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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건학 100주년 기념 국제 학술대회
생태위기의 근원에 대한 철학자들의 입장은 공해물질이나 토양오염과 같은 현상을 넘어 사람들의 생활양식이나 가치관과 같은 철학의 위기로 진단한다. 생태계 파괴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내면적 문제로부터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욕지족(小欲知足)을 내세우며 욕망의 절제를 강조하는 불교적 전통을 통해 생태적 대안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주관으로 지난 2006년 5월 25일부터 이틀 동안 동국대 예술극장에서 진행된 국제학술대회는 바로 이 같은 학계의 흐름을 반영하는 학술행사로 손꼽을 수 있다. 동국대학교 건학 100주년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번 학술대회는 ‘지식기반 사회와 불교생태학(Ecology and Buddhism in the Knowledge-based Society)’이라는 주제 아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요한 갈퉁, 데미언 키온 등 10여 개국의 관련학자 21명이 참석해 생태위기 극복을 위한 불교적 대안을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최근 몇 년 동안 동국대학교에서는 불교적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통해 인류의 당면 과제인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학술적 접근을 시도해 왔다. 수년간에 걸쳐 불교생태학 학술세미나를 개최해 온 것은 물론 미국의 하버드 대학, 영국의 런던 대학 등 해외 대학들과 공동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불교생태학 총서 시리즈를 발간해 왔다. 이번 국제학술대회는 불교생태학이라는 이름 하에 진행된 이 같은 학문적 성과를 점검하고 미래 지향적 불교학의 초석을 다지고자 하는 자리로 평가 받고 있다.
이번 호 세미나 중계실에서는 ‘지식기반 사회와 불교생태학’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 가운데 국내 학계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없는 외국 학자들의 논문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빈곤과 불교적 생활방식-세계화 경제에 맞선 불교적 대응
헬러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Hodge : 국제생태문화협회장)
1946년 스웨덴 生. 철학, 심리학, 예술사 등을 전공한 호지는 6개 외국어에 익숙한 언어학자로 1975년 당시 런던대 동양언어학과 학위논문 준비를 위해 티벳 망명정부가 자리한 인도 북부의 라다크를 처음 방문했다. 1977년에는 미국 MIT에서 노암 촘스키로부터 언어학을 배우기도 했다. 이후 16년 동안 라다크에 거주하면서 서구의 영향을 받은 이 공동체가 파괴되는 과정을 목격한 노르베리-호지는 1992년 『오래된 미래』를 펴냈다. 이보다 앞서 1980년에는 ‘라다크 프로젝트’라는 국제조직을 만들었으며 1986년에는 대안적인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바른 생활상’(Right Livelihood Award)를 수상했다. 1991년에는 영국 브리스톨과 미국 버클리에 ‘생태·문화 국제협회(ISEC, International Society for Ecology and Culture)’를 결성했다. 『오래된 미래』, 『허울뿐인 세계화』등의 저서가 있다.
자연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과 경험은 개인들의 삶에서 윤리적 결정을 위한 토대를 제공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런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다. 불교는 생명에 관한 것으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특징짓는 무상성과 상호의존성에 관한 것이다.
한편, 현대 산업세계에서 복잡한 기술과 대규모 사회적 제도는 인간과 생명세계 사이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근본적인 분리로 이끌었다. 우리 행위가 자연과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아는 것을 점점 어렵게 했다.
이런 형태의 분리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본질적으로 반대되는 파편화된 세계관으로부터 유래하고 또 그것을 반영한다. 그래서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구조와 제도는 무지와 탐욕의 물화-상호의존과 무상의 부정-들이 됐다. 때문에 경제적 세계화는 다른 사람들과 자연으로부터의 분리를 추동하는 주된 힘이다.
청빈과 자발적인 검소함에 대한 서약은 수천 년간 불교적 수행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경제에 의한 빈곤은 정신적이고 자비로운 수행이 아니다. 환경파괴, 사회적 붕괴, 테러리즘과 함께 오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불교적 실천이 고통을 덜어준다면, 세계경제를 변화시킬 것이다. 이에 앞서 1970년대 초 인도 히말라야의 고립된 불교도 지역인 라다크에서 지내면서 얻은 교훈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하려고 한다.
라다크에서 배운 것들
인구 5천 명인 수도 레(Leh)의 라다크 사람들은 자급적인 농부들이다. 완만한 속도로 일을 했고 상당한 정도의 여가를 즐겼다. 이들의 오래된 문화는 자연적 한계를 존중하면서도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를 충족시켰다. 전통적인 체계 내의 다양한 연결 관계들은 조화와 안정성을 상호적으로 강화하고 북돋워주었다.
또 라다크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모든 것을 재활용했다. 또 의식주가 화폐 없이 제공되었다. 오랫동안 형성된 인간 관계망의 일부였다.
라다크에 도착할 무렵에 인도 정부는 라다크 개발계획을 시작하면서 삶의 모든 측면들과 얽혀있는 지역 경제는 해체되어서 인도의 화폐경제와 세계시장에 통합됐다.
새로운 경제에서 직업과 건강관리와 교육은 자본에 집중되었다. 이런 교육은 사람들을 이농현상을 부채질했다. 협업과 물물교환보다 화폐가 새로운 경제의 토대가 되었다. 곧 실업과 빈곤, 오염과 다른 공동체들 사이의 갈등이 나타났다. 증가된 경제적 압력(실업과 경쟁), 종교간 긴장은 1989년 폭력적인 충돌로 이어졌다. 원인은 지역 자원들과 지역적 지식에 근거한 경제가 외부 자본과 기술에 근거한 세계경제로 이행했기 때문이었다.
세계적 빈곤의 창조
‘자유무역’ 협정들과 세계화를 통해서 단 하나의 경제 체계가 전 지구를 집어삼키고 있다. 이 체계는 인간의 필요와 동기에 대한 매우 협소한 관점에 근거하고 있다. 전적으로 화폐 거래에만 관심이 있고 가족, 공동체, 의미 있는 노동 또는 영적인 가치들과 같은 삶의 비물질적 측면들은 대체로 무시한다.
세계화된 경제는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비스코의 회장은 그것을 ‘동질적인 소비의 세계’-모든 곳의 사람들이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재료로 지어진 집에서 사는 세계-라고 정의하고 있다. 실제로 세계화는 문화적 다양성의 파괴를 의미한다. 단일문화ㆍ단일작물재배(monoculture)를 뜻하기도 한다. 문화적 다양성은 지역적 환경과 살아있는 세계와의 반영이다.
그런데 경제적 세계화가 그 과정을 더욱 빠르게 가속화하고 있다.
세계화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자원에 의존하게 만들기 때문에 기업을 위해서는 이윤을 만들어내지만 소비자들에게는 인공적 희소성을 만들어내고 경쟁을 고조시킨다. 이런 상황은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격차를 확대한다. 경제적 빈곤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문화적이고 심리적인 빈곤도 만들어낸다.
모든 서양정치가들은 세계적 빈곤을 근절시키겠다는 입에 발린 말을 한다. 해결책은 더 나아간 ‘발전’이라고 말한다. 한정된 세계에서 경제적 성장은 다른 쪽에서의 손실을 필요로 한다. 빈국들의 시장을 부국들에 의해 착취되도록 개방함으로써 우리는 식민주의에 의해 시작된 과정을 촉진시키고 있을 뿐이다.
필요한 구조적 변화들
세계경제는 초국적 기관들로부터 동력을 얻고 있기 때문에 가장 긴급하게 필요한 정책 변화들은 국제적 수준의 것이다. 그래서 정책변화에 압력을 가하는 것은 엄청난 과제처럼 보일 수도 있다.
먼저 에너지 발전을 탈중심화 하는 조치들이 이로울 수 있다. 지역적 이용과 갱신 가능한 에너지 공급에 대한 실질적 지원 제공은 돈이 지역경제로부터 ‘유출’되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병행하는 규제 법률의 변화도 의미 있는 체계적 이점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현행의 세금 규제는 소규모 사업들에게 불리하다. 세금체계에서의 편향을 역전시키기 위한 정책들은 지역경제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더 많은 직업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정부들은 자유화와 경제적 세계화에의 개방이 병든 경제를 치료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자유무역정책들을 수용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 정책들이 조세기반을 침식하고, 수많은 사업들을 파괴하며, 광범위한 실업으로 귀결됐다. 때문에 정책결정자들은 세계화의 실제 효과를 자각하고, 자유무역이라는 교의를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 같은 정책 변화들은 경제를 더 완전한 고용과 진정 자유로운 시장으로 이행시킬 것이다.
깊이 들여다보기
기술과 경제적인 급속한 변화는 무상(無常) 또는 자연의 순환과 혼동되기 쉽다. 다양한 경제들을 소위 ‘통일된’ 세계경제 안으로 통합하려는 오늘날의 시도가 불교의 상호의존의 관념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
오늘날 세계적인 소비문화는 개인과 사회 모두에서 탐, 진, 치 삼독을 키우고 있다. 소비주의가 등장하기 전에는 이런 종류의 탐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경제 체제의 덫에 걸린 사람들의 탐욕과 물질주의가 인간 본성의 불가피한 산물이라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그 대신 우리는 소비주의와 사회적 소외의 세계적 문화에서는 우리의 불성(佛性)을 드러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불교는 우리가 타인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공감하고 비폭력적이 되도록 고무함으로써 이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줄 수가 있다. 우리가 단절된 사회, 환경파괴와 세계적 빈곤을 만들어내는 것이 복잡한 세계경제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불교는 우리 자신이나 그 체계 속의 다른 개인들을 비난하는 대신에 체계와 그것의 구조적 폭력에 초점을 맞추도록 도와줄 수 있다.
경제적 집중화가 ‘합일’과 ‘상호의존’의 이름으로 촉진되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도로서 해야 할 첫 번째 조치는 이런 용어들이 낳는 정신적 혼동에 대해 자신과 타인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토론과 정보공유를 활성화시킴으로써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탐욕과 폭력의 체계를 지지하게끔 하는 무지의 층을 제거할 수 있다.
상호의존에 대한 인식
불교가 제시하는 대답에도 불구하고 많은 서양의 불교도들은 뒤늦게야 세계화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효과를 말하게 되었다. 부분적으로는 서양 사람들은 소위 제3세계에 대한 효과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거의 받지 못했다.
계속 팽창하는 세계경제의 범위와 규모는 우리 행동의 결과들을 모호하게 한다. 우리의 상황은 무지를 심화시키고, 자비와 지혜로 행동하지 못하게 한다. 더 작은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행동의 결과들을 알 수 있고 책임을 진다. 또한 더 작은 규모의 구조들은 한 개인에게 부여된 권력의 양을 제한한다.
탈중심화 된 경제와 정치적 구조에서 무상(無常)과 상호의존의 법칙을 무시하기는 힘들다. 공동체에 개인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은 공동체의 변화하는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역동성과 꾸준히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의 철학적 토대와 자비 강조는 더 이상의 세계화에 반대하기 위해 필요한 지적인 도구들을 제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 규모의 구조들에 근거한 지역화를 향한 길을 밝히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지역화와 불교적 생활방식
정부와 산업의 도움 없이도 사람들은 밑바닥에서부터 경제를 불교적 관점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이런 지역화의 과정은 전 세계의 수많은 공동체들에서 자발적으로 시작되었다. 경제적 지역화는 문화적이고 생물학적인 다양성과의 적합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지역 풀뿌리 노력들의 가능성 범위는 지역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풀뿌리에서의 노력 중 하나는 공동체 후원농업(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운동이다. 여기서는 마을과 도시의 소비자들은 직접 근처의 농부와 연결된다. 이런 공동체 후원농업(CSA)은 유럽, 북미, 호주, 일본 전역에서 재빨리 확산됐다.
창의적 조치들은 이웃들과 주변의 살아있는 세계(생명세계)에 의존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깨달음의 반영이다. 이 같은 현실에서 불교도로서 참여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불교는 세계 전체에서 고통을 만들어내고 영구화시키는 경제구조들에게 도전하라는 명령과 도구들을 함께 제공한다. 우리는 불교도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부처의 가르침에 분명히 반대되는 생명 자체에 대립하는 구조들을 지지할 수는 없다.
불교는 그것의 전체론적인 접근을 통해 다양한 징후들이 어떻게 상호 연관되고 우리가 직면하는 위기들이 얼마나 체계적이며 경제적 명령에 뿌리박고 있는지를 아는데 도움이 된다. 지역화는 공동체 안에 자리 잡게 되는 깊은 심리적 이익ㆍ기쁨의 재발견을 포함한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것처럼 정신적 각성은 타인들과 자연과 연결되는 것으로부터 온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세계를 보고, 우리 자신도 그 일부인 거대한 생명의 상호의존적 망을 더 의식적으로 경험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무상과 상호의존의 가르침, 우리에게 타인들, 자연과 현명하고 자비로우며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기를 권하는 원칙들을 ‘경험’한다.
덕의 윤리학과 환경, 최근의 연구 경향에 대한 검토
데이온 키온 교수(Damien Keown : 런던 골드스미스대학 역사문화학과)
PTS(Pali Text Society)의 정회원이자 왕립 아시아 협회(Royal Asiatic Society)의 이사이다. 1951년 영국 출생. 옥스퍼드대 졸업, 92년 옥스퍼드대 인도종교학과 초기불교윤리학연구로 박사학위 취득했다. 현재 런던대 인도종교학과 교수로 재임하고 있으며 불교가 생명윤리학을 강조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웃종교보다 불교가 이런 역할을 할 때 더욱 부각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96년 현대아산재단의 초청으로 방한해 ‘동양전통사상과 불교사상-낙태문제에 대한 입장’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세계적인 불교윤리학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불교윤리학의 본질(The Nature of Buddhist Ethics)》,『The Nature of Buddhist Ethics』(1992),『Buddhism and Bioethics』(1995),『Buddhism and Abortion』(1998) 등의 저서가 있다.
덕 윤리학은 환경윤리학의 새로운 관점과 핵심을 구성한다. 이는 정통 불교의 계통을 지닌 환경문제에 대한 진정한 불교적 해법의 전망을 제시해 줄 것이다. 덕 윤리학은 행위(action)보다는 행위주체(agent)의 역할을 강조하는 관점으로서, (의무론적 윤리학에서의) 규범이나 (결과론적 윤리학에서의) 행위의 결과보다는 개인의 인격에 보다 더 중심을 두고 있다.
덕 윤리학은 행위뿐만 아니라 행위의 주체를 고려할 것을 요청한다. 즉 우리가 어떤 종류의 행위를 해야 하는가 보다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행위는 인간의 인격과 분리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차원에서 고려된다. 덕 윤리학의 기본적인 가정은 권리나 의무, 책임보다도 선(goodness)이 근본적인 고려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덕 윤리학자들은 윤리적인 행위가 특정 규범으로 성문화될 수 있다는 견해를 거부한다.
덕 윤리학의 목적은 인간이 지닌 잠재성의 실현과 이를 수반하는 장기적인 행복에 있다. 때문에 그것이 마치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듯이 보일 수 있다.
그럼 덕의 정의는 어떨까? 덕은 탁월함 또는 목적에의 적합성이다. 덕은 날카롭고 잘 베어지는 칼이다. 고전적 서양 전통에서는 4주덕(主德) 또는 4원덕(元德)을 인정하였는데, 이는 곧 신중(prudence), 정의(justice), 절제(temperance), 용기(fortitude)를 말한다.
덕 윤리학과 환경
덕 윤리학이 응용 윤리학의 여러 분야에서 공헌을 해 왔지만, 생태학과 연계된 연구는 아직 미미한 실정이다. 이는 아마도 덕이 고대의 도덕 체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근대적인 문제에 대응함에 있어서는 무력할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덕에 기반을 둔 생태학이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 것인가? 토마스 힐(Thomas E. Hill Jr.)은 덕에 기반한 환경 생태학을 처음으로 제시한 저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자연환경이 보존되기 위해 요구되는 인류의 이념들에 대해 언급하였고, 환경과 특별히 관련된 몇 가지 덕을 밝혀내었다. 특히 그는 겸양과 감사, 자기관용 등의 개념을 자연에 대한 관심과 이해에 연관시켰다.
저프리 프라즈(Geoffrey Frasz)는 ‘겸양’을 그 맥락에 맞도록 적절하게 판단하고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힐이 제시한 겸양의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는 이 덕을 ‘개방성(openness)’이라고 개칭하고 거만(겸양의 부족)과 그릇된 겸손(겸양의 과잉) 사이의 중용이라고 보았다.
셀리아 드루먼드의 『자연 윤리학』The Ethics of Nature(Oxford: Blackwell, 2004)은 앞서 설명했던 신중ㆍ정의ㆍ절제ㆍ용기의 고전적 네 가지 덕에 대한 고찰로부터 기독교적 덕 윤리학의 연구방법을 도출하여 제시하고 있다.
불교적 덕
그런데 덕에 대한 설명들이 그다지 불교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몇 가지 맞닿을 수 있는 지점은 있다. 신중은 특정한 상황에서의 사실들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올바른 일련의 행위에 이르는 현명한 선택을 하게 하는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반야(般若)와 명확히 연결된다. 절제는 불교의 지계(持戒) 즉, 유혹을 뿌리치고 도덕적 순수함을 유지하게 하는 내재화된 자제(自制)와 매우 가까운 동류어이다. 용기는 역경에 처했을 때 굳건하게 견디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와 유사한 불교의 덕은 보살의 6바라밀 중 4번째인 정진이다. 그러나 서양에서 정의라는 덕에 대응될만한 것이 불교에는 없는듯하다는 점에서 현저한 차이가 또한 존재한다.
불교에서 다르마(Dharma)가 서양에서 정의에 해당하는 기능과 같은 방식으로 법률과 경제 및 정치의 영역에서의 공정성 원리를 포함하고는 있지만, 느슨하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다르마 이외에 정의를 표현할만한 구체적인 용어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불교에는 그밖에도 폭넓은 영역에 걸쳐 이끌어 낼 수 있는 다른 덕들을 지니고 있다. 보살의 6바라밀 중 2가지는 보시(布施)와 인욕(忍辱)이다. 생태학의 맥락에서 고려되어야 할 보다 중요한 덕으로는 비해악(non-harming)과 비폭력(non-violence)을 의미하는 불살생(不殺生)이 있다. 이 덕은 동물을 대하는 특별한 태도를 포함하는데, 현재 때로 전체 종에게 유익하다는 명분으로 개별 동물들에게 가해지는 피해를 정당화 하려는 동물 개체 관리 실태를 비추어 볼 때 이 덕이 함축하는 의미를 조심스럽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불교의 덕 윤리가 어떻게 작용하는 지에 대한 주요 측면들을 충분히 설명했다. 이제부터 데이빗 쿠퍼와 사이몬 제임스의 최근 문헌들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이들이 저술한 이 두 저작은 덕 윤리학의 전망을 환경의 문제로 향하게 하고 있다. 두 저작은 같은 일반적인 방법론을 채택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불교의 학파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 첫 번째 저작은 기본적으로 선(禪)에 의거하고 있으며, 두 번째 저작은 비학파적이고 인도와 남아시아 전통의 관점에 의한 논의를 이끌어 내고 있다.
불교, 덕, 그리고 환경주의
두 사람의 공동 저작(『덕과 환경』Virtue and Environment)은 두 가지 저작 모두에서 채택하고 있는 철학적 기반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공동저술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제목은 환경 윤리학을 뜻하고 있지만, 실제로 책의 대부분은 덕 윤리학과 불교에서의 덕의 역할에 대한 논의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저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생태학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불교적 덕은 무엇인가? 저자들은 특정한 덕을 선택하기보다는 3가지의 보편적인 범주를 설정하는데, 이들은 (念心, mindfulness과 같은 일반적인 속성을 포함하는) ‘근본(foundational)’, (겸양ㆍ자주ㆍ평정 등의 세 덕으로 구성된) ‘자기배려’(self-regarding) 그리고 (배려ㆍ비폭력ㆍ책임감 등으로 구성된) ‘타자배려’(other-regarding)’라는 명칭으로 분류된다.
보다 익숙한 불교의 덕성들은 위와 같은 서양적 제목 아래 배치된다. 예를 들어 ‘배려’(Solicitude)는 사무량심(四無量心) 중 자(慈), 비(悲), 희(喜)의 세 가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책임감’ 그룹에는 개인에게 지워지는 일련의 (왕이 국민의 부역을 면하게 해주는 것과 같은) 의무를 포함하고 있다. 덕의 주요 특성을 여기서 더욱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제5장은 이 책과 같은 제목으로서 불교적 환경, 덕 윤리학의 주요 특성을 서술하고 있다. 예의 그렇듯 불교의 환경 친화적인 찬양을 기대한 독자들은 불교가 생태학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훨씬 더 냉정한 평가를 발견하고는 놀라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불교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오지 않았으며 따라서 꺼내 올 수 있는 지적인 저장고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연기(緣起)와 같은 불교생태학의 대안적 기초 개념들은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태학보다는 심리학에 가깝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심층생태학’이나 그 밖에 현대적 환경운동들의 불교적 선도 개념으로 볼 수 없다. 자신들이 본 것을 잘못된 기대라고 간주하고, 저자들은 환경에 유익하게 될, 덕의 수양에 기반한 불교생태학에 대한 보다 신중한 제안을 제시한다.
전반적으로 보자면, 이 책은 덕 윤리학에 대한 신중하면서도 완전한 철학적 개요를 제공하며 불교와 서양 윤리학 간의 많은 접합 지점을 열어 놓았다. 또한 불교 생태 윤리학이 덕 윤리학을 기반으로 하여 발전될 수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확인시켰다.
선불교와 환경 윤리학
『선불교와 환경윤리학』 Zen Buddhism and Environmental Ethics은 선의 전통이 자연계와의 도덕적 관계에 미친 특정한 기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2장 ‘선 윤리학’에서는 선에는 윤리학에 대해 가르칠만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널리 퍼져있는 회의론을 소개한다. 제임스는 여기에서 선의 주요 관심사가 자기계발에 있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선의 비도덕성에 대한 비난을 물리치며, 그렇기 때문에 덕 윤리학의 하나의 형태로서 정당하게 추론될 수 있다고 본다.
선이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에 대처하고 자비와 같은 덕의 영역을 탐구하기 위해, 제3장에서는 ‘불교와 덕 그리고 환경’ Buddhism, Virtue, and Environment에서보다 진전된 논증을 통해 불교가 인간중심주의라는 비판에 대한 반증을 시도하고 있다. 제3장과 제4장을 통해 선은 현대 환경 윤리학의 논의에서 등장하는 핵심적인 주요 개념들과 자세한 비교를 통하여 심도 깊은 철학적 평가를 받는다. 선이 윤리적 전일론(全一論)의 하나가 아닌지, 심층생태학과는 어떠한 유사성을 가지는지, 자연이 본래적 가치를 지니는지에 대한 입장, 허무주의는 아닌지, 그 밖에 여러 사항들에 대한 질문들이 주의 깊고 엄밀하게 고찰된다.
이 책에서는 선 윤리학과 선의 환경론에 대해 패기 있고 활달하게 변호하고 있으며, 선 윤리학과 선의 환경주의에 대해 제기된 많은 반론들을 효과적으로 무력화 시키고 있다.
이상의 두 저서는 불교적 관점에 기초하여 철학적으로 성숙된 반성을 할 줄 아는 새로운 세대를 대표한다. 그러한 반성 속에서 안정된 이론적 토대와 불교 환경 윤리학이 발전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결론
왜 덕 윤리학의 방법론이 불교 생태윤리학의 기반을 제공할 수 있는 이유를 요약한다. 첫 번째는 그것이 불교 자체의 실천과 전통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격 완성에 관한 불교적 이상(理想)이, 모든 존재를 친절과 자비로써 대하고, 진실을 말하고 착실하고 바른 삶을 살며, 부모와 가족, 그리고 세속인들에게 자신의 생계를 의존하는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에 대한 봉사와 같은 자신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한 개인이 실천하는 덕으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불교생태학은 이러한 가르침들과 부합하며, 다만 환경과 관련된 새로운 일련의 문제들에 대한 전통적인 덕이 지향해야 할 바를 제시하면 된다.
덕을 갖춘 인간이 환경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가 필요하다면, 부처님의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동물들이나 자연에 해를 가하는 것은 그에게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생태학적 덕 윤리학이 우리에게 일으키고자 하는 성품이다. 부처님은 원림(園林)이나 아란야(阿蘭若) 등과 같은 단순한 자연환경에서 지내는 삶을 즐겼다. 심지어 깨달음을 얻은 상태라 하더라도, 그 힘을 생태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도 미래를 내다볼 수 없으며, 덕은 주어진 현실에서 무엇이 최선인가에 대해 언제나 무조건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덕은 우리가 문제의 본질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다른 이들의 견해를 신중하게 경청하고, 여러 대안들과 그에 대한 찬ㆍ반 양론을 심도 깊고 통찰력 있게 숙고하여 중재하고, 그 해결책에 이르고, 결정된 실천 방안을 성실하게 수행하도록 한다. 프라즈가 언급한 대로, ‘환경 덕 윤리학의 핵심은 도덕적 주체들의 사고와 행위 속에서 새로운 습성을 기르는 것이다. 이는 다만 즉각적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행동을 전체적이고도 생태학적인 사유방식의 관점에 적응토록 하는 것이다.’
심층 생태학, 심층 문화 그리고 위기 사회-평화와 불교
요한 갈퉁(Johan Galtung:노르웨이, 평화학자)
1930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태어난 요한 갈퉁은 세계적인 평화학자이자 평화운동가이다. 70년대 이후 남북한을 수십 회 방문한 유럽 내 한반도 전문가이기도 하다. 갈퉁은 흔히 현대 평화학 또는 평화연구의 창시자로 불린다. 29살이던 1959년 오슬로에 세계평화연구소를 세웠고, 5년 뒤 세계평화학회를 발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60년대에 발표한 제국주의이론과 종속이론은 7~80년대 우리나라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가 소개한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과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는 특히 주목받은 개념들이다. 현재 미국 하와이 대학 등지의 초빙교수이며 TRANSCEND Peace Network의 소장이다.
심층 생태학은 생물계와 무생물계를 침탈함으로써 빚어진 인간 파괴와 오염보다 그것들의 다양성(diversity)과 공생(symbiosis)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다. 자연에 대한 존중(respect)이 요청된다(Respect, for Nature, enters). 존중을 인간의 차원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관하고 있는 것은 종교의 심층 문화일 것이다.
종교와 자연에 대한 접근
인간은 어떻게 자연과 연관되는가? 인간의 가공할 파괴로부터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그 관계 속에서 어떤 것을 설정할 수 있을까? 인간은 자연에 대해 작용하고 자연은 인간에 대해 작용한다. 곧 작용과 반작용(actio-reactio)의 관계가 쌍방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관계가 상호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것을 하나의 행위자로 간주해야 된다는 것, 곧 목적과 전략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 목적과 전략들을 성취시킬 수 있는 행위자로 생각해야 된다. 따라서 이 점에서 기본적으로 구별되는 점이 노출된다. 곧 정령(精靈, anima), 영혼을 지닌다는 의미에서의 자연은 어느 정도까지 생명(animate)을 지니는 것으로 간주할 것인가? 그리고 무생명의, 영혼이 없는, 영혼이 결여된 곧 ‘신성(神性)이 박탈된 것(entgottert)’으로 자연을 보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인가?
종교란 영혼이거나 성스러움을 이 우주에 배분시키는 일을 규정하는 제도라고 할 때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것이 어떤 종교인가에 달려 있으며, 자연의 어떤 부분을 말하는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본다.
자연에 관한 유형으로는 ▲인간영역(Homosphere:인간과 인간이 만든 환경) ▲생물영역(Biosphere, 동물 식물 미생물의 유기체) ▲석질영역(Lithosphere) ▲액질영역(Hydrosphere) ▲대기영역(Atmosphere) ▲우주영역(Cosmosphere:외계, 지구 이외의 세계) 등이 있다.
이 유형을 전제로 할 때 중요한 문명의 종교 구성 내용에 의해 기본적인 지도를 그려본다면 다음과 같다. 이 도표에는 모두 48개의 조합으로 구성되었고 이 48항목 가운데 가장 빈번히 나오고 있는 것은 성스러운 것을 주안점으로 고려하는 한 28개가 No로 나온다. 그 가운데 약 절반가량인 12 경우들에는, 비록 5가지가 No쪽으로 기울고 있다 할지라도, 물음표(?)가 있을 수도 있다(In about half of that, 12 cases, there is a possibility, a question mart even if 5 of them are leaning toward No). 그리고 단지 4경우만이 상대적으로 모호하지 않은 적극적인 성스러움을 선호하는 것으로 특징 지워진다. 그리고 이 4개는 모두 불교의 항목 밑에 들어온다. 이미 위의 각 종교의 선언에서 감지하였으리라 생각하지만 불교가 단연 돌출된다.
[도표1]의 결론을 요약하도록 하자. 어떤 표시는 상당한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결론들은 얼마간의 지엽적 수정을 요청하더라도 충분히 건실한 것들이다.
첫째, 전체적인 상(像)은 인간이란 종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킨 것 혹은 최소한 자연 속으로 깊이 몰입하지 못한 것이라는 점이다. 종교적인 어휘를 사용한다면 이 분리시킴의 중요한 요인들은 서양종교의 단일신론에서 유래되거나 힌두교의 다신교나 중국과 일본적인 혼융의 무신론(불교의 영향을 받은 이완된 범신론과 결부된다)에서 유래되고 있다. 자연 속으로의 몰입은 토착적인 문명과 불교 속에서 볼 수 있으나 그것도 부분적이고 결코 전체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둘째, 두 극단은 확대된 서양문명의 경우가 한쪽이라면 불교는 또 다른 한쪽이다. 이것으로부터 잠정적인 결론을 끌어낸다면 확신에 찬 서양인들, 강경론자의 유대인이건 기독교이건 무슬림이건 간에 그들이 이끌 때 환경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환경이 불교도에 의해 운영될 때 아마도 그것은 나을 수 있다고 본다. 전체적인 상(像)은 불교는 전 세계의 종교의 덩어리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작은 소수에 지나지 않고 축소되고 있는 반면 전자는 세계 인구 가운데 다수의 지위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전체적인 상은 [도표1]로부터 볼 때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양의 팽창적인 문명은 다른 6문명을 침식하고 있으며 그 문명들의 구성원의 내부 원인이 되고 있으며 그 정점에 올라 있거나 특히나 그 문명의 엘리트들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서양의 주변부와 함께 모든 토착적 인종들에 대한 침식들도 있다.
곧 인도에서의 힌두문명의 침식, 그리고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의 불교문명의 침식들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보다 더 자율적으로 운영하여 왔으나 이 문명들에서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좋지 못한 행위에 대한 보호벽의 역할을 종교가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서양Ⅰ의 층은 뚜렷하고 파괴적이다. 그러나 채식주의는 어떨까? 혹자는 자연에 대해 불상생의 가장 중요한 표현으로 생각할 것이다. 육식에 반대하는 채식주의는 힌두교, 불교, 중국, 일본 문명에 모두 들어있지 않은가? 물론 그것은 사실일 수밖에 없으며 모든 유정(有情)의 성스러움의 원인과 결과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명 있는(영혼이 있는) 자연까지만 확대되고 생명 없는(영혼이 없는) 자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예컨대 국립공원같이 동물 보호지역에 함께 모아 집단적으로 방목하는 일(이것도 결국은 인공적인 사육이지 않은가?)을 확대함으로써 이 보호지역들은 ‘열린 도시(open city)’나 오아시스처럼 ‘열린 자연(open nature)’를 대변시키는 충분히 성스러운 것으로 미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공격에 영향 받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런 일은 분명히 아무 조처도 취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자연에 대한 광범위한 보호를 위해 요청되는 것보다는 훨씬 못 미치는 일이다. 대기영역, 액질영역, 석질영역, 미생물 유기체, 식물들은 모두 상호교섭 활동을 한다. 광합성의 계속적인 작동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고, 이 광합성의 작동은 거꾸로 우리 인간이 의존하는 음식물의 연쇄적 연관을 위한 기초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도표1]을 볼 때 생명(영혼)이 있는 것으로부터 무생명(무영혼)의 영역을 관통할 때 거의 No로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힌두교도, 불교도들의 채식주의 그리고 어느 단계의 중국과 일본문명의 채식주의자는 두 서구문명에서 발견되는 것보다는 또 우연히도 토착문명의 고도의 육식주의보다는 오히려 생명 있는 자연과의 보다 더 깊은 연관이 있는 지표로 간주하게 된다.
그리고 덧붙여 불교에서는 이 관계가 보다 더 깊고 아마도 더 많은 영역들에게 확대된 것을 주목하게 된다.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다. 채식인이 된다는 것은 생명 있는 자연과의 암묵적인 협약이 되어 있다. 일종의 평화적 공존관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협약은 자동적으로 무생명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곧 불교에서마저 채식주의가 기본적인 요인이라고 하는 점이 공공연히 규제되지 않는 점을 인식하여야 한다. 흔히 채식주의에 대한 보다 더 ‘합리적’인 뒤받침을 하든 다른 것들을 원하든 사람들은 손쉽게 다른 사항들을 열거한다.
이 가운데 자연의 영역(nature space)에서는 우리의 자비심을 확대할 때 그 자신들의 권리와 안녕을 지닌 모든 유정(有情)을 포괄하게 된다. 동물을 죽이는 문명은 인간을 ‘야수’로 규정하면서 인간을 쉽게 살생할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동물을 죽이지도 않고 그것들을 야수로 간주하지도 않는 문명에서는 더욱 그럴 수가 없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불교의 채식주의는 이 다섯 영역에 모두 연관된다. 채식주의는 교리에서 나오니 곧 하나의 사고방식에서 연원되고 있다. 불교에는 일정한 기본적인 문화적 타당성을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다. 곧 비종교적인 종교, 신도 없고, 사탄도 없고, 천국도 지옥도 없고, 영원도 없고 개인적인 영혼도 없는 오직 ‘자기 개선’만이 있는 종교이다.
인식론, 자연에 대한 접근, 문화적 변화
문명을 보는 또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자. 지난 밀레니엄의 중엽(1400~1600 : 1250~1750?) 시기에 중세/전통의 서구Ⅰ로부터 근대 서구Ⅱ로의 서구 문명의 거대한 전환시기로부터 시작하자. 근대화가 근거하고 있는 것은 그 이후 더욱 발전을 보았지만 근대사회의 3가지 국면에 근거하고 있다. 곧 국가, 자본, 과학 혹은 관료체제 회사, 아카데미, 또는 관료, 자본가, 지식인에 근거한다.
2004년 12월 26일의 인도양의 쓰나미의 막대함을 보고 모든 종교는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징벌로 해석했다. 문제는 이 죄를 자연에 역행한 것이거나 자연의 순리를 거슬린 것으로 보지 않고, 12계가 되었건 10계(십계명)이건, 8계이건 3계이건 간에 계명을 어긴 것으로 여기고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자비한 폭력은 공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그것은 자연을 존중할 것을 고취시키거나 과학을 근거로 한 세간적 지혜로부터 나와야 한다.
아마도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정확하게 전일주의(holistic)가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고 불교의 원리인 연기법(緣起法)이 그것이다. 그리고 아마 가장 간결한 접근은 “관계된(related)”이라는 말에 의거해 있는 일이다. 곧 조건과 결과들의 복합적 연계, 고리와 스프링 모양의 관계, 일시적이 아닌 공간적이거나 학제적 경계점을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똑같은 것을 또 다른 초학제적 연구 분야에서 분명히 목도할 수 있다.
평화연구이다. 기본적인 개념은 분쟁이다. 하나의 행위자 속에 분쟁이 표명되니 내적인 증오이거나 외형적 폭력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분쟁의 뿌리는 목표와 목표 사이의 양립 불가능의 관계에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목표들의 담지자들의 양립 불가능성의 관계에 있다. 불교의 업(業, Karma)의 개념은 행위자 중심 접근방법과 관계성 중심적 접근방법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다시 지적하자면 불교는 위기 세계를 축소화시킬 수 있는 보다 낳은 길잡이일 수 있다. 연계된 카르마를 개선하기 위해서 명상을 통한 내적 대화이거나 외적 대화를 통해서 관계를 개선하는 일이다. 그리고 전일적인 과학(holistic science)으로부터 얼마간의 도움을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