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중학교 동기들과 함께 미래를 침목을 꿈꿨다.
그중에서도 그는(박기정) 유독 반듯하고 성실했다.
주산학원, 서예학원, 속셈학원까지, 원장인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활기가 넘쳤다.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듯 보였던 그에게, 어느 날 갑작스러운 비극이 그림자처럼 드리웠다.
휴일, 그는 지하실에서 페인트칠을 하다 잠시 밖으로 나왔다.
불이 켜진 것을 보고 끄러 들어갔지만, 개폐기를 내리는 순간 굉음과 함께 지하실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몇 계단을 기어 올라왔지만, 그는 끝내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응급실에 실려 간 그의 모습은 형용하기조차 어려웠다.
"화상이 너무 심해서 살기 힘들 겁니다." 의사의 말은 비수처럼 우리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며칠을 버텼지만, 끝내 눈을 감았다.
장례식장은 침묵과 눈물로 가득 찼다.
내 아내도 펑펑 슬피 울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그의 가족을 돕고 싶었지만,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누군가는 우리가 모아둔 천만 원의 회비를 전부 현금으로 전달하자고 했지만,
나는 내 어린자식 처럼 어린아이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현금은 일시적인 도움밖에 되지 못하고,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꾸준히 학비를 지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친구들중에서 냉정하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결국, 과반수의 결정에 따라 모아진 회비모두를 현금으로 전달했다.
하지만 그 결정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친구들들 모두 후회로 변했다.
친구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에도 슬픔을 느끼는 대신, 교회에 빠져 지냈다.
아이들도 뒷전이었고, 심지어 우리가 전달한 장학금을 교회 헌금으로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분노를 넘어 허탈감마저 느껴졌다.
세상은 요지경이라 했던가.
친구의 아내는 아이들을 양육 시설에 맡기고 교회에만 매달렸다.
결국, 사이비 교회는 문을 닫았고, 친구의 아버지 그러니까 그녀의 시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아이들은 양로원에 맡겨졌다.
한 순간의 선택이 백지 한 장 차이만큼이나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는 그날의 일을 잊지 못한다.
가장 착했던 친구는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남은 우리들은 여전히 착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신은 그가 너무 착해서 일찍 데려간 것인지도 모른다.
친구들과 가끔 그날의 선택을 되돌아보며 긴 한숨을 내쉰다.
만약 우리가 다른 결정을 내렸다면, 그의 아이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속세의 시험은 때로 너무 가혹하다. 모임은 아직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다.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상처처럼.
*
행사하는사람들
첫댓글 안타까운 친구는 아직도 구천을 헤메고 있을란가...
부디 맘의 안정을 찾아 한곳에 안착을 하였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