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남면 화산마을 귀농인 이필재님 댁 밥상에는 우주(宇宙)가 담겨있다.

2년 전 겨울, 연말 무렵에도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꼬불꼬불 좁은 산길을 제법 올라 소나무 숲을 지나 개울이 심술궂게 끊어놓은 것 같은 길 아닌 길을 건너야만 당도할 수 있는 산골 외딴집, 계남면 화음리 화산마을 이필재회원과 그의 아내 정유생님이 올망졸망 네 딸과 함께 도란도란 산비둘기가족처럼 둥지를 튼 그곳을 말이다.
건축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며, 건축사에 유례가 없는 집짓기기법이라는 목천공법으로 이필재 선생이 손수 지었다는 아담한 원형 흙집. 통나무 조각을 박아 넣은 황토 흙벽에 너와 지붕을 얹고 옹기굴뚝까지 달아놓은 그 집은 동화 속에 나오는 ‘그림 같은 집’, 딱 그 모습이었다.
2년 전 우연히 이필재선생의 집을 찾았을 때는 한겨울이었다. 아궁이 불을 뜨끈뜨끈 지펴놓은 방안에서 밤새 이야기꽃을 피우고 놀다가 아랫목을 탐하며 잠이 들었는데, 아침이 되어 잠을 깨서 창밖을 내다보니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여있었다. 몇 킬로나 되려는지, 눈길에 손님들이 돌아가기 힘들까봐 부부는 물론, 아홉 살 큰 딸애부터 네 살 막내까지 삽이며 빗자루며 되는대로 집어 들고 아랫마을을 향해 난 좁은 길에 밤새 소복이 쌓인 눈을 치운다고 난리를 친 일이 기억에 새롭다.
또 하나 잊지 못하고 있던 것이 바로 그 집의 먹거리다. 처음 방문했던 그때에는 일행이 모두 다른 송년회 장소에서 저녁을 먹고 간 터라 안주인께서 가볍게 술상을 봐주셨는데, 그때 술안주로 막걸리와 곁들여 먹은 총각김치와 동치미의 맛이 그렇게 일품일 수 없었다. 직접 농사지은 재료로 항아리에 담근 것을 땅에 묻어두고서 겨우내 꺼내 먹는 것이라며 큼직한 도자기접시에 듬뿍 담아내온 그 맛은 얼마 만에 느껴본 진짜 ‘김장의 맛’으로써 일행 모두를 감탄케 하였다.
막걸리보다 김장의 맛에 취하고 싶었던 기자는 그때 한 가지 삶의 목표를 세웠다.
‘나중에 이 집에 꼭 다시 와서 밥을 차려 내 놓으라고는 요즘 드문 우리나라 옛 전통의 맛 재현의 달인, 안주인의 솜씨를 원 없이 한 번 만끽해 보리라!’
뜬봉샘의 편집위원이 된 덕을 톡톡히 보게 된 셈인가, 편집회의에서 이번 달 기획특집으로 ‘밥’을 다루자고 한 제안의 배경에는 내심 이필재선생, 아니 부인 정유생님 집의 밥맛을 ‘합법적으로’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 흑심(식심)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부모님으로부터 자연과 더불어 생태적으로 사는데 필요한 모든 걸 배우고, 집을 둘러싼 온 산과 냇물과 밭과 들에서 배우고, 자연을 배우고, 우주를 배우고, 우리나라 전통예술(판소리, 북, 가야금, 서예 등)을 배우고 익혀 지역의 이런저런 행사에 제법 ‘불려 다니는’ 실력을 갖추기도 한 큰 딸 하현이와 작은 딸 우현이, 아직 어려 뭘 배우는 것보다는 강아지와 닭들을 쫓아다니며, 산으로 들로 마냥 뛰어다니며, 노는 게 더 좋은 셋째 현빈이와, 넷째 현중이 까지, 네 자매의 열띤 환영을 받으며 2년 만에 다시 찾아간 그 집 마당에는 막 봄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해 돌나물과 냉이와 쑥 등 봄나물이 다투어 돋아나고 있었다.
찾아온 손님들을 피붙이에게 하듯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반기며 손을 잡고 이끄는 대로 집 안에 들어서니 주방 쪽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장만하고 있던 정유생님이 오랜 친구 대하듯 취재진을 반갑게 맞아준다. 약간 울퉁불퉁한 바닥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황토방 바닥에 이미 커다란 상을 두 개나 펴 놓고 막 상을 차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일(취재)하러 온 건지 놀러 온 건지 분간이 안 갈 만큼, 동그란 황토흙집 실내분위기는 따스하고 편하기 그지없었다. 취재 요청을 하면서 행여나 부담을 가질까봐 절대 ‘늘 먹는 밥상에 숟가락 두 개만’ 더 얹어 달라 신신당부했건만 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아하니 꽤 정성을 들이고 신경을 쓴 듯했다.

지난 가을에 수확해 겨우내 보관해 놓았던 마지막 하나 남은 늙은 호박을 내어 쌀가루를 섞어 쑨 호박죽이 먼저 에피타이저(전채요리)로 나올 때 벌써 알았다. 흔히 일이 잘못 되었을 때 ‘죽 쑤었다.’고도 하지만 그건 죽을 쑤는데 얼마나 긴 시간 동안 그 옆에 지키고 서서 한 눈도 팔지 않고 죽 솥과 한 몸이 되어야만 죽다운 죽이 완성된다는 것을 몰라서, 혹은 알고도 무시하고 하는 말일 게다. 늙은 호박이 호박죽으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그 얼마나 깊은 정성을 들여야 하는지는 ‘죽 쒀본’ 사람만 알 수 있다.
죽 쑨 이의 정성을 몸이 먼저 알아차린다. 한 숟갈 떠 남기자 온몸의 세포가 일제히 환호, 딱 알맞은 농도로 걸쭉하게 쑨 호박죽의 달콤하고 구수한 맛이 숟가락질을 멈추지 못하게 만든 통에 단숨에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말았다.

호박죽을 비우고 나서 정신 차리고 찬찬히 밥상을 살펴보니 크고 작은 도자기 접시에 깔끔하게 담긴 예닐곱 가지 찬들 또한 예사롭지 않다.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 잘 삭힌 고추장아찌와 겨울 나고 올라온 어린 쪽파 겉절이, 씨감자로 남겨 두었던 감자조림에 고추장 멸치 볶음, 뽕잎 장아찌와 겨우내 땅속에 묻었다 날이 풀리면서 얼마 전 김치냉장고로 옮겨놓았다는 김장김치, 아이들이 좋아하는 돼지고기를 넣고 끓인 김치찌개와 돼지감자 샐러드까지.
돼지감자, 일명 뚱딴지로도 불리는 이 뿌리채소는 변비, 당뇨 등에 매우 좋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기특한 자연 건강식품이다. 크기가 작은 식물에는 ‘까치’라는 이름이 붙는다는 것과 어미돼지 젖에 줄줄이 새끼 매달리듯 주렁주렁 열매가 달리는 식물의 이름 앞에 ‘돼지’자를 붙인다는 것도 이필재선생과 정유생님의 ‘밥상머리 교육’ 덕분에 덤으로 알게 되었다.
흔히들 썰어 말려 차로 만들어 마시지만 생으로 나박나박 썰어 갖은 양념을 해서 먹음직스러운 겉절이로 화려하게 변신한 돼지감자의 맛은 그 이름을 고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황제감자’ 쯤으로.
예상했던 대로였다. 상에 오른 모든 찬들은 멸치 빼고 전부 집주인 부부가 비닐 멀칭도 않고 퇴비나 조금 해서 농사지은 것들로 만든 것이다. 100여 평 산비탈을 갈아 일군 밭에 쌈채소 10여 종과 감자, 고구마, 고추, 배추, 무 등 을 심어 여섯 식구가 먹고 남은 것을 2012년부터 시작한 가족회원제 꾸러미로 활용하여 가계소득에 보태고 있다고 한다. 모두 18가구에 격주로 공급한다고 한다. 벼농사와 밭농사 외에도 수탉 다섯 마리와 암탉 열 마리 해서 모두 열다섯 마리 닭들도 사료를 거의 안 먹이고 유기농으로 기르고 있다. 겨울 동안 알을 안 낳다가 날이 따뜻해지면서 알을 낳기 시작했다며 아이들에게 간식으로 쪄주기도 하고 반찬도 해먹는다고 한다.
1일 2식을 하는 이 댁은 7마지기 논에 친환경농법으로 벼농사를 지어 그 중 약 2마지기를 주식으로 식구들이 먹는다. 완전 현미로 압력솥에 보통 밥보다는 훨씬 뜸을 덜 들여 먹는다는 이필재선생 댁의 현미밥 뜸들이기 법칙은 유독 엄격해 보였다. 화식과 생식의 중간 정도로 해야 현미가 간직한 영양도 살리는 한편, 꼭꼭 씹어 먹음으로써 소화 흡수에도 좋다는 현미밥 철학이 밥 먹는 내내 ‘밥상머리 교육’으로 이어졌다. 진기 가득한 영양분을 다 깎아버리고 허기만 남은 흰쌀밥을 먹는 사람들에 대해 거의 경멸에 가까운 어조로 성토하였다.
이필재선생의 밥상 강의는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된 오늘날의 밥 문화와 함께 결혼식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고 거침없이 덤으로 역설하였다. 많은 이들이 전통혼례라 알고 있는 사모관대, 원삼, 족도리를 걸친 혼례 복식이 원래 원나라 것이었다며 우리 민족의 순 진짜 전통 혼례는 그런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기자도 존경하는 스승님으로부터 그런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초례(醮禮), 또는 전안례(奠雁禮)라고 부르는 멋과 철학이 깃든 우리나라 고유 혼인 예식의 원형을 복원해 오늘 날 상업화 된 국적 불명의 혼례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말씀을.
이필재선생의 집에서 한 끼 밥을 먹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하고 먹지 않으면 먹은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올바른 먹거리만 먹고 사니 당연히 올바른 생각만 하는 것이며, 올바른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바른생활 가족, 이필재선생네 집 여섯 식구 모두 순 진짜 자연 건강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주 가끔씩 한창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멸치나 생선 정도나 좀 사기 위해 장에 가는 것 말고 그 흔한 과자 한 번 사 준 적이 없다고 하는데 가끔 놀러오는 손님들이 온갖 상업시설과 문화시설로부터 단절돼 산 속에서 사는 아이들이 ‘안 됐다’며 마트 쇼핑백 가득 과자를 담아 들고 오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다며 ‘일부 몰지각한’ 도시인의 값싼 인정을 오히려 딱하게 여겼다.

특강을 곁들인 식사를 마친 뒤, 디저트로 나온 아삭아삭하고 시원한 야콘(물론 직접 재배한) 깎은 것을 씹어 먹으며 ‘건강보험료는 내느냐’고 다소 엉뚱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이렇게 바른 먹거리만 먹고 사니 병원 갈 일 있을까 싶은 생각에 갑자기 궁금해서이다. 제도권 교육을 거부해 가정과 자연에서 아이들이 배우도록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 가정이니만큼 제도권 의료 또한 거부하여 보험료를 납부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여겨서 이기도 하다.
최근 수 년 간 여섯 가족의 병원 방문 사례는 충치가 있는 막내의 치과 진료를 위한 것과 가벼운 중이염 등 치료를 했던 것 외에 병원 문턱을 들어선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보험료를 낸다니 그 돈이 아까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 각광 받고 있는 전국의 각급 귀농교육기관들은 거개가 ‘자립하는 삶과 생태적 가치’ 지향에 교육이념을 두고 있다. 무엇 때문에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혹은 진학을 포기하고, 혹은 가족과 떨어져서까지 귀농을 선택하는가, 이 시대에 귀농은 무슨 의미인가!
이필재선생과 정유생님 가족의 삶이 그 물음에 고스란히 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병폐가 말기 암 세포처럼 가득 찬 현대사회, 동학의 2세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께서도 일찍이 ‘괴질운수’라 일컬은 이 시대의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역천(逆天)이 아닌 순천(順天)의 삶을 선택해 지금 당장 뒷걸음질 치라 몰아붙이는 또 한 명의 장수에 귀농한 이가 있으니, 바로 농사지으며 ‘글 쓰는 농부’인 전희식선생이다. 그러고 보니 전희식선생과 이필재선생은 서로 호형호제 하며 지내는 귀농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전희식선생이 세상을 향해 그토록 뒷걸음질 치라 몰아붙이는 이유가 그가 작년 가을 새로 낸 ‘아름다운 후퇴(도서출판 자리)’ 책에 오롯이 담겨있다. ‘아름다운 후퇴’라니, 제목이 다소 관념적이다. 그러나 장수귀농인 이필재선생네 밥과 삶이 그를 실제화해 주고 있다고 본다. 이필재선생네 흙집 토벽에 걸린 일완지식 함천지인(一碗之食含天地人)이라는 해월선생의 법설 또한 힌트가 되어 줄 것이라 본다.
삶을, 세상을 생각게 한 위대한 밥상이었다. 우주가 뱃속에 들어 찬 양, 아직도 가없이 부르다.

글/ 김혜정 (편집위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이 글은 장수귀농귀촌인협의회 기관지 '뜬봉샘' 4월호에 실리는 기획특집 기사입니다.
첫댓글 새로 복사해서 단락구분 표시줄 지우고 다시 올렸습니다.
빈돌님과 명철님 댓글이 새로 달렸던데, 원글을 삭제한 점 양해해 주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