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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 장군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BCE 312/311년에 창건한 제국이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셀레우코스 왕가는 헬레니즘 시대에 구 아케메네스 제국의 영토를 차지하고 '대왕'과 '아시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초창기 제국의 영토는 박트리아와 소그디아에서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까지 뻗어 있었으며, 이란을 약 150년 동안 지배했다. 제국은 BCE 2세기 중엽부터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으며, BCE 64년에 거의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한 문헌 기록은 현재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다. 그 중 대부분은 서방의 시각에서 기록되었으며, 자그로스 산맥 동쪽의 문제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요한 문헌을 꼽아 보자면 역사가 디오도루스, 폴리비우스, 리비우스, 아피아노스가 '시리아 전쟁'에서 안티오코스 3세 이전까지 왕조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한 것이 있다. 주화, 그리스 도시들에서 기록된 금석문, 바빌로니아의 쐐기 문자 기록, 그 중에서 특히 소위 천문 일지라고 알려진 기록 등은 귀중한 추가 사료다. 그러나 이 사료들에서도 이란에 관한 내용은 일부 산발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스트라본과 유스티누스의 기록에서는 파르티아인들이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영토를 빼앗은 과정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정치사
셀레우코스 제국의 역사는 크게 4가지 시기로 나눠 볼 수 있다. (1) 셀레우코스 1세와 안티오코스 1세 시대의 확장과 상대적인 안정의 시기 (312-261 BCE); (2) 위축과 내부 분열의 시기 (261-223 BCE); (3) 안티오코스 3세와 안티오코스 4세가 이끈 제국의 부흥기 (223-164 BCE); 그리고 (4) 쇠퇴와 멸망의 시기(164-64 BCE)이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그 존속 기간 내내 계승 분쟁과 지방 반란에 시달렸으며, 이는 새 왕이 즉위할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반복되었다. 이 점은 앞선 아케메네스 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셀레우코스 국가는 BCE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한 이후 셀레우코스 1세가 받은 바빌로니아 총독령에서 성장했다. 바빌로니아는 141년 파르티아인들(ARSACIDS 항목 참고)에게 빼앗길 때까지 제국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셀레우코스가 세운 티그리스 강변의 셀레우키아는 그의 여러 수도 가운데 하나였다. 셀레우코스는 정복과 외교 활동을 통해 구 아케메네스 제국의 동방 총독령들을 자신의 지배 아래 두었다. 그 뒤에는 서방으로 눈길을 돌려, 결국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에서 인도, 팔레스타인, 페니키아, 이집트, 마케도니아를 제외한 전부를 손에 넣고 니카토르(정복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셀레우코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안티오코스 1세는 261년까지 재위했으며, 서방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패권을 복원하여 소테르(구원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동방에서 안티오코스는 부왕과 마찬가지로 이란 귀족들과 강력한 (가족) 관계를 유지했다. 안티오코스는 이란 귀부인의 아들이자 공동 군주로서 292년부터 동부 총독령들을 다스렸으며, 박트라(발흐)를 셀레우코스 제국 최동단 수도로 재건했다.
안티오코스 1세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의 역사는 이집트를 차지하고 동지중해와 홍해에 해상 제국을 건설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벌인 끝없는 대립으로 점철되었다. 이 대립은 동지중해의 해안 도시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최소 6차례의 소위 시리아 전쟁으로 이어졌다.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신; 261-246) 사후 제국은 왕위에 오른 셀레우코스 2세(246-226)와 소아시아에서 왕위를 자칭한 그의 동생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매) 사이의 내전 때문에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 형제 간의 내전은 몇 차례 짧은 소강상태를 두면서 239년부터 228년부터 이어졌고, 다른 헬레니즘 국가들과도 관련되었다. 박트리아의 총독이었던 디오도토스(1세)는 그 틈을 타서 왕을 자칭했다.
아르사케스 1세가 이끄는 파르니 유목민들의 셀레우코스 영토 침입도 이 때 이루어졌다. 그들은 대략 238-236년 경 이란 북부의 파르티아와 히르카니아에 정착했고, 그 이후로 파르티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파르티아인들은 점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대신해 셀레우코스 제국의 새로운 주적으로 성장했다. 100년 넘게 이어진 셀레우코스 제국과 파르티아의 전쟁 초창기, 셀레우코스 2세는 아르사케스를 반독립적인 봉신으로 인정함으로써 셀레우코스 제국의 이란 내 명목상 주권을 일시적으로 재확립했다. 셀레우코스 3세(226-223)의 짧은 재위 이후, 안티오코스 3세(223-187)가 이란과 박트리아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패권을 다시 세우고 제국의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 안티오코스 3세의 메소포타미아와 소아시아의 반란 세력에 대한 원정은 성공적이었으나, 팔레스타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상대로 벌인 전쟁은 패배로 끝났다. (217년 라피아 전투) 그 뒤 안티오코스는 이른바 거주 세계(oikoumenē)의 북방, 동방, 남방 변경을 아우르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했다. 이 소위 아나바시스(내륙으로의 여정)는 군사 작전인 동시에 일종의 의례이기도 했다. 왕은 엑바타나를 출발해 히르카니아, 박트리아, 인도에서 아라비아를 돌며 반항하는 봉신들을 제압한 뒤, 그들을 셀레우코스 제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인 하위 군주로 재설정했다. 바빌로니아로 돌아온 안티오코스는 메가스(아마도 메소포타미아와 이란의 '대왕'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되는)라는 칭호를 차지했다. 그 뒤 안티오코스는 파니온 전투(200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게 참패를 안기고, 그들로부터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의 영토를 빼앗았다. 그러나 서방으로의 진출은 로마인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에서 안티오코스를 격퇴한 뒤 곧이어 소아시아 서부에서 벌어진 마그네시아 전투(189년)에서 그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렸다. 그 이듬해 아파메아에서 안티오코스는 소아시아와 지중해 함대를 포기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정을 맺었다.
한때 널리 퍼졌던 인식과는 달리 소아시아의 상실이 곧 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Kuhrt and Sherwin-White, 1993; Grainger, 2002), 안티오코스 대왕이 패전 얼마 뒤 이란 남부 지역에서 전사했던 것을 보면 로마군의 승리 소식이 제국의 다른 지역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4세 테오스 에피파네스(신의 현신; 170-164)의 재위 기간은 짧지만 인상적이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공격해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하고 멤피스에서 파라오로 즉위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파르티아의 이란 침공 때문에 그는 로마의 최후 통첩에 따라 이집트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란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권위를 다시 세운 뒤에 로마를 상대로 한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려고 했지만(Strootman, 2007, p. 311), 파르스에서 이른 나이에 요절하면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안티오코스 4세 재위 기간 셀레우코스 제국은 동방에서 여전히 히르카니아, 메디아, 엘람, 파르스, 그리고 아마도 카르마니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가 죽자 정치적 몰락이 가속화되었다. 제국 역사의 마지막 100년 동안 왕국은 두 파벌로 갈라진 왕가의 내전으로 산산조각났다. 아라비아, 팔레스타인, 콤마게네, 아르메니아, 엘람, 페르시아, 박트리아의 속국들은 사실상 독립했으며, 파르티아 왕 미트라다테스 1세가 148년에 메디아를, 141년에 바빌로니아를 정복했다.
140/139년에 데메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가, 130년에 정력적인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가 재정복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파르티아인들에게 이란과 메소포타미아를 빼앗긴 이후 제국의 동부와 서부는 완전히 분단되었으며,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BCE 1세기 초엽, 아시아의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내전으로 갈라진 시리아 북부의 소국에 불과하게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에 의해 잠시 점령당한 뒤, BCE 64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에 의해 칼질 한 번 없이 소멸되었으며 시리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는 셀레우코스 제국 후기에 존재했던 제국의 봉신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과거 셀레우코스 왕조의 역할이었던 도시들의 보호자 역할을 대신 차지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란을 차지한 파르티아인들 역시 완전히 새로운 국가 체제를 만들기보다는 과거 셀레우코스 제국의 방식대로 봉신들을 거느리는 종주국으로서의 역할을 택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셀레우코스 왕조가 옛 아케메네스 제국을 차지했을 때에도 사용한 방식이었다.
왕실, 궁정, 군대
셀레우코스 국가는 기본적으로 조공을 받는 군사 집단이었다. 왕은 다른 모든 것에 앞서서 전사였다(Gehrke, 1982). 왕권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은 전쟁의 승리였다. 제국의 영토는 왕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doriktētos chōra, 즉 '창으로 얻은 땅'이었다. 군주는 창을 들고 단숨에 전투의 향방을 바꿔 버릴 수 있는 무적의 전사로서, 그를 통해 신민들을 보호하고 평화를 보증할 수 있는 자로 여겨졌다. 왕의 영웅적 위엄은 호메로스적 서사시의 초인 영웅상과 연계된 헬레니점 이전 마케도니아 시대의 유산이었다. 이는 박트리아, 이란, 아르메니아, 아나톨리아의 향촌과 산악 지대를 지배하는 이란계 귀족들에게도 통하는 요소였다(Gropp, 1984;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은 Brosius, 2003 참고). 왕들은 이 같은 영웅주의 때문에 몸소 군대를 지휘해야만 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들은 거의 매년 군사 원정을 벌였고, 왕국의 역사는 곧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였다.
과거 셀레우코스 왕국은 동방 주민들에게 그리스 문화를 주입하려 한 '서방' 제국으로 분류되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고대 근동 역사 개설서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등장이나 사망 장면에서 갑작스럽게 막을 내리곤 했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동방에 관한 기록 문헌이 거의 없는 상황과(Bickerman, 1985) 현존하는 사료들(그리스, 로마, 유대)의 왜곡된 지중해적 관점에 기초를 둔 것이다. 1970년대 후반 이후로 더 많은 헬레니즘 시기 바빌로니아의 쐐기 문자 기록을 이용할 수 있게 되고, 고고학적 초점도 확대되면서 셀레우코스 제국 시기에도 군주의 전통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연속성이 유지되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Oelsner, 1978 and 1986; Downey, 1988; Briant, 1990; Kuhrt and Sherwin-White, 1994; Linssen, 2004). 이란에서는 아마도 문화적, 정치적 연속성이 더 강했을 것이다. 바빌론에서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들은 전통을 따른 군주임을 내세웠고, 지구라트의 유지 관리를 신경썼으며 아키투 의례에 참여하기도 했다.
심지어 셀레우코스 왕국은 기본적으로 헬레니즘적 제국보다는 '동방' 제국에 더 가까웠다는 주장도 있다(Kuhrt and Sherwin-White, 1993). 이 관점은 왕국의 명백한 그리스적 성격은 물론 셀레우코스 왕권의 특징과도 상반된다. 그보다는 셀레우코스 왕들이 현지 언어를 사용하거나 현지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모습을 개별 도시나 주민들의 기대에 맞추어 따로 제시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전체적으로는 제국의 보호 이념과 그리스-마케도니아 양식을 고수했다. 이는 왕조의 프로파간다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주화에서 그리스 식 상징물과 그리스어가 등장하는 것, 그리고 셀레우코스 궁정의 강렬한 헬레니즘 문화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리스인들과 마케도니아인들은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에 페르시아인들이 그랬듯이 궁정과 군대의 상위 계급 대부분을 차지했다(Habicht 1958; 이에 대한 반론은 Mehl 2003).
알렉산드로스, 셀레우코스 1세, 안티오코스 1세는 근동의 주요 교통로를 따라 많은 도시를 새로 만들거나 다시 만들었고, 그리스인 및 마케도니아인 이민자들과 현지인들로 채워진 이 도시들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사적, 경제적 근간이었다. 이에 더해 여러 군사 식민지들이 설치되었는데 소아시아에서는 이를 katoikia라고 했다. 왕가로부터 토지를 받는 대신 군인으로 복무하는 마케도니아인들이 이 식민지들을 건설하고 수비했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그리스계이든 비그리스계이든 명목상 자치권을 가졌기 때문에, 도시의 지배층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제국 지배의 기본적인 요소였다. 이 때문에 왕들은 특히 자그로스 산맥 서부 지역의 도시들을 상대로 후원자이자 보호자를 자처했다. 그 대가로 그리스인들은 왕을 신성한 '구원자'(sōtēres)로 찬양하고 신적인 영예를 바쳤다. 안티오코스 3세 이후로 신격화된 군주를 숭배하는 중앙집권화된 교단이 제도화되었다. 셀레우코스 왕가는 구원자 신 아폴론의 후손을 자처했다. 비 그리스계 인구를 상대하기 위해, 아폴론과 그의 쌍둥이 여동생 아르테미스는 각 지역에서 숭배되는 여러 해의 신 및 달의 신들과 동일시되었다. 안티오코스 4세 이후로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제우스의 왕권과 동일시하려는 시도도 있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다른 지역에서는 제우스가 그 지역의 하늘의 신으로 대체되었다.
3세기 경, 제국의 핵심 영역은 명확히 구분되고, 도시화되었으며 인구밀도가 높은 4개의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각각 소아시아 서부, 시리아, 바빌로니아, 박트리아였다. 이 지역들을 잇는 지역들을 군사적으로 통제하는 것 -이란의 경우 메디아와 오늘날의 호라산 지역- 은 셀레우코스 제국주의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제국에 고정된 단일 수도는 없었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거의 항상 군사 원정 상태에 있었으므로, 그저 원정 중인 왕과 궁정이 머무를 여러 처소가 있었을 뿐이다. 여기에는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바빌로니아의 티그리스 강변의 셀레우키아, 수사, 엑바타나, 박트라 등이 포함된다. 초창기 제국은 매우 넓은 속주들로 분할되어 있었는데, 이 속주들의 경계는 대체로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의 총독령 경계와 비슷했다(아케메네스 제국 체제의 지속에 대해서는 Briant, 1990 와 McKenzie, 1994 참조). 셀레우코스 제국의 총독들은 조세, 병력 양성, 평화 유지의 임무를 맡았다. 제국의 중심에는 소위 왕의 친구들(philoi tou basileōs)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있었고, 이들은 왕의 일시적 필요에 따라 관직, 지휘권, 장원, 총애를 부여받았다. 이 필로스들은 대부분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의 민간 지배계급 가문 출신으로, 왕가와 (실제 혹은 가상의) 친척 관계 및 의례화된 빈객-우정 관계를 통해 연결되었다. 필로스 대부분은 자신들의 출신 도시 및 가문과 유대 관계를 유지했으므로, 그들은 곧 복잡한 후원 관계 네트워크의 중심이었으며 왕가는 이를 통해 도시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반대로 필로스들이 각 도시의 이해관계를 궁정에 반영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궁정에는 많은 불화가 있었는데, 서로 경쟁하는 필로스 파벌 사이의 갈등도 있었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왕비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세력들이었다. 셀레우코스 왕들은 일부다처제를 유지했으며 여러 차례 정략 결혼을 했는데, 그렇게 결혼한 아내와 자식들 사이에 확실한 위계질서를 세우지 않았으므로 왕위 계승은 곧 잔혹한 분쟁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이 같은 내부 갈등은 과거에 여겨졌던 것만큼 파괴적이지는 않았는데(Ogden, 1999),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들은 자신의 생전에 가장 총애하는 아들에게 공동 왕위를 부여함으로써 미래의 후계자를 정하는 방식을 썼기 때문이다(Strootman, 2007, pp. 111-14). 내부 갈등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안티오코스 4세 사후, 셀레우코스 왕가가 두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거의 끊임없는 왕위 다툼을 벌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안티오코스 7세 시대테스 시대에 들어서도, 제국은 6만 명에서 8만 명에 이르는 강력한 군대를 편성할 수 있었다. 군사력의 핵심은 은 방패라고 불린 마케도니아식 보병 상비군과 여러 친위 기병 부대들, 그리고 전투 코끼리 부대였다. 여기에 군대 복무를 대가로 농지(klēroi)를 부여받은 군사 식민자들인 클레루코이(klērouchoi)로 구성된 팔랑크스 부대들이 더해졌다. 또 필요에 따라 다수의 경보병과 경기병이 징집되었으며, 대규모 군사 원정에는 동맹국 병력과 용병들도 소집되었다. 궁기병과 중무장한 캐터프랙트를 포함한 다수의 기병을 동원하는 것이 셀레우코스 군대의 특색이었다.
셀레우코스 제국과 이란
이란 고원에서 셀레우코스 왕조는 도시가 아니라 현지 귀족 집단과 관계를 유지했다. 셀레우코스 1세는 박트리아 귀족의 딸과 결혼했다. 셀레우코스 제국 후기에는 폰투스, 콤마게네, 아르메니아의 왕족들과 혼인 동맹을 맺기도 했다. 최소한 3명의 셀레우코스 왕들이 이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이란 귀족들은 상당히 충성스러운 편이었다. 메디아 아트로파테네를 제외하면, 이란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에 대한 현지인 중심 반란은 눈에 띌 정도로 적다(Wolski, 1947; Wiesehöfer, 1997). 셀레우코스 세력의 주둔은 주된 육상 교통로, 특히 메소포타미아에서 박트리아에 이르는 도로 주변의 전략적 요충지에 설치된 군사 식민지에 한정되었다. 서부 이란에서 셀레우코스 세력의 주요 거점은 엑바타나였으며, 엑바타나는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사이의 연결로를 통제하는 위치였다. 엑바타나는 왕가의 처소(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의 궁궐이 계속 사용되었다)이자 왕실 조폐소가 위치하기도 했으며, 최소 BCE 150년까지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Mørkholm 1966, p. 178; Mittag 2006, p. 52). 이에 더해 엑바타나 근방에 군사 식민지들이 설치되었는데, 특히 군마로 유명한 니사이아의 비옥한 평원(NISAYA 항목 no.2 참고)에는 라오디케아라는 식민지가 있었다. 이란 북부에서는 라가이(테헤란 근방)와 헤카톰필로스(아마도 샤흐레 쿠미스)가 셀레우코스 세력의 주요 거점이었다. 파르스의 해안가 평원에는 안티오코스 1세에 의해 건설 혹은 재건설된 페르시스의 안티오키아라는 도시가 있었다. 이곳은 최소한 안티오코스 3세 시대까지는 확실히 그리스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셀레우코스 1세와 안티오코스 1세에는 파르스에 왕실 조폐소가 운영되기도 했는데, 이 조폐소가 페르세폴리스와 파사르가다이 중 어느 쪽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엘람에서는 수사가 셀레우키아 에울라이오스로 개명되었으며, 아마 마케도니아 군사 식민지로 재건설된 것 같다(Potts 1999). 수사에도 왕실 조폐소가 있었으며 왕실 처소로 사용되기도 했다(Strabo 15.3.5). 종교의 경우, 엘람 지역에 대한 고고학 연구를 보면 현지의 토착 종교 건축이 대부분 유지된 것 같다. 예를 들면 Masjed-e Solaymān과 Bard-e Nešānda(Bard-è Néchandeh; Downey, 1988, pp. 131-36)등이 있다.
동북부의 상황은 다르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는 더 짧지만 더 강하게 나타난다. 첫째로 셀레우코스 제국은 카스피 해에서 힌두쿠시 산맥에 이르는 동북 변경을 보호하기 위해 소그디아, 마르기아나, 박트리아에 체계적으로 방어시설들을 건설했다. 안티오코스 1세는 마르브의 오아시스를 감싸는 성곽을 건설하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안티오키아라는 마을을 만들었다(Strabo, 9.516; Pliny, 6.47). 마르브에서 발견된 주화들은 마르기아나에 BCE 2세기 중엽까지 그리스 세력이 계속해서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박트리아의 행정 수도였던 박트라에(Newell, 1938, pp. 228-30), 그리고/혹은 아이 하눔에(Kritt, 1996) 왕실 조폐소가 있었다. 소그디아의 경우 3세기 초까지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의 소그디아 지배를 보여 주는 아프라시압의 초기 헬레니즘 유적을 통해 마라칸다(사마르칸트)의 셀레우코스 군사 식민지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Kuhrt and Sherwin-White 1993, p. 106). 동북 변경 지역에 대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비적 조치들이 중앙아시아와의 교역을 감소시켜 유목민들과 정주 농경민들 사이의 적대감을 키웠다는 주장이 있다(Olbrycht, 1997). 하지만 셀레우코스 왕조 치하에서 중앙아시아의 경제는 번영을 누렸는데, 왕조가 박트리아를 향한 이민을 장려하고 관개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확장시켰기 때문이다(Frye, 1996, p. 113). 최초의 외부 정착민들은 변경 방위를 위해(그리고 아마도 서방의 평화와 질서 유지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Simonetti Agostinetti, 2002) 알렉산드로스가 남기고 간 그리스인 용병들이었다. 셀레우코스 제국 치하에서 이민은 더 늘어났다. 그리스인, 마케도니아인, 트라키아인, 그리고 다른 지역 사람들이 동북 지역의 도시에 몰려들었고, 군대 복무의 대가로 왕실로부터 토지를 받았다. 아프가니스탄의 아이 하눔 유적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헬레니즘화된 도시들은 그리스와 이란의 문화가 융합된 거주지가 되었지만, 헬레니즘 문화가 도시 성벽 밖에서 얼마나 퍼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란과 박트리아에 대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 기간 추산치는 다양한데, 이는 추산자가 셀레우코스 국가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린 문제이다. 제국의 이란 상실을 가장 이르게 보는 경우는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246-225 BCE) 시대, 파르티아의 총독 안드라고라스가 반란을 일으킨 뒤 파르티아인들이 이란 북부에 자리잡는 시기로 보는 경우이다. 이와 동시에 박트리아의 총독 디오도토스는 주화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 시작했다(Wolski, 1947; Broderson, 1986; Lerner, 1999). 그러나 독자적인 주화 발행이 꼭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Frye, 1996, p. 114). 나아가 셀레우코스 국가가 패권 제국으로서 자신들의 종주권 인정, 군사 원조, 조공 납부라는 조건만 갖춘다면 언제든 토착 세력의 자치를 인정할 채비가 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왕실의 관리가 직접 통치하는 체제에서 결혼 동맹과 의례화된 빈객-우정 관계, 선물 증여 등을 통한 봉신들의 지배 체제로 바뀐 것이라고 봐야 한다. 한편 셀레우코스 제국의 이란 서부와 남서부에 대한 지배는 명목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164년 안티오코스 4세가 사망하고 왕가의 내전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Bickerman, 1983; Wiesehöfer, 1997). 파르티아인들이 메디아를 정복한 것은 최소한 BCE 149년 이후의 일이며, 엘람과 파르스의 속국들이 완전히 독립한 시기도 마찬가지다.
비록 처음 시점에서는 셀레우코스 제국 몰락의 원인보다는 결과에 해당했지만(Habicht 1989), 이란의 상실은 열강으로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파멸에 결정적인 한 획을 그었다. 제국에서 박트리아를 포함한 이란 영토들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토지에서 나오는 조공 수입 뿐 아니라 셀레우코스 군사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기병의 대다수, 그리고 경보병들, 특히 궁병들이 이 지역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190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는 6천 명 이상의, 아마도 이란인들로 구성되었을 캐터프랙트들과 도합 1만 명이 넘는 엘람 및 페르시아 경보병들을 동원했다(Livy, 37.40.1-14). 166/5년 시리아의 축제에서 안티오코스 4세는 1,500명의 캐터프랙트와 1,000명의 파르티아 혹은 사카 궁기병을 행진시켰고(Polybius 30.25.6), 140년대 후반 데메트리오스 2세의 파르티아 원정을 돕기 위해 페르시스, 엘람, 심지어 박트리아에서도 보조 병력을 파견했다(Justin, 38.9.4).
셀레우코스 제국이 이란에 남긴 영향은 군사 및 경제적 분야에 한정되었고, 문화적 영향은 거의 없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당대 이란의 사회, 문화, 정치적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한번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배는 후세 역사에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못했는데, 개중 몇 가지 중요한 예외를 들면 화폐 경제의 확산,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의 왕권 개념의 일부 특성을 자신들의 그리스-마케도니아식 왕권 형태를 추가해 파르티아와 사산 왕조에 전달한 것, 그리고 셀레우코스 1세가 바빌론을 탈환한 312년을 기점으로 한 연도 기록법인 셀레우코스 연대의 사용 등이 있다.
참고 문헌
- 원본 링크 참조
첫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평소 셀레우코스제국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