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m.cafe.daum.net/obh2004/2le1/86?svc=cafeapp
[[비평]] 김수영 다시 읽기 1
김수영 다시읽기
-김수영의 초기시
오 봉 옥(시인, 문학평론가)
김수영의 초기 시 중 문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 <달나라의 장난>입니다. 김수영은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북으로 갔다가 유엔군의 평양 탈환 시 탈출을 시도, 남으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남으로 내려와선 곧바로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때가 때인지라 첩자로 오해를 받아 모진 고문을 받았다고 하네요.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부산 수용소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운 좋게 그 곳 외과원장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달나라의 장난>이 씌어진 시기는 바로 이 때, 부산 수용소 병원에서 가까스로 석방되어 직장을 얻으려고 애를 쓰고 있던 때였지요. 이 때 김수영에게는 처자식이 있었습니다. 김수영 시에 등장하는 아내의 상은 대단히 즉물적이어서 그가 그토록 혐오하는 대상인데, 이 시는 그의 부인이 보낸 그림에 대한 화답으로 보낸 시랍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쫒겨다니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년 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 <달나라의 장난> 전문
제목이 <달나라의 장난>인데요, 상당히 신선한 감이 있지요. 김수영은 리얼리즘 논쟁을 할 때에도, 그리고 모더니즘 논쟁을 할 때에도 단골로 거론되는 시인인데요,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모더니즘의 정신이라고 볼 때 이 시의 제목은 상당히 모더니틱한 감이 있습니다. 『서정주 다시읽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일행일설의 원칙을 지켜나가고자 합니다. 시를 올곧게 감상하기위해서는 문맥에 따라 충실히 해석해보는 훈련이 필요하지요. 시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육풍토에서는 시를 그 무슨 특별한 것쯤으로 가르치는 경향이 있지요. 그렇게 교육을 받다보니 대학에 들어오고, 대학원에 들어와 공부를 하면서도 시 한편을 올곧게 감상하기가 힘이 들지요. 저는 이론적 잣대로 시를 마구 재단하는 풍토, 그래서 그 시의 한 측면을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따지고 보면 너무도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참 많은 우리 시대의 비평 풍토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수영의 작품이 난해한 경향이 있어서 그러하겠지만 김수영 작품평을 볼 때 특히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허무맹랑한 해석들 참 많습니다. 그냥 한 줄 한 줄 읽어나가기로 합시다. 문맥을 따라 충실히 해석을 해 보기로 하지요.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이 작품이 전쟁 직후에 씌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쉽게 이해가 되는 대목이네요. 생존의 문제, 실존의 문제가 너무도 중요한 전후상황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팽이와 연결시켜 본다면, 팽이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팽이처럼 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떠올린 것이겠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기하고 낯설게 느껴진 것이겠지요. 시적 자아는 지금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전후상황 속에서 살아있다는, 살아간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기한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지요. 김수영 사진을 본 적이 있는지. 김수영은 정말 시인처럼 생겼지요. 참으로 고고하고, 선량하고,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이미지까지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큰 눈’으로 팽이가 돌아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네요. 그 모습 그려집니까? 사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시적 자아의 내면을 읽어내야 합니다. 전후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신기롭다’라고 생각하는 그 화자의 시선, 뭔가를 늘 ‘물끄러미 보고 있는’ 그 시선 속에서 내면을 읽어내야 하지요. 관조적 자세를 견지하는 사람치고 적극적 성격의 소유자는 별로 없지요. 지금 이 화자는 소극적 성격의 소유자이고, 현실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지요.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살림을 사는 아이’는 생활 속의 아이겠지요, 화자가 바라보고 있는 ‘노는 아이’는 미학적 가치의 아이입니다. 전후 상황에서 ‘살림을 사는 아이’는 너무도 많았지요. 먹고 살기위해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 모두가 다 그런 생활 속의 아이들이었지요. 화자를 사로잡은 것은 그런 일상 속의 흔한 아이들 ‘살림을 사는 아이들’이 아니었군요. 화자를 사로잡은 것은 ‘노는 아이’입니다. 전후 상황 속에서 한가하게 팽이돌리기에 열중인 ‘아이’이지요. 뒤에 거듭 나옵니다만 화자는 이러한 낯선 모습에 눈이 팔리고, 또 돌아가는 ‘팽이’에 눈이 팔립니다. 그래서 ‘손님으로 온 나’이지만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아이가 팽이를 또 돌려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지요.
“도회 안에서 쫒겨다니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화자는 지금 전쟁으로 폐허화된 거리를 ‘쫒겨다니듯이’ 살고 있고, ‘소설보다도 신기롭고’ 비참하게 살고 있군요. 그러면서도 ‘속임없는 눈’으로 세상을 보고자 하고, ‘나이가 준 나의 무게’로 세상을 바로 보며 살아가고자 하네요.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같이 보인다”, 그렇게 ‘나이가 준 나의 무게’와 ‘속임없는 눈’으로 살아가고자 하지만 세상을 보면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게’ 돌아가고 있네요. 그런 세상은 마치 ‘별세계 같이’ 보입니다. ‘별세계’란 현실세계와는 다른 세계이지요.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같다”, 화자가 찾아간 집은 정말 ‘여유’있는 집안이네요. 집안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리고 있거든요, ‘팽이’도 그냥 팽이가 아니지요, 줄팽이입니다. 이 시를 이야기하면서 모두들 전통적 ‘팽이’를 운운 하는데 여기서의 ‘팽이’는 그런 전통적 팽이 즉 치는 팽이가 아니라 줄을 감아 돌리는 당시로서는 첨단의 팽이이지요. 제 어렸을 때만 해도 ‘줄팽이’는 부잣집 애들이나 돌리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전후 상황에서 그것도 집 안 거실에서 ‘줄팽이’를 돌리고 있으니 대단한 부잣집이 아닐 수 없지요. 어쩌면 김수영으로서는 처음 보는 ‘팽이’였을 겁니다. 그러니 ‘별세계’를 운운할 수 밖에 없고, 더구나 집 안에서 ‘팽이’를 돌리고 있으니 ‘달나라의 장난’을 운운하지 않을 수가 없죠.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부잣집을 방문하여 ‘별세계’를 느낀 화자, 그것도 ‘달나라의 장난’같이 집 안 거실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팽이를 본 화자, 그런 소외감이 끝내는 화자를 울리게 하는 거죠. 그러면서도 그는 뼈아픈 자각을 하고, 자기 결의를 다지게 됩니다. ‘뚱뚱한 주인’은 속물적인 지상적 욕구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대상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이 아님을 역설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대결 의식이기도 하고, 심층적으로 내다보면 자기위안이기도 하죠. 세상에 대한 대결 의식은 자기 자신에 대한 뼈아픈 자각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이 바로 그런 자각이지요. 현실 속의 ‘나’는 전통적 팽이를 치는 자리에나 있지요, 그리고 지금 피터지는 현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로 눈앞 거실에서 줄팽이가 돌아가고 있으니, 그런 별천지의 현실이 벌어지고 있으니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 그런 자각, 그런 다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거지요.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년 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비행기 프로펠러나 팽이는 스스로 돌지 못하는 사물이지요, 동력을 얻어야만 돕니다. 그러나 이 프로펠러나 팽이는 동력을 얻으면 대단한 속도를 낼 수 있는 사물이라는 점에서 근대를 상징하는 사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는 ‘팽이’는 물론 전근대적 풍물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이 시에서 나오는 ‘줄팽이’는 속도를 담보하는 사물입니다. 그럼 ‘기억이 멀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비행기 프로펠러’의 기억은 고작해야 전쟁 상황에서의 기억이지요, 그러나 ‘팽이의 기억’은 오래된 것입니다. 우리네 아버지도 ‘팽이’를 쳤고, 우리네 할아버지도 ‘팽이’를 쳤지요. 그런 점에서 ‘팽이’는 전근대와 근대를 아우르는 풍물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화자는 ‘팽이’를 주목하고 있고, 그 ‘팽이’의 존재에 자신의 존재를 대입시키고 있지요. 그 팽이는 ‘지금 수천년 전의 성인과 같이’화자의 바로 눈앞에서 돌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가장 막연한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인데요, 저는 이 대목을 속물적이고 지상적 욕구를 대변하는 ‘뚱뚱한 주인’과 대비시켜 해석을 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 ‘수천년 전의 성인’은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는 그 어떤 고귀한 정신을 말하는 것 같고, 그런 점에서 처절한 현실을 감내하는 ‘성인’을 떠올리고 있으면서도 그런 성인이 되지 못하는 ‘현실 속의 자신’을 대비시켜 이런 비애감어린 표현을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생각하면 서러운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는 설움의 정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 생각해보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를 인지하는 것이 설움이지요, 그리고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돌고 있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인지하는 것이 또 설움입니다, 더구나 그렇게 살아가면서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그 설움은 증폭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움을 자제하며 신기하게 곡예사처럼 살아가는 자신, 그런 처절한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이 대목에서 ‘설움’을 넘어선 그 어떤 각성, 시적 주체의 의지를 읽게 됩니다.
이 시는 설움의 정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나’와 ‘뚱뚱한 주인’으로 표상되는 현실의 대립, 심층적으로는 ‘팽이’와 ‘화자’의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팽이’는 돌면서 ‘나’를 울리기도 하고, 비웃기도 합니다. ‘수천년 전의 성인과 같이’ 화자의 눈앞에서 돌고 있고,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에서 울리는 현실과 울지 않으려는 시적 자아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읽을 시는 <屛風>입니다. 김수영의 초기 시 중 대표작으로 꼽을만한 작품이지요. 수영 자신도 “현대시로서의 진정한 자질을 갖춘 처녀작”이라 스스로 평가한 바 있는 작품입니다.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주검에 취한 사람처럼 멋없이 서서
병풍은 무엇을 향하여서도 무관심하다
주검의 全面 같은 너의 얼굴 우에
용이 있고 낙일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고 하면서
병풍은 허위의 높이보다도 더 높은 곳에
飛瀑을 놓고 幽島를 점지한다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있는 병풍은
내 앞에 서서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
나는 병풍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뒤에서 병풍의 주인 六七翁海士의 印章을 비추어주는 것이었다
김수영은 일상어를 과감히 시로 도입시킨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일상어를 과감히 도입시켰으면 시가 쉬워야 하는데 어렵다는 점이지요. 난해한 작품이 많은 게 김수영입니다. 이 시가 그렇습니다. 이 시의 해설을 찾아보았는데요, 납득할만한 해설이 없더군요. 공통적인 점은 모두 ‘빈소’에 쳐놓은 병풍을 통해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해석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 시를 보면 병풍의 그림이 나오는데요, ‘병풍이 그림’이 ‘빈소’에 비출 수 있을까요? ‘병풍’은요, 뼈대있는 집안에서 시집을 갈 때 가지고 가는 것이지요, 생활의 공간에서 장식용으로, 바람을 막는 도구로도 쓰입니다. 그리고 애 ․ 경사에 쓰이는 게 ‘병풍’이지요. 애사에 쓰이는 게 ‘글씨가 나오는 병풍’이고요, 경사에 쓰이는 게 ‘그림이 나오는 병풍’입니다. 경사에 ‘글씨가 나오는 병풍’은 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애사에 ‘그림이 나오는 병풍’은 쓰지 않지요. 그런데 이 시를 보면 일관되게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고, 언뜻보면 이 ‘병풍’이 ‘빈소에 쳐놓은 병풍’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빈소에 쳐놓은 병풍을 통해 죽음을 노래한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이지요. 그럼 저는 어떻게 해석을 하는 지 일행일설을 통해 밝혀보고자 합니다.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주검에 취한 사람처럼 멋없이 서서/ 병풍은 무엇을 향하여서도 무관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