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인이 아내에게 쓴 아름다운 편지
아름다운 동반자, 여보,/문보근
가을에 빨간 고추를 기대하며
열심히 고추밭을 가꾸어 왔는데
희아리 고추로 가득 달렸다면 이를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오래전
"사랑합니다" 라는 나의 첫 편지를 읽으며
가슴 부풀어 했던 당신이
세월이 흐른 뒤, 지금
"미안합니다" 라는 나의 이 편지를 읽고 있는
당신이 얼마나 실망스러울까요
오래전 어느 날
"행복하게 해 주겠소"라는 내 고백을 들은
당신은 핑크색 장래 꿈에 젖었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라는 나의 이 편지에
당신의 마음은 얼마나 찹찹할까요
같은 하늘 아래,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당신은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지요
각자 터전에서 꿈을 키우며 자란 우리,
나이가 차면 본능적인 현상이라 하지요
옆구리가 허전해진다고 하지요
그래서 서로가 찾았을까요?
난 내 반쪽을, 당신은 당신의 반쪽을,
그런데 참 신기합니다
세상에는 많고 많은 여성들이 있지요
그 많은 여성들 중에 한 여성,
당신만이 내 눈을 사로잡았을까요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
나의 숨이 탁 막혔습니다
당신이야 말로 내가 찾고 있던
내 반쪽임을 단번에 나는 알아차렸습니다
뽀얀 얼굴에 보석이 박힌 듯한 빛나는 눈동자
생글생글 미소 질 때마다
내 마음을 들썩거리게 했던 그 입술,
곱게 빗어 내린 단발머리,
그 머리에 두른 머리띠가 한층 더
소녀스러움을 자아내는 심쿵한 헤어 패션,
검정 치마에 하얀 블라우스,
그 위에 날아 갈듯이 두른 스카프의 아리따움
아담한 키에서 풍겨 나오는 여성 미
난 그만 당신 모습에 쓰러졌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면 큰일 날 뻔한 사람들같이
정신없이 사랑에 빠졌지요
진달래꽃이 두어 번 피고 졌을까요?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은 내 가슴에 안겨 펑펑 울었습니다
엄마가 그립다고 하며,
두 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아픈 과거를
들쳐내며 당신은 펑펑 울었습니다
나 역시 태어난 지 백일도 안되어
아버지를 잃은 나도 불운아 라는 말은
차마 못한 채 우리는 서로 엉켜 울었지요
그때 난 다짐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젠 그 외로움 내가 달래주리라
그동안 얼마나 사랑이 고팠을까?
이젠 그 사랑을 내가 채워 주리라
그동안 얼마나 삶이 추웠을까?
이젠 그 삶을 따뜻하게 내가 해 주리라
이런 다짐이 쌓여 용기가 되고
용기가 신뢰가 되어 마침내 부부가 된 우리,
그동안 나만 알고 있었던 내 현관문 자동 키
비밀번호를 당신이 아는 순간 나에게는
참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집안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구리구리한 냄새로 가득했던 집안이
향긋한 향수 냄새로 가득 찼습니다
집안 환경도 달라졌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금방 벙어리 되던 내입이
침이 마르도록 말을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백한 천정만 보이더니
이젠 예쁜 얼굴이 보입니다
찌든 내 옷 몇 개만 걸려 있던 빨래 건조대가
이젠 산뜻한 옷이 널려 있습니다
잠들기 위해 했던
양을 더 이상 셀 필요가 없습니다
아내 손만 잡아도 잠이 절로 옵니다
무엇보다도
직장에서 일하다가도
집에 빨리 오고 싶어 집니다
이런 행복을 누리는 동안
또 진달래꽃은 수십 번 피고 지고
당신 머리나 내 머리나 하얀 서리가 내리는
우리에게도 어느덧
남들도 다 만나고 헤어졌던 인생 가을이
예외 없이 찾아온 이즈음에,
참도 열심히 살아준 당신에게
미안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라는 이 말이
녹음기 틀어놓듯 내 입에서 절로 나오는 것은
내가 장담해왔던 데로
당신에게 행복을 안겨주며 살아왔는가? 하고
반추해 보았을 때
나는 낙제생이란 생각에서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내게 아름다운 동반자가 되어 주었지요
당신은 나를 향해
가장 많이 쌀을 씻은 사람입니다
가장 많이 기도해 준 사람입니다
가장 많이 걱정해 준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을 향해
가장 많이 아픔을 준 사람입니다
가장 많이 힘들게 한 사람입니다
가장 많이 외롭게 한 사람입니다
여보
여보란 말뜻은 보배란 뜻이라 합니다
당신은 나에겐 보배입니다
지금 난 당신을 떠올리며
부도나지 않는 다짐을 또 합니다
하늘에 태양이 하나 있듯
나에게도 당신만 있습니다
오늘은 또 다른 선물,
나는 당신에게 오늘이 되겠습니다
호수에서 물질하던 원앙새가
푸드득 함께 하늘 높이 날아올라
어디론가 훨훨 날아갑니다
이다음에
우리도 그렇게 되길 기도합니다
그때까지
우리 팔팔하게 삽시다
그날까지
우리 질투 나게 삽시다
우리 아껴주며 후회 없이 삽시다
꼭 그렇게 삽시다
아름다운 동반자. 여보
출처: 좋은글과 좋은음악이 있는곳 원문보기 글쓴이: 허리케인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