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성들은 가사를 주로 담당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여성들의 일이 반드시 가사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여성들은 육아와 가사를 책임지는 것은 물론 그 외에 틈틈이 직조를 하여 의생활을 자급자족하고 세금을 충당하였다. 조선시대 여성은 생산 활동이나 일상생활을 살펴볼 때 신분에 따라 그 양상이 달랐다.
1. 조선시대 신분과 여성생활
1) 왕실 여성 : 왕비와 후궁
○ 왕비 : 왕비란 왕의 정처이며, 국모를 지칭하는 호칭. 중궁, 모비(某妃). 모두 전(殿), 궁이라 칭함. 빈은 정1품. 세자의 정처인 왕세자빈과 왕의 후궁.
* 비빈의 수 : 고려는 빈의 수가 일정치 않고 적첩의 구별도 없어 여러 비는 동등한 신분적 위치에 있었던 것. 그러나 조선 건국 후 처첩, 적서의 구별을 분명히 할 것이 요구됨. 1비 이외에는 모두 후궁.
* 간택의(揀擇儀) : 비나 후궁을 간택할 때는 전국의 처녀에게 금혼령을 내림. 세종은 15세 이상을 가혼 연령으로 삼았고 세조는 연령의 제한을 없앴지만, 금혼령 대상 연령은 대개 16세 이하에서 8세까지. 비, 후궁을 간택하게 되면 조정에서는 가례색을 설치하고 전국에 연령해당자에게 금혼령을 내림. 간택 대상은 대개는 사대부 규수.
세자빈의 간택조건은 가계, 부덕, 자색(미모) 등 3가지, 자색에 치우치지 않기 위한 간택방법으로 처녀의 집을 순방하여 택하고 다시 이들을 창덕궁에 모아 선발함. 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으로 이루어짐.
동궁이 세자로 책봉되면 세자빈으로, 세자가 즉위하면 비로 승격됨. 또 비나 세자빈 자리가 비었을 경우, 재간택하는 것이 원칙이나 경우에 따라 후궁 중에서 승격시켜 왕비나 세자빈으로 삼음.(숙종대 장희빈 사사 이후는 불허) 이씨는 본관을 불문하고 제외됨. 후궁의 경우도 간택을 통해 들어오는 경우는 이씨가 없음.
* 교육 : 최종 간택에서 낙점받은 처녀는 그날부터 별궁에 들어가 일정기간 궁중 예절과 왕비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음. 예의범절교육을 마치면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고 왕비나 세자빈이 됨.
* 폐비 : 조선초 7대 동안 4,5차례 폐비문제가 대두되었고 3명의 세자빈이 폐출됨. 원인은 불의, 부덕으로 가법을 더럽힌 경우. 정치적 사건으로 왕 또는 세자가 폐위되었을 때 따라서 폐비 또는 폐빈이 됨.
* 은전(恩典) : 비의 경우 고향을 승격시키고, 향리 수를 증가시켜 줌. 후궁의 경우는 해당되지 않음. 후궁은 노비 전결 등을 급여함. 왕비의 아버지는 부원군에, 어머니는 부부인에 봉하고, 각종 물품을 내려주고 죽었을 경우 조의를 위한 장례용 물품 등을 내려줌.
왕비의 족친은 아주 무능한 자가 아니면 다 관작을 받음. 후궁의 근친에게는 1,2품에 해당하는 고관직을 부여하기도 함.
* 생활 : 절검을 미덕으로 삼아 비빈들은 검소한 의식생활을 추구. 부덕이란 미명하에 정신생활의 제약을 받음. 왕비는 아들을 낳는 것과 상관없이 죽어서는 종묘에 신위가 안치됨.
○ 왕비가 하는 일은 : ․ 왕비는 국모로서의 역할, 내․외명부를 거느림. 내명부에는 왕의 후궁과 상궁, 궁녀들이 속해 있었고, 외명부에는 종실의 처, 왕과 세자의 자녀, 문무반의 부인들이 속해 있었음. 왕비는 원칙적으로 무품계로, 품계를 초월한 존재.
․ 양잠과 방직을 손수함. 친농과 같이 왕비가 직조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일반 부녀자들의 양잠의식을 고취시키고자 친잠(親蠶)을 강조함. 이때 친잠례는 부덕(婦德)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강조해 이념적으로도 양잠의 활성화를 기대함.
친잠 때에는 중궁이 왕세자빈과 내외명부를 모두 인솔하여 채상단 밖에서 의식을 거행함 먼저 채상 . 즉 뽕나무 잎을 따는 일이 있고, 그 다음은 따놓은 뽕잎을 모아 광주리에 담는 행위를 한다. 여기서 왕비가 실제로 노동을 하느냐 않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왕비 자신이 충실하게 이러한 의식을 수행한다는 사실에서 직조노동의 중요성, 그 보급 노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
․ 여가를 이용하여 저술함. 소혜왕후 한씨 내훈 , 혜경궁 한씨 한중록 등.
○ 후궁이 되는 방법 :
1. 왕의 승은을 입는 것. 2. 왕비처럼 간택을 거쳐 후궁이 되는 경우. 2-3명의 후궁을 정식 간택을 통해 들였다. 후궁은 정1품 빈, 종1품 귀인, 정2품 소의, 종2품 숙의, 정3품 소용, 종3품 숙용, 정4품 소원, 종4품 숙원으로 나누어짐. 후궁 소생이 세자가 되는 경우 특별한 대우를 받음. 정1품 빈의 품계와 궁호를 특별히 하사받았다. -> 궁정동 칠궁 : 원종, 경종, 진종, 장조, 영조, 순조, 영친왕의 어머니
표 1 조선시대 후궁의 품계
2) 양반 여성
양반여성은 남편의 직위에 따라 외명부 직첩을 받음. 관료부인의 산직체계인 외명부에는 당상관 부인은 ‘부인(夫人)’이라는 말이 붙고, 당하관 부인에게는 ‘유인(孺人)’으로부터 ‘숙인(淑人)’까지 ‘인’자가 뒤에 붙음.
표 2 조선시대 외명부
○ 양반 여성의 최대 임무 : 제사 모시기(봉제사)와 손님접대(접빈객)
* 봉제사 : 조선의 제사 범위는 본래 『경국대전』에 「문무관 6품 이상은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의 3대를 제사하고 7품 이하는 2대를 제사하며 서인은 단지 죽은 부모만을 제사한다.」고 되어 있음. 대부분의 양반 집안에서는 4대 봉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 조선 후기에는 서민들의 경우에도 4대 봉사를 하기에 이름. 조선 중 ․ 후기 이후가 되면 윤회나 외손봉사가 줄어들고 여성들은 시집의 제사를 대부분 4대까지 담당하게 됨. 다례와 시제를 포함하면 많은 경우 10번 이상의 제사를 지내야 함.
* 접빈객 : 조선 사회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곧 집안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 양반 사회에 있어서 ‘접빈객’은 필수불가결한 공조기능. 여성들이 접빈객을 담당한 것은 단순히 집안일의 연장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사회적인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유지시키는 핵심적인 바탕이 됨.
* 가정 내 경제 관리 : 여성들의 가정 경제 관리는 크게 토지 관리와 노비 관리.집안 내에서 남자가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경우에는 남자가 가정경제를 관리하는 경우도 없지 않음. 곳간 열쇠를 여성이 가짐.
3) 양인여성과 노비여성의 일
○ 농업 분야의 여성 노동 : 실학자 유수원은 『우서』에서 「농가의 부녀는 농사일하고 식사를 마련하느라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쁜데, 또 스스로 옷까지 짜서 입어야 하니 그 옷 짜는 것이 막히고 잘 나가지 못한다.」고 함. 조선시대 여성들이 농사나 가사 일을 하고 길쌈을 함.
가족노동에서 노동력을 제공해야 할 인원이 대략 4~5명 선으로 본다면, 여자들의 노동력이 투입되지 않고서는 농사를 짓기 어려웠을 것. 이앙법 등 생산기술이 발달하고 농업형태가 집약농업으로 바뀌는 조선후기가 되면, 김매기의 감소 등으로 남성노동중심이 되며 여성노동의 몫은 줄어들게 됨.
밭농사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참여율이 더 높았고, 노동력 투입에서도 일시에 많은 노동력이 요구됨. 조선 초기 인정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는 일반농민의 경우 당연히 남녀의 구분 없이 동시에 보리 수확에 참여했을 것. 『농사직설』에는 게 젓 담구기, 식품저장, 장담구기 등 식생활의 가사일로서 여성들이 담당했던 일들도 수록되어 있음.
○ 직조(길쌈) 분야의 여성 노동 : 길쌈 즉 직조는 전근대 사회생활에서 농업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생산 활동. 조선시대에는 왕이 친농을 하는데 대하여 왕비가 친잠을 행함. 포는 화폐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욱 중요한 것. 「남자는 밭 갈고 여자가 길쌈하는 것은 천하의 대업이다. 밭 갈지 않고 어찌 먹으며 양잠하지 않고 어찌 옷을 입을 수 있겠는가」-> 견우와 직녀 당시 성역할 분담 형태를 대변해 줌. 길쌈은 신분의 차이에 구애됨이 없이 모든 여성이 해야 하는 일. 대체로 한 포를 짜는데 40시간이 걸림. 가사노동을 제외하고 하루에 2-3시간 잡는다면 15일 정도 걸림. 목화는 재배부터 수확까지 대체로 여성 노동의 비중이 큰 농사일. 누에치기에서부터 양잠까지도 여성의 일.
조선시대 사람들은 의와 식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필수품이라는 공통된 인식. ‘권농상(勸農桑)’을 수령 7사의 최우선적인 항목으로 하는가 하면, 국가에서 양잠을 장려하면서 일반적 권장책 외에 보다 구체적인 양잠활성화 방안을 강구하기도 함.
견․면 이외에 사회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 직물은 麻, 즉 베로 화폐로 유통되어 쌀과 함께 인간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생활용품. 견직물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생산이 적극 권장된 직물로서, 후비의 친잠례가 대표적인 여성 직조노동의 실례. 노비들은 신공으로 면주(綿紬)를 납부하거나 아니면 잠실의 잠모로서 역할을 수행하든 양잠에 관여함.
일반인들은 3월부터 실질적으로 양잠을 수행함. 누에의 종을 선택하는 것, 개미 누에를 섬세하게 보살피는 일, 뽕잎 채취, 손질, 먹이주기, 실켜기 등이 모두 여자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양잠은 스스로 갖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가사나 육아, 농사를 하는 틈에 수행해야 했으며, 양잠이 시기를 임의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 로 양잠의 어려움이 있었다. 양잠은 면이나 베와 달리 방적까지가 여성의 몫이며 방직으로 이어지지는 않음. 일반민 여성들의 직조노동 즉 길쌈은 면이나 베를 짜는 일이 대부분이며, 견 즉 비단직조는 일반 여성의 길쌈에 포함되지 않음. 견직에서 여성노동은 양잠에 한정되며 견직직조는 중앙의 견공장에서 이루어짐.
양잠에 의해 생산된 실을 견사(繭絲)라고 하는데, 일반민들의 양잠활동은 이 견사를 생산하여 진상하는 데에 그침. 그런데 뽕잎 채취와 같은 단순노동에는 남자들도 참여하였지만 미미한 정도. 견사를 생산하는 일도 섬세함이나 근면성 외에 힘든 노동을 수반하였으므로 여자들에게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면직에서도 예외는 아님. 다른 농작물에 비해 유난히 김매기의 기간이 길고 횟수가 많았고, 목화 따는 일이나 실잣기 등의 일이 낙후성으로 인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함.
당시 부녀자들은 농업노동과 가사노동을 하고 남은 시간에 직물생산노동을 행하였으므로 생산하는 직물의 양이 결코 많은 것은 아니었으며, 주로 저녁식사 이후의 시간을 이용.
또한 세금을 내기 위해 급하게 길쌈을 함. 남자들의 군포는 2필, 노비에게 책정된 신공은 1필. 국가는 이들 포에 등급을 매기고 화폐로 유통시킴. 조선 시대 유통되던 세금과 화폐의 대부분을 여자들이 생산해냈던 것. 여성 직조노동의 국가적인 기여도는 매우 큼.
4) 경제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의 등장
조선 후기에 이르러 농업은 물론 상업과 공업에서도 발전이 이루어짐. 여성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하거나 경제력을 향상시켜 나감. 양인 여성들은 시전에서 직접 점포를 운영하기도 함. 여성이 운영한 점포를 ‘여인전’이라고 함. 18세기 말 정조의 문집인 홍제전서 에 의하면 120여개의 시전 가운데 여인전은 18개가 있었다고 함.
여인전 : 상우전, 하우전, 전우전, 송현우전, 정릉우전, 문외우전(우전은 과일 파는 가게) 족두리, 백당전(엿, 사탕) 채소전, 내분전(종로 거리에 있었음) 외분전(서소문 밖에)
-분전은 연지와 분. 침자전(반질 도구) 문내좌반전(간한 생선이나 젓같은 반찬류) 떡
거상 김만덕의 경우 : 10세 때 고아, 처음에는 기생집 의탁, 20세 넘자 양인 여성임을 관에 호소. 기생에서 벗어남. 이후 독신으로 지내면서 장사에 남다른 재주가 있음. 십수년에 만에 재산을 꽤 모음.
1792년(정조 16)부터 1795년(정조19) 사이에 제주에는 흉년이 들어 식량 사정이 매우 좋지 못함. 만덕은 재산을 빈민 구조를 위해 희사함. 정조는 특별히 만덕을 내의원 의녀로 임명하여 서울로 오게 함. 만덕의 나이 57세 때. 왕비에게 인사, 금강산 유람하고 옴.
양반 여성들도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서 경제활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함.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 여성들은 주로 삯바느질을 하여 생계를 꾸려감. - 허생의 처 통천의 김씨의 경우 여자로서 큰 재산을 모으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자세를 가짐. 빙허각 이씨는 차밭을 경영하여 가계를 꾸려나감.
-> 여성들은 장사나 상업적 밭농사의 경영 또는 사채 행위 등 다양한 이익활동을 하여 돈을 범.
1696년(숙종 22) 양반 여성이 동전을 주조하여 나라가 발칵 뒤집힌 사건이 발생함.
2. 특수직 여성의 일과 생활
조선시대 직업을 가지고 있던 특수직의 여성으로는 궁녀, 의녀, 기녀, 무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신분상 천민이었지만 각각의 전문성을 가지고 특수직에 종사함.
1) 궁녀
(1) 궁녀의 설치와 선발
: 대궐내의 대전 ․내전․대비전․세자궁 등과 기타 각종의 별궁에서 일하던 여성. 내명부 가운데 정5품 상궁 이하의 궁인직에 해당하는 여성들. 국왕이나 세자의 부실(副室)이 되면 궁녀로서의 신분을 면하고 승격하게 됨. 정5품 상궁에서 종9품 주변궁까지가 궁녀의 신분에 해당하였지만, 아무런 품계없이 궁중에서 천역에 종사했던 수사(水賜) 등도 넓은 의미의 궁녀에 해당함. 궁녀라는 용어 이외에도 ‘나인(內人)’, ‘시녀’, ‘궁인’ 등으로도 불림.
궁녀 제도는 태조 6년 조준, 정도전의 건의에 의해 시작됨. 세종대에는 명칭과 품계, 직무까지 명시한 본격적인 여관제도가 설치됨. 세종 12년에는 동궁의 여관제도도 확정됨. 여관제도는 성종 때 경국대전 에서 내명부로서 확정되어 조선 말기까지 존속함.
보통 궁녀에는 3가지 등급, 상궁· 나인·애기나인으로 나뉨. 이들도 입궁시기와 소속부서에 따라서 격의 높낮이에 차이가 있고, 위계질서가 형성되어 있었음.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상궁. 상궁 밑으로는 나인이 있었으며, 이들의 역할은 매우 다양하였음. 나인 아래에는 애기나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아기나인 또는 생각시라고 도 하였음.
3 조선시대 궁녀의 품계
정5품 상궁(尙宮) 왕비를 인도하며, 상기와 전언을 통솔. 상의(尙儀) 일상생활의 모든 예의와 절차를 맡았으며, 전빈과 전찬을 통솔 종5품 상복(尙服) 의복과 수로 무늬놓은 채장을 공급하고, 전의와 전식을 통솔. 상식(尙食) 음식과 반찬을 준비하였으며, 전선과 전약을 통솔. 정6품 상침(尙寢) 왕을 일상으로 뵐 때와 왕이 옷을 입고 먹는 일의 진행을 맡았으며 전설과 전등을 통솔. 상공(尙功) 여공(女功)의 과정을 맡았고, 전제와 전채를 통솔. 종6품 상정(尙正) 궁녀의 품행과 직무단속 및 죄를 다스림. 상기(尙記) 궁내의 문서와 장부의 출입을 담당. 정7품 전빈(典賓) 손님 접대, 신하가 왕을 뵐 때 접대, 잔치 관장, 왕이 상을 주는 일 등. 전의(典衣) 의복과 머리에 꽂는 장식품의 수식을 맡음. 전선(典膳) 음식을 삶고 졸여 간에 맞는 반찬을 만듦. 종7품 전설(典設) 장막을 치고 돗자리를 준비하며 청소하는 일과 물건을 베풀어 놓는 일. 전제(典製) 의복 제작. 전언(典言) 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왕에게 아뢰는 중계구실 담당. 정8품 전찬(典贊) 전빈과 같음. 전식(典飾) 머리를 감고 화장하는 일과 세수하고 머리 빗는 일을 담당. 전약(典藥) 처방에 따라 약을 달임. 종8품 전등(典燈) 등불과 촛불을 맡음. 전채(典彩) 비단과 모시 등 직물을 맡음. 전정(典正) 궁관의 질서를 바르게 하는 일을 도움. 정9품 주궁(奏宮)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상(奏商)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각(奏角)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종9품 주변치(奏變徵)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치(奏徵)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우(奏羽)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변궁(奏變宮)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궁녀의 선출방법은 제도화되지는 않았지만, 왕의 입장에서는 양가의 딸을 뽑고자 하였고, 양가에서는 이를 피해 조혼의 풍습까지 유발하게 됨. 왕이나 왕비를 모시는 경우는 선출 방법에 다소 예외가 있었고, 먼저 입궁한 궁녀의 가까운 친척 가운데 소개되어 들어오는 경우가 많음.
입궁연령은 지밀이 가장 어린 4∼8세, 침방과 수방은 6∼13세, 그 외에는 12∼13세가 일반적.
궁녀는 20세 전후에 계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됨. 나인이 된 후에 15년이 경과되어야 상궁의 자리에 오름, 왕의 후궁이 되면 20대에도 상궁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런 궁녀는 왕의 자손을 낳기 전에는 상궁으로 머물게 되지만, 대신 궁녀의 기본적 임무는 주어지지 않고 왕의 시중만 전담하게 됨. 이 경우를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 함. 이들이 왕의 자녀를 낳게 되면 내관인 종4품 숙원(淑媛) 이상으로 봉해지고, 독립세대를 구성하게 됨.
(2)궁녀의 생활
궁녀들은 대체로 어려서부터 수련을 쌓았는데, 지밀나인 등 중요한 직책의 궁녀들은 한글․소학․여사서 등 기본적인 지식을 익히고 공손히 앉고 일어서는 법, 절하는 법, 글쓰는 법 등 궁중생활에 필요한 동작과 용어, 궁체 쓰기 등을 배움. 이러한 수련을 거친 궁녀들 중에서는 높은 교양을 쌓은 자들도 있었는데, 계축일기 , 인현 왕후전 등의 궁중문학을 남기기도 함.
전체 궁녀 수는 제도적으로 확정되어 있지는 않아, 초기에는 많지 않았는데 후기로 내려오면서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보임. 궁중에서 일하는 대가로 지위에 따라 차등있게 월봉과 생활필수품 등을 지급받음, 재정형편에 따라 감해지기도 하는 등 유동적임.
궁녀는 실제로 왕족들이 자신들의 생활상 편의를 위해 만들어 놓은 존재. 궁궐내의 모든 궁녀들은 입궁에서 퇴출까지 원칙적으로 종신제. 그러나 중병 또는 가뭄으로 궁녀방출이 이루어지거나 모시고 있던 상전이 죽는 경우에는 중도에서 궁궐을 나갈 수 있었음.
궁녀의 근무상황은 일반적으로 하루에 당번과 비번으로 교대함. 시대에 따라 하루 종일 근무하거나 3번으로 나누어 근무하기도 함. 천재를 당하면 여원(女怨)을 풀어주기 위해 궁녀를 내보내는 관습이 있었음.
궁녀는 궁 밖에서는 다른 남자와의 혼인이 금지됨. 방출시녀를 첩으로 삼는 경우 탄핵을 받음. 궁녀는 출궁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부와의 접촉이 거의 단절됨. 불만이 많음. 궁녀 사이에 동성애(대식)도 존재함.
○ 궁녀 더 알아보기
제조상궁/ 부제조상궁/ 지밀상궁/ 보모상궁/ 시녀상궁/ 일반상궁/ 나인(입궁 후 15년이 지나 관례를 치룬 후의 궁녀들을 지칭.)/
생각시 (지밀 애기 나인을 지칭. 머리를 생으로 묶는다 하여 이름 붙여짐.)/각시(지밀 생각시 외의 애기 나인들을 지칭.) 궁녀는 정5품 상궁(尙宮)직을 최고로 하여 최하 4,5세의 어린 견습나인(아기나인)까지 있으며 각기 소속된 처소. 직분, 신분에 따라 명칭이 다름. 다양한 궁녀의 명칭은 의식(儀式) 때 직무를 분장(分掌)할 때에 쓰이고 평상시에는 단지 '상궁', '내인(나인)'의 두 종류로 크게 나뉨.
가. 상궁
상궁은 직첩을 받으면 그날부터는 머리에 첩지(머리 가르마 가운데에 장식하는 것)를 달게 됨. 상궁이 되기 전은 항아(姮娥,嫦娥; 달 속에 있는 선녀)님이라 부르고 상궁이 되면 비로소 마마님이라 부르고 대접받음. 상궁 첩지를 받으면 궁안에 방을 하나씩 주어 따로 세간을 내줌. 따로 밥짓고 빨래하는 하녀를 두고 살림을 하는데 이 일을 하는 사람을 각방서리라 함. 이러한 내명부소속의 상궁들은 정5품으로 품계는 모두 같다. 그리고 그 이상의 품계가 높아지진 않는데 그 이유는 후궁들 중에 가장 낮은 품계의 숙원이 종4품이기 때문.
▶ 제조(提調)상궁 : 제조상궁은 일명 큰방상궁이라고 하여 수백 명의 궁녀 중 으뜸이 되는 상궁으로 권세와 권위가 대단하여 남자관리로 치면 영의정의 지위와 같다고 하겠다. 제조상궁은 단 한사람이며, 자격은 궁녀 중에 연조가 오래되고 위품이 있고 인격이 높아야 함. 학식이 많고 수많은 궁녀를 통솔할 수 있는 영도력이 있어야 하고 인물도 출중하여야 함. 제조상궁의 임무는 대전어명을 받들고 내전의 대소 치산(治産)을 주관함. 제조상궁에 대한 음식대접은 임금님의 수라상과 가짓수를 같게 하고 분량만 적게 함. 그리고 큰방 상궁이 궁궐을 출입할 때는 세수간 나인과 비자(婢子)가 따라 다님.
▶ 부제조(副提調)상궁 : 부제조상궁은 제조상궁의 다음 자리로 일명 아랫고(阿里庫,下庫)상궁이라고도 하며 제조상궁이 세상을 떠나면 그 자리를 이어감. 보석과 의식주에 걸친 왕의 귀중품은 물론 수라에 쓰이는 반상기용인 은기(銀器),자기(磁器) 및 유기(鍮器)와 비단 등이 있는 아랫 곳간의 물품들의 출납은 부제조상궁의 담당.
▶ 대령 상궁 대령상궁은 ▶ (待令) : 일명 지밀상궁이라고 함. 항시 왕의 곁에서 어명(御命)을 받드는 자세로 대기하고 있음.
▶ 보모(保母)상궁 : 보모상궁은 왕자녀의 양육을 맡는 나인들 중의 총책임자. 동궁에 두 명, 그 밖의 궁에는 한 명씩. 왕자녀들은 어릴 때에 이들을 '아지(阿只)'라고 부름.
▶ 시녀(侍女)상궁 : 시녀상궁은 궁중의 지밀에서 상시 봉사하면서 여러 가지 업무를 행함. 서적 등을 관장하고 글을 낭독하고 글의 정사(淨寫)를 맡고, 대소 잔치의 내연에 좌우 찬례(贊禮), 전도(前導), 승인(承引), 시위(侍衛) 등을 거행하고, 각 종실(宗室), 외척(外戚)들의 집에 내리는 하사품에 관한 업무를 관장, 규찰(糾察)하고 그릇과 기타를 다스리는 일 외에 대소 사우(祠宇; 따로 세운 사당집)를 총관하여 곡읍(哭泣; 소리내어 슬피움)도 하며, 왕비와 왕대비의 특사로 그 본댁(本宅;친정)에 어명을 받들고 나가기도 함.
▶ 특별상궁(승은상궁) : 상궁 중에는 '승은상궁'이라 불리는 이도 있음. 일명 '특별상궁'. 승은(承恩)은 왕의 손이 닿은 것을 일컬음. 자녀를 낳지 못한 경우 승은상궁 또는 특별상궁의 지위에 머뭄. 이들은 일정한 직책 없이 다른 후궁과 같이 왕의 곁에서 왕을 모심. 이들은 나중에 승격되어 귀인이 되기도 함.
◈ 감찰(監察)상궁 : 감찰상궁은 궁 안에서 일어난 궁녀들의 음란, 비리, 모함, 사치 등의 모든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또 조사하여 조금이라도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한 궁녀들에게는 가차 없이 처벌하던 상궁.
▶ 일반상궁 : 이상의 상궁들 외에 뚜렷이 직함이 붙지 않은 일반상궁들이 각 처소마다 7, 8명씩 있어서 그 아래의 나인들을 총괄하고 처소마다의 모든 업무를 책임지기도 함. 상궁들은 존칭으로 '마마님'이라 부르는데 민가에서는 대가댁의 소실(小室)을 높이는 말이기도 함.
◈ 세수간(洗手間)상궁 : 세숫물과 목욕물을 준비하던 곳의 책임 상궁으로서, 세수간은 옻칠한 커다란 함지에 따뜻한 물을 담고 목욕을 시키는 일과 내전을 청소하는 일을 함. 한편 세수간상궁은 왕비가 나들이할 때 가마 옆에 서서 시위하는 역할의 중요한 임무도 함.
◈ 세답방(洗踏房)상궁 : 세탁과 다듬이질, 다리미질 그리고 염색 등을 담당하던 일명 빨래방의 상궁.
◈ 복이처(僕伊處)상궁 : 아궁이를 담당하는 곳의 책임 상궁으로, 침실에 불을 때는 것과 내전에 불을 밝히는 임무를 담당하였으며 세답방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임무가 독립적인 기능을 하던 곳.
◈ 침방(針房)상궁 : 왕과 왕비가 옷을 편하게 입도록 하며 또 잘 때는 평안하게 자도록 옷과 이부자리를 만들던 곳인 침방 나인들을 맡아서 총괄 관리 책임지는 상궁.
◈ 수방(繡房)상궁 : 왕과 왕비의 옷에 수를 놓거나 장식물을 놓는 일을 담당한 수방을 총 지휘한 상궁.
◈ 수라간(水剌間)상궁 : 수라간은 소주방이라고도 하였는데, 안소주방과 밖소주방으로 나뉨. 안소주방 상궁은 왕과 왕비의 조석 수라상을 관장하였으며 밖소주방 상궁은 궐내의 잔치와 윗분들의 탄일에 잔치상을 차리며 차례 등도 담당함.
◈ 기미(氣味)상궁 : 왕과 왕비에게 올려진 수라를 곁에서 한 술씩 미리 먹어 보며 검시하던 상궁. 왕과 왕비를 모해하려 함에 혹시나 수라음식에 해가 되는 것이 없는지 확인하던 절차를 담당하던 상궁.
궁녀 중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지밀은 왕을 제일 가까이에서 모시기 때문에 후일 왕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가장 많았다고 함.
나. 나인(內人)
나인(내인)은 관례를 치르고 성인이 된 궁녀를 이르는 말. 원칙으로는 소녀 때에 견습여관(女官)으로 들어와서 15년이 경과되어야 나인이 됨. 왕이 있는 대전(大殿)외에도 왕대비(中殿), 대왕대비, 동궁 그 밖의 왕자, 공주의 궁과 그리고 후궁과 별궁에 소속된 여인들까지 속함. 더욱이 왕의 사친(私親)의 사당(祠堂)을 지키는 이들 까지 포함됨. 즉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궁전을 각전(各殿)이라 하고, 대군, 왕자, 공주, 옹주, 후궁, 신주를 모신 곳을 각궁(各宮)이라 하여 궁인(宮人)이라는 관리를 두고 있음. 왕족들이 사는 궁들은 각기 사유재산과 그밖에 국가에서 내리는 공물(供物)을 가지고 완전히 독립세대를 이루고 있으므로 그 궁에 소속된 나인들은 물론 그 궁에서 보수를 받음.
▶ 지밀(至密)나인 : '지밀'은 대궐에서 가장 지엄(至嚴)하고 중요한 곳으로 말 한마디 새어나가지 못한다는 뜻. 왕내외가 거처하는 궁궐 중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침전 (寢殿)을 말함. 이들은 우선 왕과 왕비의 신변보호 및 기거(起居),침(寢), 식(食), 의(衣)등 일체의 시중과 물품관리 및 내시부(內侍府), 내의원(內醫院), 내선사(內膳司) 들과 중요한 교섭을 담당함.
▶ 소주방(燒廚房)나인 : 수라간(水剌間)은 소주방이라고도 하며 안소주방과 밖소 주방으로 나뉨. 안소주방(內燒廚房)나인은 왕, 왕비의 조석 수라상을 관장하며 주식에 따르는 각종 찬품을 맡아 함. 밖소주방(外燒廚房)나인은 궐내의 대소잔치는 물론 윗분의 탄일에 잔치상을 차리며 차례, 고사 등도 담당함.
▶ 생과방(生果房)나인 : 후식에 속하는 것, 즉 생과(生果), 숙실과(熟實果), 조과(造菓), 차(茶), 화채(花菜), 죽(粥) 등을 만듦. 조석 수라상은 소주방나인을 도와서 거행하며 잔치음식의 다과(茶菓)류는 이곳에서 관장함.
▶ 퇴선간(退膳間)나인 : 지밀에 부속되어 있는 중간 부엌인 퇴선간에서 수라를 지으며 안소주방에서 운반한 음식을 다시 데워서 수라상에 올리고 수라상 물림을 함.
다. 그 밖의 궁중에서 일하는 여인들
(왕의 승은을 입는다면 단연 종4품 숙원으로 봉해짐)
▶ 무수리(水賜伊) : 각 처소에서 물긷기, 불때기 등 험한 잡역을 맡아하는 여인이라 대개 기혼자로 아침저녁 출퇴근함. 앞에 패(牌)를 달고 다니는데 이 패는 조석의 대궐 통근과 각 별궁간 심부름 다닐 때 아무 때나 드나들 수 있는 신분증과 같은 것.
▶ 의녀(醫女) : 여의(女醫)라고도 하며 여러 읍의 비(婢) 중에서 뽑아들여 간단한 진맥이나 침술법을 가르치는 여인들로 출산 때 조산부 노릇까지 하였고 궁중 잔치에 춤을 추는 기생 역할도 하여서 일명 약방(藥房)기생이라 불리었고 여자 죄인을 잡아가는 등의 여순경 역할도 함.
▶ 비자(婢子) : 붙박이로 각 처소나 상궁의 살림집에 소속된 하녀. ▶ 각심이(손님방아이, 방자) : 나인들 살림집의 가정부 격인 여인들.
2) 기녀
조선시대의 관기의 설치 목적은 주로 여악(女樂)과 의침(醫針)에 있었음. 연회나 행사 때 노래 ·춤을 맡아 하였고, 거문고․가야금 등의 악기도 능숙하게 다룸. 관기는 지방관아에도 딸려 지방관의 위락(慰樂)의 대상이 되기도 함.
중종 때는 사회 풍기에 관해서 여러 가지 규제를 하는 가운데 의녀 · 창기의 연회 참여를 금지시킨 일이 있는데, 중종은 연회를 할 때 의녀나 창기를 부르는 것을 엄금하도록 사헌부에 명령하고 절목을 만들도록 함.
위반자는 물론 의녀나 창기도 중벌로 다스리도록 함. 그러나 잘 지켜지지 않음.
(1) 기녀의 변천 경위 : 기녀는 의약이나 침선의 기술, 가무의 기예를 배워 익혀서 나라에서 필요할 때 봉사하던 여성들. 대체로 남녀의 접촉을 금하는 유교적 질서 속에서 남성들의 접근이 허용될 수 있는 천인 계층에 속함. 남성들의 잔치에서 흥을 돋구고 위안하는 구실을 겸함. 궁중내의 잔치와 외국사절을 환영하는 잔치에 필요한 여악(女樂)의 담당자로서 기녀를 둠. 그러나 기녀들 중 일부는 사대부나 변경 지방 군사들의 위안부로서의 구실을 맡음.
의녀가 기녀의 역할을 담당하여 약방기생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기도 함. 조선왕조에서는 기녀의 폐지에 대한 논의가 여러 번 있었으나 폐지되지 않음. 오히려 시대가 내려올수록 기녀의 수는 더욱 증가하여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문제를 파생시킴.
연산군대는 전국에서 기녀를 뽑아 올렸고(흥청, 광희) 그들의 생계와 치장을 위해 세금을 늘려 농민과 수공업자들이 큰 피해를 받음. 기녀는 신분상으로는 천인이고, 관비(官婢)에 속해 있었으며, 기부(妓夫)가 있었음.
기부는 대체로 기녀의 의식주를 주선하면서 동거생활을 함. 기부들이 거느린 기녀는 다만 국가에서 주어진 임무만 다하고 일반 사회에는 기예만을 팔고 매음 등은 하지 않음.
기부가 제도화된 것은 국가에서 기녀를 보다 철저하게 파악할 수 있고, 기녀의 생계가 보다 안정성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 기부의 신분은 대체로 천인, 시대가 내려오면서 각전의 별감, 포도청의 군관, 궁가의 청직이, 무사 등 신분층이 한정됨. 기녀의 종류와 등급도 세분화.
고종대에는 상류사회의 연회에 참석하였던 기생인 일패(一牌), 기생출신으로 남몰래 매춘한다고 하는 은근자(殷勤者)인 이패(二牌), 매춘 자체가 직업인 탑앙모리(搭仰謀利)라고 불리는 삼패(三牌)로 구별됨.
(2)기녀의 인간상 :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났던 곳으로는 서울· 평양 ·성천· 해주 · 강계·함흥· 진주· 전주·경주 등. 시 등 문장으로 유명한 명기로는 황진이· 매창· 소백주 등이 있으며 충절로 유명하기는 , 평양의 계월향, 진주의 논개, 가산의 홍련 등. 만향과 같이 부모를 극진히 봉양한 효녀. 홍낭․춘절․ 유지 등과 같이 인연을 맺은 한 남자를 위해 수절하여 절개를 지킨 기녀. 남자를 패가망신하게 만들고 조롱하고 기만하는 기녀 등 다양함.
(3) 기녀의 특기 : 기녀는 천민에 속하지만 시와 서에 능한 교양인으로서 대접받는 등 특이한 존재. 기녀를 관장하는 기관으로는 기생청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가무 등 기생이 갖추어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시· 서화 등을 가르쳐 그들이 접대하는 상류 사족층의 교양과 걸맞게 연마시킴.
기생청은 후에 권번으로 개칭되어 기생청의 기능을 맡았거니와, 서울과 평양에는 기생학교가 있어 15세에서 20세까지의 처녀를 입학시켜 가무 외에 예의 · 서예 등을 가르쳐 예능과 교양을 겸비하도록 함.
시가나 서화에 능하거나, 악기나 가무에 능하거나, 또는 재치 있는 말씨나 유머를 잘하여 명성을 남김. 특히 미모에 여러 가지 특기를 겸비한 기녀는 명기로서 이름을 떨치기도 함.
지방에 따라 기녀들이 공통적인 특기가 있었는데, 경상도 안동의 기녀들은 대학 을 곧잘 읊었고, 관동의 기녀들은 송강 정철의〈관동별곡〉을, 함경도 영흥의 기녀들은〈용비어천가〉를, 평양의 기녀들은 정조 때 시인 신광수가 지은〈등악양루탄관산융마시 登岳陽樓歎關山戎馬詩〉를 많이 읊었다 함.
평안도 의주 및 함경도 북청 기녀들은 말달리며 재주를 보이는 기예를 지니고 있었고, 제주도의 기녀들은 말을 잘 달리는 특기를 가짐.
3) 의녀
(1) 설치 경위와 교육 내용 : 여성들의 질병 치료를 위해서 의녀의 설치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태종 6년 허도의 건의로 동녀(童女) 수십 명을 뽑아 맥경 ․침구의법을 가르쳐 제생원에서 사무를 맡아보도록 한 것이 의녀제도의 시초. 필요성은 증가하였는데 공급이 따르지 못하여, 점차 의녀의 수를 늘려나감.
세종 때까지는 중앙에서만 실시되었고, 지방에서도 필요하게 되자 지방에서 10세 이상의 영특한 동녀를 뽑아 제생원에서 교육을 시킨 뒤에 지방에 돌려보내 질병을 치료하게 함. 그런데 지방 의녀제도는 제도적으로 실시되지는 못했고, 세종 17년을 전후해서야 의녀제도가 전국적인 규모로 실시됨.
세종 16년 의녀들에게 1년에 두차례 사미(賜米)가 결정되는 등 국가에서 일정한 보수를 받았고, 필요성과 교육성과가 늘어남에 따라서 더욱 조직적이고 철저한 교육방침을 세움.
세조대에는 제생원을 혜민국에서 병합하면서, 의녀교육도 혜민국에서 맡았고, ‘의녀권징조건 醫女勸懲條件’을 제정하여 학업성적에 따라 포상하고 징계하는 조처를 취함. 성종대에는 ‘의녀권과조 醫女勸課條’라 하여 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학습 장려책이 제정됨. 이러한 체계적인 교육방침에 의해 의녀들은 의학뿐만아니라 일반교양에서도 높은 지식을 쌓아갈 수 있었음.
(2) 제도상의 정비 : 의녀의 출신 신분은 관비. 의녀를 내의· 간병의 ·초학의 등의 3종으로 나누고 급료를 구분하여 의녀의 과업을 권장함. 성종대에는 먼저 사서를 읽히고 그 뒤에 의술을 가르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고, 『경국대전』에는 의녀의 학업 권장과 선상을 조문화하고 있다. 우수한 3명에게는 월료를 석달동안 지급하고 성적이 나쁜 자는 다모로 삼았다가 성적이 좋아지면 다시 의업에 종사하게 한다고 하였고, 여의 70명을 3년마다 선상하도록 규정함.
영조대에 제정된 『속대전』에는 의녀를 내국 여의, 혜민서 여의로 양분하여 그 인원을 정하고, 그 장권(獎勸)의 방법도 달리함. 내국 여의는 궁중에 출입하며 왕비나 대비 등 왕실 여성의 질병 치료에 종사하였고, 혜민국 여의는 일반 부녀의 질병 치료에 종사함. 왕실의 존귀한 여성을 치료하기 위한 내의녀 선택을 성종대부터 체계 화시켜, 마음씨 등 인물 선정에 꽤 신경을 씀. 내여의는 조선왕조 말기까지 제도적인 시행을 봄.
(3) 의녀의 활동 : 의녀들은 여성들의 질병 치료와 함께 그 질병의 유무를 조사하는 임무도 띰. 의녀가 독자적인 활동을 할 수는 없었음. 여성 환자를 직접 대면하여 증세를 진찰하는 것은 의녀가 하더라도, 그 환자에 대한 처방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 의원이 맡음.
그러나 남자의원이 여성 환자의 환부를 직접 만질 수 없었기 때문에, 치통․종기등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질병은 직접 치료하였고 시침(施針)하는 일도 직접 함.
이밖에 교육과정에 산서 産書 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여성들의 해산에 조산원의 구실도 맡음. 질병 진단, 간호, 조산, 특수한 분야의 치료 등 의료 활동 이외에 의녀들은 의학적 지식이 필요한 다른 임무도 맡음.
법적으로 가려낼 수 있는 신체상의 이상 여부라든가, 여성 죄인에게 약을 내려 죽일 때에 그 임무마저 맡음.
의녀들은 책을 읽어 지식층에 속하며, 전문직 여성. 그러나 출신이 관비인 만큼 성종 말경부터 기생들처럼 연회에 불려나감. 연산군 때에는 더욱 심해짐. 중종대에는 대소 연회에 의녀를 초치하는 것을 법으로써 엄금하고 그 후에도 수차에 걸쳐 의녀들과의 향음 하는 것을 계속 금지. 의녀들로 하여금 창설 당시의 본업에 돌아가도록 엄중 단속함. 그러나 연산군 때 한번 흐려졌던 의녀들의 풍기는 갑자기 시정되지 않고 의녀들은 부인들의 의료와 간호에 종사하면서 한편으로는 여전히 주연에 참석함. 그리하여 약방기생이라는 이름으로써 공공연하게 의료와 함께 가무를 병행하게 되었던 것.
부호들의 혼수가 극히 사치하다 하여 혼가 납채일에 의녀를 보내어 그 물품들을 검찰하게 함. 궁중이나 사대부 집안의 여성에 관한 범죄를 수색하고 죄인을 체포하기도 함.
4) 무녀
무녀는 선령(善靈) ·악령(惡靈)과 직접 통하며 그들을 다룰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지녔다고 하여 인간과 신의 사이를 연결해 주는 일을 직업적으로 함. 인간의 모든 화복(禍福)은 신의 뜻에 따라 좌우되므로, 재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무녀들을 통하여 신과 접촉하여 재난을 미리 탐지하고 방지한다고 생각. 질병· 흉사 등의 근원이 되는 악령을 구축하는 일을 담당함. 무녀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신을 통하여 판단하는 길흉점복(吉凶占卜)의 예언자가 됨.
무는 무당과 박수로 나뉘고, 무당은 무당의 정통인 숙련된 큰무당[大巫] 또는 단골무당과 미숙한 선무당으로 나뉨. 단순히 무당이라 하면 여무(女巫), 특히 가무로써 강신(降神)하는 무녀를 뜻하나, 일반적으로 남무· 여무 구별없이 씀.
(1) 무녀의 존속 경위 : 모든 신을 섬긴다는 의미에서 만신이라고도 함. 무녀의 폐단에 대해 대책을 강구하여, 세종대 도성 내의 무녀들을 성 밖으로 축출하였고, 또 무녀가 중심이 되어 행해지던 야제(野祭)와 산천․ 성황에서의 제사를 금지함. 그러나 무속은 수그러지지 않았고, 국가에서 인정하는 국무(國巫)가 엄연히 존재함. 이들은 왕이나 세자가 병들었을 때 병이 낫기를 기도하거나, 가뭄이 들 때 기우제를 지내기도 함. 궁중을 출입하면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함.
국가에서는 무녀의 존재는 인정하되, 무녀로 인해 파생되는 사회적 물의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임. 국무를 제외한 무녀를 모두 동서활인원에 소속시켜 병든 사람을 치료하게 함. 이에 대한 반대 의견, 성중의 무녀 축출 등이 제시되기는 하였으나, 별로 실효가 없었고, 조선왕조 말기까지 사실상 무녀의 성안 거주가 가능. 그 이유는 정신적인 이유로서, 무속의 영향을 계속 받아왔으므로 큰 일이 있을 때 무속신앙에 의해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함.
국가에서는 표면상으로는 무속을 금지하면서도 기우제· 기양제(祈禳祭)에 무녀를 불러들여 제사를 집행하게 하였고, 궁중 여인들은 국내 명산에 무녀를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기도 함. 무당에 대한 인식은 민간신앙으로까지 깊이 뿌리내림.
(2) 무녀의 실태 : 무속신앙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서 크게 성행하였는데, 송악의 무속은 신사(神祠)를 중심으로 번창함. 이에 무녀들은 많은 재물을 모을 수 있었고, 국가에서는 이들에게 무세(巫稅)를 부과함.
세종 5년까지는 무세를 가혹하게 징수함. 무세는 무녀의 원공(元貢)인 정포(正布) 1필이 조선후기까지 존속됨. 서울에서는 동서활인서에서 무녀들을 파악하여 무세를 부과했으며, 지방에서는 관청별로 무세를 징수함. 그리고 여러 가지 명목의 잡세가 첨부되어, 신당세포(神堂稅布)․퇴미세(退米稅) 등을 징수함.
무녀는 수입이 많았고, 무녀의 수도 전국적으로 매우 많았음. 목민심서 에서 「세집이 있는 마을에도 모두 무녀가 있다」고 할 만큼 무녀가 민간에 고루 퍼져 있음. 무녀들이 여러 가지 무속행사를 통하여 사람들의 재물을 차지하여 치부하는 사례도 자주 보임.
(3) 왕실과 무녀 : 중앙의 궐내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무(主巫)가 있었음. 궁중에 출입할 수 있는 무녀의 주무를 ‘국무’ 또는 ‘국무녀’, ‘국무당’이라고 불렀고, 주읍(州邑)의 주무를 ‘내무녀(內巫女)’ 혹은 ‘내무당(內巫堂)’이라고 함.
국무는 중앙의 성숙청(星宿廳)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아래 많은 무녀를 거느리고 국가나 왕실의 무속 행사에 동원됨. 성숙청에 소속된 무녀들은 주로 기우제 등에 빈번하게 동원됨. 그리고 국왕이나 왕실 가족의 병을 물리치기 위해서 고사를 지냈고, 복을 빌기 위해서도 동원됨.
무녀는 신분상 천인 계층에 속해 그 소생이 관원이 될 수 없었지만, 궁중에서 신임을 받게 되면 부귀영화는 물론이고 그 소생까지 고관이 되었던 경우가 있음. 또한 무녀들은 특정한 인물을 위해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행사도 서슴치 않음.
조선시대 여성들은 가사를 주로 담당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여성들의 일이 반드시 가사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여성들은 육아와 가사를 책임지는 것은 물론 그 외에 틈틈이 직조를 하여 의생활을 자급자족하고 세금을 충당하였다. 조선시대 여성은 생산 활동이나 일상생활을 살펴볼 때 신분에 따라 그 양상이 달랐다.
1. 조선시대 신분과 여성생활
1) 왕실 여성 : 왕비와 후궁
○ 왕비 : 왕비란 왕의 정처이며, 국모를 지칭하는 호칭. 중궁, 모비(某妃). 모두 전(殿), 궁이라 칭함. 빈은 정1품. 세자의 정처인 왕세자빈과 왕의 후궁.
* 비빈의 수 : 고려는 빈의 수가 일정치 않고 적첩의 구별도 없어 여러 비는 동등한 신분적 위치에 있었던 것. 그러나 조선 건국 후 처첩, 적서의 구별을 분명히 할 것이 요구됨. 1비 이외에는 모두 후궁.
* 간택의(揀擇儀) : 비나 후궁을 간택할 때는 전국의 처녀에게 금혼령을 내림. 세종은 15세 이상을 가혼 연령으로 삼았고 세조는 연령의 제한을 없앴지만, 금혼령 대상 연령은 대개 16세 이하에서 8세까지. 비, 후궁을 간택하게 되면 조정에서는 가례색을 설치하고 전국에 연령해당자에게 금혼령을 내림. 간택 대상은 대개는 사대부 규수.
세자빈의 간택조건은 가계, 부덕, 자색(미모) 등 3가지, 자색에 치우치지 않기 위한 간택방법으로 처녀의 집을 순방하여 택하고 다시 이들을 창덕궁에 모아 선발함. 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으로 이루어짐.
동궁이 세자로 책봉되면 세자빈으로, 세자가 즉위하면 비로 승격됨. 또 비나 세자빈 자리가 비었을 경우, 재간택하는 것이 원칙이나 경우에 따라 후궁 중에서 승격시켜 왕비나 세자빈으로 삼음.(숙종대 장희빈 사사 이후는 불허) 이씨는 본관을 불문하고 제외됨. 후궁의 경우도 간택을 통해 들어오는 경우는 이씨가 없음.
* 교육 : 최종 간택에서 낙점받은 처녀는 그날부터 별궁에 들어가 일정기간 궁중 예절과 왕비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음. 예의범절교육을 마치면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고 왕비나 세자빈이 됨.
* 폐비 : 조선초 7대 동안 4,5차례 폐비문제가 대두되었고 3명의 세자빈이 폐출됨. 원인은 불의, 부덕으로 가법을 더럽힌 경우. 정치적 사건으로 왕 또는 세자가 폐위되었을 때 따라서 폐비 또는 폐빈이 됨.
* 은전(恩典) : 비의 경우 고향을 승격시키고, 향리 수를 증가시켜 줌. 후궁의 경우는 해당되지 않음. 후궁은 노비 전결 등을 급여함. 왕비의 아버지는 부원군에, 어머니는 부부인에 봉하고, 각종 물품을 내려주고 죽었을 경우 조의를 위한 장례용 물품 등을 내려줌.
왕비의 족친은 아주 무능한 자가 아니면 다 관작을 받음. 후궁의 근친에게는 1,2품에 해당하는 고관직을 부여하기도 함.
* 생활 : 절검을 미덕으로 삼아 비빈들은 검소한 의식생활을 추구. 부덕이란 미명하에 정신생활의 제약을 받음. 왕비는 아들을 낳는 것과 상관없이 죽어서는 종묘에 신위가 안치됨.
○ 왕비가 하는 일은 : ․ 왕비는 국모로서의 역할, 내․외명부를 거느림. 내명부에는 왕의 후궁과 상궁, 궁녀들이 속해 있었고, 외명부에는 종실의 처, 왕과 세자의 자녀, 문무반의 부인들이 속해 있었음. 왕비는 원칙적으로 무품계로, 품계를 초월한 존재.
․ 양잠과 방직을 손수함. 친농과 같이 왕비가 직조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일반 부녀자들의 양잠의식을 고취시키고자 친잠(親蠶)을 강조함. 이때 친잠례는 부덕(婦德)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강조해 이념적으로도 양잠의 활성화를 기대함.
친잠 때에는 중궁이 왕세자빈과 내외명부를 모두 인솔하여 채상단 밖에서 의식을 거행함 먼저 채상 . 즉 뽕나무 잎을 따는 일이 있고, 그 다음은 따놓은 뽕잎을 모아 광주리에 담는 행위를 한다. 여기서 왕비가 실제로 노동을 하느냐 않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왕비 자신이 충실하게 이러한 의식을 수행한다는 사실에서 직조노동의 중요성, 그 보급 노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
․ 여가를 이용하여 저술함. 소혜왕후 한씨 내훈 , 혜경궁 한씨 한중록 등.
○ 후궁이 되는 방법 :
1. 왕의 승은을 입는 것. 2. 왕비처럼 간택을 거쳐 후궁이 되는 경우. 2-3명의 후궁을 정식 간택을 통해 들였다. 후궁은 정1품 빈, 종1품 귀인, 정2품 소의, 종2품 숙의, 정3품 소용, 종3품 숙용, 정4품 소원, 종4품 숙원으로 나누어짐. 후궁 소생이 세자가 되는 경우 특별한 대우를 받음. 정1품 빈의 품계와 궁호를 특별히 하사받았다. -> 궁정동 칠궁 : 원종, 경종, 진종, 장조, 영조, 순조, 영친왕의 어머니
표 1 조선시대 후궁의 품계
2) 양반 여성
양반여성은 남편의 직위에 따라 외명부 직첩을 받음. 관료부인의 산직체계인 외명부에는 당상관 부인은 ‘부인(夫人)’이라는 말이 붙고, 당하관 부인에게는 ‘유인(孺人)’으로부터 ‘숙인(淑人)’까지 ‘인’자가 뒤에 붙음.
표 2 조선시대 외명부
○ 양반 여성의 최대 임무 : 제사 모시기(봉제사)와 손님접대(접빈객)
* 봉제사 : 조선의 제사 범위는 본래 『경국대전』에 「문무관 6품 이상은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의 3대를 제사하고 7품 이하는 2대를 제사하며 서인은 단지 죽은 부모만을 제사한다.」고 되어 있음. 대부분의 양반 집안에서는 4대 봉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 조선 후기에는 서민들의 경우에도 4대 봉사를 하기에 이름. 조선 중 ․ 후기 이후가 되면 윤회나 외손봉사가 줄어들고 여성들은 시집의 제사를 대부분 4대까지 담당하게 됨. 다례와 시제를 포함하면 많은 경우 10번 이상의 제사를 지내야 함.
* 접빈객 : 조선 사회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곧 집안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 양반 사회에 있어서 ‘접빈객’은 필수불가결한 공조기능. 여성들이 접빈객을 담당한 것은 단순히 집안일의 연장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사회적인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유지시키는 핵심적인 바탕이 됨.
* 가정 내 경제 관리 : 여성들의 가정 경제 관리는 크게 토지 관리와 노비 관리.집안 내에서 남자가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경우에는 남자가 가정경제를 관리하는 경우도 없지 않음. 곳간 열쇠를 여성이 가짐.
3) 양인여성과 노비여성의 일
○ 농업 분야의 여성 노동 : 실학자 유수원은 『우서』에서 「농가의 부녀는 농사일하고 식사를 마련하느라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쁜데, 또 스스로 옷까지 짜서 입어야 하니 그 옷 짜는 것이 막히고 잘 나가지 못한다.」고 함. 조선시대 여성들이 농사나 가사 일을 하고 길쌈을 함.
가족노동에서 노동력을 제공해야 할 인원이 대략 4~5명 선으로 본다면, 여자들의 노동력이 투입되지 않고서는 농사를 짓기 어려웠을 것. 이앙법 등 생산기술이 발달하고 농업형태가 집약농업으로 바뀌는 조선후기가 되면, 김매기의 감소 등으로 남성노동중심이 되며 여성노동의 몫은 줄어들게 됨.
밭농사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참여율이 더 높았고, 노동력 투입에서도 일시에 많은 노동력이 요구됨. 조선 초기 인정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는 일반농민의 경우 당연히 남녀의 구분 없이 동시에 보리 수확에 참여했을 것. 『농사직설』에는 게 젓 담구기, 식품저장, 장담구기 등 식생활의 가사일로서 여성들이 담당했던 일들도 수록되어 있음.
○ 직조(길쌈) 분야의 여성 노동 : 길쌈 즉 직조는 전근대 사회생활에서 농업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생산 활동. 조선시대에는 왕이 친농을 하는데 대하여 왕비가 친잠을 행함. 포는 화폐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욱 중요한 것. 「남자는 밭 갈고 여자가 길쌈하는 것은 천하의 대업이다. 밭 갈지 않고 어찌 먹으며 양잠하지 않고 어찌 옷을 입을 수 있겠는가」-> 견우와 직녀 당시 성역할 분담 형태를 대변해 줌. 길쌈은 신분의 차이에 구애됨이 없이 모든 여성이 해야 하는 일. 대체로 한 포를 짜는데 40시간이 걸림. 가사노동을 제외하고 하루에 2-3시간 잡는다면 15일 정도 걸림. 목화는 재배부터 수확까지 대체로 여성 노동의 비중이 큰 농사일. 누에치기에서부터 양잠까지도 여성의 일.
조선시대 사람들은 의와 식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필수품이라는 공통된 인식. ‘권농상(勸農桑)’을 수령 7사의 최우선적인 항목으로 하는가 하면, 국가에서 양잠을 장려하면서 일반적 권장책 외에 보다 구체적인 양잠활성화 방안을 강구하기도 함.
견․면 이외에 사회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 직물은 麻, 즉 베로 화폐로 유통되어 쌀과 함께 인간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생활용품. 견직물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생산이 적극 권장된 직물로서, 후비의 친잠례가 대표적인 여성 직조노동의 실례. 노비들은 신공으로 면주(綿紬)를 납부하거나 아니면 잠실의 잠모로서 역할을 수행하든 양잠에 관여함.
일반인들은 3월부터 실질적으로 양잠을 수행함. 누에의 종을 선택하는 것, 개미 누에를 섬세하게 보살피는 일, 뽕잎 채취, 손질, 먹이주기, 실켜기 등이 모두 여자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양잠은 스스로 갖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가사나 육아, 농사를 하는 틈에 수행해야 했으며, 양잠이 시기를 임의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 로 양잠의 어려움이 있었다. 양잠은 면이나 베와 달리 방적까지가 여성의 몫이며 방직으로 이어지지는 않음. 일반민 여성들의 직조노동 즉 길쌈은 면이나 베를 짜는 일이 대부분이며, 견 즉 비단직조는 일반 여성의 길쌈에 포함되지 않음. 견직에서 여성노동은 양잠에 한정되며 견직직조는 중앙의 견공장에서 이루어짐.
양잠에 의해 생산된 실을 견사(繭絲)라고 하는데, 일반민들의 양잠활동은 이 견사를 생산하여 진상하는 데에 그침. 그런데 뽕잎 채취와 같은 단순노동에는 남자들도 참여하였지만 미미한 정도. 견사를 생산하는 일도 섬세함이나 근면성 외에 힘든 노동을 수반하였으므로 여자들에게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면직에서도 예외는 아님. 다른 농작물에 비해 유난히 김매기의 기간이 길고 횟수가 많았고, 목화 따는 일이나 실잣기 등의 일이 낙후성으로 인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함.
당시 부녀자들은 농업노동과 가사노동을 하고 남은 시간에 직물생산노동을 행하였으므로 생산하는 직물의 양이 결코 많은 것은 아니었으며, 주로 저녁식사 이후의 시간을 이용.
또한 세금을 내기 위해 급하게 길쌈을 함. 남자들의 군포는 2필, 노비에게 책정된 신공은 1필. 국가는 이들 포에 등급을 매기고 화폐로 유통시킴. 조선 시대 유통되던 세금과 화폐의 대부분을 여자들이 생산해냈던 것. 여성 직조노동의 국가적인 기여도는 매우 큼.
4) 경제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의 등장
조선 후기에 이르러 농업은 물론 상업과 공업에서도 발전이 이루어짐. 여성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하거나 경제력을 향상시켜 나감. 양인 여성들은 시전에서 직접 점포를 운영하기도 함. 여성이 운영한 점포를 ‘여인전’이라고 함. 18세기 말 정조의 문집인 홍제전서 에 의하면 120여개의 시전 가운데 여인전은 18개가 있었다고 함.
여인전 : 상우전, 하우전, 전우전, 송현우전, 정릉우전, 문외우전(우전은 과일 파는 가게) 족두리, 백당전(엿, 사탕) 채소전, 내분전(종로 거리에 있었음) 외분전(서소문 밖에)
-분전은 연지와 분. 침자전(반질 도구) 문내좌반전(간한 생선이나 젓같은 반찬류) 떡
거상 김만덕의 경우 : 10세 때 고아, 처음에는 기생집 의탁, 20세 넘자 양인 여성임을 관에 호소. 기생에서 벗어남. 이후 독신으로 지내면서 장사에 남다른 재주가 있음. 십수년에 만에 재산을 꽤 모음.
1792년(정조 16)부터 1795년(정조19) 사이에 제주에는 흉년이 들어 식량 사정이 매우 좋지 못함. 만덕은 재산을 빈민 구조를 위해 희사함. 정조는 특별히 만덕을 내의원 의녀로 임명하여 서울로 오게 함. 만덕의 나이 57세 때. 왕비에게 인사, 금강산 유람하고 옴.
양반 여성들도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서 경제활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함.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 여성들은 주로 삯바느질을 하여 생계를 꾸려감. - 허생의 처 통천의 김씨의 경우 여자로서 큰 재산을 모으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자세를 가짐. 빙허각 이씨는 차밭을 경영하여 가계를 꾸려나감.
-> 여성들은 장사나 상업적 밭농사의 경영 또는 사채 행위 등 다양한 이익활동을 하여 돈을 범.
1696년(숙종 22) 양반 여성이 동전을 주조하여 나라가 발칵 뒤집힌 사건이 발생함.
2. 특수직 여성의 일과 생활
조선시대 직업을 가지고 있던 특수직의 여성으로는 궁녀, 의녀, 기녀, 무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신분상 천민이었지만 각각의 전문성을 가지고 특수직에 종사함.
1) 궁녀
(1) 궁녀의 설치와 선발
: 대궐내의 대전 ․내전․대비전․세자궁 등과 기타 각종의 별궁에서 일하던 여성. 내명부 가운데 정5품 상궁 이하의 궁인직에 해당하는 여성들. 국왕이나 세자의 부실(副室)이 되면 궁녀로서의 신분을 면하고 승격하게 됨. 정5품 상궁에서 종9품 주변궁까지가 궁녀의 신분에 해당하였지만, 아무런 품계없이 궁중에서 천역에 종사했던 수사(水賜) 등도 넓은 의미의 궁녀에 해당함. 궁녀라는 용어 이외에도 ‘나인(內人)’, ‘시녀’, ‘궁인’ 등으로도 불림.
궁녀 제도는 태조 6년 조준, 정도전의 건의에 의해 시작됨. 세종대에는 명칭과 품계, 직무까지 명시한 본격적인 여관제도가 설치됨. 세종 12년에는 동궁의 여관제도도 확정됨. 여관제도는 성종 때 경국대전 에서 내명부로서 확정되어 조선 말기까지 존속함.
보통 궁녀에는 3가지 등급, 상궁· 나인·애기나인으로 나뉨. 이들도 입궁시기와 소속부서에 따라서 격의 높낮이에 차이가 있고, 위계질서가 형성되어 있었음.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상궁. 상궁 밑으로는 나인이 있었으며, 이들의 역할은 매우 다양하였음. 나인 아래에는 애기나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아기나인 또는 생각시라고 도 하였음.
3 조선시대 궁녀의 품계
정5품 상궁(尙宮) 왕비를 인도하며, 상기와 전언을 통솔. 상의(尙儀) 일상생활의 모든 예의와 절차를 맡았으며, 전빈과 전찬을 통솔 종5품 상복(尙服) 의복과 수로 무늬놓은 채장을 공급하고, 전의와 전식을 통솔. 상식(尙食) 음식과 반찬을 준비하였으며, 전선과 전약을 통솔. 정6품 상침(尙寢) 왕을 일상으로 뵐 때와 왕이 옷을 입고 먹는 일의 진행을 맡았으며 전설과 전등을 통솔. 상공(尙功) 여공(女功)의 과정을 맡았고, 전제와 전채를 통솔. 종6품 상정(尙正) 궁녀의 품행과 직무단속 및 죄를 다스림. 상기(尙記) 궁내의 문서와 장부의 출입을 담당. 정7품 전빈(典賓) 손님 접대, 신하가 왕을 뵐 때 접대, 잔치 관장, 왕이 상을 주는 일 등. 전의(典衣) 의복과 머리에 꽂는 장식품의 수식을 맡음. 전선(典膳) 음식을 삶고 졸여 간에 맞는 반찬을 만듦. 종7품 전설(典設) 장막을 치고 돗자리를 준비하며 청소하는 일과 물건을 베풀어 놓는 일. 전제(典製) 의복 제작. 전언(典言) 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왕에게 아뢰는 중계구실 담당. 정8품 전찬(典贊) 전빈과 같음. 전식(典飾) 머리를 감고 화장하는 일과 세수하고 머리 빗는 일을 담당. 전약(典藥) 처방에 따라 약을 달임. 종8품 전등(典燈) 등불과 촛불을 맡음. 전채(典彩) 비단과 모시 등 직물을 맡음. 전정(典正) 궁관의 질서를 바르게 하는 일을 도움. 정9품 주궁(奏宮)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상(奏商)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각(奏角)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종9품 주변치(奏變徵)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치(奏徵)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우(奏羽)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변궁(奏變宮)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궁녀의 선출방법은 제도화되지는 않았지만, 왕의 입장에서는 양가의 딸을 뽑고자 하였고, 양가에서는 이를 피해 조혼의 풍습까지 유발하게 됨. 왕이나 왕비를 모시는 경우는 선출 방법에 다소 예외가 있었고, 먼저 입궁한 궁녀의 가까운 친척 가운데 소개되어 들어오는 경우가 많음.
입궁연령은 지밀이 가장 어린 4∼8세, 침방과 수방은 6∼13세, 그 외에는 12∼13세가 일반적.
궁녀는 20세 전후에 계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됨. 나인이 된 후에 15년이 경과되어야 상궁의 자리에 오름, 왕의 후궁이 되면 20대에도 상궁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런 궁녀는 왕의 자손을 낳기 전에는 상궁으로 머물게 되지만, 대신 궁녀의 기본적 임무는 주어지지 않고 왕의 시중만 전담하게 됨. 이 경우를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 함. 이들이 왕의 자녀를 낳게 되면 내관인 종4품 숙원(淑媛) 이상으로 봉해지고, 독립세대를 구성하게 됨.
(2)궁녀의 생활
궁녀들은 대체로 어려서부터 수련을 쌓았는데, 지밀나인 등 중요한 직책의 궁녀들은 한글․소학․여사서 등 기본적인 지식을 익히고 공손히 앉고 일어서는 법, 절하는 법, 글쓰는 법 등 궁중생활에 필요한 동작과 용어, 궁체 쓰기 등을 배움. 이러한 수련을 거친 궁녀들 중에서는 높은 교양을 쌓은 자들도 있었는데, 계축일기 , 인현 왕후전 등의 궁중문학을 남기기도 함.
전체 궁녀 수는 제도적으로 확정되어 있지는 않아, 초기에는 많지 않았는데 후기로 내려오면서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보임. 궁중에서 일하는 대가로 지위에 따라 차등있게 월봉과 생활필수품 등을 지급받음, 재정형편에 따라 감해지기도 하는 등 유동적임.
궁녀는 실제로 왕족들이 자신들의 생활상 편의를 위해 만들어 놓은 존재. 궁궐내의 모든 궁녀들은 입궁에서 퇴출까지 원칙적으로 종신제. 그러나 중병 또는 가뭄으로 궁녀방출이 이루어지거나 모시고 있던 상전이 죽는 경우에는 중도에서 궁궐을 나갈 수 있었음.
궁녀의 근무상황은 일반적으로 하루에 당번과 비번으로 교대함. 시대에 따라 하루 종일 근무하거나 3번으로 나누어 근무하기도 함. 천재를 당하면 여원(女怨)을 풀어주기 위해 궁녀를 내보내는 관습이 있었음.
궁녀는 궁 밖에서는 다른 남자와의 혼인이 금지됨. 방출시녀를 첩으로 삼는 경우 탄핵을 받음. 궁녀는 출궁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부와의 접촉이 거의 단절됨. 불만이 많음. 궁녀 사이에 동성애(대식)도 존재함.
○ 궁녀 더 알아보기
제조상궁/ 부제조상궁/ 지밀상궁/ 보모상궁/ 시녀상궁/ 일반상궁/ 나인(입궁 후 15년이 지나 관례를 치룬 후의 궁녀들을 지칭.)/
생각시 (지밀 애기 나인을 지칭. 머리를 생으로 묶는다 하여 이름 붙여짐.)/각시(지밀 생각시 외의 애기 나인들을 지칭.) 궁녀는 정5품 상궁(尙宮)직을 최고로 하여 최하 4,5세의 어린 견습나인(아기나인)까지 있으며 각기 소속된 처소. 직분, 신분에 따라 명칭이 다름. 다양한 궁녀의 명칭은 의식(儀式) 때 직무를 분장(分掌)할 때에 쓰이고 평상시에는 단지 '상궁', '내인(나인)'의 두 종류로 크게 나뉨.
가. 상궁
상궁은 직첩을 받으면 그날부터는 머리에 첩지(머리 가르마 가운데에 장식하는 것)를 달게 됨. 상궁이 되기 전은 항아(姮娥,嫦娥; 달 속에 있는 선녀)님이라 부르고 상궁이 되면 비로소 마마님이라 부르고 대접받음. 상궁 첩지를 받으면 궁안에 방을 하나씩 주어 따로 세간을 내줌. 따로 밥짓고 빨래하는 하녀를 두고 살림을 하는데 이 일을 하는 사람을 각방서리라 함. 이러한 내명부소속의 상궁들은 정5품으로 품계는 모두 같다. 그리고 그 이상의 품계가 높아지진 않는데 그 이유는 후궁들 중에 가장 낮은 품계의 숙원이 종4품이기 때문.
▶ 제조(提調)상궁 : 제조상궁은 일명 큰방상궁이라고 하여 수백 명의 궁녀 중 으뜸이 되는 상궁으로 권세와 권위가 대단하여 남자관리로 치면 영의정의 지위와 같다고 하겠다. 제조상궁은 단 한사람이며, 자격은 궁녀 중에 연조가 오래되고 위품이 있고 인격이 높아야 함. 학식이 많고 수많은 궁녀를 통솔할 수 있는 영도력이 있어야 하고 인물도 출중하여야 함. 제조상궁의 임무는 대전어명을 받들고 내전의 대소 치산(治産)을 주관함. 제조상궁에 대한 음식대접은 임금님의 수라상과 가짓수를 같게 하고 분량만 적게 함. 그리고 큰방 상궁이 궁궐을 출입할 때는 세수간 나인과 비자(婢子)가 따라 다님.
▶ 부제조(副提調)상궁 : 부제조상궁은 제조상궁의 다음 자리로 일명 아랫고(阿里庫,下庫)상궁이라고도 하며 제조상궁이 세상을 떠나면 그 자리를 이어감. 보석과 의식주에 걸친 왕의 귀중품은 물론 수라에 쓰이는 반상기용인 은기(銀器),자기(磁器) 및 유기(鍮器)와 비단 등이 있는 아랫 곳간의 물품들의 출납은 부제조상궁의 담당.
▶ 대령 상궁 대령상궁은 ▶ (待令) : 일명 지밀상궁이라고 함. 항시 왕의 곁에서 어명(御命)을 받드는 자세로 대기하고 있음.
▶ 보모(保母)상궁 : 보모상궁은 왕자녀의 양육을 맡는 나인들 중의 총책임자. 동궁에 두 명, 그 밖의 궁에는 한 명씩. 왕자녀들은 어릴 때에 이들을 '아지(阿只)'라고 부름.
▶ 시녀(侍女)상궁 : 시녀상궁은 궁중의 지밀에서 상시 봉사하면서 여러 가지 업무를 행함. 서적 등을 관장하고 글을 낭독하고 글의 정사(淨寫)를 맡고, 대소 잔치의 내연에 좌우 찬례(贊禮), 전도(前導), 승인(承引), 시위(侍衛) 등을 거행하고, 각 종실(宗室), 외척(外戚)들의 집에 내리는 하사품에 관한 업무를 관장, 규찰(糾察)하고 그릇과 기타를 다스리는 일 외에 대소 사우(祠宇; 따로 세운 사당집)를 총관하여 곡읍(哭泣; 소리내어 슬피움)도 하며, 왕비와 왕대비의 특사로 그 본댁(本宅;친정)에 어명을 받들고 나가기도 함.
▶ 특별상궁(승은상궁) : 상궁 중에는 '승은상궁'이라 불리는 이도 있음. 일명 '특별상궁'. 승은(承恩)은 왕의 손이 닿은 것을 일컬음. 자녀를 낳지 못한 경우 승은상궁 또는 특별상궁의 지위에 머뭄. 이들은 일정한 직책 없이 다른 후궁과 같이 왕의 곁에서 왕을 모심. 이들은 나중에 승격되어 귀인이 되기도 함.
◈ 감찰(監察)상궁 : 감찰상궁은 궁 안에서 일어난 궁녀들의 음란, 비리, 모함, 사치 등의 모든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또 조사하여 조금이라도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한 궁녀들에게는 가차 없이 처벌하던 상궁.
▶ 일반상궁 : 이상의 상궁들 외에 뚜렷이 직함이 붙지 않은 일반상궁들이 각 처소마다 7, 8명씩 있어서 그 아래의 나인들을 총괄하고 처소마다의 모든 업무를 책임지기도 함. 상궁들은 존칭으로 '마마님'이라 부르는데 민가에서는 대가댁의 소실(小室)을 높이는 말이기도 함.
◈ 세수간(洗手間)상궁 : 세숫물과 목욕물을 준비하던 곳의 책임 상궁으로서, 세수간은 옻칠한 커다란 함지에 따뜻한 물을 담고 목욕을 시키는 일과 내전을 청소하는 일을 함. 한편 세수간상궁은 왕비가 나들이할 때 가마 옆에 서서 시위하는 역할의 중요한 임무도 함.
◈ 세답방(洗踏房)상궁 : 세탁과 다듬이질, 다리미질 그리고 염색 등을 담당하던 일명 빨래방의 상궁.
◈ 복이처(僕伊處)상궁 : 아궁이를 담당하는 곳의 책임 상궁으로, 침실에 불을 때는 것과 내전에 불을 밝히는 임무를 담당하였으며 세답방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임무가 독립적인 기능을 하던 곳.
◈ 침방(針房)상궁 : 왕과 왕비가 옷을 편하게 입도록 하며 또 잘 때는 평안하게 자도록 옷과 이부자리를 만들던 곳인 침방 나인들을 맡아서 총괄 관리 책임지는 상궁.
◈ 수방(繡房)상궁 : 왕과 왕비의 옷에 수를 놓거나 장식물을 놓는 일을 담당한 수방을 총 지휘한 상궁.
◈ 수라간(水剌間)상궁 : 수라간은 소주방이라고도 하였는데, 안소주방과 밖소주방으로 나뉨. 안소주방 상궁은 왕과 왕비의 조석 수라상을 관장하였으며 밖소주방 상궁은 궐내의 잔치와 윗분들의 탄일에 잔치상을 차리며 차례 등도 담당함.
◈ 기미(氣味)상궁 : 왕과 왕비에게 올려진 수라를 곁에서 한 술씩 미리 먹어 보며 검시하던 상궁. 왕과 왕비를 모해하려 함에 혹시나 수라음식에 해가 되는 것이 없는지 확인하던 절차를 담당하던 상궁.
궁녀 중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지밀은 왕을 제일 가까이에서 모시기 때문에 후일 왕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가장 많았다고 함.
나. 나인(內人)
나인(내인)은 관례를 치르고 성인이 된 궁녀를 이르는 말. 원칙으로는 소녀 때에 견습여관(女官)으로 들어와서 15년이 경과되어야 나인이 됨. 왕이 있는 대전(大殿)외에도 왕대비(中殿), 대왕대비, 동궁 그 밖의 왕자, 공주의 궁과 그리고 후궁과 별궁에 소속된 여인들까지 속함. 더욱이 왕의 사친(私親)의 사당(祠堂)을 지키는 이들 까지 포함됨. 즉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궁전을 각전(各殿)이라 하고, 대군, 왕자, 공주, 옹주, 후궁, 신주를 모신 곳을 각궁(各宮)이라 하여 궁인(宮人)이라는 관리를 두고 있음. 왕족들이 사는 궁들은 각기 사유재산과 그밖에 국가에서 내리는 공물(供物)을 가지고 완전히 독립세대를 이루고 있으므로 그 궁에 소속된 나인들은 물론 그 궁에서 보수를 받음.
▶ 지밀(至密)나인 : '지밀'은 대궐에서 가장 지엄(至嚴)하고 중요한 곳으로 말 한마디 새어나가지 못한다는 뜻. 왕내외가 거처하는 궁궐 중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침전 (寢殿)을 말함. 이들은 우선 왕과 왕비의 신변보호 및 기거(起居),침(寢), 식(食), 의(衣)등 일체의 시중과 물품관리 및 내시부(內侍府), 내의원(內醫院), 내선사(內膳司) 들과 중요한 교섭을 담당함.
▶ 소주방(燒廚房)나인 : 수라간(水剌間)은 소주방이라고도 하며 안소주방과 밖소 주방으로 나뉨. 안소주방(內燒廚房)나인은 왕, 왕비의 조석 수라상을 관장하며 주식에 따르는 각종 찬품을 맡아 함. 밖소주방(外燒廚房)나인은 궐내의 대소잔치는 물론 윗분의 탄일에 잔치상을 차리며 차례, 고사 등도 담당함.
▶ 생과방(生果房)나인 : 후식에 속하는 것, 즉 생과(生果), 숙실과(熟實果), 조과(造菓), 차(茶), 화채(花菜), 죽(粥) 등을 만듦. 조석 수라상은 소주방나인을 도와서 거행하며 잔치음식의 다과(茶菓)류는 이곳에서 관장함.
▶ 퇴선간(退膳間)나인 : 지밀에 부속되어 있는 중간 부엌인 퇴선간에서 수라를 지으며 안소주방에서 운반한 음식을 다시 데워서 수라상에 올리고 수라상 물림을 함.
다. 그 밖의 궁중에서 일하는 여인들
(왕의 승은을 입는다면 단연 종4품 숙원으로 봉해짐)
▶ 무수리(水賜伊) : 각 처소에서 물긷기, 불때기 등 험한 잡역을 맡아하는 여인이라 대개 기혼자로 아침저녁 출퇴근함. 앞에 패(牌)를 달고 다니는데 이 패는 조석의 대궐 통근과 각 별궁간 심부름 다닐 때 아무 때나 드나들 수 있는 신분증과 같은 것.
▶ 의녀(醫女) : 여의(女醫)라고도 하며 여러 읍의 비(婢) 중에서 뽑아들여 간단한 진맥이나 침술법을 가르치는 여인들로 출산 때 조산부 노릇까지 하였고 궁중 잔치에 춤을 추는 기생 역할도 하여서 일명 약방(藥房)기생이라 불리었고 여자 죄인을 잡아가는 등의 여순경 역할도 함.
▶ 비자(婢子) : 붙박이로 각 처소나 상궁의 살림집에 소속된 하녀. ▶ 각심이(손님방아이, 방자) : 나인들 살림집의 가정부 격인 여인들.
2) 기녀
조선시대의 관기의 설치 목적은 주로 여악(女樂)과 의침(醫針)에 있었음. 연회나 행사 때 노래 ·춤을 맡아 하였고, 거문고․가야금 등의 악기도 능숙하게 다룸. 관기는 지방관아에도 딸려 지방관의 위락(慰樂)의 대상이 되기도 함.
중종 때는 사회 풍기에 관해서 여러 가지 규제를 하는 가운데 의녀 · 창기의 연회 참여를 금지시킨 일이 있는데, 중종은 연회를 할 때 의녀나 창기를 부르는 것을 엄금하도록 사헌부에 명령하고 절목을 만들도록 함.
위반자는 물론 의녀나 창기도 중벌로 다스리도록 함. 그러나 잘 지켜지지 않음.
(1) 기녀의 변천 경위 : 기녀는 의약이나 침선의 기술, 가무의 기예를 배워 익혀서 나라에서 필요할 때 봉사하던 여성들. 대체로 남녀의 접촉을 금하는 유교적 질서 속에서 남성들의 접근이 허용될 수 있는 천인 계층에 속함. 남성들의 잔치에서 흥을 돋구고 위안하는 구실을 겸함. 궁중내의 잔치와 외국사절을 환영하는 잔치에 필요한 여악(女樂)의 담당자로서 기녀를 둠. 그러나 기녀들 중 일부는 사대부나 변경 지방 군사들의 위안부로서의 구실을 맡음.
의녀가 기녀의 역할을 담당하여 약방기생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기도 함. 조선왕조에서는 기녀의 폐지에 대한 논의가 여러 번 있었으나 폐지되지 않음. 오히려 시대가 내려올수록 기녀의 수는 더욱 증가하여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문제를 파생시킴.
연산군대는 전국에서 기녀를 뽑아 올렸고(흥청, 광희) 그들의 생계와 치장을 위해 세금을 늘려 농민과 수공업자들이 큰 피해를 받음. 기녀는 신분상으로는 천인이고, 관비(官婢)에 속해 있었으며, 기부(妓夫)가 있었음.
기부는 대체로 기녀의 의식주를 주선하면서 동거생활을 함. 기부들이 거느린 기녀는 다만 국가에서 주어진 임무만 다하고 일반 사회에는 기예만을 팔고 매음 등은 하지 않음.
기부가 제도화된 것은 국가에서 기녀를 보다 철저하게 파악할 수 있고, 기녀의 생계가 보다 안정성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 기부의 신분은 대체로 천인, 시대가 내려오면서 각전의 별감, 포도청의 군관, 궁가의 청직이, 무사 등 신분층이 한정됨. 기녀의 종류와 등급도 세분화.
고종대에는 상류사회의 연회에 참석하였던 기생인 일패(一牌), 기생출신으로 남몰래 매춘한다고 하는 은근자(殷勤者)인 이패(二牌), 매춘 자체가 직업인 탑앙모리(搭仰謀利)라고 불리는 삼패(三牌)로 구별됨.
(2)기녀의 인간상 :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났던 곳으로는 서울· 평양 ·성천· 해주 · 강계·함흥· 진주· 전주·경주 등. 시 등 문장으로 유명한 명기로는 황진이· 매창· 소백주 등이 있으며 충절로 유명하기는 , 평양의 계월향, 진주의 논개, 가산의 홍련 등. 만향과 같이 부모를 극진히 봉양한 효녀. 홍낭․춘절․ 유지 등과 같이 인연을 맺은 한 남자를 위해 수절하여 절개를 지킨 기녀. 남자를 패가망신하게 만들고 조롱하고 기만하는 기녀 등 다양함.
(3) 기녀의 특기 : 기녀는 천민에 속하지만 시와 서에 능한 교양인으로서 대접받는 등 특이한 존재. 기녀를 관장하는 기관으로는 기생청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가무 등 기생이 갖추어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시· 서화 등을 가르쳐 그들이 접대하는 상류 사족층의 교양과 걸맞게 연마시킴.
기생청은 후에 권번으로 개칭되어 기생청의 기능을 맡았거니와, 서울과 평양에는 기생학교가 있어 15세에서 20세까지의 처녀를 입학시켜 가무 외에 예의 · 서예 등을 가르쳐 예능과 교양을 겸비하도록 함.
시가나 서화에 능하거나, 악기나 가무에 능하거나, 또는 재치 있는 말씨나 유머를 잘하여 명성을 남김. 특히 미모에 여러 가지 특기를 겸비한 기녀는 명기로서 이름을 떨치기도 함.
지방에 따라 기녀들이 공통적인 특기가 있었는데, 경상도 안동의 기녀들은 대학 을 곧잘 읊었고, 관동의 기녀들은 송강 정철의〈관동별곡〉을, 함경도 영흥의 기녀들은〈용비어천가〉를, 평양의 기녀들은 정조 때 시인 신광수가 지은〈등악양루탄관산융마시 登岳陽樓歎關山戎馬詩〉를 많이 읊었다 함.
평안도 의주 및 함경도 북청 기녀들은 말달리며 재주를 보이는 기예를 지니고 있었고, 제주도의 기녀들은 말을 잘 달리는 특기를 가짐.
3) 의녀
(1) 설치 경위와 교육 내용 : 여성들의 질병 치료를 위해서 의녀의 설치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태종 6년 허도의 건의로 동녀(童女) 수십 명을 뽑아 맥경 ․침구의법을 가르쳐 제생원에서 사무를 맡아보도록 한 것이 의녀제도의 시초. 필요성은 증가하였는데 공급이 따르지 못하여, 점차 의녀의 수를 늘려나감.
세종 때까지는 중앙에서만 실시되었고, 지방에서도 필요하게 되자 지방에서 10세 이상의 영특한 동녀를 뽑아 제생원에서 교육을 시킨 뒤에 지방에 돌려보내 질병을 치료하게 함. 그런데 지방 의녀제도는 제도적으로 실시되지는 못했고, 세종 17년을 전후해서야 의녀제도가 전국적인 규모로 실시됨.
세종 16년 의녀들에게 1년에 두차례 사미(賜米)가 결정되는 등 국가에서 일정한 보수를 받았고, 필요성과 교육성과가 늘어남에 따라서 더욱 조직적이고 철저한 교육방침을 세움.
세조대에는 제생원을 혜민국에서 병합하면서, 의녀교육도 혜민국에서 맡았고, ‘의녀권징조건 醫女勸懲條件’을 제정하여 학업성적에 따라 포상하고 징계하는 조처를 취함. 성종대에는 ‘의녀권과조 醫女勸課條’라 하여 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학습 장려책이 제정됨. 이러한 체계적인 교육방침에 의해 의녀들은 의학뿐만아니라 일반교양에서도 높은 지식을 쌓아갈 수 있었음.
(2) 제도상의 정비 : 의녀의 출신 신분은 관비. 의녀를 내의· 간병의 ·초학의 등의 3종으로 나누고 급료를 구분하여 의녀의 과업을 권장함. 성종대에는 먼저 사서를 읽히고 그 뒤에 의술을 가르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고, 『경국대전』에는 의녀의 학업 권장과 선상을 조문화하고 있다. 우수한 3명에게는 월료를 석달동안 지급하고 성적이 나쁜 자는 다모로 삼았다가 성적이 좋아지면 다시 의업에 종사하게 한다고 하였고, 여의 70명을 3년마다 선상하도록 규정함.
영조대에 제정된 『속대전』에는 의녀를 내국 여의, 혜민서 여의로 양분하여 그 인원을 정하고, 그 장권(獎勸)의 방법도 달리함. 내국 여의는 궁중에 출입하며 왕비나 대비 등 왕실 여성의 질병 치료에 종사하였고, 혜민국 여의는 일반 부녀의 질병 치료에 종사함. 왕실의 존귀한 여성을 치료하기 위한 내의녀 선택을 성종대부터 체계 화시켜, 마음씨 등 인물 선정에 꽤 신경을 씀. 내여의는 조선왕조 말기까지 제도적인 시행을 봄.
(3) 의녀의 활동 : 의녀들은 여성들의 질병 치료와 함께 그 질병의 유무를 조사하는 임무도 띰. 의녀가 독자적인 활동을 할 수는 없었음. 여성 환자를 직접 대면하여 증세를 진찰하는 것은 의녀가 하더라도, 그 환자에 대한 처방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 의원이 맡음.
그러나 남자의원이 여성 환자의 환부를 직접 만질 수 없었기 때문에, 치통․종기등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질병은 직접 치료하였고 시침(施針)하는 일도 직접 함.
이밖에 교육과정에 산서 産書 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여성들의 해산에 조산원의 구실도 맡음. 질병 진단, 간호, 조산, 특수한 분야의 치료 등 의료 활동 이외에 의녀들은 의학적 지식이 필요한 다른 임무도 맡음.
법적으로 가려낼 수 있는 신체상의 이상 여부라든가, 여성 죄인에게 약을 내려 죽일 때에 그 임무마저 맡음.
의녀들은 책을 읽어 지식층에 속하며, 전문직 여성. 그러나 출신이 관비인 만큼 성종 말경부터 기생들처럼 연회에 불려나감. 연산군 때에는 더욱 심해짐. 중종대에는 대소 연회에 의녀를 초치하는 것을 법으로써 엄금하고 그 후에도 수차에 걸쳐 의녀들과의 향음 하는 것을 계속 금지. 의녀들로 하여금 창설 당시의 본업에 돌아가도록 엄중 단속함. 그러나 연산군 때 한번 흐려졌던 의녀들의 풍기는 갑자기 시정되지 않고 의녀들은 부인들의 의료와 간호에 종사하면서 한편으로는 여전히 주연에 참석함. 그리하여 약방기생이라는 이름으로써 공공연하게 의료와 함께 가무를 병행하게 되었던 것.
부호들의 혼수가 극히 사치하다 하여 혼가 납채일에 의녀를 보내어 그 물품들을 검찰하게 함. 궁중이나 사대부 집안의 여성에 관한 범죄를 수색하고 죄인을 체포하기도 함.
4) 무녀
무녀는 선령(善靈) ·악령(惡靈)과 직접 통하며 그들을 다룰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지녔다고 하여 인간과 신의 사이를 연결해 주는 일을 직업적으로 함. 인간의 모든 화복(禍福)은 신의 뜻에 따라 좌우되므로, 재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무녀들을 통하여 신과 접촉하여 재난을 미리 탐지하고 방지한다고 생각. 질병· 흉사 등의 근원이 되는 악령을 구축하는 일을 담당함. 무녀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신을 통하여 판단하는 길흉점복(吉凶占卜)의 예언자가 됨.
무는 무당과 박수로 나뉘고, 무당은 무당의 정통인 숙련된 큰무당[大巫] 또는 단골무당과 미숙한 선무당으로 나뉨. 단순히 무당이라 하면 여무(女巫), 특히 가무로써 강신(降神)하는 무녀를 뜻하나, 일반적으로 남무· 여무 구별없이 씀.
(1) 무녀의 존속 경위 : 모든 신을 섬긴다는 의미에서 만신이라고도 함. 무녀의 폐단에 대해 대책을 강구하여, 세종대 도성 내의 무녀들을 성 밖으로 축출하였고, 또 무녀가 중심이 되어 행해지던 야제(野祭)와 산천․ 성황에서의 제사를 금지함. 그러나 무속은 수그러지지 않았고, 국가에서 인정하는 국무(國巫)가 엄연히 존재함. 이들은 왕이나 세자가 병들었을 때 병이 낫기를 기도하거나, 가뭄이 들 때 기우제를 지내기도 함. 궁중을 출입하면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함.
국가에서는 무녀의 존재는 인정하되, 무녀로 인해 파생되는 사회적 물의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임. 국무를 제외한 무녀를 모두 동서활인원에 소속시켜 병든 사람을 치료하게 함. 이에 대한 반대 의견, 성중의 무녀 축출 등이 제시되기는 하였으나, 별로 실효가 없었고, 조선왕조 말기까지 사실상 무녀의 성안 거주가 가능. 그 이유는 정신적인 이유로서, 무속의 영향을 계속 받아왔으므로 큰 일이 있을 때 무속신앙에 의해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함.
국가에서는 표면상으로는 무속을 금지하면서도 기우제· 기양제(祈禳祭)에 무녀를 불러들여 제사를 집행하게 하였고, 궁중 여인들은 국내 명산에 무녀를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기도 함. 무당에 대한 인식은 민간신앙으로까지 깊이 뿌리내림.
(2) 무녀의 실태 : 무속신앙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서 크게 성행하였는데, 송악의 무속은 신사(神祠)를 중심으로 번창함. 이에 무녀들은 많은 재물을 모을 수 있었고, 국가에서는 이들에게 무세(巫稅)를 부과함.
세종 5년까지는 무세를 가혹하게 징수함. 무세는 무녀의 원공(元貢)인 정포(正布) 1필이 조선후기까지 존속됨. 서울에서는 동서활인서에서 무녀들을 파악하여 무세를 부과했으며, 지방에서는 관청별로 무세를 징수함. 그리고 여러 가지 명목의 잡세가 첨부되어, 신당세포(神堂稅布)․퇴미세(退米稅) 등을 징수함.
무녀는 수입이 많았고, 무녀의 수도 전국적으로 매우 많았음. 목민심서 에서 「세집이 있는 마을에도 모두 무녀가 있다」고 할 만큼 무녀가 민간에 고루 퍼져 있음. 무녀들이 여러 가지 무속행사를 통하여 사람들의 재물을 차지하여 치부하는 사례도 자주 보임.
(3) 왕실과 무녀 : 중앙의 궐내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무(主巫)가 있었음. 궁중에 출입할 수 있는 무녀의 주무를 ‘국무’ 또는 ‘국무녀’, ‘국무당’이라고 불렀고, 주읍(州邑)의 주무를 ‘내무녀(內巫女)’ 혹은 ‘내무당(內巫堂)’이라고 함.
국무는 중앙의 성숙청(星宿廳)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아래 많은 무녀를 거느리고 국가나 왕실의 무속 행사에 동원됨. 성숙청에 소속된 무녀들은 주로 기우제 등에 빈번하게 동원됨. 그리고 국왕이나 왕실 가족의 병을 물리치기 위해서 고사를 지냈고, 복을 빌기 위해서도 동원됨.
무녀는 신분상 천인 계층에 속해 그 소생이 관원이 될 수 없었지만, 궁중에서 신임을 받게 되면 부귀영화는 물론이고 그 소생까지 고관이 되었던 경우가 있음. 또한 무녀들은 특정한 인물을 위해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행사도 서슴치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