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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달래다
국행수륙재(水陸齋
고려와 신라의 합병은 신라 마지막 군주인 경순왕 김부가 935년 고려 왕건에게 귀부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은 나름대로 평화로웠다.
이 때문에 고려에서 경주 김씨의 세력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으며, 불교 역시 타격을 입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는 '위화도 회군'이라 일컫는 이성계의 군사 쿠데타에 의한 것으로 그리 평화롭지 않았다.
이성계는 고려 우왕과 최영의 요동 정벌 명령에 불복종하며 위화도 회군 당시 그 이유를 네 가지로 말했는데 이를 '4불가론'이라 일컫는다.
그중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는 부분은 2014년 개봉된 영화 - 바다로 간 산적>의 주인공인 장사정 김남길 분의 말처럼 논리가 약하다.
"전쟁을 하는 군인이 날씨와 상대를 봐 가면서 하자는 것이냐?
"4불가론에 담긴 이성계의 논리는 오늘날까지도 비아냥거림을 당할정도이다.
타당성이 없는 정권일수록 자기 반대편에 선 이들에게 잔인하기 마련. 결국 조선은 고려의 국성(王姓)인 왕 씨 성을 가진 자들을 몰살시키고,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아 불교를 배척하게 된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원귀가 되어 해를 끼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조선의 왕과 왕실에 재앙이 미치진 않을까 우려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불교의 방식으로 원혼을 달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국행수륙재이다.
🎈조선 수륙재의시작
수륙재는 '천지명양수륙재天地冥陽水陸無遮平等大齋)’ 의 줄임말로 하늘과 땅, 죽음과 삶, 바다와 육지의 모든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는 일종의 천도재를 말한다.
이러한 불교의식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주관한 것이 바로 국행수륙재이다.
삼화사 국행수륙대재.
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화사
국행수륙재는 1395 년 동해의 삼화사를 필두로 관음굴과 현암사에서 시행되었다.
그 이유는 이곳이 모두 고려 왕족 및 귀족의 죽음과 연관된 인근의 사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태조실록』 권7에는 수륙재에 대해 '고려의 왕 씨를 위한 것이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즉 억울한 죽음을 당한 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한다.
삼화사의 수륙재는 진관사 수륙재와 더불어 2013년 각각 중요무형문화재 제125호, 제126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원사 수륙재와 태조의 오대산 참배
삼화사, 관음굴, 현암사에서 치러지던 국행수륙재는 1398년부터 오대산 상원사와 금강산표훈사로 장소를 옮겨 시행된다. 상원사와 표훈사는 기존의 수륙재 사찰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위상이 높은 성지 사찰이다.
이는 기존 수륙재가 가진 한풀이의 성격보다 점차 종교적인 성격이 더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듬해인 1399년 11월에는 이성계가 자신이 원찰로 삼은 중대 사자암 중수를 마치고 친히 행차하여 참배한다.
이때는 정종 원년으로 태조는 상왕의 위치에 있을 때이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오대산은 조선의 숭유억불 판도 속에서도 성산으로서의 위상을 잃지 않고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상원사의 수륙재는 태종의 즉위년인 1401년에도 행해지며, 세종 대를 지나 중종 대까지도 큰 변화 없이 유지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