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님 /김미숙
오늘도 어머니는 흐릿한 시력으로 이불호청을 꿰매며 외할머님에 대한 그리움에 젖는다. 외할머님이 생각날 때마다 내게 들려주시는 가슴 아린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어머니가 손질하시는 보송보송한 이불 위에 드러누워 어렸을 때를 떠올린다. 어머니는 한 땀 한 땀 바느질 하듯 옛 이야기를 차분하게 풀어놓는다.
"우리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처럼 진갑에 돌아가셨지. 네 외할머니는 슬하에 열한 명의 자녀를 두었어. 나는 우리 아버지가 환갑 때 막내로 태어났지. 아버지는 씨를 뿌릴 줄만 알았지 거두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 내가 태어나던 날도 우리 아버지는 노름을 하다가 돌아와 돈을 내놓으라며 엄마를 구타했고, 막 태어나 핏덩이인 나를 딸이라는 이유로 "저것을 당장 내다 버려" 하고 고함을 치셨지.
그런 아버지 때문에 엄마는 늘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어. 우리 아버지는 노름꾼이었어. 죽이 척척 맞는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그와 더불어 늘 노름에 빠져 살았지. 쌀독에 쌀 한 톨이 없어도 천하태평이었고 노름 밖에 몰랐어. 독수리 날리듯 애써 키우던 자식이 넷이나 죽어도 나몰라 했지.
한 가정의 가장이길 포기한 아버지를 마냥 믿고 기다릴 수 없었던 엄마는 옷감에 물들이는 물감을 팔러 다니셨지. 젊은 여인의 몸으로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며 한 푼이라도 벌기위해 갖은 고초를 겪었어. 어느 때는 사나운 개가 있어서 무서워 들어가지도 못했고, 또 어느 곳은 젊은 청년들이 우글거려 부끄러워 발길을 돌려야만 했어.
우리 엄마는 참으로 여성스러웠고 만화방초(萬花芳草)보다 고왔어. 그런 엄마가 결국 물감장사를 그만두고 식당을 차리게 되었지. 엄마는 억척스럽게 일을 해서 우리 11남매를 키우며 공부를 가르쳤어. 뿐만 아니라 전처에게서 태어난 두 딸까지 거두어 시집을 보냈어. 두 딸 중에 작은 딸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맏딸은 대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암암리에 들었어.
곱디고운 우리 엄마가 후처로 들어오게 된 것은 먼 친척 되는 당숙어른 때문이었어. 당숙어른은 우리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어. 어느 날, 당숙 어른은 우리 외삼촌에게 "자네 동생에게 좋은 혼처가 있다네" 하면서 소개를 했지.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 아버지가 이미 상처(喪妻)한 사람이며 어린 두 딸이 있다는 것을 비밀에 붙였어.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엄마는 오라버니의 말만 믿고 호랑이굴로 시집을 갔던 거야.
나중에서야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물은 건너갔고 돌이킬 수 없었어.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외가댁 식구들은 그 후로 발걸음을 끊어 버렸어. 해서 우리 엄마는 그토록 굶주리면서도 친정에 가서 쌀 한 바가지도 가져올 수 없었어. 오로지 혼자 힘으로 일어서야만 했지. 엄마의 암담한 삶의 여정이 지팡이를 잃은 장님에 비할까, 아니면 등대를 잃고 밤바다를 헤매는 어선(漁船)에 견줄까. 그러나 엄마는 아버지를 원망하기보다는 우선 살아가는 일이 더 시급했어. 그래서 금이야 옥이야 키운 자식을 여럿 잃고도 슬퍼할 겨를이 없었던 거야.
삶이 엄마를 무참하게 학대하고 핍박을 하여도 꿋꿋하게 견디면서 세상을 살았던 우리 엄마였어. 그래서일까, 우리 엄마는 짧지 않은 질곡의 세월을 처연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몰라. 끝내 중풍으로 자리에 누우신 가엾은 우리 엄마, 내가 엄마의 거칠고 깡마른 수수깡 같은 손을 단 한번만이라도 잡아드릴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겠어. 나는 엄마 앞에서 나의 삶이 나를 속였다고 투정부리며 고달파 못 살겠다는 말조차 꺼낼 용기가 없어. 우리 엄마의 지난한 삶에 비하면 내 삶은 용상(龍床)이라 할 수 있지. 연약한 여인으로서 자식을 잃어보지 않고, 배고픔을 겪어보지 않고, 후처의 자리에 앉아보지 않고서 감히 어떻게 내 삶이 고통스럽다고 운운할 수 있겠어.
여인에게 있어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은 지아비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고통일 것이야. 지아비 하나만을 믿고 인생을 송두리째 건 우리 엄마의 삶이란 그저 매미의 허물과 같은 빈 껍데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어. 지아비의 사랑을 얻지 못한 여인의 자식을 향한 연민은 또 얼마나 깊었을까. 그런데 기대했던 자식마저도 하나 둘 어미의 곁을 떠나갔을 때 그 진저리 치는 삶을 얼마나 벗어나고 싶었을까. 우리 엄마는 차라리 무의식 상태로 있는 것이 더 평온했을지도 몰라.
돌이켜보면 우리 아버지의 전처가 돌연 죽지만 않았어도 우리 엄마가 후처로 시집을 오는 불행한 업은 없었을 꺼야. 아버지 역시 조강지처가 비명에 죽지 않았다면 놀음에 빠져서 소중한 삶을 허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또 가산을 거덜 내며 사랑스러운 아내를 구박하는 일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무이, 조청이 먹고 싶어요."
그 여자는, 그러니까 큰 엄마는 왜 하필 그날 조청(造淸)을 먹고 싶어 했는지 모를 일이야. 큰엄마의 친정어머니는 그녀에게 조청을 해다 받쳐 평생 동안 가슴에 씻지 못할 회한을 남기고 말았던 거야. 부모 마음은 그런가봐. 자식이 먹고 싶다면 칼바람과 폭설 속을 달려서라도 구해다 주려고 하거든. 그 사랑이 지나쳐서 오히려 해가 된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어. 다만, 큰엄마의 어머니가 구해다 준 그 조청이 화근이 되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귀한 딸자식이 온방을 헤집고 구르다 비누거품을 쏟으며 죽게 만든 결과를 낳고 말았던 거야. 과유불급이라고 했잖아. 조청을 지나치게 많이 퍼먹은 큰엄마는 그렇게 속이 달여 이승의 끈을 놓고 말았어."
나는 외할머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갓 돌을 지났을 때 외할머님께서 돌아가셨다. 중풍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어린 나를 안아준 적이 있다고 한다. 한데 내가 너무 어렸을 때여서 그런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세월은 유수라, 어느새 어머니도 할머니처럼 진갑이 되셨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하는 이 포근함을 언제까지 누릴 수 있으랴. 큰바늘(大針)을 머리에 대고 박박 문지르시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괜스레 눈물이 나려고 한다. 어머니께서 오래도록 내 곁에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다만, 딸이 없는 나로서는 ‘외할머니’라는 호칭은 영영 물 건너 간 것이나 다름없다. ★
첫댓글 팔음선배, 옛날 나의 외할머니가 생각나네요. "아이고 우리 강생이 왔나" 하시던 할머니, 감추어 두었던 먹거리를 주시며 좋아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