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흩허졌고, 5대조 李慶相(이경상)이 가지고온 書冊(서책)들은 필시 아무도 볼수 없는 깊은곳에 감추어 두었거나 後孫(후손)들이 보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지만, 李檗(이벽)은 그 감추어둔 書冊(서책)을 보고 필시 西學(서학)에 눈을 뜨게 되었을 성 싶다고 披瀝(피력)했다.
李檗(이벽) 李承薰(이승훈)이 北京(북경)에서 가지고온 책을 한권 한권 정독하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심이 날로 커 갔고, 그 신앙심과 더불어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복음과 은총을 알려주고자 하는 욕망으로 열심히 연구하여 그 “외딴집”에서 나와 李檗(이벽)과 이승훈은 傳敎(전교)하기 시작 하였고. 李檗(이벽)은 먼저 경기도 광주군 馬峴(마현:마재)에 있는 다산 丁若鏞(정약용)의 집으로 가서, 茶山(다산) 丁若鏞(정약용)의 형제들에게 전교하여 그들을 개종 시키는데 성공하고, 중인 계급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은 중국의 譯官(역관: an official translator)인 金範禹(김범우)와 崔昌顯(최창현), 崔仁吉(최인길), 金宗敎(김종교)등도 개종 시켰다.
그러나 李檗(이벽)의 전교는 그리 쉽지 않았다. 당쟁을 두려워하는 유학자들의 반대파인 李家煥(이가환)이 맨 먼저 이벽을 찾아와 말하기를 “우리집에 ”織方外紀(직방외기)“ ”西學凡(서학범)“등이 있어 나도 서양 서적들을 여러권 보았으나, 그것은 기이한 글, 괴벽한 책으로 오직 우리의 見識(견식)을 넓힐수 있는데, 지나지 않소! 그것이 어찌 天命(천명)을 쫓아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할수 있으리오? ” 하고 꾸짖었다. 그러자 李檗(이벽)이 천주교의 교리를 들어 이에 대답하자. 李家煥(이가환)은 말이 막혀 마침내 책을 구하여 자세히 읽어 보겠다고 하였다.
좌로부터 외방선교회 지도 신부님, 인 향성(가롤로)신부님, 한 사람 건너, 김 수환 추기경님, 노 기남 대 주교님, 오 기선 신부님, 외방선교회 지도 신부님이신 길 홍균 신부님
김 수환 추기경님께서 강론하신 이벽 성조님께 드린 추도사 내용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세자요한 탄생축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느님이 마지막으로 보낸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또 그분은 예언자로서, 세상에 올 구세주를 맞이하는 준비를 하도록, 사람들에게 회개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세자 요한은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길을 닦고 준비한 선구자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시간, 한국의 세자 요한이라고 말할 수 있고, 한국에 있어서 역시 주님의 길을 누구보다도 먼저 앞서 갔던, 선구자였던 이벽선생의 유해를 모시고 그 추모미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벽선생은 지금으로부터, 225년전인 1754년에 경기도 광주 땅에서 아버지 이부만과 어머니 청주 한씨 사이에서, 6남매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교회가 없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이벽선생은 25세의 청년이 되자 경기도 광주와 여주 일대에서 당시의 우수한 젊은 유학자들이셨던 권철신, 정약종, 정약용, 이승훈 등과 함께 儒,佛,仙 三敎와 그 당시, 이미 우리학자들에게 알려졌던 天學을 연구, 토론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탐구하고 신앙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지대한 공을 남기신 분이십니다. 특히 이벽선생은 그 당시에 이미 「천주공경가」를 지으시고 「聖敎要旨」를 저술하시고, 가톨릭 교리를 학문의 경지에서 신앙의 차원으로 이끌어 주셨으며, 기도와 선행을 통해서 천주교에 관한 교리를 실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선생께서 29세 되던 1783년에는 친분이 두터웠던 이승훈에게 천주교 진리를 전해주고, 冬至使와 함께 중국의 北京가는 기회를 이용해서, 영세를 받고 돌아오도록 주선해 주심으로써, 한국교회에 창립 주춧돌을 놓는데 중추역할을 하신 분이십니다. 이듬해 1784년, 우리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귀국하면서, 제일 먼저 이벽선생을 찾아 뵙고, 영세한 경위와 북경의 교회동향을 보고하고, 한국에 있어서의 복음선교의 길을 함께 논의했습니다. 그 후 이벽선생님은 자신도 열심히 예비해서 이미 영세를 받고 온 이승훈으로부터 영세를 받았습니다. 이때 세례명을 요한세자, 세례자 요한으로 붙였습니다. 한국교회사를 쓴 달레의 말에 의하면 이벽선생이 세자요한이라는 본명을 붙인 것은 이분이 한국에 복음을 들어오게 하는데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세 후, 이벽선생은 전교에 전념하여서 정약종, 권철신 가문의 학자들을 입교시키는 한편, 당시에 명성높은 학자였던 이가환이, 선생으로 하여금 천주교를 버리게 하려 했을 때, 오히려 그를 설복하여 입교시켰고, 또 1785년 한국 최초의 박해인 을사박해 사건도 실은 이벽선생의 교회예절과 강론이 도화선이었던 것입니다. 첫 박해가 일어났던 김범우 도마의 집은, 한국 땅에 있어서의 복음선교의 터전이었고, 그 집은 바로 오늘, 이 명동성당이 서 있는 종현언덕입니다.
이때부터 한국교회는 수난의 시기를 맞이했고, 이벽선생님 또한 관가로부터, 사회로부터, 친지로부터, 심지어 가문으로부터, 천주교를 버리도록 압력을 받으셨고, 더욱이 아버지를 비롯해서 같은 형제들로부터까지 배교의 압력을 받았습니다. 그 아버지는 "네가 천주교를 버리지 않으면 패가망신을 면치 못하니 차라리 내가 죽겠다"고 대청마루에서 스스로 목을 매며까지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전파와 신앙에 불타오르는 이벽선생도 그 당시 한 인간이었기에,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부모에 대한 효성의 갈등 속에서 대단히 괴로운 시간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교리상으로 신앙과 효성이 결코 상충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오히려 조화되고 보완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더 잘 섬길수록, 부모를 더 공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철두철미한 유교적 사회관은, 모든 것을 부모에 대한 孝로써 판단하였고, 특히 형식적인 면에 치중하였기에, 하느님을 믿으면 부모를 거스리는 것이 되고, 부모의 뜻을 따르며는, 하느님을 배반한 것 같은 갈등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 갈등 때문에 이벽선생님도 한때 외적으로 믿음을 나타내는 일에 주저했으나, 자신의 마지막 시기에는, 기도와 보속과 묵상으로 보내시면서, 1785년 만 31세의 짧은 일생을 마치셨습니다.
뿐더러, 선생께서는 재주가 많고 학식이 깊은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진리를 찾고, 또 天主안에서 진리를 통해서만, 이 겨레가 구원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우수한 門中에서, 형제들 가운데서, 오직 선생님만이 이른 바, 과거를 보지않고 白衣書生으로서 남아 계셨습니다. 이렇게 교묘하게 복음화를 앞서서 살아오셨기에, 그 분의 이름은 우리에게 다소 생소해졌던 것은 물론이요, 오랫동안 그 분의 무덤이 어디 있었는지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교회사를 연구하는 분들이 이 분의 한국교회 창설에 있어서의 지대한 공적을 재평가하게 되었고, 또 이분에 대한 관심을 가진 성직자와 신자들이 끈질기게 노력하여, 드디어 선생의 묘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4월 10일 경기도 포천군 화현리에서 선생의 묘를 발견했고, 또 불가불 이장하지 않으면 않되는 지급한 상황에서, 천진암으로 옮겨 모시는 도중, 이벽선생님이 전교의 터전으로 삼으셨던 바로 이 종현 언덕, 이 명동성당에 오늘 다녀가시게 된 사실도 대단히 뜻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이 시간, 우리 한국에 복음의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 교회를 창설하기 위해서, 공이 대단히 크셨던 선구자의 유해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유해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드리고, 그동안 우리 모두가 이분에 대해 소홀했고, 정성이 미약하여, 그 묘소마저 뒤늦게 알게 된 그 모든 잘못에 대해 사죄해야 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오늘 이벽선생님의 유해를 모시고 추모하는 이 자리에서 한 분의 역사적인 보물을 발견했다는 안도감과 행사만으로, 우리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이벽선생님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순교선열들의 그 깊은 신앙심과 순교정신을, 우리 스스로 오늘날 사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벽선생님은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출세할 수 있었는데, 출세하지 않으신 분이었습니다. 뿐더러, 온갖 시련 속에서도, 가족으로부터 오는 압박 속에서도, 끝내 믿음을 버리지 않고 그 마음속에서 生을 다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조상 순교자들 역시,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그 구원의 생명을, 우리에게까지 전달하기 위해 자신들의 온 생애를 불태웠고, 정성을 다해 주님께 바쳤으며, 또한 피까지 흘렸습니다. 그분들에겐 그만큼 신앙이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 신앙에 인생의 삶과 죽음이 달려 있다는 것을, 그분들은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우리들은, 신앙에 있어 그분들의 후예라고 말할 수 있는지, 과연 우리들은 신앙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 신앙에, 이 믿음에, 우리의 삶과 죽음이 달려있다고 정말 생각하고 있는지 이 믿음에 우리 겨레의 참 구원이 달려있다고 보는지, 이 믿음만이 우리가 살고있는 이 사회의 어두움을 정말 밝힐 수 있다고 우리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지,.....
불행히도 저나 여러분은, 이 점에 있어, 자신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이벽선생님과 순교자들의 遺德을 추모하면서, 이 기회에 우리도 우리의 신앙을 재다짐해야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마치 사도바오로께서 깊은 신앙에서 확신하며, 「죽음도, 생명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높음도, 깊음도, 그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들의 신앙을 깊게 하여 이 같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뒤를 이어 우리교회의 최고목자가 되시는 교황 요한바오로 2세께서는 취임하신 후부터 오늘까지, 오늘의 세계구원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복음선교에 의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고, 인간의 참된 해방과 인간들 사이의 일치를 가져 올 수 있다고 외치고 계십니다. 이 같은 교황님의 정신에 따라, 신앙의 소중함, 이 신앙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깊이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교황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실천하신 분이 바로 여기 우리가 유해로 모신 이벽선생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우리의 믿음이 타서 불꽃이 심화될 때에, 오늘 이분을 이 자리에 모신 뜻을 더욱 빛나게 해드리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벽선생님은 「성교요지」의 가장 마지막 절에서 이와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크고 광대하시며 그 음성 크시고 한없음을 우러러보라. 光明이신 모습을 조용히 생각하면 그 덕화의 빛 심원하고 높도다. 허리를 굽히고 맨발로 끓어 앉아 부끄러운 허물과 원망하는 마음을 버리고 국궁예배하여 공경하면 어둡고 캄캄한 마음을 서서히 깨치리라
金玉姬 수녀 著「광암이벽의 서학사상」中에서 오늘 우리에게도 참으로 교훈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벽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느님을 흠숭하며 사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광명과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또한 그렇게 모든 겨레가 삶으로써 이 겨레가 광명 속에 살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 하셨습니다. 이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의 도리와 그 교인들은 임금을 섬기는 일이나,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나 正心誠意를 다할지며, 사람은 마땅히 어느 길이 참되고 거짓인가를 헤아려 깊이 생각하여, 잘 지킨다면, 어찌 영겁의 불에서라도 구원을 받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길지어다
오늘, 이 자리에 모신 이벽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바로 이 말씀을 하고 계신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분을 본받아서, 우리도 참으로 예수님을 섬기고 또한 이웃을 사랑합시다. 이 講論(강론) 말씀은 명동성당에서 당시 주임"백신부님"께서 錄取(녹취)한 "Tape"를 筆者(필자)에게 주어서, 한부는 천진암 박물관 보관 자료로 변기영 신부님에게, 한부는 "명동성당" 역사 자료실로 옮기면서 "筆者(필자)"가 그날의 강론 말씀을 정리하여 기록한 것이다.
6월 24일 낮 12시 명동성당 미사주례와 강론은 김 수환 추기경님의 우렁찬 목소리로 이어졌었다. 그 때 추기경님께서 강론 하신 말씀이 담긴 녹음 테프는 필자가 명동성당 주임 신부님이신 백 은기 신부님께 간청하여, 전달 받아 곧 바로 변 기영 신부님께 전달했는데, 지금도 천진암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그때의 감격적인 김 수환 추기경님의 육성을 들어 볼수가 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벽 성조님의 유해가 1979년 6월 21일 오후 7시 혜화동 성당에 도착하여 23일 토요일 오후에 이벽 성조님의 유해는 명동 대 성당으로 옮겨 모셨다가 다음 날 주일이며, 이 벽 성조님의 영세본명 축일을 맞아 정오에 명동 대성당에서 한국인 최초의 주교님이신 노 기남 대 주교님과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님이신 김 수환 추기경님과 공동 집전으로 이장 미사를 성대히 거행하고, 즉시 출발하여, 신장 성당에 들려서 노 기남 대 주교님 집전으로 합동 사도예절을 거행하고, 그 길로 천진암 터에 이르러 보름 전부터 구축된 새 묘지에서 이장위원회 위원장이며, 한국 순교자 시성시복 추진위원회 위원장님이신 김 남수 주교님의 주례로 하관예절을 마치니 1979년 6월 24일 오후 3시 30분이었다.
천진암으로 운송하는 도중에서 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촬영에 어려움이 따랐다. 천진암에 도착하여 운구하는 과정에서 제법 많은 비가 내려 순교 성인들의 감회의 눈물로 받아 드리며, 우중에서도 우리 모두는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드디어 1779년 기해년 강학회에 참석하신 후 꼭 200년만인 1979년 6월 24일에 이벽성조님께서 천진암으로 돌아 오시는 감격의 순간이다. 시신 운구 행렬을 따라 교우들이 천진암 계곡을 엄숙히 뛰따르고 있다.
우중에도 노기남 대주님께서도 참석해 주셨고, 변 기영 신부님 옆에 김 남수 주교님께서 화관예절을 하시고, 그 옆에 서서 우산을 바치고 촬영하는 筆者의 사진은 누가 촬영을 해 주었는지 밝히지 못했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우중에도 노기남 대주님께서도 참석해 주셨고, 변 기영 신부님 옆에 김 남수 주교님께서 화관예절을 하시고, 그 옆에 서서 우산을 바치고 촬영하는 筆者의 사진은 누가 촬영을 해 주었는지 밝히지 못했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남원양씨 병부공파 거제문중 30세손 양 방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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