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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인 호시노 도모유키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국가를 흔들리게 하는 규모의 소설을 쓴다.”고 극찬한 작가이다.
이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은 그의 세계가 ‘국가’에 머물지 않고 ‘지구’를 흔들고 ‘우주’로 뻗어나가는 인간 상상력의 한계 너머를 보여준다. 「지구가 되고 싶었던 남자」, 「스킨 플랜트」에는 각각 홍수 뒤 반지하 방에 쌓인 흙을 퍼내다 결국은 자기 자신이 흙을 낳고 그 흙과 한 몸이 되는 남성, 식물의 열매로 태어나 자신의 씨앗(문자 그대로의 씨앗)을 우주에 뿌리기 위해 우주로 간 남성이 등장한다. 인간 자신을 화폐화하여 노동으로 빚을 갚게 하는 기묘한 조직의 이야기 「인간은행」, 독보적인 그로테스크함의 절정을 보여주는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작가 특유의 유쾌함이 돋보이는 「치노」, 살아남은 것이 미안하고 슬퍼지던 우리의 사회적 경험을 떠오르게 하는 「눈알 물고기」, 인간의 집단적 광기를 그리는 한편, 그 광기를 되돌리는 힘 역시 인간에게 있음을 시사하는 「핑크」 등 작가의 치밀함과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주는 문제작들만 골랐다.
호시노 도모유키는 일본의 정치와 사회문제를 작품으로 비판하는 몇 안 되는 작가다. 이 책에 실린 단편에도 구석구석 그런 사회 현실의 비판의식이 엿보인다. 이 작품집에는 많은 질문들이 담겨 있지만 작가가 작품을 통해 풀어내고자 하는 것은 ‘인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하는 궁극의 질문이다.
현재를 바꿀 수는 없어도 10년 후의 미래라면 바꿀 수 있다. 작가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 그런 믿음의 씨앗을 남기고 싶다.”고 말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려는 『언어』의 모색
초단편소설 「읽지 마」는 1인칭 화자가 이야기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끝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말하는 위트 넘치는 작품이다. 「읽지 마」는 마치 롤랑 바르트가 말한 ‘작가의 죽음’을 영화화하는 모노드라마의 시나리오 같다.
「지구가 되고 싶었던 남자」의 모리세는 가족과도 동료와도 철저히 분리되어 고독하게 살아간다. 그는 누군가를 질타함으로써 소속집단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는 존재들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고독을 선택한 인물이다. 온 마을을 덮었던 홍수가 끝나자 모리세는 반지하 방의 침낭 속에서 매일 혼자 먹고 자고 깬다. 어느 순간 벌레들과 친숙해지고 그 자신이 지구가 되어 간다. 침낭이 여왕개미의 배를 닮았다고 생각하자, 항문 대신 열린 그의 산도에서 개미, 풍뎅이, 달팽이, 질경이, 괭이밥 같은 벌레와 식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모리세는 흙과 맨틀과 핵을 차례로 삼키며 지구 자체가 된다. 가는 곳마다 강이 범람하여 누군가의 지하 방을 침수시키는데 그 물은 이미 모리세 자신의 체액이었다. 말 그대로 ‘지구를 흔드는 규모’의 소설이며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의 지구와 인간의 관계를 다이내믹하게 그려낸 은유의 대서사다.
「스킨 플랜트」에서는 이 규모가 우주로 확대되어 나간다. 「스킨 플랜트」의 화자는 ‘나ぼく(남성 1인칭)’다. 타투로부터 시작된 진짜 식물 피부 이식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의 머리에 꽃을 피울 수 있게 되자, 현생인류는 꽃을 피우는 기쁨을 위해 생식기능을 포기하게 된다. 성범죄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인간의 일상이 얼마나 성에 관련된 범죄와 폭력, 짓궂은 언행으로 이루어졌는지 명백히 드러난다. 성과 인간의 욕망에 대한 호시노 자신의 문제의식이 보이는 부분이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부조리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 것 같던 지구에 놀랍게도 ‘플라워즈’라는 존재들이 태어난다. 인간의 머리에서 자라난 꽃에서 떨어진 씨앗이 다시 싹을 틔우면 거기에 사람의 모습을 한 열매가 열렸다. 신인류는 더 이상 섹스에 의해 태어나지 않고 식물의 열매로 열리게 된다. 식물 인류라고 해도 좋을 신인류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화자인 ‘나’는 우주 정거장으로 보내져 달 표면에 씨를 뿌릴 준비를 한다. ‘나’는 인간이 결국 이동하는 초목의 형태로 진화하여 지구를 채울 것이라고 예견한다.
「스킨 플랜트」는 일종의 SF소설이다. 인류의 소멸과 신인류의 탄생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을 연상시킨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는 멸종한 줄 알았던 인류의 아기가 탄생하는 장면에서 그 울음소리 하나로 전쟁을 종식시키는 메시아적 탄생을 암시한다. 하지만 「스킨 플랜트」의 ‘플라워즈’들은 평화를 지향하는 다수의 신인류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메시아적 영웅서사를 넘어선다. 인류는 반드시 현생인류여야만 한다는 당위적 패러다임 역시 해체된다.
「지구가 되고 싶었던 남자」와 「스킨 플랜트」는 모두 남자 주인공들이 섹스에 의하지 않고 ‘낳는 성性’으로 등장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남성이 ‘낳는 성’으로 등장하는 또 다른 단편 「쿠엘보」에서는 주인공 쿠엘보 노인이 까마귀 알을 낳는다. 쿠엘보는 인간 세상에 염증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는 인간이 자유의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나와바리’의 주인인 까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며, 까마귀 덕분에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조금 이상한 노인이다. 그는 까마귀에게 감정 이입한 나머지 스스로 까마귀가 되어 까마귀 알을 낳게 된다.
호시노는 자주 데칼코마니와 같은 미러링을 통하여 인류의 존재 방식을 묻는다. 그 미러링은 때로 공간의 반전, 시간의 반전을 의미하기도 하고, 젠더, 빈부, 내셔널리즘의 반전을 가져오기도 한다. 젠더, 빈부, 내셔널리즘에 대한 강력한 문제의식은 호시노의 주요 이슈인 동시에 현생인류의 존재론적 화두이다. ‘낳는 성’으로서의 남성의 등장도 그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선배 전설」에서는 빈부의 위치가 뒤집힌다. 집 없는 사람, 집 없이 살기를 자처한 사람이 사회의 다수이고, 집을 가진 자가 소수인 세상을 그림으로써 갖지 못한 자에 대한 멸시의 시선을 그대로 가진 자에게 돌려주기도 한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와 「인간은행」은 무엇이 인간을 비인간화하는지를 궁극적으로 파헤쳐 들어간 작품들이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에는 단돈 10만 원에 노인을 맡아준다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보호시설 광고문에 현혹되어 늙은 아버지를 넘겨준 도라스케가 등장한다. 자유기고가인 도라스케는 특종 취재를 위해 스스로 보호시설로 들어가면서 그 자신도 시설의 노예로 전락하며 사라진 사람들이 ‘에코화’되어 가축의 사료 통조림이 된다는 걸 알게 된다.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어떻게 알려지지 않을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은 ‘사라진 노인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은 녀석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부조리한 것을 파헤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실체를 알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러한 외면이 소외를 만든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간은행」은 노숙자나 삶이 궁지에 몰린 이들을 ‘주워다’ 빚을 안기고, 인간 자신을 화폐화하여 노동으로 빚을 갚게 하는 기묘한 조직의 이야기다. 보통의 살과 영혼을 지닌 인간이 화폐가 된다는 발상은 대단히 충격적이다. 인간은 자본주의 사회의 노예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화폐 자체가 아니었던가 하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실체에 대한 우리의 허무는 당장에 세상을 바꿀 수 없지만, 그 허무의 심연은 눈물 쏟아내며 하소연할 자리를 마련해 준다. 「인간은행」은 호시노의 치밀함과 궁극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사람은 자신의 한계와 사회적 터부를 넘어 상상의 날개를 펴지만, 흔히 그 상상조차 사회적 규범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그것은 ‘끝까지 응시하기를 두려워함’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호시노는 터부와 금기를 넘어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상상 너머에 기다리는 어둠은 허무 자체가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한없이 부드러운 연민과 위로다. 호시노의 힘은 그 부드러운 어둠에 있다고 언제나 생각한다. 의식의 바닥을 외면하지 않는 그 상상력에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작가적 용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호시노의 문학이 가지는 또 하나의 힘은 ‘유쾌력’이다. 내셔널리티를 거부하는 한 청년이 게릴라가 되기 위해 멕시코를 여행하는 이야기 「치노」는 그 유쾌력을 십분 발휘한 작품이다. 호시노 특유의 경쾌한 필치로 내셔널리티를 성찰하고 있다. 일본의 지구 반대편 공간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통해 내셔널리티를 앞세워 표현되는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빈곤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멕시코인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작가 자신의 남미 체재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작품은 ‘멕시코인이 되어도 좋다’는 자유 의지마저도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우연히 가지고 태어난 내셔널리티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성찰한다. 이주를 꿈꾸는 자유의지조차도 사실은 ‘엔’으로 대표되는 특권이었던 것이다. 지구 규모에서 빈곤의 문제와 내셔널리티의 문제가 별개일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인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이것이 호시노 도모유키가 작품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질문이 아닌가 한다.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쇼크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인간이 얼마나 배타적이 되기 쉬운 존재인가를 확인했다. 이것은 선악의 문제라기보다는 실존의 문제였다. 모두가 함께하는 기도는 커다란 힘을 가진 주술이 되어 우리를 구원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빠뜨리기도 한다. 인간은 종종 육체적이든 정치적이든 자신의 생존을 위해 누군가를 배척함으로써 안도하는 존재이다. 스스로 욕망하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내 대부분의 욕망과 생각이 외부에서 비롯됨을 깨닫곤 한다.
“국가를 흔들리게 하는 규모의 소설을 쓴다” -오에 겐자부로
호시노 도모유키는 일본인으로 드물게 영어와 스페인어에 능숙한 작가이다. 탁월한 언어 감각을 바탕으로 창조한 호시노의 소설은 일본의 정서적, 정신적 자폐증을 신랄하게 파헤친다. 문학평론가 모리 다쓰야는 호시노의 소설이 [위화감]이라는 감각에서 시작했다고 보면서 [이단의 위치에서 사회를 조망]하는 작가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현재 일본 작가 중에서 드물게 전체소설(全體小說)을 몽상하는 작가다. [전체]나 [체계]를 지향하는 것이 어렵게 된 이 시대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체나 체계를 상기시키는 문제적인 작품을 펴내고 있다. 199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는 자신의 작가 생활 50년을 기념해 2006년에 ‘오에 겐자부로상’을 만들었다. 셀 수 없이 많이 출간되는 책들 가운데, 매년 단 한 권을 직접 선정해 ‘문학적 작품’으로서의 가능성과 성과를 인정하는데 많은 작가 가운데서 호시노를 “국가를 흔들리게 하는 규모의 소설을 쓴다.”고 극찬하면서 자신의 문학적 후계자로 지목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호시노 도모유키는 점점 사라져가는 소설적 상상력과 문학성을 모두 갖춘, 현대 일본문학이 낳은 신선한 이정표이다.
『인간은행』을 번역한 김석희 경희대 교수는 “멜랑콜리에 호소하지 않고, 자극을 연료로 하지 않으면서 때로는 긴 호흡으로, 때로는 긴박한 호흡으로 인간의 내면을 두드리며 설렘 뒤에 성찰을 주는 작가다. 남녀 간의 하이어라키, 내셔널리티에 대한 거부, 인간과 식물, 쾌락과 윤리, 거짓과 진실의 경계, 빈부, 안과 밖……, 끊임없이 전복시키고 역전시키며 반전을 꾀한다.”고 말한다. 또한 “앞으로 호시노 도모유키가 한국 사회에서 새롭게 발굴되고 보다 널리 알려지기를 기대한다.”며 “권력을 대하는 그의 자세와 시선, 약자에 대한 태도, 인류사에 대한 통찰 등을 지켜봐 왔다. 그의 작품 속에는 일본뿐 아니라 한국 사회와 동아시아 전체가 귀 기울일 만한 메시지가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이 단편집이 한국 독자에게 호시노가 누구인가를 가까이 전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쁘겠다.”고 한국 독자와의 교감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호시노 도모유키는 1965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일본으로 귀국, 도쿄 인근을 옮겨 다니며 살고 있다. 대학 졸업 후에는 2년 6개월간 신문사에서 기자로 근무했고, 1990년대 초 멕시코로 유학을 떠났다. 1995년에 귀국한 뒤에는 자막 번역가 등으로 활동하다가 1997년에 『마지막 한숨』으로 미시마 유키오상, 『판타지스타』로 노마문예 신인상, 『오레오레』로 오에 겐자부로상, 『밤은 끝나지 않는다』로 요미우리문학상, 『호노오焔』로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을 수상했다. 최신작으로 『주문呪文』, 『어수룩한 사람騙され屋さん』 등이 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난초로 태어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