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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조선이 명나라에 '한반도에는 금은이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세종대에 금은에 대한 조공을 면제해줄 것을 요청했고, 면제 받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사실 조선의 체계상 광업 또한 관에서 주도하는 사업이다 보니 이게 생산성이 안나오면 바로 문을 닫는 구조기도 하고해서 적극적으로 광맥을 찾아 광산을 개발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안한건 아니고 정말 필요최소로 유지하는 상태였지요.
하지만 민간시장이 조금 발전되고 안정된 중종~명종시기에가게 되면 민간광업이 조금씩 발전을 하게되고 은이 예전보다는 시중에 풀리게 되는데 이 영향인지 조공할때 역관 통사 혹은 세도가들이 명나라에 은을 싸가지고 가서 교역하는 사람이 많아서 이거 좀 어떻게 해야하지 않냐는 이야기가 조정의 공론으로 나올 정도가 됩니다. (명나라에서 우리를 오랑캐 장사치가 와서 살수가 없다는데 이건 망신에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은이 조선의 기축통화로 쓰이거나 하는 그런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조선후기 이전까지는 광산개발은 한정적이었고(홍경래처럼 광산을 개발한다고 돈주고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모습은 조선초기는 상상도 못할 일), 그 은이 풀릴만한 시장이 조선에 그렇게 대규모로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러다가 조선의 광업개발에 뛰어든(?) 어르신이 한 분 계셨으니 바로 고려천자 만력제사마 였습니다.
임진왜란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아마 그 단천은광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조선을 비판하는 주제로도 많이 회자되고는 하는데, 조선에서는 안하고 있다가 가토기요마사가 와서 이 좋은 은광을 왜 그냥 둠? 하면서 은광채굴을 했다는 기록때문이죠.
근데 이번에는 명나라에서도 그 단천은광을 비롯하여 은광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덕형이 아뢰기를,
"진신(陳信)이 제독의 군중에서 나와 신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에는 부국 강병의 방책이 있다. 이곳에 와서 보니, 은이 산출되지 않는 산이 없으니 이것을 채굴하여 제련한다면 충분히 부유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 2월 20일 을사 2번째기사
그리고 심지어 호대수같은 사람은 어디서 얻었는지 조선 일대의 광맥을 조사한 종이를 가지고 와서는 이덕형에게 가보자고 요구할 정도.
유격이 종이 하나를 꺼내어 보이는데 그것은 곧 우리 나라 산광(産鑛) 지명을 기록한 것으로, 평안도의 강계(江界)·창성(昌城)·양책(良策), 황해도의 서흥(瑞興)과 개성부(開城府), 강원도의 춘천(春川)·이천(伊川)·원주(原州)·주천(酒泉), 충청도의 보은(報恩)·연풍(延豊)·청풍(淸風), 함경도의 안변(安邊)·문천(文川)·단천(端川) 등의 고을이 모두 그 안에 있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개광(開鑛)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간혹 한두 곳의 철맥(鐵脈)을 찾아 여러 달동안 공력(功力)을 허비해도 수삼 냥의 은을 만들지 못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은철(銀鐵)은 본국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하였습니다. 이어서 문답하고 물러났는데, 어두울 녁에 유격이 와서 신을 보고 또 은 캐는 일에 대해서 말하기에, 신이 ‘만일 땅의 보물을 얻어 이 때의 빈궁함을 구제할 수 있다면 이는 본국도 원하는 바이다.....
선조실록 67권, 선조 28년 9월 13일 임오 1번째기사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근데 그럼 명나라에서는 왜 이렇게 조선은광에 관심을 가졌을까요?
사실 명나라에서는 그럴 만한 분위기가 있기는 했습니다. 황제인 만력제가 1596년부터 광세사(鑛稅使)라는 관리에 환관들을 임명하여(광세태감鑛稅太監) 중국전국에 뿌리고, 적극적으로 광산 개발을 해서 환관들의 골드 아니 실버러시를 일으킨 장본인 이었거든요;;
노다지(?)를 찾으러 고고~
해금책때문에 명나라가 송나라나 원나라에 비해 상업이 후퇴되었다는 한국의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명나라는 풍부한 인적 자원과 국토 및 물자를 바탕으로 한 '내수시장'으로 상업이 발달한 국가였습니다.(상방商帮이라는 상인조직이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가 바로 명나라)
그리고 마을단위기는 했지만 어쨌든 민간 광산업자들도 당연히 그 전부터 출현하였죠. 가정제 시절 척계광이 의오의 '광부'들을 병사로 '모집'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는대목.
은 광산에서 왜구 토벌 레이드 뛸 사람 모집하고 있는 척계광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황제가 직접 환관을 동원하여 간섭을 하는 것이었기에, 신하들과 당연히 마찰을 빚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력제: 야 지금 전비가 엄청들어가는데 전국에 환관들을 보내서 광산개발을 독려해야겠다.
신하들: 그런거 말고 사치를 하지마요 쫌!!!!!! 그리고 환관 제네들이 얼마를 뜯어가는지도 좀 알아봐요
이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두고두고 만력제의 실책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징비록에서 환관에게 은자 계산하게 시키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하는 만력제
시기가 좀 맞지는 않지만 징비록이 이런 부분에서 신경을 쓴게 눈이 보이는 대목이죠
근데 중국에서는 그렇다치고 만력제는 왜 이렇게 조선의 은광에 관심을 가졌을까요? 중국에서도 모자라서 조선에서 은을 수탈할 목적이었을까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임진왜란~정유재란기에 공식적으로 만력제가 조선에 하사한 은만해도 이만오천냥 가량인데, 은을 줘놓고 조선에서 은을 채굴해서 가져간다? 앞뒤가 안맞는 이야기죠.
징비록에서 표현한 조선에 전달한 은자 20000냥
참장(參將) 곽몽징(郭夢徵)이 황제가 하사한 은 2만 냥을 가지고 오자, 상이 서문 밖으로 나가 영접하고 용만관(龍灣館)에 이르러 예를 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은(皇恩)이 망극합니다."
하니, 몽징이,
"황제께서 은이 속히 전달되지 못할까 염려하시어 나를 보냈습니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4일 壬子 2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정곤수(鄭崐壽)가 북경에서 돌아왔다. 중국 조정이 대병(大兵)을 출동시켜 구원할 것을 허락하고 먼저 은(銀) 3천 냥을 내려주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11월 1일 정사 2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 태복시(太僕寺)에 공문을 보내어 마가(馬價)(은) 2천냥을 변통해서 예부(禮部)에 보내어 차출되어 온 배신에게 부쳐 보낼 것이니......
선조실록 87권, 선조 30년 4월 13일 계유 7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그렇다면 대체 광산개발간섭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군수교역'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명나라가 군대를 보내며 식량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군대가 군량을 북경에서 조선으로까지 직접 가지고 오는 것은 이만저만 경비가 많이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마찬가지로 일본도 이순신장군에 의해 수로가 막혀 부산~평양라인 군량공급자체에 많은 경비가 소요되었죠)
해결 방안으로 나온 것 중에 하나가 명나라 군사들더러 은을 가지고 가서 조선에서 식량을 조달한다는 방안도 모색했지만 아시다시피 조선에서는 은의 통화가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전쟁중에 농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식량 조달이 원활하지 않았는데 그걸 팔 여력도 없었죠.
그렇기때문에 또다른 방안으로 나온 것 중에 하나가 명나라 상인들로 부터 명나라가 구입하기도 하고(참고로 명나라가 지니고 있던 은의 양이 580만냥정도였는데 전쟁동안 미두교역에만 쓴 은이 3백만냥에 달합니다^^;;), 압록강 중강에서 시장을 열어 그곳에서 조선으로 하여금 군수교역을 하도록 시키자는 것 이었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명나라는 상업활동이 활발한 국가였고 당연하게도 '군수상인' 들의 활동도 상당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상인집단이 '섬서상방' 입니다.
섬서지방이 우리나라로 따지면 우리나라 1군지역(강원도지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지역의 군수교역을 담당하여 부를 축적하였죠. 우리에게 대중적인 작품인 토전사에서도 언급이 되기도 했고요.
토전사에서도 언급된 섬서상인(섬서가 아닌 산서상인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명조정에서는 상인들로 하여금 식량과 군수를 명과 조선에 팔도록 함으로써 명 조정에서 들이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하며(물품 운송은 당연히 상인들이 직접하는 것이니), 동시에 조선에 군수를 구입하게 함으로써 명나라와 조선의 군대에 대한 군수지원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한 겁니다.
위에 언급한 은자를 내려준 것에 대한 보면 항상 빠짐없이 '군수교역' 이야기가 (그것도 명나라가 돈을 주면서 그 돈으로 구입해라라는 이야기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곤수(鄭崐壽)가 북경에서 돌아왔다. 중국 조정이 대병(大兵)을 출동시켜 구원할 것을 허락하고 먼저 은(銀) 3천 냥을 내려주었다......성지(聖旨)가 즉시 윤허하여 병부 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을 경략(經略)으로 삼아 먼저 2만의 군사를 출발시키고 곧 이어 대군(大軍)을 조발하고 장수를 정하여 잇따라 파견하게 하였다. 그리고 마가은(馬價銀) 【마가은은 바로 중국 조정의 변방 오랑캐 방어용 자금이다.】 3천 냥을 내려 궁각(弓角)과 화약을 사서 보냈다. 정곤수가 무더운 때에 갔다가 추위를 무릅쓰고 돌아왔는데, 길에서 머물지 않고 주청하여 성사시켰으므로 상이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며 후하게 위로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11월 1일 정사 2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태복시(太僕寺)에 공문을 보내어 마가(馬價) 2천냥을 변통해서 예부(禮部)에 보내어 차출되어 온 배신에게 부쳐 보낼 것이니, 해관(該館)에서 시장을 여는 날 스스로 무역하게 하라. 따라서 해관의 관부(館夫) 및 포상(舖商)들을 엄히 통제하여 공평한 값으로 교역하게 할 것이요, 값을 올려 강제로 폐단을 일으키거나 짐짓 쓸모없는 나쁜 물건을 가지고 폭리를 바라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러한 내용의 폐단이 있으면 조사하여 율(律)에 따라 처벌할 것이다......
선조실록 87권, 선조 30년 4월 13일 계유 7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다만 명나라에서 내려준 돈만으로는 교역을 하는데 필요한 은을 충당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명나라에서는 조선으로 하여금 광산을 개발해서 은을 채굴하라 압박을 한 겁니다.
경제구조를 좀 바꿔야 할 것 같은데요, 그게 안되면 좀 맞추려고 시도라도 좀 하세요~
물론 이게 자랑스러운 모습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소위 말하는 명나라가 조선을 수탈해가는데 조선은 손놓고 있는 모습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1만 5천 명을 주둔시켜 가지고는 안 될 것같기에 부득이 3만 명을 주둔시키는 것입니다. 이번 역사에 중국이 소비한 은냥은 수만 냥뿐이 아닙니다. 귀국이 반드시 우리의 양식을 보내와 원조하기를 원한다면 염채은(鹽菜銀)을 귀국이 마련해 낼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은광이 많지 않아서 송 경략(宋經略)께서도 일찍이 시험삼아 채굴해 보았으나 결국 소득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군문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미 식량이 모자란다고 하고 또 은도 없다고 하시니, 중국이 어찌 은도 주고 또 식량까지 운반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의 생각은 은과 식량을 모두 귀국에 책임지우려 하였으나 제가 주본을 올려 힘써 말하였기 때문에 식량만 마련하라고 하였던 것이니 두 가지를 다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요동 좌측의 일로는 정동(征東)의 역사에 시달려 노새와 수레는 모두 탕진되었고 백성은 굶주려 자식을 팔아 먹고 사는 자도 있으며, 또 쌀 1만 석을 운반하였으나 겨우 6천여 석을 얻었고 그 비용은 또 이뿐만 아니므로 아무리 중국이라고 해도 지탱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귀국을 위하여 어찌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선조실록 109권, 선조 32년 2월 24일 갑술 2번째기사 1599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나온 이야기기는 합니다만 형개邢玠와 선조의 이야기를 통해 그동안 명나라의 은광조사와 채굴관련 조선 조정에 대한 명나라의 압박이 그냥 나온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
물론 임진왜란 이후 요동광세태감 고회(高淮)처럼 조선 뜯어먹으려 시도한 X맨이 안나온 건 아닙니다만(요동에서 하도 뜯어먹어서 조선에까지 이름이 알려짐ㅎㄷㄷ) 그런 사례만 가지고서 임진왜란때 은광관련 일을 '은을 수탈해가는데 손을 놓을 수 밖에 없던 조선'이라고 이야기를 한다는 건 사건의 전후사정을 고려하지않은 사료 오독에 해당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참고로 심하전투에서 패한 이후 만력제는 광해군에게 맹은(艋銀) 2만냥을 내려 조선의 전사자들을 위로하고 '우리버리지 않을꺼지?'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근데 천계제때 왔던 놈들이 배로 뜯어가서 문제였지만요.....
....그대 나라를 보호하고 우리 변방도 든든하게 하는 길은, 오직 이번 거사에 달려 있겠기에 지금 특별 칙서를 내려 선유하고 아울러 탕은(艋銀) 2만냥으로 그대의 장사(將士)들을 위로함으로써 사랑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나운 오랑캐들을 섬멸함으로써 국치(國恥)를 깨끗이 씻으라. 그리하여 삼한(三韓)을 편안케 만들고 백제(百濟)를 다시 편안하게 하라.
광해군일기[정초본] 158권, 광해 12년 11월 21일 갑오 2번째기사 1620년 명 만력(萬曆) 48년
ps 광업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을 까는 사람들도 있던데 광산에서 직접 곡괭이라도 들고 땅이라도 파본 경험이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발파작업과 채굴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근대이후조차 한동안 노동력 착취가 행해진 것이 바로 광업입니다.
그 당시 무조건 인력을 갈아넣었어야하는 전근대 광업의 특성상 조선시대의 관아에서 비용이 안나오는데 무리하게 작업시켰다가는 지방사족들의 반발과 더불어 탄핵당하기 딱 알맞았을 겁니다. 거기다가 관할지역에서 탄광 작업 진행하다가 무너져 죽는 사람이라도 발생 하면 뭐..... 그리고 노비 많다고 조선까는 사람들은 조선왕실이 '그 많은 공노비들을 왜 이 작업에 죄다 갈아넣지 않았을까' 생각 한번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명나라의 광산개발간섭 목적이 군수교역 때문이었군요 명나라에서 전쟁에서 미두교역에만 쓴 은이 상당했군요
쓴 은냥 보면, 전쟁은 돈잡아먹는 하마라는게 딱 느껴지더라고요 ㅎ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뭐... 처음에 진출한 명군이 돈을 주고 쌀을 살 수 없는 현실에 충공깽 했다는 기록도 있으니..ㅎㅎㅎ
요즘으로 치면 카드로는 결제가 안되는 느낌이었을 듯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