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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양지쪽에 구두수선, 지게꾼, 잡상인과 많은 사람이 모여있다.
1949년 서빙고로. 좌측의 철길이 보이 않지만 그 너머는 이촌동 우측은 미8군 이고, 길의 앞방향은 용산
1949년 짐의 주인을 따라가는 지게꾼. 담장 너머에 미 8군 트럭 천막이 보인다.
1949년 지게위에 짊어진 짐은 삶의 무게로 느껴진다. 힘들어 잠시 쉬어가기로...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나기 전의 서울의 생활상은 이상(1949년 컬러사진)과 같았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으나 자주 독립이 아닌 외세의 힘으로 되었기에 강대국의 논리도 땅의 한 가운데를
갈라 놓고 미, 영, 소, 중국은 자립을 할때까지 5년간 신탁통치를 하겠다고 결정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공산당등 좌익은 찬탁을 임시정부측은 결사반대로 좌우의 제휴에 의한 민족통일 공작은
절망적인 것이 되었다. 건국문제는 유엔으로 넘어 갔다. 영국 중국은 빠지고 미소 공동위원회가 북쪽은 소련군정이
남쪽은 미군정이 계속되며,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정부수립을 할려는 계획은 어렵게 되자 1948년 5월 10일 남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8월 15일에 남한 단독 정부 ‘대한민국’ 을 수립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북한에선 다음 달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란 사회주의국가를 수립했다.
우리나라는 전쟁을 할만한 여력이 없었으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늘 버릇같이 북진통일 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아무것도 준비 해 둔것도 없이.. 오히려 저들에게 자극만 주고 빌미를 준게 아닌가...
그러나 저들(북)은 해방 되고서 부터 적화야욕을 위해 전쟁준비를 해 놓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해방이후 각종 사건으로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울때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경제와 군사적 원조를 받아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공산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항일전에 이어 내전에서 모택동에게 패배한 국민당 장개석
정부는 1949년 12월 7일대만으로 쫒겨나고 중국대륙은 모택동의 공산당 정권이 지배하게 되어 중국대륙은 소련에
이어 거대 국가가 공산화가 되었다. 이무렵 후에 한국전을 발발케 했다는 비난을 받은 선언이란 것이 있었다.
1950년 1월 12일에 미국 국무장관이 '에치슨 라인'을 선언했다.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측의 동북아시아 방위선을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으로
한다는 것이였다.
그 결과로 한반도와 대만이 미국의 방위에서 제외 되었다. 여기에서 전쟁이 발발해도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북한에 심어 주게되어 김일성의 적화야욕에 힘을 실어주게 되었고, 그 선언이 있기 전에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계획을 수십번 재가 받으려고 했으나 무산되었지만 김일성의 강력한 의지를 꺽지 못하고 이를 승인하게 되었고
1950년 5월엔 모택동이 전쟁발발시 미국이 참전하면 중공군을 파병하겠다고 언급했다.
전쟁발발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 우리 군은 북한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받고도 비상 경계를
해제하고 전방 사단장까지 참석한 장교파티를 갖는 등 상식 밖의 행동을 했다. 일요일인 25일 새벽 4시 고요했던 38선
전역에서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일제히 밀고 내려왔다.
6.25 사변, 즉 한국전쟁이 시작되며 전쟁초기 우리나라는 치욕적인 패배를 이어 갔다.
1950. 6. 18. (6.25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 (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
(덜레스 오른쪽이 신성모 국방장관).
1950. 6. 18. 미 국무장관 덜레스 일행이 38선 접경지대를 살피고 있다.
해방 후, 소련은 자기네들이 구상하는 사회주의 국가로 끌어 들이기 위해 북한에 지속적으로 군수물자를
지원한 까닭에 북한은 남한과는 다른 아주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 군이 우리에게 군수물자를
제공하지 않은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평소에 전쟁을 해서라도 통일을 해야 한다는 말을 늘 해왔기 때문...
아래의 “전쟁의 전개과정”을 보면 사진 순서대로 보는데 도움이 될것입니다
1950. 6. 25 북한군의 남침
1950. 6. 26 유엔안보리 , 북한군 침공중지 결의
1950. 8. 1 미 제 8군사령관,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명령
1950. 8. 5 인민군의 8월 공세 시작
1950. 8. 16 B-29 폭격기 융단폭격
1950. 8. 31~ 9. 8 인민군의 9월 공세
1950. 9. 15 인천상륙작전
1950. 9. 28 수도 서울 탈환
1950. 10. 1 국군, 38도선 돌파 북진
1950. 10. 25 중공군, 제1차 공세 개시
1950. 10.26 국군, 압록강 초산 도달
1950. 11 21 미 제 10군단, 두만강 혜산진 진입
1950. 12. 15 ~24 흥남철수 단행
1951. 1. 4 후퇴
1951. 3. 15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
1951. 4. 12 맥아더원수 해임, 리지웨이 장군 유엔군사령관 임명
1951. 6. 23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
1951. 7. 10 개성에서 휴전회담 개시
1951. 10. 25 휴전회담장 판문점으로 이동
1951. 10. 28 군사분계선 설정 합의
1951. 12. 18 쌍방 포로명단 교환
1953. 4. 20~26 부상병 포로 교환
1953. 6. 8 포로 송환문제 타결
1953. 6. 18 이승만 대통령, 전격적 반공포로 석방
1953. 7. 27 휴정협정 조인
1950. 6. 25 새벽 4시 북한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38선 전지역에서 일제히 남침을 감행했다.
6.25 당시 38선 철조망을 자르는 인민군 병사의 모습. <정성길 계명대 명예박물관장, 2009년 공개사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38선 전역에 걸처 비밀리에 배치해 있던 북한군은 '폭풍'이라는 남침개시 암호를
하달받은 북한군은 일제히 포격을 개시하였고 동시에 보전합동으로 38도선을 넘어 불법 남침하기 시작했다.
{보전 - 보병, 전차(탱크)를 일컷는 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전격적인 공격을 가해 왔다. 민족의 대참극을 빚었던
6·25전쟁의 시작이다. 북한군 부대원들이 인공기를 세워 든 채 공격하고 있는 모습. 장소는 알려지지 않음.
[중앙포토]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4005615
남하하는 북한군 소련제 탱크
남하하는 북한군 탱크. 다른종류
1950. 6. 25 북한군의 기습 남침.
1950. 6. 25 남하하는 북한인민군
1950. 6. 28 북한군 점령직전의 을지로.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서울로 들어오는 북한군
서울 사수의 마지막 저지선인 미아리 청량리 방어선은 대체로 27일 밤중에 무너졌다.
북한군은 38선을 돌파한지 불과 60영 시간만에 T-34탱크를 앞세우고 서울 인근에 왔다.
우리 국군은 북한군 탱크를 저지 할만한 장비나 무기는 없어 계속 밀리다가 미아리가 뚫리고
적의 탱크가 서울 시내 한복판 들어 왔다. 서울에 맨 처음 돌입한 북한군 부대는 제 105 전차 여단과
이권무가 이끄는 제 4사단의 18연대 였으며, 제 18연대는 그 본부를 덕수궁에 두었다.
이어 이영호가 이끄는 제 3사단이 입성하였으며, 방호산의 제 6사단은 서울로 들어오지 않고
곧바로 나아가 7월 3일에 인천을 점령했다. 북한 인민군 최고 사령부는 서울시내에 제일 먼저 돌입한
제 4, 3사단에게 7월 5일 서울사단이란 명예칭호를 부여 하였다. <책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1950. 6. 28 태평로를 지나 남대문 방향으로 향하는 북한 인민군 탱크.
1950. 6. 28. 서울시청 앞을 지나며 세종로로 향하고 있는 인민군의 소련제 T-34 탱크
1950. 6. 28 서울로 들어온 북한 인민군.
1950. 6. 29. 수원비행장을 공습한 북한공군 IL-10 지상공격기에 의해 파괴된 미공군 C-54 수송기.
1950. 6. 29. 수원비행장의 맥아더 장군과 전용기 C-54E Bataan
1950. 6. 폭파 전의 전의 한강철교.
왼쪽은 복선 다리이고 오른쪽 두개의 다리는 각각 단선철교이다. 노량진에서 강북방향을 보고 촬영한 사진
1950.7. 초. 미 공군이 미처 끊어지지 않은 단선 철교를 폭파하는 모습을 정찰기가 찍은 사진.
오른쪽은 우리측에서 먼저 폭파한 한강인도교(현 한강대교) 모습이다.
1950. 7 단선 한강철교 폭파 후의 모습. 왼쪽 복선철교는 비교적 온전한 모습. (항공촬영)
1950. 7. 7.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전쟁 유엔파병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1950. 7. 7. 기마대 행렬.
1950. 7. 한미 수뇌부들이 환담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병옥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무초 주한 미대사, 임병직 외무장관, 워커 주한 미군 사령관).
1950. 7. 6.25전쟁이 터지자 자원입대한 청년.
1950. 7. 대전 시가지 모습.
1950. 7. 대전에서 철수하는 국군과 경찰.
대전 전투(大田戰鬪)는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7월 14일~7월 21일까지 대전에서 벌어진 전투로 미군은
20일까지 대전을 지키는데에는 성공을 했지만,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과 전투다운 전투를 하지 못하였고,
배후를 봉쇄한 인민군에 의하여 계획대로 퇴각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철수했다. 북한군 전차를 격파
할 수 있는 셔먼전차와 미국에서 공수된 3.5인치 로켓포를 처음 이용하여 전투를 치를 수 있었고, 미군은
3.5인치 로켓포로 인민군의 탱크를 처음으로 저지할 수 있었다. -위키백과-
1950. 7. 중순 대전에 진격한 북한군 T-34 탱크. 건물에 인공기가 계양되어 있다.
구형, 대전차 화기 2.36인치(50.95mm)로켓포.
3.5인치 로켓포(일명 바주카포)를 조준하고 있는 미군 병사.
사수 앞 좌우에 로켓포탄이 보인다. 사수는 표적을 향해서 조준하고 부사수는 후미에서 포탄을 장전하고 준비
됐다는 신호로 사수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고 포의 격발시 사진에서와 같이 사수 옆에 나란히 있어야 된다.
무반동으로 발사 되지만 후폭풍의 위력이 대단하다. 발사 후 적에게 노출되기 쉬워 자리를 이동해야 된다.
교육당시에 들은 3.5인치 로켓포와 관련된 6.25때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글이 길어져 생략...
6.25 전쟁초기 북한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서울로 입성하는데 단 3일 정도 밖에 걸리지 않을정도로
속수무책이였다. 이에 대적 할만한 대전차 화기가 없던 우리국군은 서울이 점령 당할 무렵에 춘천 등지의 전투
에서 필사적으로 싸우고 육탄으로 돌격하여 적의 탱크를 파괴하기도 하여 적의 남진을 지연 시키다가 서울 방어
선이 무너졌다는 정보에 남쪽의 충주로 후퇴 했다. 서울이 점령당할때 까지 적절한 대전차 화기를 장비하지 못하
고 있던 미군은 대전 전투부터 적의 T-34 탱크를 파괴 할 수 있는 3.5인치 로켓포(일명 바주카포)를 처음 사용하
기 시작 했다. 이화기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부터 개발되어 왔으나 로켓탄이 완전히 개발된 상태가 아니었는데
극동군 사령부의 긴급 요청으로 첫 발주품의 로켓탄이 7월 10일에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에서 3.5인치 로켓포는
8대의 적 T-34 탱크를 파괴 하였다. 또한 105mm곡사포의 직사로 2대, 20일 오후 항공기 공격으로 10대를 포함
하여 모두 20대의 T-34 탱크가 대전 전투에서 파괴된 것으로 추산되고, 한국전쟁 기간 중 3.5인치 로켓포 대전차
화기의 위력은 적의 탱크 및 기계화 부대를 제압하는데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1950. 7. 20. 대전 전투에서 파괴된 북한군 T-34 소련제 탱크.
(탱크의 페인트로 된 문자는 미군이 대전차 화기로 제압한 날짜와 소속부대를 쓴것임
1950. 7. 20 대전 전투에서 파괴된 북한군 T-34 탱크 (위사진과 같은날 미군으로 부터 공격당한 탱크)
대전 전투에서 파괴된 북한군 T-34 탱크
1950. 7. 26.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는 중, 종군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워커 장군.
철모르는 꼬맹이가 저도 짐을 지고 가겠다고 해서 지팡이로 살짝 들어주며 가고있다.
1950. 7. 27. 맨발을 한 소년이 지게에 피난봇짐을 지고 카메라를 보고 있다.
1950. 7. 29. 경북 영덕의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
1950. 7. 29. 경북 영덕의 피난민 행렬.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 수로에 머리를 쳐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군인들에게 나눠 줄 주먹밥을 만들고 있다.
1950. 7. 29. 야간 전투 후 주간 취침.
1950. 7. 29. 계속되는 전투에 지친 심신을 이렇게 라도 달래야 했다.
사다리 위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 한 병사는 위장한 철모를 가슴에 올려놓고 다리사이에
개인화기를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 학도병 모습도 보인다.
1950. 한국전쟁 때 ‘북한인민 의용군’ 으로 끌려간 장정들.
1950. 7. 29. 안동군민의 피난 행렬.
1950. 8. 3. 부산. 부산항과 영도 모습.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
1950. 8. 8. 복중 불볕 더위에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
6.25 전쟁- 해방에서 서울수복까지 [3] 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