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조선 개국 505년, 고종 33년, 병신년)
3월 13일(음력 2월 1일) 금요일
오늘 아침 이범진이 내게 말하기를 러시아 공사관 통역 김홍륙이 전하에게 내각대신들을 심하게 비난했다고 한다.
여느 때처럼 근무처로 가다. 간밤에 잠을 자지 못해 온종일 몸이 불편했다.
집에서 김노완을 만났다. 그는 전하가 이범진을 싫어하기 시작했다는 것, 전하가 자신이 호랑이(한국어에서 범은 호랑이를 말한다) 등에 올라탔다고 느끼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모두를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전하는 시치미 떼는 법을 알고 있다. 임금은 이런 방법을 매우 잘 이용해서 그가 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자신은 권좌에 복귀할 모든 희망을 접었다고 하는 것을 널리 알려 믿게 했다.
전하와 세자를 볼 때마다 왕후가 생각나는데, 세자가 그렇게 즐거울 수 있는지 매우 놀라게 된다. 박정양, 이완용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서투르고 비용이 많이 드는 조선식 출판방식으로 책을 간행하는 것이 그들의 양심문제(그들에게 양심이 있다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1896년(조선 개국 505년, 고종 33년, 병신년)
3월 15일(일요일)
지난 밤 아니 오늘 새벽 1시 아니면 1시 반에 사랑하는 아버지가 러시아 공사관에 안전히 도착했다. 현흥택이 함께 왔다. 그들이 전하를 알현하는 장면은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가장 놀랍고도 낙담스러운 것은 세자가 전혀 아무런 느낌도 없는 듯이 보이는 점이었다. 그는 웃고 얘기했다. 그것도 아무 생각도 없이 마치 10월 8일이 결코 그에게는 아무런 슬픔도 아니었다는 듯.
1896년(조선 개국 505년, 고종 33년, 병신년)
3월 21일(토요일)
간밤에 집에서 잤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짐 등을 꾸렸다. 소중한 아내와 나는 아내가 데이비스양 등과 함께 상하이에 가도록 결정했다. 그 두 여성은 일본으로 간다. 아내는 나가사키에서 기선을 갈아 탈 예정이다. 아내와 아이는 8시 쯤 집을 나와 제물포로 떠났다. 언제 우리는 집, 영원한 집을 가질 수 있을까! 어머니는 며느리와 손녀가 떠나는 것을 보고 매우 슬퍼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근무처에 있었다. 오늘은 세자의 생일이다. 이범진은 전하가 오늘 아침에 눈물을 흘렸는데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랬다고 말했다. 여러 노대신도 눈물을 흘렸다.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마땅히 슬퍼해야할 세자가 사람들 가운데 가장 즐거워하는 인물이었다. 한 방울의 눈물도, 한 번의 한숨도, 한 번의 심각한 표정도 없었다! 아, 모후는 얼마나 많은 모정을 그에게 쏟았던가!”라며 실망조로 말을 이었다. 왕자는 오늘 망건을 썼다.
1897년(개국 506년, 광무 1년, 정유년)
3월 16일(음력 2월 8일)《화요일》
음력에 따르면 오늘은 세자의 생일이다. 중심가에 위치한 일부 상점에 깃발이 걸려 있다.
오후 1시에 궁[경우궁, 현재의 덕수궁.]으로 갔다. 5시 30분까지 기다리니 전하가 알현을 허락하셨다. 전하와 황태자는 매우 자애로우셨다. 전하는 당신이 공사관에 계실 때 왜 좀 더 일찍 찾아오지 않았는지 하문하셨다. 전하는 부친의 안부를 물으셨고, 내가 프랑스어를 얼마나 배웠는지, 프랑스어를 좋아하는지 등등을 물어보셨다.
1901년(광무 5년, 신축년)
1월 14일(음력 24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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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50세 생신을 축하하는 기념식에서 조선의 황태자는 이미 충분히 긴 황제의 호, 실제로 40자에 달할 정도로 긴 황제의 호에 몇 가지 경칭을 더해서 황제가 민간에서나 군대에서 이룬 영광스러운 과업 면에서, 그리고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고귀한 덕성을 가졌다는 면에서 고대나 근대를 막론하고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통치자를 능가한다고 장담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런 후한 발언을 삼킨 황태자는 인간 호랑이 이야기에 열중할 필요가 없다. 황제는 자신의 희망에 찬 상속인에게 이렇게 답했다. ʻʻ네가 나보다 나을지 누가 알겠느냐.ʼʼ(이런 속담에서 나온 말이다. ʻʻ아들이 아버지보다 나을지 아무도 모른다.ʼʼ) 하지만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 ʻʻ절묘한 대답이다!ʼʼ
황제의 호는 점점 더 늘어나 결국 40개의 한자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大皇帝
조선인은 점점 더 늘어나는 고춧가루 때문에 소화기관이 손상되어 고춧가루를 한 숟가락씩 수북이 먹어도 큰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동양 폭군의 손상된 위는 역겨움 없이 수많은 아첨의 말을 견뎌낼 수 있다.
1901년(광무 5년, 신축년)
5월 6일 월요일
...........황제는 황태자와 관료 사이의 친밀한 관계에 대해서 질투한다. 황제 자신이 대원군에게 했던 일을 황태자가 자신에게 하지 못하도록 애써 막는 것은 몹시 당연한 일이다. 황제는 최근에 사무실이 불탄 한성신문(漢城新聞) 소유자에게 1만 불을 주었다. 그들에게 이런 충고를 하고 싶다. 오두막을 지어라. 그런 다음 또 그 오두막을 불태워라. 그 수법이 판매부수가 적은 신문을 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이익이 될 것이다.
1906년(조선 개국 515년, 광무 10년, 병오년)
6월 15일(음력 4월 24일) 금요일
........황태자가 다음 달에 또 결혼을 한다고 한다. 그 감탄스러운 의식을 준비하느라 수만, 아니 수십만 달러가 낭비되고 있다. 퇴직한 어느 상궁이 며칠 전 말한 바에 따르면, 황태자는 자기 대신 부친이 결혼하기를 원했다고 했다. “내가 결혼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곳에서 6년 이상 지내지 못할 텐데.” 이런 소문이 사실이라면, 황태자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을미사변 이후 아관파천 후의 모습
○ 신하들이 눈물흘릴 상황에서 세자는 웃고 있다는 언급이 몇번 나옴
(고종 33년 3월 13일, 3월 15일, 3월 21일)
대한제국 시기
○ 황제인 부친에게 존호를 올리는데 집중한다던지,
황제가 황태자와 관료 사이 친밀한 관계에 대해 질투하는 모습이 묘사
을사늑약 이후
○ 황태자는 새로 결혼하는 부분에 대해서 “내가 결혼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곳에서 6년 이상 지내지 못할 텐데.”라고 했다는 소문이 있었음
[외교권이 넘어간 상황이나 나랏일에 대한 인지는 하고 있던걸로 보임]
물론 윤치호가 퇴직한 어느 상궁이 했던 말이 팩트라는 전제에서는....
슬픈 상황에서 웃는 부분은 어떤 이유였을까?
대한제국 시기에는 윤치호는 황제가 황태자를 질투한다는 언급에서 갈등이 있던걸로 보이는데 바보였다면 그럴 수 있을까?
을사년 이후 현실을 자조하는 듯한 말을 실제로 했던걸까?
하는 여러 의문이 든다.
첫댓글 너무 고생을 해서 어딘가 태엽이 나간 자동기계처럼 된 걸까요?
순종 본인이 아니면 모를 일이긴 합니다.
슬픈 상황에 웃는 병이 있는지 찾아봤더니 '감정실금(pseudobulbar affect, PBA)'
신경계의 장애로 인해 예측, 조절할 수 없는 웃음 또는 울음, 혹은 둘이 동시에 터져 나오는 증상
......감정실금 환자들은 상황에 맞지 않는 부적절한 감정의 표출로 인한 좌절갈, 당혹감, 걱정, 혼란을 느낀다. 인간 관계나 사회적 활동, 구직 등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생략)
남성 환자가 부적절한 상황에서의 웃음을 상대적으로 더 높은 비율로 경험하고, 여성 환자는 부적절한 울음을 더 많이 경험한다. 나타나는 감정 표현의 종류는 뇌 병소의 위치에도 영향을 받는다. 환자들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방법을 몰라 어려움을 겪는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1777763
슬픈 상황에서 웃음이 터져나오는 증상이 있다고 하네요. 요즘은 약물치료로 그런 증상 80% 억제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삼한일통 힘들 때 웃는 게 일류다 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그거 완전히 헛말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