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 金炳洙 (미상 ~ 미상)】 "이완용(李完用) 등 7대신) 전원 암살 계획"
출생 시기와 출생지 모두 미상이나, 1919년에는 중국 펑톈성(奉天省) 류허현(柳河縣)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1월 21일에 급서(急逝)한 광무황제(고종)의 인산일(因山日)이 3월 3일로 공표되자, 국내특파 결사대로 하여금 국장 당일에 서울 망우리(忘憂里) 고개에 매복해 있다가 반우(返虞) 행렬을 급습하여 매국노 5적(을사늑약 체결을 주장했거나 그에 찬동했던 박제순(朴濟純) 등 5대신)과 7적(1907년 광무황제의 퇴위를 강박했던 이완용(李完用) 등 7대신)을 전원 암살 숙청할 계획이 세워졌다. 이 계획은 중국 펑톈(奉天, 현재의 선양(瀋陽))에서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 등이 주도한 것이었다.
이 거사 실행의 총책임자로 지명된 이탁(李鐸)이 류허현에서 9인 1대(隊)의 3개 대로 구성되는 27인 결사대를 조직할 때 호응하여 대원이 되어서, 펑톈과 안둥(安東)을 거쳐 서울로 잠입 대기하였다. 그러나 펑톈으로부터 운반되어 올 권총과 탄환의 도착이 지체된 탓으로 거사는 결행되지 못하였고, 그 후 3월 하순부터 대원들과 함께 성토문·경고문·격문 등을 만들어 독립문과 종각(鐘閣) 등 여러 곳에 부착하는 등의 선전 활동을 벌이다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자 몇몇 대원과 함께 급히 피신하여 5월말에 류허현으로 귀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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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측 문서에 나타난 김병수(1921.10.3) [판형3] |
그 후 지린성(吉林省) 창바이현(長白縣)에서 결성된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에 가입하여, 1중대 3소대 1분대 소속의 일등병이 되었다. 1921년 9월 16일 분대장 김병묵(金秉默)의 인솔 하에 대원 9명과 함께 군영을 떠나 압록강 상류를 건너 함경남도 갑산군(甲山郡)으로 잠입하였고, 동월 23일 밤 동인면(同仁面) 함정포(含井浦, 사천포(舍扦浦)였다고도 함)의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였다. 폭탄 2개로 주재소를 폭파하고 참교(參校) 김형길(金亨吉)과 함께 순사부장 고바야시小林淸治郞를 저격 사살했으며, 현금 60원 및 서류와 총기 등을 노획하고 부근의 영림창(營林廠) 출장소도 소각해버린 후 일제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동월 30일 전원 무사히 귀환하였다.
뒤이어 군비단이 국민단(國民團)으로 재편된 후인 동년 11월 6일에도 의용군 소대장 김성연(金成淵) 지휘하의 대원 26명과 함께 함남 삼수군(三水郡) 호인면(好仁面) 운전리(雲田里)의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여 폭파하고 순사 3명을 사살하였다. 1922년 7월 28일에는 대원 14명과 함께 다시 갑산군으로 침투해 가던 중에 포태동(胞胎洞)에서 일제 경찰대와 마주쳤고, 5시간의 교전 끝에 13명을 사살하고 3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그 후의 활동 행적과 몰년은 미상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