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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효 사상의 특징과 현대적 의의
김동수(평택대 교수)
신구약성서의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에는 한자의 효(孝)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위 언어들에서 사상적, 어원적 영향을 받은 영어, 불어, 독어 등 서양의 주요 언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서양 언어에는 효에 꼭 들어맞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효를 영어로 표기할 때 중국식 발음의 xiao 혹은 한국식 발음의 hyo라고 하거나, filial piety라는 말로 억지로 풀어쓸 수밖에 없다. 유교식의 효라는 언어나 개념이 없는 이 천년 역사의 서양 기독교에서 효를 윤리의 근간으로 삼았다거나 신학의 주요 주제로 토론한 일도 물론 없었다. 사전적 정의에서 흔히 보이는 것처럼 효는 유교의 경전에 나타나는 동양의 기초 윤리 덕목이기 때문이다. Anne Cheng, "Xiao," Routledgecurzon Encyclopedia of Confucianism 2, 680-681.
이와 같이 효가 기본적으로 유교의 덕목이라는 것은 이 개념이 기독교 신학과 아무 연관성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유교적 개념인 효를 매개로 하여 성서의 주요 교리를 설명하는 시도가 한국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 의해서 수행되어 왔다. 지금까지 효를 메타포로 신학을 전개한 대표적인 학자로서 변규용 신부와 윤성범 교수를 들 수 있다. 변규용 신부는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이에 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썼으며 ‘효신학’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여 효를 통한 동서양 신학의 조우를 시도했다. Kyu-yong Byun, Pére et Files (unpublished Ph. D. Diss.: Institute catholi[sic]que de Paris, 1973). 이은선, 이정배, [현대이후주의와 기독교](서울: 다산글방, 1993) 358, 각주 41에서 재인용.
하지만 박사학위 논문을 쓴 이후 이에 관한 계속적인 신학화 작업이 미미했다. 이에 반해 윤성범 교수는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토착화 작업의 일환으로 효를 중요한 개념으로 취급했고 현재까지도 기독교 입장에서 효를 학문화 한 사람 중 중심적 위치에 서 있다. 윤성범 교수는 유교와 동양문화에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기독교의 핵심 교의를 효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성경 본문에 대한 세밀한 주석적 고찰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독교의 효를 유교의 효와 동일시 해버리는 우를 범했다. 윤성범 교수의 효에 대해서는 편집위원회 편, [윤성범 전집 3: 효와 종교](서울: 감신, 1998); 윤성범, [효](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4)를 보라.
이런 상황에서 최성규 목사는 ‘성경적 효’를 주창함으로써 양자를 구별하려는 시도를 한다. 즉 성서 자체가 말하는 특징적인 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최성규 목사의 효에 관해서는 다음의 저서를 보라. 최성규, [효가 살아야](서울: 성산서원, 1998); 최성규, [최성규 목사 회갑 기념집. 설교집. 효자 축복](서울: 성산서원, 2001); 최성규,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서울: 규장, 1998); 최성규(편), [효학개론](서울: 성산서원, 2001); 김동수, 차준희(편), [효와 성령: 최성규 총장 회갑기념 논문집](서울: 한들출판사, 2002); 성산연구소(편), [효실천](서울: 성산서원, 2002); 성산효도대학원 대학교(편), [효의 길 사람의 길](서울: 성산서원, 1999).
본 논문은 위의 학자들처럼 효를 메타포로 하는 신학이나, 토착화 신학으로서의 효를 논의하려는 것은 아니다. 본인은 본 논문에서 성서에 나타난 효의 개념을 연구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서에는 효라는 단어도 나타나지 않고 있고 그 개념이 유교적 의미의 효 개념과 상호 일맥상통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임시적으로 유교의 어떤 책에서 말하는 효라는 의미를 벗어나 자녀가 부모에게 행하는 윤리라는 의미에서 성서가 이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찾아내보려 한다. 이것을 성서적 효 나아가서는 기독교적 효라고 하자.
위와 같은 의미에서 성서에서 효 개념을 찾는다면 성서의 효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특히 한국인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효 개념과는 이것이 어떻게 다른가? 본 논문은 이와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 것이다. 물론 유교에서 말하는 효 개념도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발전해온 개념이다. 효가 중국 주나라 시대에는 사자(死者)가 된 부모에 대한 예배 행위를 지칭하다가 공자에 와서는 생존해 있는 부모에 대한 존경과 공경을 지칭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유교 경전 중 논어에서는 효가 인(仁)의 하위 개념으로 자리매김하는 반면, 후대에 발전된 효경에 이르러서 효는 충(忠)을 말하기 위한 전제로서 자리매김하여, 결국 통치자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다. Cf. Cheng, "xiao," 680-681; W. T. De Bary, “유교적 효사상에 대한 소고,” [효사상과 미래사회](서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37-54; 공덕성, “효란 무엇인가,” [효사상과 미래사회](서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117-126.
최진묵의 말대로 “[효경]에서의 효는 더 이상 가족과 친족윤리만으로 이해되지 않았으며, 국가와 군주를 위한 忠을 위한 효”가 되어 국가와 사회를 용이하게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것이다. 최진묵, “중국 고대 孝이념의 형성과 그 변화,” [효학연구] 1(2004) 312.
본 논문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효경에서 말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효 개념이 성경에 특히 성경의 완결인 신약성서에 존재하는 가하는 것이다. 효는 정치가들 혹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사람들의 행동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흔히 자리매김 되어왔기 때문에 성서에 과연 그러한 사상이 있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막스(K. Max)의 이해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지배자가 고의적으로 퍼트린 허위의식이다. 지배 계층은 피지배 계층을 지배하기 위해 허위의식을 유포하고 피지배 계층은 이를 참으로 받아들여 결국 이 의식이 피지배 계층을 지배하게 된다. 양명수, “기독교의 죄 개념과 효,” [효학연구] 1(2004) 18-24; idem, “효,” [신학비평] 1(2001년 6월) ??-??; idem, “효와 인권,” [활천] 546(1999년 5월) 22-26.
위와 같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효는 많은 사회적, 인권적 문제를 야기 시킨다. 종교적 권위주의, 비인간화, 지역 연고주의, 학벌주의는 모두 이데올로기적 효의 귀결이다. 왕대일 교수에 의하면 이스라엘도 이러한 혈연주의, 연고주의에 머무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공통된 야훼 신앙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는 “예배로서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하고, 공의를 실현하는 삶으로써 하나님의 질서를 구현하며, 약자를 사랑하는 마음 속에 하나님의 구원을 실천해 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야훼신앙 공동체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우고자 했던 이스라엘 참된 신앙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왕대일, “성서에서 본 현연, 혈연주의, 가정,” [기독교사상] 473(1998년 5월) 19.
본 논문에서 본인이 주장하는 것은 위와 같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효는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성서 주요 저자들은 위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효를 적극적으로 물리치고 청산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신약 성서의 주요 인물과 저자인 예수와 바울의 견해를 검토해 볼 것이다. 본 논문은 예수와 바울이 공히 이데올로기적 효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반대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예수와 바울에게서 효(부모공경)는 모든 행동의 근본 원리라기보다는 제자도 혹은 그리스도를 따름의 하부 원리로서 이것이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자리매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토대 위에서 본 논문은 마지막으로 비 이데올로기 효인 성서적 효의 유용성에 대해서도 언급하려 한다.
예수와 효 1: 효도냐? 제자도냐?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서 기록한 복음서에는 효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효에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전통을 지키기 위해 구약의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것의 한 예로서 부모 공경을 하나님 공경으로 대체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가 책망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막 7:1-16; 마 15:1-9). 효에 대한 간접적인 교훈으로는 하나님과 신자를 부자 관계로 묘사한 것과(cf. 마 6:26-26, 31-33; 7:9-11; 23:37; 요 1:12; 20:17) 소년 예수가 부모에게 순종했다는 내용 등을 들 수 있다(눅 2:39-51). 복음서 나오는 효의 주제는 효에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에서라기보다는 주로 제자도와의 관계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효경에 있어서 효는 백행지 근본이요, 인간 도리의 근원이 되는 윤리 덕목이다. 예수 당시 유대 문화에서도 부모 공경과 가족사랑은 최상의 가치였다. 예수가 부모 공경과 가족 사랑을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는 인생에 있어 부모 공경과 가족사랑보다 더 상위 원칙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제자도이다. 예수는 사람이 예수보다 부모, 형제, 자녀 및 자신을 더 사랑하는 자는 능히 그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한다(마 10:37; cf. 눅 14:26). 그래서 예수는 가정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검과 분쟁을 주러 왔다고 한다. 어떤 사람 안에서 제자도가 형성될 때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고 선언한다(눅 12:53; cf. 마 10:34). 심지어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까지 한다(마 10:36). 이 말은 예수 사역 시대와 초대 교회 박해 상황 속에서 가족의 적극적인 반대로 예수의 제자가 되려하는 것을 망설였던 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예시하며, 이 메시지는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예수에게 있어 제자도는 삶에서 있어서 부모 공경이나 가족사랑 등 당시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던 어떤 가치보다도 상위의 원리였다.
나아가 예수는 부모를 장사지내는 것보다도 제자도의 실행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라고까지 한다. 어떤 제자가 먼저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예수를 좇겠다고 하자 예수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까지 한다(마 8:22; cf. 눅 9:60). 유대교에서는 모세오경의 부모 공경의 원칙에 따라 유대인들은 그 후대 전승에서 자녀가 부모를 장사지내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고, 이것은 종교적 의무보다도 우선되는 것이었다(cf. 창 50:5; 토빗 4:3; 지혜서 38:16). 예를 들어 제사장들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되는데 가까운 가족에게만은 예외적으로 그것이 허용되었다(cf. 레 21:1-3). 또 부모 장례에 대한 의무를 행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에서 예수는 제자도의 우선성, 시급성, 급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cf. 눅 9:60-61).
여기에 예수는 육적 가족을 뛰어넘는 제자 무리로서의 대안 가족을 제시하는 것 같다.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31-35; cf. 마 12:46-50; 눅 8:19-21). 여기서 예수는 누가 진정한 가족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며, 피를 나눈 가족보다는 이제 예수의 제자 무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가족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제자무리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영적 공동체의 자격 구성원으로 형제뿐만 아니라 자매까지 언급한 것은 당시의 문화로 볼 때는 대단히 진보적인 것으로서 예수의 제자 공동체는 남녀노소, 귀천의 구분이 없음을 역설한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와 어머니의 관계를 묘사한 구절에서도 예수가 가족 관계보다도 제자도의 우선성을 말했다는 것이 분명히 나타난다(요 2:1-11; 19:25-27). 여기서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와 가족 관계라기보다는 제자로서 등장한다. 먼저, 요한복음의 가나의 혼인잔치 기사(2:1-11)에서 예수의 어머니가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이 기사의 초점은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관계가 아니라 예수의 신성을 표적으로 드러내어 제자들이 믿게 하는데 있다(11절). 여기서 마리아가 예수를 올바로 이해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그것을 예수께 먼저 이야기 한 것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의 비범성을 알아차린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행동에 대해 예수가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하는 셈족어 특유의 상호의 거리감을 표시하는 숙어(삿 11:12; 삼하 16:10; 19:23; 왕상 17:18)를 어머니께 사용한 것을 보면 마리아도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의 신성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인물로 볼 수 있다. 더욱 난해한 것은 어머니의 부탁에 대해 예수가 자기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자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대로 행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를 완전히 오해하여 예수가 무슨 기적을 행하는 자로 이해한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고, 혹은 예수의 어머니가 이후에 예수가 표적을 행할 것에 대해 예견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는 표적을 행한 것에 대해 제자들은 믿었다고 했고, 어머니의 반응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은 것은 주의해 볼 일이다. 더구나 어머니를 어머니로 호칭하지 않고, 당시 어떤 문서에서도 그 용례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 어머니를 다른 여인을 부른 것처럼 “여인”이라고 호칭한 것은(cf. 마 15:28; 눅 13:12; 요 4:21; 8:10) 예수가 어머니를 자신의 표적에 대해 응답해야 하는 제자로서 그리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Cf. T. Martin, "Assessing the Johannine Epithet: 'The Mother of Jesus'," Catholic Biblical Quarterly 60(1998) 63-73. 마틴은 ‘구나이’(여인)라는 단어를 연구한 결과 유대 혹은 헬라 문헌 어느 곳에서도 자식이 어머니를 지칭하는 말로 이 단어가 쓰인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형제들도 특별 취급을 받지 못한 것을 볼 때(7:1-10) 여기서 예수와 예수의 어머니의 관계는 모자 관계로서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예수의 제자 마리아의 관계로 묘사된 것이라고 보인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가 십자가를 진 현장까지 따라간 사건(19:25-27)에서도 예수는 육적인 모자관계보다는 영적 가족 공동체에 대해서 역설한다. 여기서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어머니를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고 그 제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용이 나온다. 일 측면으로 보면 이 기사는 신학적인 중요성이 없는 인간 예수가 모친께 대한 마지막 인간적 효심의 발로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느 복음서보다도 신학적인 문서인 요한복음에서 구속사의 최정점에서 예수가 단순히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보였다는 것을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와 어떤 인간적인 관계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관련이 없으며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상이 복음서 초두부터 일관성 있게 깔려있기 때문이다(cf. 1:12-13; 3:3-5). 또한 여기서 예수의 어머니와 예수의 사랑 받는 제자가 한번도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상징적인 인물로 나오는 것을 볼 때 이 제자에게 어머니를 집에 모시라는 예수의 명령은 인간적인 배려 이상의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특히 “그 후에 모든 일이 이이 이루러진 줄 아시고”(28절)이라는 구절에서 요한복음에서 “그 후에”라는 말이 한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로 전환될 때 흔히 사용되어(2:12; 11:7, 11; 3:22; 5:1, 14; 6:1; 7:1; 19:38; 21:1), 결국 그 앞의 내용의 신학적인 귀결을 말할 때 흔히 사용된 것을 볼 때, 이 구절은 예수의 공생애를 마감하는 결정적인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는 언사가 기대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가 어머니를 그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고 그 제자가 그 부탁을 받아들인 것은 이 둘이 제자들의 대표로서 영적 가족 공동체를 이루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상을 통해서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로서 특권을 가진 자로서보다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구원받아야 할 인간으로, 더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까지 따라난 모범적 제자의 하나로 묘사된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증은 김동수, [요한복음의 교회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5) 141-144를 보라.
종합하면,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구절들을 통해서 볼 때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은 효도라는 개념이 제자도보다도 상위 개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양자의 갈등이 있다면 제자들은 마땅히 제자도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효가 지배 이데올리기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한된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면 효는 부모에 대한 공경인 효행으로서 머물러야지 그것이 사회 지도원리 혹은 신앙 원리로서 자리매김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와 효 2: 이데올로기적 효 비판
예수는 제자도를 부모공경이나 가족사랑보다 상위 인생 원리로 제시하면서 효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용이하게 지배하기 위한 것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사실 예수는 당시에 이데올로기적 효를 청산하는데 진력하셨다. 예수는 당시 유대 문화에서 권위주의화된 사회 계급 사상을 허물어야 할 것으로 말한다. 사회 지도자와 장로들이 당연히 하이어아키(hierarchy)의 최상부를 차지하고 민초를 억압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당시의 문화에서 예수는 하나님만이 모든 이의 아버지이시고 예수만 지도자이시며 다른 사람들은 다 형제라고 선언한다 “[바리새인들은]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 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라.”(마 23:6-10).
또한 예수는 당시에 귀머거리 혹은 백치와 동급으로 취급되던 어린이들을 완전히 독립된 인격체로 취급하고 “어린아이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마 18:5)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현명한 노인을 인생의 모델로서 제시하고 노인과 아이가 지배/피지배 구조로서 명령과 순종에 의해서 삶을 사는 것을 당연시 하는 당시의 문화에서 보면 이 말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은 당시 이데올로기화된 효 개념에 입각하여 가부장화된 사회 구조를 전복시키는 메시지였다.
예수가 효를 이데올로기로 사용하는 것을 우려했다는 것은 그의 율법 해석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유대교의 랍비적 해석 전통에서 구약의 율법을 일상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요약하는 관습이 있었는데(cf. 미 6:8; 시 15, 24; 사 66:2b; 렘 22:3-4; 슥 8:16-17), 이러한 관습에 따라 당시에 랍비라고 여겨지던 예수께 한 서기관이 예수께 율법 중 어떤 것이 가장 큰 계명인지를 묻는다. 그것은 곧 성서 해석에 있어서 해석학적 열쇠(hermeneutical key)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대해 예수는 잘 알려진 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성서를 해석하는 열쇠가 되는 사상이라고 대답한다(막 12:28-34; 마 22:34-40; 눅 10:25-28). 여기서 예수가 구약의 계명, 특히 십계명을 자체에도 ‘공경하다’라는 동사로 요약하지 않고 ‘사랑하다’(cf. 신 6:4-5; 수 22:5; 레 19:18, 34)라는 말로 요약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아마도 이 단어가 구약에서 주로 하나님(삼상, 2:30; 사 24:15; 잠 3:9), 부모(출 20:12; 신 5:16), 주인(말 1:6)에 대한 공경으로 사용되었고 이것이 당시에는 사회 지도자에 대해서 사용되어 이 개념이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것으로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것을 경계하는 뜻에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것은 공경의 개념이 창조질서의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과 여기서 파생된 부모로부터 차츰 인생과 지혜의 스승으로 확대되어(잠 16:31; 20:29), 결국 이것은 상위 계층이 하위 계층을 지배하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되기에 이른 것이다(마 23:8-9). 여기에 예수는 율법의 요약과 해석을 ‘사랑하다’라는 보다 비 이데올로기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로 했던 것이다.
바울과 효 1: 예수의 어깨 위에 서서
예수 가르침의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공관복음에 의하면) 혹은 영생(요한복음에 의하면)이였다면 바울 신학의 주제는 하나님의 의였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도 효가 그 신학의 주제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삶의 방식을 제시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족 윤리를 이야기 할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 바울은 예수보다 효를 더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
1세기 그레꼬-로마 사회를 재배하고 있던 가부장제를 무너뜨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애를 말한다는 면에서 바울은 예수의 노선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바울 당시의 그레꼬-로마 문화에서는 가부장제(patriarchy)가 가정과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가정에서는 여자와 아이들과 종들은 집안의 남자 어른에 의해 지배받았고, 사회 조직에 있어서는 하이어아키가 극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사회에서 지위 높은 사람들이 최대한의 존경을 받는 사회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도자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즐겨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바울은 교회에서 지도자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꺼려했고 대신 동역자, 동반자, 혹은 같은 군사라는 말을 선호했다.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 직제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중심이 섬김에 있었다.
바울 서신에서 교회 안에서의 많은 관계는 부자관계 혹은 형제 관계로 묘사되었다. 바울은 자신을 가끔 아버지로 묘사하지만(딤전 1:2; 딤후 1:2) 주로 형제라고 한다. 자신을 아버지로 묘사함으로서 바울은 교회에 대한 그의 관심과 사랑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주로 자신을 형제나 같은 신자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자신이 다른 신자들에 대해서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상호 형제, 자매로 규정함으로서 이들을 대체 가족 관계로 묶은 것이다. 그러나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당시 그레꼬-로마 사회에서 흔치 않은 일이었다. 바울의 교직이해에 대해서는 Andrew D. Clark, Serve the Community of the Church: Christians as Leaders and Ministers(Grand Rapids, MI: Eerdmans, 2000) 특히 249-51를 참조하라.
이것은 일반 사회에 있던 조직과는 상당히 다른 모델로서 이 부분에 대해서 바울은 반문화적(counter-cultural)이었다. 대체 가족은 출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입각한 그리고 공동으로 헌신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이다. 이 대체 가족 사회에서 특별한 점은 지상의 아버지의 부재이다. 오직 천상의 하나님만이 아버지이고 모든 가족 구성원은 서로 형제, 자매 관계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형제로서의 상호 복종이다. 바울의 대체 가족 개념에 대해서는 S. Scott Bartchy, "Undermining Ancient Patriarchy: The Apostle Paul's Vision of a Society of Siblings," Biblical Theology Bulletin 29 (1999) 68-78을 보라.
만약 이 공동체 안에 조직이 필요하다면 형제 안에서 서로 지도력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것이 된다. 한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을 지배하는 형태의 지도력은 바울의 이상이 아니다(고전 12:17).
바울과 효 2: 상호존중과 약자에 대한 배려
바울 서신에서 효를 가장 직접적으로 말한 구절은 에베소서 6장 1-4절이다(cf. 골 3:18-4:1; 딤전 2:8-15; 6:1-2; 딛 2:1-10; 벧전 2:18-3:7). 문맥을 따라서 읽으면 이 본문은 5장 21절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장 21절은 본 문맥에서 주제 구절이고 그 주제 구절 하에 바울은 세 쌍의 실천 덕목을 제시한다. 아내와 남편의 상호윤리(5:22-33)와 자녀와 부모의 상호윤리(6:1-4)와 종과 주인의 상호윤리(6:5-9)가 그것이다. 여기서 핵심 주제 구절은 5장 21절이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뒤에 나오는 세 쌍의 교훈은 이 핵심 구절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사항이다. 이러한 피차복종의 윤리는 바울의 신앙과 사상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다(갈 5:13b; 빌 2:3b 참조). 바울에게 있어 모든 관계의 중심이 그리스도이고 신자는 모두 형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는 피차 복종이 가장 중요한 윤리 원칙으로 되어 있다. 이 본문에 대한 자세한 주석은 김동수, “성서적 효(엡 6:1-4),” [2001 예배와 강단](서울: 한들출판사, 2000) 288-294을 보라.
위의 문맥에서 바울은 아내, 자녀, 종이 해야 할 윤리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약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혁명적인 것이었다. 당시의 헬라 문화에서는 소위 가훈집(Haustafel)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예외 없이 모든 문헌에서 남자, 성인, 자유인에게만 윤리적인 명령이 주어져있다. 여자, 아이, 종들에게는 윤리적인 명령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윤리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본문에서 바울은 자녀가 부모만 공경하는 것을 명하지 않고 부모가 자녀에게 해야 할 일도 말하고 있다 (6:1-4). 여기서 자녀가 해야 할 일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공경하다’라는 말은 자녀가 부모를 혹은 하급자가 상급자를 향해서 하는 행위로 밖에 쓰이지 않는다. 아버지가 아들을 공경한다는 말은 절대 쓰일 수 없다. 신약 성서에도 ‘공경하다’라는 동사는 부모와 관계해서 가장 많이 쓰이고 하나님 공경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는 이 단어의 쓰임새가 위와 같이만 한정되지 않는다. 베드로전서 2:17에는 “뭇 사람을 공경하며”라는 말이 나오고 요한복음 12:26에는 한글 개역 성경에는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귀히 여기시리라”는 말로 번역된 단어는 에베소서 6:2에 부모를 공경하라고 할 때의 동사와 같은 단어이다. 아마 한글 성서 번역자들이 하나님이 사람을 영광을 준다(혹은 공경한다)는 말이 어색하다고 느껴 “귀히 여기시리라”고 번역한 것 같다. 물론 이 번역은 적절했다고 본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신약에서 ‘공경하다’라는 동사는 사람과 하나님 혹은 사람 상호 간에 모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적인 공경의 정신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만 해야 되는 무엇이라기보다는 상하에 관계없이 누구나 먼저 다른 사람을 섬기려는 것이다. 바울은 부모 공경을 바로 이러한 상호 존중 사상의 틀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 효가 상호 존중의 실천사항이기 때문에 바울의 효의 귀결은 약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이다.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주로 하급자가 상급자를 도와준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 보면 도움이라는 말은 하급자가 상급자를 도와준다는 말로도 쓰이지만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돕는다는 의미로 더 많이 쓰였다. 강한 자가 오히려 약한 자를 돕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을 통해서 효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데 예수는 사회적 강자에게 비굴하거나 그들을 두둔한 일이 없고 오히려 앉아서 효만 받으려고 하는 자들에게 엄중한 심판의 메시지를 던진다(마 23:1-9). 반면 예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특별히 보살핀다. 특히 예수는 어린이를 완전한 인격체로 인정하고 그들을 사랑하신다(마 19:13-15). 한마디로 성경적 효 정신은 모든 사람을 형제로 먼저 섬기는 것인데,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특별히 더 많은 관심과 배려를 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본인의 해석은 최근의 차준희 교수의 “제 5계명”에 대한 연구 결과에 의해서도 지지된다. 차준희 교수에 의하면 “제 5계명”에 나오는 “부모”는 성인 남자가 모시는 “노인 부모”를 가리킨다. 즉 여기서 부모는 사회적 약자를 가리키는 것이고, 부모 공경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특별한 배려로 이해된다(차준희,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 5계명 연구,” [효와 성령], 46-64를 보라). 고병인 교수가 효를 노인 공경과 연결시키는 것은 아마도 위와 같은 효 이해에 바탕을 둔 것 같다. 고병인, “노년 과정의 이해와 효,” [효와 성령] 123-143.
이러한 약자에 대한 특별한 보살핌으로써의 효는 바울서신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디모데전서 5:3에 과부를 경대(공경)하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과부는 사회적 약자를 지칭한다. 과부에 대한 보살핌은 교회에 책임이 있는데 만약 그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가 있으면 그 자녀나 손자녀가 일차적으로 그 봉양의 책이 있다(딤전 5:4). 디모데전서 5장 4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어떤 과부가 자녀나 손자가 있으면 그들에게 먼저 자기들의 집에서 경건의 의무를 행하는 것과 자기들의 (조)부모에게 보답하는 것을 배우게 하시오. 그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글 개역 성서에는 그 봉양의 책임을 말하는 단어를 “효를 행하여”라고 번역하고 있다. 본래 이 단어는 헬라어로 ‘유세베오’라는 동사로 기본적으로 종교적 의무를 행하다 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것은 주로 이스라엘 백성 혹은 신자가 하나님께 하는 종교적 의무에 대해서 쓰인다(cf. 행 17:3; 딤전 2:2; 6:11). 이러한 의무를 하나님이 아닌 부모에게 대해서 사용한 것은 부모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본문이 말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가 된 과부에 대한 일차적 봉양의 책임은 교회가 아니라 그 자녀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곧 여기서 말하는 효는 약자에 대한 보살핌으로서 이 전통은 구약에서부터 면면히 내려온 것이다. 이러한 약자에 대한 전통이 바울에게서 사회적 약자가 된 부모에 대한 존중으로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효는 사회 정의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성서적 효의 특징과 유용성
신약의 주요 인물인 예수와 바울은 공히 이데올로기적 효를 청산하려고 했다는 것을 위에서 논증했다. 예수는 효를 제자도의 하위 개념으로서 설정하고 있으며 효를 매개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을 극히 경계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바울도 마찬가지다. 당시의 유대교와 로마 사회의 사회적 계급 구조가 극도로 발달되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노년기의 바울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로 부르면서 이데올로기적 효의 원리인 상명하복 혹은 부자자효의 원리를 극복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또 바울은 예수에게처럼 효를 인간 윤리의 최상의 지배 원리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피차복종하고 약자를 존중하는 것에 대한 하위 원리로서 이해하고 있다. 바울에게 효는 그리스도인의 상호 복종의 실천사항이요(엡 5:21-6:9), 약자가 된 부모에 대한 특별한 배려이다(딤전 5:4). 논자는 본 연구에서 다른 문헌 혹은 다른 종교 문헌에 나타난 효를 염두해 두지 않고 주로 성서 자체에서 말하는 효 개념을 밝혀내는데 집중했다. 흥미로운 것은 논자의 연구와 상호 독립적으로 진행된 동양학 입장에서 연구된 공자의 효에 관한 한 한자의 연구 결과는 성서적 효의 특징에 대한 연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상선 교수에 의하면 공자의 효를 현대에 실행하는 방법은 정직이 바탕이 되어야 하고(비 권위주의적 효), 의로워야 하며(정의로운 효), 자유와 평등의 바탕위에 표현되어야 한다(상호성에 기초한 효). 이상선, “공자 효행의 현대적 의의,” [성산효도대학원대학교 교수논총] 2(2001) 251-267.
그렇다면 이렇게 이데올로기가 청산된 신약의 효는 어떤 의의가 있을까? 우선, 이러한 효는 비권위주의적인 것으로서 이데올로기로서의 효의 독소를 제거한 것이다. 성경적 효는 이데올로기적 효를 청산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성경적 효에는 권위주의가 설 자리가 없다. 인간 본성으로 효를 반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효도하라고 할 때 젊은이들이 때로 반감을 갖게 되는 것은 효가 흔히 권위주의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1999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김경일 교수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공자의 가르침으로 대변되는 유교의 권위주의를 공격하고 있다. 기성세대가 이에 대해 적극적인 반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이것은 젊은 세대의 생각에는 기성세대는 상당히 권위주의화 되어 있다고 느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김경일,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서울: 바다출판사, 1999). 이에 반대하는 책으로 곧이어 성균관대 유학과 최병철 교수의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서울: 시아출판, 1999)가 출판되었으나 독자들의 반응은 비교적 냉담했다. 이 때 여성의 입장에서 한국의 가부장제적 권위주의 비판한 책으로 이하천의 “삼십년 가부장제와 맞서 싸운 한 여성 작가의 외침”라는 부제의 [나는 제사가 싫다](서울: 이프, 2000)가 출판되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권위주의화 된 효는 성경이 말하는 효가 아니다.
성경의 효의 근원적 모델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기 때문에 상하관계, 혹은 위계질서의 관계로 생각한다. 당연히 아버지가 아들보다 높고 아버지는 사랑, 아들은 순종의 관계로만 보는 경향성이 있다. 소위 부자자효(父慈子孝)의 관계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묘사하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요한복음에는 아들로서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음과 아울러 아버지와 아들은 사랑의 관계 속에서 하나라는 사상이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요 10:30 참조). 오히려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위계 안에서의 상하 복종의 관계라기보다는 사랑 안에서 하나된 관계라는 것이 성경에는 더 강조되어 있다(요 10:15; 17:21 참조). 김균진은 삼위일체가 성부에 의한 성자와 성령의 위계가 아니라 삼위의 인격이 서로 사랑과 교제로 결합되어 있는 관계로 설명한다.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 I](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4) 260.
위와 같은 성서적 혹은 기독교적 효의 유용성은 무한이 열려있다. 전통적인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적 효는 사회와 교회에 큰 폐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효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도와주기 보다는 약자를 억압하고 사람의 자율권을 제한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하는데 방해가 된다. 하지만 성서적 효를 목회에 적용하면 큰 유익이 있다. 첫째, 부모 자녀 간의 올바른 관계 설정을 함으로써 성경적 효 개념을 통하여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를 올바로 설정할 수 있다. 둘째, 성경적 효 정신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살핌의 목회를 적극 지지한다. 위에서 고찰한 대로 성경적 공경 정신이 약자를 더 적극적으로 배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의 신학이 성령의 역동적 역사와 약자에 대한 보살핌을 동시에 균형 있게 강조하고 있다(눅 4:16-19; 행 2:43-47; 4:32-35). 셋째, 성서적 효 정신으로 한국 교회와 사회의 병리를 치유할 수 있다. 성서적 효는 정의의 효이기 때문에 이 정신으로 한국 교회와 사회의 정직성 회복 운동을 전개 할 수 있다. 성경적 효는 비 권위주의적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이 정신을 적용할 때 교회와 사회가 보다 민주와 합리화되고, 인격적 목회가 가능해지며, 목회자와 평신도의 형제애가 회복되고 가족 구성원 간의 대화와 화목이 이루어 질수 있다.
이러한 효 개념을 성경 자체에는 적극적으로 활용되어 진리를 가르치는데 사용되고 있다. 신약 성서는 부모 공경 개념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부자간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성서의 주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는 예수에 대한 여러 타이틀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이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은 예수의 아버지이고 예수는 그 아들이라는 개념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 개념을 통해서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가 가장 잘 설명되어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하나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요한복음의 기독론이 부자 관계의 모델에 의해서 설명된 것에 대해서는 김창선, “‘보냄받은 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에 나타난 성경적 효 모델로서의 파송 기독론,” [효와 성령](서울: 한들, 2002), 81-97을 보라. 요한의 아들 기독론에 관해서는 김동수외, [신약성서개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437을 보라.
또 요한복음에서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부자관계로 묘사되어 있다.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요 1:12; 11:52)이며 하나님은 모든 신자의 아버지이시고(요 20:17)이고 따라서 모든 신자는 서로 형제가 된다(요 20:17; 21:23). 이에 관해서는 김동수, “요한복음에 나타난 하나님과 신자의 부자 관계,” [성산효도대학원 대학교 교수논총] 2(2001) 65-77을 보라.
이렇게 이데올로기적 효가 극복된 성경적 효는 성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주요 메타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기독교 메시지를 실을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적 효를 극복함으로써 근대 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 간의 근본 관계는 지배 관계 보다는 계약 관계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가 성서적으로 볼 때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는 올바른 것이지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는 계약 관계와 아울러 은총의 관계도 있는 것이다. 계약 관계에만 익숙한 서구 현대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이 힘든 측면이 있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비 이데올로기적인 효 개념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한 다음의 양명수 교수의 요약적 설명은 길게 인용할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가 아닌 효가 공헌할 점이 있다. 근대 사회가 당당한 주체를 내세우고 각자 일한 대가로 산다고 생각하면서 은총을 모르게 되었다. 감사와 회개보다도 자기 실현이 미덕이 되었다. 말을 잘 듣기보다는 자기 의사를 당당하게 표현하는 것이 미덕이 되었다. 그 결과 무한 경쟁으로 치닫고 마음은 삭막해지고, 생각은 그 깊이를 상실했다. 효는 그런 현대 사회를 치유하고, 은총에 대한 감사와 섬김을 알도록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은총이 먼저다. 나보다 은총이 먼저다. 그리고 그 은총의 대표자는 여전히 부모다. 서구 사회에서는 효의 문제를 사회 보장 제도로 해결하려고 한다. 우리 나라도 그런 절차를 밟겠지만, 사회 보장 제도로 인간 관계가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 보장 제도로 정의를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면서 동시에 사랑은 사회 보장 제도로서 해결되지 않는다. 효가 과거의 이데올로기와 달리 말대답을 못하게 하는 데 바탕을 두지 않고, 사회 보장 데도 이상의 섬김을 말하는 것이라면 현대 사회에 중요한 공헌을 할 것이다. 양명수, “기독교의 죄 개념과 효,” 23-24.
효는 이데올로기화될 가능성이 있는 개념이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면 성경의 많은 개념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