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에서 친정 아버지가 오셨습니다.
아버지는 평소 제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많으셨는지 많은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고향 해남군수를 마지막으로 행정직에서 은퇴하신 아버지는 이제 일흔 여덟이십니다.
그런 아버지께서 '우리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제 할아버지를 부르시는 게 참 생소합니다.
제게는 해남에서 방학을 끝내고 돌아올 때
차비하라고 용돈을 주는 게 젤로 좋았던 우리 할아버지...
그분 성함이 밀양 朴씨 姓을 가진 '기'자 '洙'자 쓰시는 박기수 옹이십니다.
그분의 어릴적 아명이 種大셨다 합니다.
그분은 머리가 별로 영민하지 못한 게 제 증조할아버지의 고민이셨다고 하네요.
늘상 그분의 미래를 고민하던 증조할아버지는 어느 날 장돌뱅이 한분을 돈을 주고 사서
어린 할아버지를 교육시키기로 작정을 하셨다 합니다.
할아버지는 韓紙를 등짐 지고 그 장돌뱅이를 따라 장에 다녔답니다.
한 겨울 정해진 시기가 끝날 무렵 매서운 겨울 바람이 부는 계곡 사이에 서서
스승 장돌뱅이가
"종대야! 날씨가 어떠하냐?"
"아~주 춥습니다. "
"너는 앞으로 이 차가운 세상의 바람 맛을 결코 잊어선 안된다."
는 게 마지막 가르침이었노라고 아버지께 가르쳐 주시더랍니다.
고생을 하고 돌아온 아들을 당신이 경영하시는 한약방에서
재료를 썰거나 찌는 허느렛일을 가르치고 계시던 증조 할아버지께서는
어느 날 어린 아들의 친구중에 투전을 잘하는 이를 불러 들여 아들과 투전을 하도록 시켰답니다.
투전을 배워보지 못한 할아버지는 떡내기 투전에서 돈을 잃었고
그를 안 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불러 시치미를 떼고
"종대야! 그 떡은 어디서 난 것인고?
"친구랑 투전을 해서 떡을 잃었고 친구가 나눠 줘서 먹고 있습니다"
하고 성품이 고지식한 할아버지께서 고하자
증조 할아버지는 집안에서 인감도장과 집문서 땅문서를 모두 가지고 오게 하고는 그걸 내어 놓으시며
"종대야! 이제 우리 가족은 투전을 해서 먹고 살 것이니 이제 네가 살림을 관장 하거라. "
하여 혼비백산한 할아버지는 일평생 투전같은 도박을 하지 않았다고 아버지께 가르치셨답니다.
아버지가 결혼하고 엄마가 빚을 잘못 운용해서 집안의 중요 제답을 없앴을 때는
초석을 말아 겨드랑이에 끼고 안집에 건너 오신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공부방 앞마당에 무릎을 꿇고
"도련님 뵈입시다! 도련님 뵈입시다!"
하셨다니 아버지가 들창문을 열고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집안의 재산을 잘 지키지 못하고 보증을 잘못 선 어머니는
이에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석고대죄를 하셨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연아! 우리 집안은 돈을 하찮게 여기는 전통을 가졌다.
아버지 어릴 적 너희 증조 할아버지는 세배를 하면 접시에 돈을 올려 놓고는
동전이든 지전이든 젓가락으로 집어 주시며
돈이란 더러운 것이니 선비의 손으로 집을 순 없는 것이다.
또한 돈이란 돌아야 하는 것이고 언제든 재앙을 더불어 친구하고 다니니
넘치게 가지면 안된다고 배웠다. "
고도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니 제가 시집올 때 혼수에 섭섭하신 시어머니가 친정에 가서
당시 일부의 세태 풍습대로 혼수 흥정을 하려하자
"사과 궤짝을 장농으로 가져간들 그것은 저희 집안 법도대로 할 것이고
그것이 못마땅하여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은 그 집안 법통대로 하면 될 일입니다.
제 여식이 자제분을 배필로 정했을 때 시집살이는 이미 각오했을 터
예의가 아니니 돌아 가십시오..."
하신 것도 당연지사였겠지요.
결혼시 아버지는 '삼 년간의 친정 나들이 금지'를 함께 혼수로 챙기셨습니다.
영의정 벼슬을 한 것도 아니면서 꼬장스럽기가 양반집 서슬이어서
제가 다 크고도 망건 쓰고 갓 쓰고 도포 입고 제사를 모시는 걸 익히 보았고
평생 한복을 입으시던 우리 할아버지...
제사중에 할아버지의 哭하는 소리는 너무 생경해 저는 연극처럼 느껴졌는데
늘 할아버지께서는 '에고..에고..."를 하셨습니다.
고조 할아버지는 정오품 당상관을 지내셨고
임금님이 내린 옥관자가 지금도 증표로 남아 있다고도 하셨고
증조 할아버지가 한약을 공부하시고 한의사가 된 것은 을사보호조약으로 나라를 잃어
관직을 물러나고 생계를 위한 것이었으며
정치의 덧없음에 회의 하시어 생업을 바꾸셨다 하셨습니다.
큰아들인 종대 할아버지는 머리가 나쁜 연고로 두번 낙방하시고 세번 도전 끝에 한의사 면허를 얻었고,
작은 할아버지는 평양의전을 나오시고 우리나라 의사 면허 32호로 양의사가 되셔서
살아 천석군을 이루셨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집안의 선산의 위치와 연고를 말씀 하셨고
그 외에도 하고 싶은 말씀이 참으로 많으신 기색입니다.
할아버지가 경영하시던 한약방은 해남군 북평면 5일장터에 있었는데 어릴 때 가서 놀던 곳입니다.
감초를 집어 먹고 숙지황인지 생지황인지를 염소똥이라며 훔쳐 먹고
방바닥에 수은병을 깨뜨려 수은이 구슬처럼 굴러 다니고
장날이면 나란히 얌전히 앉아 차례로 약짓기를 기다리던 장꾼들 생각도 납니다.
할아버지는 결코 살아 생전 부모님을 속이는 일 없이
번 돈을 갖다 드리고 필요한 돈을 타서 쓰는 삶을 유지하셨다고 합니다.
좀 머리가 나쁘긴 했으나 아주 고지식해서
남에게 봉사하는 한의사였다고 아버지는 말씀 하시며
의술은 인술이라고 명심 또 명심하라고도 이르셨습니다.
손자가 의사가 되니 잘하면 가업을 잇겠다고 좋아하시기도 했지요.
집안에 보관중인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진품 동의보감책을 제게 남겨 주겠노라고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해남 북평면 그 깊은 시골 마을에서
광주 서중, 일고를 졸업하고 열일곱에 고려대법대에 입학한 수재였습니다.
마을이 떠들석하게 진학을 했던 아버지는
말년에 당신이 청해서 고향인 해남 군수를 했노라 말씀 하셨습니다.
연세 스물 둘에 해남 두륜중학교의 전신인 공민학교를 설립하셨노라 했습니다.
알지 못한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아마 당신 돌아가시기 전에 이런저런 얘기를 딸에게 터 놓고 싶으셨던가 봅니다.
둘째는
"할아버지 포스 장난 아니야... 할 말씀이 무궁무진 하신가 봐. "
하며 아버지와 마주 앉기를 꺼리는 눈치입니다.
"네 엄마 대단한 엄마다. "
라며 땀냄새 풍기는 퇴근길에 붙들어 이번엔 딸자랑이 한창이랍니다.
당연히 저야 모르죠... 아들의 전언이니까...
아버지는 아들들이 제게 잘 하는 것을 보더니
"넌 좋은 엄마였던 것 같구나. 애들을 잘 키웠어..
사임당 신씨가 왜 사임당인 줄 아니?
중국 주나라 무왕의 어머니는 任씨성을 가진 분이셨는데 태교를 처음 도입한 분이셨단다.
이율곡을 잉태한 신씨는 스스로 任씨를 스승으로 삼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스승 師 임씨의 任 집堂 을 써서 사임당이 됐느니라.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이 가물한데 오래전에 읽었다. "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입만 여시면 공자왈 맹자 왈이시지만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엄하고 차가운 아버지였던 고로 父女有親은 아닌데도
그래도 늘상 귀를 기울여 그 말씀을 새겨 두는것은 늘 교육적인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녀와 나누는 대화의 질이 여느 집과는 좀 格을 달리한다는 것이죠.
얼마전 식탁에서 아들과 깨달음과 화두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데
"우리집 식탁화제는 참 대단해.."
했던 게 문득 떠올랐습니다.
나이가 들고 또 들더라도 상투적인 일상사와는 좀 다른
새겨들을 만한 주제로 손자녀와 대화하려면
배우고 또한 익히기를 게울리 하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기전에 한번은 딸네집에 와 보시겠다고 나선 길에
제게 하려는 많은 이야기를 가급적 잘 새겨 들으려고 애쓰려고요.
당뇨 합병증으로 신부전증을 앓으며 낼 아침 투석을 하러 가셔야 한다고
일찍 잠자리에 드시는 늙고 병드신 우리 아버지...
대단한 기개는 다 어디 갔는지 침대에 웅크리고 잠드신 모습이 영 안쓰럽습니다.
이제 박기수翁 ,우리 할아버지의 마르고 꼬장꼬장한 모습은 아버지의 어디에서도 못 찾아 보겠습니다.
우리 세대는 덕대가 할머니를 닮았거든요.....
해서 아버지는 처음보는 사람에게조차 위압감을 주는 위풍당당함을 지니신 풍모이십니다.
애써 옛이야기를 잊기 전에 두서없이 써 두는 것은
오늘이 지나 먼 훗날.. 아버지를 추억할 날이 생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대충 써놓은 한덕골 이야기도
아이들에게 어느 날 자신들의 뿌리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작은 실마리가 되겠지요?
첫댓글 가슴 찡한 글입니다. 나이들어도 친정 어머니라는 단어보다는 울 엄마라는 단어가 더 친밀하게 느껴지는것이 친정?. 울 맘도 密陽朴氏 & 울 모두는 친척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