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가 신비로운 기운을 띠는 것은 이곳에 세상을 이루는 세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신들이 머물다 가는 한라산의 천계와 바다를 터전으로 삶을 살아가는 인간계, 그리고 이 두 세계를 이어주는 중산간의 중간계. 중산간에는 지금도 스쳐가는 바람 속에 신선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웃음소리들이 떠돌다 머무는 곳, 거기에 포도호텔이 있다.
지난해 여름 프랑스 국립 기메 박물관은 건축가로서는 최초로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 伊丹潤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때 메인 작품으로 선정된 것이 바로 제주도의 포도호텔이다.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제주도만의 전통미를 바탕으로, 독특하고 참신한 발상의 디자인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포도호텔. 전 세계인은 그 외형뿐만 아니라 경영 이념에 배어 있는 자연주의 철학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한라산 어느 자락 아래 숨어 있다는 그곳, 자연주의의 결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중산간으로 향한다.
넓게 펼쳐진 들판과 간간이 나타나는 자작나무 숲들이 나른한 풍경을 이루는 중산간 1115번 도로. 아무리 달려도 민가 하나 보이지 않고, 가끔씩 나타나는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돌담들만이 이곳이 제주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몇 개의 골프 클럽들을 지나 핀크스 골프 클럽으로 접어든다. 길목에 서 있는 파란색 작은 팻말이 포도호텔 입구임을 확인시켜 준다. 세계적 명성의 호텔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되지 않는 작은 길을 따라 올라가니, 작은 건물이 나타난다. 골프장 한구석에 마련된 작은 그늘집 같은 단출하고 소박한 분위기에 더 올라가야 하나 싶었는데, 이곳이 포도호텔이란다. 단층 건물이라 여느 호텔에서 느껴지는 화려함이나 위압감은 들지 않는다. 호텔에 들어가기 전 언덕에 작은 전망대가 있어 올라가보니 넓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저 멀리 희미하게 마라도가 눈에 들어온다.
포도호텔의 정면 뜰에 만들어져 있는 전망대. 날이 맑으면 마라도를 볼 수 있다.
양실의 베란다를 통해 나오면 펼쳐지는 넓은 잔디밭.
이타미 준이 떠올린 이미지 갤러리처럼 단정하게 꾸며진 입구를 지나 체크인을 하기 위해 프런트로 다가갔다. 프런트에는 미리 만나기로 약속했던 포도호텔 지원팀의 이경수 대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오시면서 포도를 보셨나요?” 포도는 물론 과일 하나 구경하지 못했다. 선뜻 대답 못하고 있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포도호텔의 명칭에 관해 설명을 해준다. “포도호텔은 작은 언덕이 여러 개 모여 있는 듯한 형상으로, 건물 전체를 덮은 지붕이 상당히 인상적이지요. 이 지붕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크고 작은 포도 알이 붙어 있는 포도송이 형상입니다.” 그동안 호텔 명칭에 대한 사람들의 질문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짐을 로비에 맡겨놓고 그의 안내에 따라 호텔을 천천히 둘러보기로 했다. 포도호텔의 특징은 마치 갤러리에서 아트 디렉터가 설명을 해주듯, 호텔을 소개하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곳의 이용객은 거의가 골프장을 이용하는 회원들이라 일반인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요. 그래서 간혹 호텔 이름을 듣고 오신 일반 분들을 위해서 이 같은 서비스를 합니다.” 그를 따라 다시 입구로 나왔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찬찬히 호텔 주변을 돌았다. 다시 보아도 포도호텔의 외관은 일반 호텔들과는 조형 자체가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한적한 느낌, 세속의 어지러움과 번잡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외형은 제주 고유의 시골집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아담하고 고즈넉하다. 호텔 앞에는 제주 전통의 밭이 조성되어 있어 봄에는 유채와 보리가 자라는 것을 직접 볼 수 있다. 호텔 뒤로 돌아 나가니 수선화가 피어난 천연 늪지대가 나타나고 그 뒤로 자작나무가 자라고 있다. 자작나무의 키는 호텔보다 더 커서 외부에서 호텔을 전혀 볼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나무 너머 바로 옆으로 도로가 나 있지만 차량이나 행인의 소음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소란스럽거나 사치스럽지 않은 곳에서 조용히 여유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이상적인 공간인 것이다. “이타미 준은 이 호텔을 구상하면서 몇 가지의 공간적 이미지들을 사용하였습니다. 틀어박히다, 숨어 있다, 해방, 열다, 닫다, 혼재하다… 여기에 지형과의 조화, 지형에 거슬리지 않는 배치에 신경을 썼지요. 호텔 전체는 제주도의 작은 마을을 보는 듯한 분위기로 만들었습니다.” 한라산 자락 아래 자리한 바다가 보이는 작은 마을,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듯하지만 호텔 어느 룸에서건 테라스를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자연스럽게 열려 있는 공간. 이타미 준은 제주도의 자연 속에 남몰래 존재하는 또 하나의 제주도를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호텔 외부에 조성된 제주도 전통식 밭.
왼. 포도호텔 입구에 걸린 심벌. 오 포도호텔 입구를 장식한 기하학적 문양의 보도 블록.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전통 호텔 레스토랑에서 이곳에서 추천하는 제주산 흑돼지로 요리한 수육과 간단한 우동으로 점심을 먹었다.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보이지 않아 물어보니, 오후에는 투숙객 대부분이 그린에 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레스토랑의 메뉴 중에서 저녁 시간이 가장 화려한 것도 이 때문이다. 주방장이 여름철 최고로 손꼽는 요리는 자연산 옥돔회. 예약한 시간에 맞춰 바다에서 직접 잡아 오기 때문에 미리 주문하지 않고는 절대 맛볼 수 없다. 유리창 밖으로 펼쳐진 돌담과 평온한 들녘을 바라보며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룸으로 향한다.
포도호텔의 룸은 제각각 다른 구조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크게 한실과 양실로 나눌 수 있다. 내가 예약한 곳은 한실 객실이다. 객실로 향하는 길에 긴 복도 한가운데에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캐스케이드에 눈길이 간다. “처음 오픈할 당시 이곳은 하나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죠. 저 캐스케이드 안에서 판소리나 음악을 연주하면 사람들은 주위에 둘러앉아 공연을 관람했습니다.” 자칫 폐쇄적이고 딱딱해질 수 있는 호텔이란 건물에 자연을 끌어들이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 바로 여기가 이타미 준이 제주도에서 받은 ‘숨어 있다’와 ‘해방’, ‘혼재하다’의 이미지가 가장 잘 표현한 곳이 아닐까 한다. 둥근 유리관을 열고 위를 올려다보니 천장이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다.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실내에 앉아서 살아 있는 동양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실 객실에 들어서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천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서까래다. 한국의 전통적인 모습을 서구적인 방법으로 해석해 놓은 모습이 매우 이색적이다. 창은 그대로 드러나 있거나 혹은 한지를 바른 격자무늬 창이고, 벽은 원목을 사용하거나 그 위에 감물을 들인 천을 덧대 전체적으로 오묘한 붉은빛을 띤다. 내부는 자연광을 최대한 끌어들여 마음을 더욱 차분하게 만든다. 한실 객실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베란다와 욕실. 밖으로 이어진 베란다로 나가면 호텔 뒤편에 자리한 늪지대와 자작나무 산책로가 이어진다.
복도의 인테리어. 창 너머에 무엇이 있을 것 같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굳이 나가지 않고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마음은 아늑한 뜰을 거닐고 있는 기분이다. “한실과 양실은 내부 시설뿐만 아니라 베란다의 풍경 자체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곳이 아늑한 정원이 있는 산속 풍경이라면 양실의 베란다에서는 바다를 낀 해변의 풍경을 볼 수 있으니까요.” 욕실은 전형적인 일본식으로, 히노키 욕조가 인상적이다. 히노키 나무는 자체에 뛰어난 약리 성분을 가지고 있어 옛날부터 일본에서는 국가가 특별히 보호 육성할 정도로 신성시되어 온 나무다. 히노키 탕에서 목욕을 하면 삼림욕을 한 것 같은 상쾌함을 느낄 수 있으며, 뛰어난 살균 작용 및 모근 활성화, 혈액 순환 촉진 등 피부 건강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옛날부터 일본 황실의 욕조로 쓰였다.
모든 설명이 끝난 뒤,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짐을 풀고 천천히 베란다를 통해 늪지대 가의 산책로로 향한다. 늪지대라고는 하지만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개울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물가에는 노랑, 빨강, 보랏빛 수선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불어오는 바람에 창포의 가녀린 몸이 하늘거린다. 산책로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돌 위에 앉아 잠시 상념에 빠진다. 정말 이타미 준이 생각한 것처럼 옛날 어느 제주도 마을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다. 세속에서 잊혀진 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월을 거슬러 온 중산간의 숨겨진 신선의 마을에. 중산간에 서서히 어둠이 내리면서 피부에 닿는 바람이 서늘해지고 있음을 느낄 즈음, 문득 세상은 개구리 울음 소리로 다시 깨어난다.
양실 객실의 풍경과 한실 객실의 풍경이 만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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