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40
11월10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연중 제32주간 수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Z3CrAWjiu50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기 저기 숨겨져 있는 수많은 감사꺼리들을 찾아냅시다!>
나병으로부터 치유 받은 열 명 가운데 유일하게 감사 인사를 하러 온 이방인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감사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세탁물이 산더미인데 세탁기가 자주 고장이 나서 한동안 무척 성가셨습니다. 출장 서비스를 신청했더니 기사님 왈, 15년 됐으니 수명이 다됐답니다. 마침 창고를 정리하다가 큼지막한 구식 통돌이 세탁기를 발굴해서 설치했더니...세상에 시원시원 너무나 잘 돌아가는 것입니다.
화창한 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옥상에서 담요들을 널고 있자니, 제 입에서는 감사기도가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우리 삶의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면,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 감사기도꺼리가 숨겨져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감사기도를 바치신 흔적을 복음서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오 복음 12장 25절)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요한 복음 6장 11절)
갈 곳 없는 소녀들을 수녀님들께서 친딸처럼 양육하는 청소년보호시설 개원 기념 미사 때의 일입니다. 영성체후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내가 '우리 집에 살면서 감사할 꺼리 37가지'라는 묵상글을 낭독했는데, 듣고 있는 내내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감사기도보다는 청원기도에 혈안이 되어 있는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감사보다는 불평불만이 앞서던 제가 비참해보였습니다.
우리들의 기도생활 안에서 감사기도가 더 확장되면 좋겠습니다. 눈을 크게 뜨면 더 많은 감사꺼리들을 찾아낼 수 있을 듯합니다. 육의 눈도 크게 뜨지만 영안(靈眼), 심안(心眼)을 크게 뜨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노년에 다다른 루르드의 벨라뎃다 수녀님께서 한번은 자신의 일생을 총정리하며 감사기도를 바치셨는데, 진정한 의미가 감사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제게 발현하심에도 감사드리지만, 발현하지 않으심에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기억력이 나빠 아무리 노력해도 암기할 수 없었던 제 무지와 어리석음에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원장수녀님이 저를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 갖은 폭언과 차별, 굴욕의 방 처벌에 대해서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를 보고 '이 여자가 정녕 그 벨라뎃다인가?' 라고 말할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저라는 것과, 마치 희귀한 동물 대하듯, 바라본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제 눈앞에 나타나실 때도 감사드리지만, 나타나지 않으실 때도 감사드립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께서 현존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이나 축복에 감사합니다. 건강과 성공에 감사합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감사기도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기도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극심한 고통이 다가올 때는, 주님의 수난에 깊이 참여하게 되었음에 감사해야겠습니다. 깊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을 때는,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바닥까지 내려온 것에 대해, 이제 남은 것은 바닥을 딛고 올라가는 것뿐임에 감사해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SlsTJUfmjew
++++++++++++++++++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신다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늘 복음은 ‘감사’의 중요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사람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 감사하지 못해서 ‘믿음’이 없음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완전히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일까요? 그들도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청할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는데도 예수님은 오직 감사하는 사마리아사람에게만 믿음이 있다고 하시고 구원에 다다랐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믿음도 단계가 있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열역학 법칙에 따라 우리 믿음도 측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역학 법칙은 0부터 3 법칙까지 4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열역학 제0 법칙은 에너지는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로 이동한다는 법칙입니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있을 때 뜨거운 물은 저절로 차가운 물에 열을 빼앗깁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주실 수 있기에 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본인 의지가 아니라 빼앗기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일까요?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이 만드신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는데 피가 멈추었습니다. 에너지를 회복했던 것입니다. 부모는 어쩔 수 없이 자녀에게 살과 피를 내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아홉 명의 나병 환자들의 믿음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열역학 제1 법칙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열역학 제1 법칙은 에너지를 누군가 얻었다면 누군가는 빼앗겼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성장시키기 위해 고생하듯, 하느님도 고생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에너지는 곧 당신의 살과 피입니다. 만약 아홉 명의 나병 환자들이 자신들을 치유해 준 은총이 곧 예수님께서 나병에 걸리시는 것임을 알았다면 그분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나병을 치유해주시기 위해 주시는 성체가 곧 그분의 죽음임을 안다면 우리가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열역학 제1 법칙, 곧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 위해 지셔야 했던 십자가의 무게는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오늘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사람은 예수님께 감사드릴 줄 알았기에 그분의 십자가를 이해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위 단계도 있습니다. 바로 열역학 제2 법칙입니다. 이 법칙은 아무리 은총과 에너지를 받았어도 시간이 지나면 계속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사람처럼 이런 사람은 규칙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선물을 받기 위해 다가옵니다. 규칙적인 기도를 한다는 뜻입니다.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규칙적으로 주님께 감사하고 찬미합니다.
그다음 단계도 있습니다. 열역학 제3 법칙인데 내 안에 있는 모든 에너지가 소멸하기까지 가만히 있으면 내 존재까지 사라진다는 법칙입니다. 결국, 지금 나에게 존재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시는 분이 나의 창조자이시어서 그분이 아니면 나는 먼지보다 못한 존재, 아니 존재할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때 나오는 감정이 무엇일까요? 바로 찬미입니다. 나를 낮추고 그분의 전능함을 찬미하는 것이 가장 큰 믿음입니다.
‘열역학 법칙’에 대치되는 종교가 ‘저절로교’입니다. 모든 것이 저절로 생겨났고 저절로 유지된다는 믿음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창조자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의 법칙이 있음을 믿었고 남들이 소홀히 여기는 작은 차이에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행성들은 원이 아니라 타원으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천문학을 연구하는 한 친구는 창조자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열역학 법칙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태양계란 저절로 생성된 것이며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니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케플러는 그 친구에게 태양계의 모형을 실제 크기의 축소비율에 맞게 만들어 아름다운 색을 칠하고 별들이 빛을 발하며 빙글빙글 돌아가도록 하여 그 친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친구는 매우 감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누가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었나?”
“아무도 만들지 않았네. 자기 힘으로 생겨나서 자기 힘으로 도는 것일세.”
“뭐야? 어서 말해봐. 어떻게 만든 사람이 없이 절로 만들어지고 돈단 말인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잖나?”
“이 친구야! 이렇게 작은 장난감도 만들어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어떻게 이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큰 태양계가 저절로 생겨나서 저절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무신론자 친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은 저절로교에서 벗어나 열역학 법칙을 믿는 것으로 증가합니다. 열역학 법칙은 한 마디로 ‘저절로 존재하는 것도 없고 저절로 움직이는 것도 없다.’입니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열역학 법칙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에너지와 존재를 내어줄 존재를 찾습니다. 아기들은 열역학 법칙을 믿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찾아서 에너지와 존재를 부여받습니다. 그렇게 부모에게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감사했다면 열역학 법칙을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열역학 법칙을 이해하면 기도의 법칙도 이해합니다. 기도하면 에너지가 들어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고 기도하지 않는 자는 소멸한다는 것이며 기도로 주시는 그분의 에너지는 곧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열역학 법칙을 먼저 믿게 되면 믿음은 저절로 성장하게 되고 감사와 찬미도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보인 대표적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계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실 때 벌거벗고 춤을 추며 찬미하였습니다. 계약궤를 모시는 것은 자신의 머리가 되실 주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성찬례와 같습니다. 이때 자기를 버리고 낮출수록 찬미가 솟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낮추는 것을 비웃던 아내 미칼에게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2사무 6,22)라고 말합니다. 미칼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찬미하는 다윗을 비웃었기에 더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저주를 받습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근엄하게 앉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아니면 먼지보다도 못한 나를 존재하게 해 주시고 자아에 지배받지 않도록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이기에 지금, 이 순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얻어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7,11-19 : 한센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10명의 한센병 환자들을 만나신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영적으로 깨끗해지도록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제들에게 보내신다. 아울러 치유도 해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들이 사제에게 몸을 보이고 병이 나은 것을 감사하는 예물을 올리라고 명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다른 한센병 환자에게 그러셨듯이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하시지 않고 사제들에게 보이라고 하신 이유이다. 성 라자로 마을의 피정의 집을 “아론의 집”이라고 명명했다. 아론은 사제이다. 구약에서 사제가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한센병이 걸린 사람이 치유되었을 때, 보고 치유되었음을 선언한 다음 정상생활을 할 수 있었듯이, 아론의 집의 의미도 같다. 아론의 집에 들어 와서 모든 치유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인 사제들은 늘 그분의 영광을 시기하였다. 한센병 환자들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사실을 증거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이 치유되기를 바라시자 자신들이 불행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먼저 고쳐주지 않으시고 사제들에게 보내셨다. 그들은 나병의 증세와 그것이 치유되었음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17절)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고쳐주신 한센인들을 꾸중하신다. 그들은 자기를 고쳐 주신 분에 대해서보다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 결국 한 사람은 나머지 아홉보다 훨씬 많은 은총을 받았다. 병이 나은 것 말고도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유대인 한센인들 아홉은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음이 굳어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임을 보여주신다.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타민족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반면 유대인은 그토록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는 것을 알려준다.
감사드리는 이들과 찬양하는 이들은 같은 마음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은총을 내리신 분을 찬미한다. 바오로 사도가 모든 사람에게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20) 하고 권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사야도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섬에서마다 그분에 대한 찬양을 알려라.”(이사 42,12)고 한다.
여기서 과연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이런 반성을 해 보아야 한다. 나는 과연 신앙인으로써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인지를!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똑같이 사랑 받는 귀중한 존재임을 알고 서로 사랑하며 항상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자.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시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루카 17,12-14)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말은, 여기서는 병을 고쳐 달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이야기에 나오는 환자 열 사람 모두, ‘어떤 병이든지 고칠 수 있는 예수님의 권능’을 믿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사제에게 가서 나병이 나았음을 확인받고 율법 규정대로 정결례를 행하라는 지시입니다.(레위 14장) 따라서 이야기 속에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의 병을 고쳐 줄 테니...”라고 약속하는 말씀을 하셨거나 아니면 병을 고치는 ‘치유의 말씀’을 먼저 하셨을 것입니다. 어떻든 아직 병이 낫지 않았는데도 환자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사제에게 간 것은 그들의 ‘믿음’과 ‘순종’을 나타냅니다. ‘몸이 깨끗해졌다.’ 라는 말은, ‘병이 나았다.’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났다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단순한 ‘치유 이야기’로 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되돌아와서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다른 아홉 명은 그냥 가버렸다는 이야기가 더 있어서 좀 더 주의 깊게 해석해야 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5-19)
1) 돌아왔다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되돌아온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다는 말은, 예수님을 하느님과 같으신 분으로 믿고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는 행동을 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은 그의 믿음은, 7장에 나오는 백인대장의 믿음과 같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7)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반면에 그냥 가버린 사람들은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는 예언자’나 ‘의사’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되돌아갈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마치 치료가 끝난 뒤에 미련 없이 병원을 떠나버리는 사람들처럼.) 그들도 예수님의 권능을 믿었으니까 간청했고, 청한 것을 얻었지만, 예수님의 치유 능력만 믿는 것과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으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는 상관없이 살게 되고, 그러면 몸의 병이 나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2) 이 이야기를 ‘감사’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감사’는 신앙생활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자신들이 ‘치유의 은총’을 받은 일을 ‘당연한 일’로, 즉 ‘받아야 할 것을 받은 일’로 생각한 사람들이고, 되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은 ‘은총’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지 않은 사람, 즉 은총을 은총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감사드린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님께 감사드린 일은, 되돌아온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냥 가버린 사람들 경우에, 받은 은총에 감사하지 않고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는 것은, 자기들이 병에 걸린 것은 하느님 탓이라고 생각하고, 억울해 하고, 하느님을 원망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또는 그들은 아쉬울 때에는 하느님을 찾다가 그 일이 지나가면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이 하느님께는 감사드렸지만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잊었거나 생략한 것은 아닐까?”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18절의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그들은 하느님께도 감사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혜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 그리하여 주님,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것은 여러 가지 곡식이 아니라 당신을 믿는 이들을 돌보는 당신의 말씀임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불에도 없어지지 않던 그것이 잠깐 비치는 햇살에 따뜻해지자 그냥 녹아 버린 것은 당신께 감사하기 위하여 해 뜨기 전에 일어나야 하고 동틀 녘에 당신께 기도해야 함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고마움을 모르는 자의 희망은 겨울 서리처럼 녹아 버리고 쓸데없는 물처럼 흘러가 버립니다."(지혜 16,26-29) (여기서 ‘그것’은 ‘만나’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드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더 큰 은총을 향해서 나아가지만, 감사드릴 줄 모르는 사람은 그냥 그 자리에서 정체되어 버립니다.
3) 이 이야기를 ‘구원’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냥 가버린 사람들은 ‘몸’의 치유에만 만족하고서 멈춘 사람들이고, 되돌아온 사람은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계속 나아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린 사람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신 것은, 그들이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고 ‘몸의 치유’에서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몸’의 치유와 건강도 중요한 일입니다. 건강하면 신앙생활을 좀 더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몸이 건강해서 오히려 신앙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건강하면 세속 일에 더 쉽게 몰두하게 되고, 그래서 그렇게 되는데,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사람의 ‘몸의 건강’은 아무것도 아닌 것, 즉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친구가 와서 모처럼 자전거타고 뉴욕 나들이를 가기로 했습니다. 헬멧을 친구에게 주려고 했는데 뉴욕은 헬멧 착용은 의무가 아니라고 하고, 친구도 그냥 타겠다고 해서 헬멧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가는 길에 사고가 났고, 헬멧을 착용하지 않은 친구의 이마가 조금 다쳤습니다. 헬멧 착용이 의무는 아닐지라도 본인의 안전을 위해서는 착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다행히 친구는 보험을 들었기 때문에 큰 부담 없이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보험은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가입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친구는 학교의 보험에 가입했고, 이번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국처럼 전 국민의료보험이 적용되는 나라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전 국민의료보험이 시행되지 않는 나라에서는 아픈 것도 고통이지만, 의료비 부담도 걱정입니다.
이제 곧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작년에는 팬데믹 때문에 대림특강, 성탄판공이 취소되었습니다. 올해는 본당에서 대림특강, 성탄판공이 재개 될 것입니다.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 선물을 준비했던 동방박사처럼, 주님의 성탄을 축하했던 목동들처럼 우리의 삶으로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교회에서 정한 의무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성숙을 위해서 슬기로운 처녀가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웠던 것처럼 우리들의 기도와 선행을 우리 마음의 등잔에 가득 채우면 좋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톨릭평화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파울리타 수녀의 유익한 교리여행’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지난주까지 30회의 교리여행이 있었습니다. 수녀님의 설명을 잘 읽으면 교리여행에서 만나는 문제를 맞힐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의무는 아니지만 제게는 큰 도움이 되는 교리여행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 10명을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다른 아홉 명은 예수님을 다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은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루가복음 10장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님께 물을 드렸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시면 곧 다시 목마를 우물의 물을 드렸던 사마리아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구원의 샘물을 예수님께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선택받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의무는 아니었지만 자비를 베풀었던 사람이라면, 의무는 아니지만 주님의 말씀을 경청한 사람이라면, 의무는 아니지만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잔 바니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평생 장애인들과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았던 잔 바니에입니다. 잔 바니에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주었던 분은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안정된 일자리와 성공이 보이는 길이 있지만 장 바니에는 장애인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의견을 아버지에게 말했고, 아버지는 아무런 조건 없이 ‘난 너를 신뢰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로 잔 바니에는 구원의 방주를 뜻하는 라르쉬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라르쉬 공동체는 35개국 134곳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구원의 방주가 되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영성가인 헨리 나웬 신부님은 잔 바니에를 만났고, 라르쉬 공동체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잔 바니에의 영성과 사상은 헨리 나웬 신부님의 삶을 바꾸었고, 헨리 나웬 신부님은 라르쉬 공동체에서의 체험을 책으로 출판하였고, 책은 많은 이들의 영적인 갈증을 풀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능력과 재능을 보시고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열 때, 오늘 나병이 치유된 이방인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린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찾을 때 치유는 구원으로 꽃이 필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뇌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눈은 사물을 바라보는 창문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고, 고맙게 보일 것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시기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이비귀환으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들의 몸도 있는 것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1)감사의 정을 드리는 정도가, 영혼이 건강한 정도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어떤 마을에 들르십니다. 마침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멀찍이 서서, 소리 높여 외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이르십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집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으로 구원된 사람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 한 사람뿐입니다. 다른 아홉은 몸은 깨끗해졌지만 구원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영혼의 나병이 치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감사할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영혼의 나환자들입니다. 그들은 부족한 작은 것에 집착한 나머지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그런 나머지 주어진 큰 은혜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혹시 나도 부족한 작은 것 때문에, 크신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감사의 정을 드리는 정도가, 영혼이 건강한 정도입니다.
감사의 정을 잊지 않는 매일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
(2)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구원관
종교마다 영혼이 사후에 구원받는다는 구원론이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스승을 주님으로 모시는 가톨릭과 개신교는 구원관이 다릅니다. 개신교의 구원관은 좀 뻔뻔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람이 죽기 전에 예수님의 이름만 불러도 구원받는다는 구원관, 살아서 무슨 짓을 했건 간에 주님의 이름만 부르면 된다는 구원관은 얼핏 들으면 주님의 사랑을 강조한 듯 하지만 그 속내에는 무책임하고 뻔뻔함이 보입니다.
실컷 죄짓다가 죽기 전에 회개하면 된다는 식의 무식한 사고방식을 만들 위험도 크고 사람의 마음을 잘 모르는 무지함도 엿보입니다. 심지어 자기 교회에 나와야 구원을 받는다는 철면피한 종교 영업(?)을 하는 목회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반면 가톨릭의 구원관은 어떠한가? 반대로 지나치게 엄격합니다. 티끌만한 죄도 짓지 않아야 천당에 가고 죄를 지은 자들은 그 죄를 다 씻을 때까지 연옥에서 시간을 보내야합니다. 또 대죄를 지은 자들은 여지없이 지옥으로 가야 한다는 구원관이죠.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느님을 사랑하지만 자신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종교적 자격지심과 구원 불안증에 시달리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구원을 천당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시험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심리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일수록 구원을 포악한 독재자의 관점에서 봅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천당에 가고 하느님 보시기에 덜 차는 사람들은 연옥, 하느님 보시기에 꼴 보기 싫은 놈은 지옥에 간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한 경우 길거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외치는 병적인 믿음을 가진, 심한 신경증환자들이 생기는 것입니다.이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을 가학성 성격장애를 가진 신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들의 신앙이 학대적 신앙인지도 모릅니다. 왜 모르는가? 어린 시절부터 부모로부터 학대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병적인 종교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심리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죽어서 어디로 갈 것인가’를 중요시하는 구원론은 말 그대로 유물론적인 구원론입니다. 참 구원이란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 내적인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마치 자캐오가 주님을 접하고 내적인 변화를 가진 것처럼, 마음 속 자아를 괴롭힌 소리들에서 벗어나게 자유로움을 주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참된 의미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부동산으로 인해 스트레스 받는 세대들이 천당도 평수 넓은 아파트를 얻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어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합니다.
주일학교 교리시간에 보좌신부가 아이들에게 “구원이 무엇일까요?”하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이 여러 대답을 하는데 한 개구쟁이가 빙긋이 웃더니 “10원에서 1원을 빼면 9원이요!” 했습니다. 그 아이는 하느님을 놀린 벌로 신부가 돼서 구원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대구대교구 마진우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나병환자 열 사람이 등장합니다. 나병은 참으로 고약한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손과 발이 문드러지고 얼굴도 문드러져서 병 자체의 심각성도 문제이지만 그런 흉측한 몰골로 인해서 가까운 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가족에게서도 버림받는 지독한 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기꺼이 치유해주시고 그들은 치유 받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돌아온 이는 오직 한 사람, 그것도 당시의 가장 천대받던 이방민족인 사마리아사람만이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이 복음 말씀을 듣고 우리는 혀를 찹니다. 아마도 이런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쯧쯧쯧... 아니 그렇게 치유를 받았으면 당연히 돌아와서 감사를 드려야지... 보통 병도 아니고 나병을 치유받았는데... 다들 생각이 없구만?’
맞는 말입니다. 크나큰 축복의 선물을 받았으면 마땅히 감사 드리는 것이 합당합니다. 혹시 숨쉬는 것에 감사드려 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 어느 시험기간이었습니다. 저는 휴게실에 혼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순간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더니 그대로 숨구멍으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갑자기 숨구멍이 조여들기 시작했고 저는 한동안 숨을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고 이대로 죽는가보다 생각하는 순간 다시 숨구멍이 조금씩 열려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지만 그 순간 이후로 저는 마음껏 숨을 쉬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잃게 되면 그것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평소에 얼마나 감사하며 살지 못했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 앞의 우리의 처지를 잘 살펴보면 우리 주변은 온통 감사할 것 투성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지금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에게 살아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숨쉬고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이 하느님의 크나큰 선물이라면 그 밖의 것들은 더더욱 큰 선물로 다가옵니다.
사지가 멀쩡한 나의 몸,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내가 일할 수 있는 직장...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얼마나 감사드리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감사는 둘째치고 때로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발길을 돌려 우리에게 크나큰 선물을 내려주고 계시는 하느님께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실 것입니다.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감사에 더디고 파티에 익숙한 우리들>
예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치신 오늘 복음의 기적사화는 루카복음만의 고유한 사료이다. 루카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9,51-19,28)를 엮어가면서, 예수께서 상경 길에 있다는 사실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9,51.53; 13,22.33; 17,11; 18,31; 19,11.28)
뿐만 아니라 베레아 지방을 통해 가시면서 오늘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지방을 언급한 이유는 나병환자 열사람 중에 이방인으로 취급받던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지나간 복음들에서 드러났다.
애당초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예루살렘 상경계획을 잡았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를 제자들이 꼽게 여겨 하늘의 불을 내려 태워버리자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초연히 우회로를 택하셨다.(9,52-56)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10,29-37)에서도 예수님의 호의적 속내가 드러난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열 사람의 치유사화에서도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이 돋보인다.
구약성서에서는 사제들이 나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악성 피부병들을 부정함으로 규정하고 그 환자들을 격리시켜 살게 하였다. 그들이 완치되었을 경우, 자신의 피부를 사제에게 보여 정함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레위 13장)
사제가 정함을 선포하면 병이 나은 자는 사제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의 장막에서 복잡한 ‘정화예식’을 치러야 했다.(레위 14,2-14) 하루도 아니고 8일씩 걸리는 이 예식이 얼마나 복잡하고, 사실 골치 아픈 것인지는 레위기의 이 대목을 꼭 읽어보아야 한다. 이 대목을 읽고나면 나병환자 10명 중에서 유대인이었던 9명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악성 피부병자들이 마을 중심과 격리된 어귀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마을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쉽게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치유의 자비를 청했다. 사실 예수께는 어떤 병이든 치유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병자들이 사제들로부터 치유를 인정받고 공식적인 정화예식을 치름으로써 가족들과 함께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사제에게 가는 도중에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10명중에서 9명은 유대인이었다.
그들이 나병환자로 격리되어 지내는 동안 살아서는 결코 그들 가족과 동족에게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낫게 된다면 율법이 규정하는 ‘정화예식’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그 예식을 치러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수백 번을 뇌까렸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치유된 것을 확인하는 순간, 더 힘차게 사제들에게 달려갔을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바로 이방인으로 간주되는 사마리아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예수께로 돌아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제대로 치유를 받은 사람이 된 것이다.
과연 깨끗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법(法)이 사람을 깨끗하다고 선포한다 해서 깨끗하게 되는 것인가? 깨끗하고 흠 없이 산다는 것은 사람의 인정을 받기보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삶이다.
정화예식은 천천히 치러도 늦지 않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발걸음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분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자신의 길을 가야 하시는 것이다.
오늘 9명의 유대인들 속에서 찬양과 감사에는 더디고, 축하파티에는 잽싸고 익숙한 우리들 자신을 본다. 감사와 찬양에는 정한 날 없이 미루고, 파티와 회식과 약속에는 열 손가락이 모자라는 우리들이 아닌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두 배의 기쁨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나병을 치유 받은 열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18)
만약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홉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체 무엇 때문일까? 이 질문은 가장 분명한 영적인 선택 하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묘하게도,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믿지 않기가 일수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마음속에서 그 실상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감사하지도 기뻐하지도 못하고, 자비를 입었음에도 여전히 무엇인가를 채우고자 안달하거나, 불평하고 원망하는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마치 아버지께서 베푸는 잔치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서 있는 큰 아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나병을 치유 받았으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하지도 감사를 드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드린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를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니, 나병의 치유가 구원인 것이 아니라, 그 치유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은 감사를 불러옵니다. 그러기에, 지금 감사하며 기쁘게 살고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결국, 그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지, 아닌지는 ‘그가 감사와 가쁨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아침 식사 때 빵에 발라먹는 꿀 한 숟가락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꿀 한 숟가락, 이를 위해 하느님은 몇 천 마리의 벌을 몇 천 시간 동안 날아다니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몇 천 가지 꽃들을 피게 하셨고, 태양을 비추셨습니다. 비가 오면 벌들이 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지구를 약간 기울어지게 만드셨음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발육과 성숙을 체험하고, 죽음과 소멸도 체험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같은 계절만 있었을 것입니다.
또 밥상의 반찬을 두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음식들이 바로 나를 위해 목숨 바치고 있음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목숨이 나를 위해 몸 바쳤는지! 닭은 나를 위해 몇 마리 쯤 목숨을 바쳤을까요? 또 몇 마리의 소가, 몇 마리의 멸치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쳤을까요?
이처럼, 감사하는 일은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의식하면서, 모든 삶을 지속시켜주고 있는 많은 기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의 신비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눈! 신비를 바라보는 눈!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며 활동하시는 그분을 볼 줄 아는 눈이야말로, 바로 감사의 눈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 5,20).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6)
주님!
감사하게 하소서!
청하기도 전에 듣고 계시는 당신께 감사하게 하소서.
베풀어지기도 전에 이미 품으신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치유보다 치유시키는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모든 것 안에 깃든 당신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무감각하지 않게 하소서.
치유를 받고도 감사할 줄을 모르는 배은망덕은 말게 하소서!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17,17)
<은혜에 감사하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예수님을 마주오던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멀찍이 서서 소리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7,1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17,14) 하고 이르시자,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집니다.
그런데 나병으로부터 해방되어 몸이 깨끗해진 열 사람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배은망덕한 모습을 보인 아홉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러 온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두 가지를 마음에 담아봅니다.
하나는, 우리가 끊임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라는 기도를 바쳐야 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 기도를 꼭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구원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 바로 '감사기도'라는 것입니다.
한번 각자의 모습을 성찰해 봅시다!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기도를 얼마나 충실하게 바치고 있는지? 자비하신 하느님의 은혜를 입고 '감사기도'를 잘 바치고 있는지? 감사를 잊고 배은망덕한 모습을 보인 치유 받은 아홉 명의 나병환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1테살5,1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음들>
루카 17,11-19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들>
믿음 하나
그분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낫게 해주시리라는
믿음
믿음 둘
그분께서
가라고 하시니
아직 낫지 않았어도
그분을 떠나가는
믿음
믿음 셋
그분께서
낫게 하셨음을 깨닫고
그분께 돌아가는
믿음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을 읽다가 어느 의사 선생님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로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신에게 암이 자라고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불행히도 늦게 발견해서 치료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의사 선생님은 오히려 감사의 마음으로 가질 수 있었다며 이렇게 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어떻게 자신이 죽을지 모르는데, 저는 죽음의 원인을 알게 되었잖아요. 그런 행운이 어디 있습니까?”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의사 선생님은 죽음을 삶의 단절로 보지 않고,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삶에 대해 아쉬움도 물론 있지만, 미래를 확신하고 있기에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이 세상 삶이 마지막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고 이를 위해 회개의 삶을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순간에서도 희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희망을 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보는 사람은 좋은 일, 긍정적인 일들을 바라보면서 지금의 삶에 감사해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병 환자들이 등장합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라 나병 환자들은 성으로 둘러싸인 큰 도시에는 들어갈 수 없었고, 특히 예루살렘 성전에는 얼씬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던 나병 환자였기에, 예수님을 보고 멀찍이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나병은 실질적 치유가 필요하였지만, 치유 후 율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는 법적인 치유 인정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하게 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를 올립니다.
이 사람은 이방인이었고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 9명은 유다인이었습니다.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경배를 뜻합니다. 이방인은 하느님을 경배하는데, 하느님 경배를 민족성으로 자부하는 유다인들은 치유된 것을 알자 다른 데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과연 어디로 갔을까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구원의 말씀입니다.
++++++++++++++++++
<아이를 키우기 참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느 어머니께서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십니다. “우리 애가 얼마나 착했는지 몰라요. 성당도 열심히 다니면서 복사도 섰었는데…. 지금 방에서 나오지를 않아요. 매일 게임만 하고…. 한심해 죽겠어요.”
모범생이었던 아이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 직장을 구할 생각도 하지 않고 방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모범생이었다는 말을 들으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어느 패션 디자이너의 책에서 “우리 아이를 패션 디자이너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혹시 모범생이에요?”라고 다시 묻는다고 합니다.
만약 모범생이라고 하면 다른 길로 인도하라고 권한답니다. 정해진 규칙만을 따르고, 부모님 말씀만 잘 듣는 모범생에게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틀을 깨지 못해 내적 갈등을 엄청나게 겪을 수 없다는 말을 해준다고 합니다. 앞선 그 아이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세상은 모범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틀을 깨는 독창성을 원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갈등이 생기고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잃기도 합니다. 모범생은 누구의 모범생일까요? 부모의 모범생을 세상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까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돌아가 감사를 드렸다>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께 돌리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서운함이 앞섭니다. 그 처지가 어떠하든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또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 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17,13) 하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들은 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이 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 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와’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제에게 몸을 보이는 것보다 먼저 예수님을 뵙고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얼른 가서 사제에게 보이고 자신의 삶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아니,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구원의 혜택은 이방인, 죄인에게도 열려 있고, 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과 사람 자신의 믿음과 협력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자기가 하느님께 어떤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간구했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몸의 치유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여 큰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선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은혜를 당연히 생각 말고 은혜를 통해서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매사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결국은 불평불만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감사할 것을 찾아보십시오. 살아있음이 감사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받기만 하는 것, 기다리기만 하는 것, 청하기만 하는 것,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구원은 감사하는 이들의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찬양과 감사>
-구원의 행복은 선택이요 선물이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저녁바다 갈매기는 행복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고기를 싣고,
넓고넓은 바다를 노저어 와요, 넓고 넓은 바다를 노저어 와요.”
어제 행복한 하루를 선택해 피정을 한 코이노니아 자매회 자매들이 처음 강의에 앞서, 또 떠날 때 끝으로 부른 ‘바다’란 옛 동요입니다. 이렇게 좋은 동요인지는 예전엔 미쳐 몰랐습니다.
희망찬 시작과 행복한 끝의 인생을 상징한 구원의 노래입니다. 새삼 구원의 행복은 선택이자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새벽에 일어나 카톡을 확인해 보니 45년전 거의 반세기전 신림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로부터 뜻밖의 메시지와 선물로 보낸 쌀 여러 포대 사진이 첨부되어 도착되어 있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철없던 6학년에 처음 뵈었을 때 선생님 연세보다 두배를 더 먹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저희는 6학년입니다. 자주 찾아 뵙지는 못해도 뵐 때마다 감동해 주시는 선생님 덕에 저희 맘도 따뜻합니다. 선생님이 계셔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해마다 선생님께 저희 6반 친구들의 정성된 마음 전달해 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무엇보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도드립니다.
6학년6반 제자일동; 김대현, 김광철, 이원재, 김옥현, 홍희기, 배준석, 박건우, 정찬석, 김종호, 이동환, 김성호, 이진”-
선생님, 신부님, 수사님 세 호칭으로 불리는 행복한 존재인 제가 참 감사했습니다. 선생님답게, 신부님답게, 수사님답게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참 고맙고 반가운 선물입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린 감사의 선물들입니다.
오늘은 참 자랑스러운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입니다. 자랑하기로 하면 끝없이 자랑해도 부족한 처음으로 큰 대大자가 붙는 무려 1600년전 교황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빛을 발하는 지금도 함께 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교황입니다.
야만의 외적들 침입으로 참 어려웠던 격동기의 로마를 구했던 다방면의 천재였던 하느님 보내 주신 최고의 선물같은 교황이었습니다. 교황에 대한 업적을 간략히 소개합니다.
“대 레오 교황에 대한 평가는 위대한 행정가, 외교가, 전략가, 신앙의 보존자, 고대 교회의 초석을 놓은자로 요약된다. 서로마 제국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과 교회 역시 여러 이단 사상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황에서 신학적, 사목적, 정치적 난제들을 훌륭하게 해결해 냈던 그는 대내적으로 로마 교회의 최고 통치권 기반을 확립한 수장이었으며, 대외적으로도 사실상 로마의 수호자가 되었던, 당시 서방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우리 교회에 보내 주신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인 성 대 레오 교황입니다. 얼마전 세 위대한 근래의 교황 세 분에 대한 소통의 스타일에 대한 비교도 공감이 갔습니다. 이 세분 교황들 또한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소통의 거인(a giant of communciation)’으로 병으로 인한 고통과 약함중에도 침묵의 시간을 통해서 소통의 빛을 발했던 교황이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말씀과 저술의 사람(a man of words and writing)’이다. 압축된 태도안에서, 또 말과 생각에서 명석하고 질서잡힌 방식으로 그의 사상과 영성을 표현했던 ’문화의 사람(a man of culture)’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친밀함의 사람(a man of proximity)’이다. 그의 소통의 힘은 사람들에 대한 가까운 접근에서 표현되는 분명하고 짧은 말과 태도안에서 잘 드러난다.”
참 자랑스런 하느님의 선물인 세분의 교황들입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좋으신 분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특히 지도자들에게 ‘지혜를 찾아라’ 강조합니다. 어찌 지도자들뿐이겠습니까! 하느님은 누구나 지혜를 찾는 자에게, 지혜를 선택하는 자에게 지혜를 선물하십니다. 하느님은 ‘들어라’, ‘깨달아라’, ‘배워라’, ‘귀를 기울여라’ 부단히 선택의 노력을 촉구하십니다.
“만물의 주님께서는 누구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으시고 누가 위대하다고 하여 어려워하지도 않으신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바로 이런 대자대비, 공평무사한 하느님을 믿고 선택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받은 열명의 나병환자중 찬양과 감사로 응답해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받은 바로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이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기득권도 소용없습니다. 찬양과 감사를 선택하여 응답함으로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받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찬양과 감사로 응답하지 못한 유대인 나병환자 아홉은 영혼 아닌 육신의 치유라는 반쪽의 구원뿐임을 깨닫습니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오늘 복음입니다. 부활의 기쁨, 파스카의 구원 기쁨을 가득 안고 귀가하는 영육이 온전히 치유 받은 나병환자 사마리아인입니다. 지혜도 믿음도 찬양과 감사도 치유의 구원도 선택이자 동시에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역시 진인사대천명이 답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지성의 선택에 감천의 선물입니다. 찬양과 감사로 표현되는 우리의 믿음은 그대로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는 치유의 구원이 됩니다. 더불어 감사 10계명을 소개합니다.
1.생각이 감사다. 깊은 생각이 감사를 불러 일으킨다.
2.작은 것부터 감사하라.
3.자신에게 감사하라.
4.일상을 감사하라.
5.문제를 감사하라. 문제에는 항상 해결책이 있게 마련이다.
6.더불어 감사하라. 함께 감사하면 은총의 결실도 풍성하다.
7.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라.
8.잠들기 전에 감사하라.
9.감사의 능력을 믿고 감사하라.
10.모든 것에 감사하라. 우리 삶에서 은혜와 감사가 아닌 것은 한가지도 없다.
새삼 희망과 더불어 감사는 최고의 명약名藥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께 희망을 두고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베풀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 아멘.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감사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들려 주십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루카 17,12)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실 때 한센병을 앓는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자비를 청합니다. "멀찍이"라는 표현에 당시 사회가 그들에게 가졌던 편견과, 그들 스스로 느꼈던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져 참 마음이 아픕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
예수님은 치유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멀찍이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그들을 존중해서 무작정 다가가지도 않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어쩌면 결과론적인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악성 피부병을 앓는 이들의 발병 여부나 회복에 대해 확인을 해 주는 이가 사제였으니까요.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루카 17,14)
치유의 기적은 그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 걸어가는 동안에 일어납니다. 그저 믿고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나은 겁니다. 어떤 결정적 순간이 아니라 믿고 가는 동안...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많은 기적들도 이렇게 찾아올지 모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몸에 정화의 치유가 일어난 걸 알고 예수님께 되돌아와 감사를 드린 단 한 사람,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몸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은 순간, '사제에게 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이고, 그 말씀이 이 모든 놀라운 기적의 열쇠라는 걸 직감했지요.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립니다. 그는 사제의 완치 판정이나 가족과의 재회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아는 이였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다른 아홉은 육신의 치유를 받았고, 이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적 치유에 영혼의 구원까지 얻습니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세상의 권력자와 통치자에게 지혜를 배우라고 촉구합니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지혜 6,7)
통치자, 힘 없는 이들 할 것 없이 누구나 지혜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권력을 가진 이들을 콕 짚어 더 엄중하게 지혜를 요구하시는 이유가 있겠지요. 사실 모든 이가 하느님 앞에 한낱 작고 보잘것없는 피조물이지만, 하느님은 일부에게 더 많은 재능과 재물과 권력을 허락하시고 그에 맞갖는 자질과 덕행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을수록 주제 파악이 필요합니다. 본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단지 하느님께서 뭔가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라고 잠시 힘을 맡기셨다는 것을 자각할 때 감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감사는 자신을 알고 타인을 알며 하느님을 아는 이의 덕행입니다. 그렇게 감사할 줄 아는 권력자는 세상을, 타인을, 가난한 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지혜 6,11)
권력자나 통치자가 끝내 얻어야 할 것은 힘이나 명성, 재물, 이권이 아니라 감사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하느님과 함께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지만 그분이 떠나시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리는 인간 실존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가 기껏해야 짧게 지나가 버릴 이 풍진 지상 삶에서 도토리 키재기가 목표여서는 안 되니까요.
지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이며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지혜를 갈망하고 갈구하는 이는 지혜를 찾아 얻고 지상의 삶과 영원한 생명을 관통하는 가르침을 받아 얻을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복음 환호송)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지혜를 구합니다.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희로애락의 파도에 출렁이고 생로병사의 풍랑에 뒤집어지면서도,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최선을 다하고 계심을 믿고 감사드리고 있다면 지혜의 길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몸과 마음이 힘들고 처한 상황이 어렵다 해도,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감사할 일들을 꼽아내어 주님 앞에 엎드리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비를 청하고 감사를 되돌려 드리는 이들을 결코 그냥 보내지 않으시니, 벗님에게도 치유와 구원이 반드시 함께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힘내십시오. 은총과 자비의 주님께서 벗님과 함께 하시길 두손모아 기도합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9ru2kE70EOM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 18)
관계의 현주소를
보여주듯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는다.
하느님을 잊고사는
씁쓸한 우리들
모습이다.
감사와 믿음이
빠져버린 관계는
이미 죽어있는
아픈 관계이다.
가장 깨끗한
치유는
하느님께 먼저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영광은 치유와
믿음으로
하느님을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만든다.
치유와 믿음은
그래서
둘이 아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참된 치유와
믿음이 나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다.
작은 것들이 모여
큰 것을 이룬다.
당연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가장 아름다운
실천은 우리의
감사이다.
삶의 중심축에
있어야 할
감사의
실천이 감사의
삶이다.
가혹한 삶의
현실이 간절한
우리의
기도가 된다.
우리 삶에
있어야 할 것은
바로 믿음이다.
믿음의 여정은
치유의 여정을
걸어가고
감사와 함께하며
드디어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한다.
우리 삶 안에
감사가 있는 지를
묻게된다
믿음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깨끗한 믿음으로
하느님께
돌아가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린다.
이미
무한히 열려진
믿음의 길이다.
그 믿음의
길 위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우리들이다.
아무도에서
드디어
마침내로
돌아오는 깨끗한
믿음의 자녀들이
우리들이다.
믿음을 청하는
오늘이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