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뉴욕 증권시장의 주가폭락으로 시작된 세계대공황(Great Depression)은 산업사회에 대한 암울한 전망을 극적인 형태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공황이 정점에 달했던 1933년 6월, 미국의 실업률은 29.4%라는 수치를 기록하였으며, 실업자수만도 1,500만 명에 이르렀다. 거리에는 배급식량을 얻으려는 실업자들의 줄이 끊이지 않았으며, 가격폭락에도 불구하고 상품은 팔리지 않아 공장의 기계는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피아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은 집권과 동시에 이른바 뉴딜정책(New Deal policy)을 통해 공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시도하였다. 정책의 요체는 노동집약적인 공공사업을 일으킴으로써 실업자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실업률은 많이 감소하였지만, 1940년에도 여전히 100명 중에 15명은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나서야 공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우리나라는 서울올림픽을 치르기 거의 40여년 전에 이미 동족간의 전쟁을 통해 세계경제회복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강력한 헤게모니 아래 재편된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황금시대(Golden Age)라 불리우는 유례없는 번영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번영은 적어도 1973년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회원국인 중동의 국가들이 기습적으로 원유가격을 인상함으로써 시작된 이른바 1차 오일쇼크(oil-shock)가 발생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실질적인 혜택은 미국과 일부 유럽 국가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였지만, 대공황의 아픈 기억이 서서히 잊혀지고 산업사회의 유토피아적 환상이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가 되면 미국 국민은 2명당 1대꼴로, 즉 1가구당 2대 이상의 승용차를 보유할 정도가 되었다. 냉장고나 세탁기, 청소기 등 전통적인 가사부담의 대부분을 덜어주는 내구소비재들은 90% 이상의 가정에 보급되었다.
이와 같은 번영을 가능하게 한 것은 컨베이어 벨트로 상징되는 반(半)자동일관생산공정의 도입을 통한 생산력의 혁명적인 발전에 기초한 표준화된 제품의 대량생산, 그리고 그와 결합된 대량소비로 특징지워지는 이른바 포드주의(Fordism)적 축적체제의 성립에 있었다. 원래 포드주의란 명칭은 20세기 초반 미국의 자동차왕인 헨리 포드(Henry Ford)가 자동차대중화를 가져온 유명한 모델 T를 생산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일당 5달러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높은 임금을 지불한 것에서 유래하였다.((주: 비록 이름을 따오기는 하였지만 헨리 포드의 시대와 포드주의의 시대는 시기적으로도 일치하지 않을뿐더러 몇가지 점에서 구별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헨리 포드는 반(反)노동조합적 성향을 매우 완강하게 유지였던 인물이기 때문에, 미국의 자동차 3사(이른바 '빅3') 중에서 가장 늦게 노동조합이 허용된 회사가 바로 포드사였다. 반면, 포드주의적 축적체제 그 자체는 강력한 노동조합―비록 노사협조적인 분위기가 유지되기는 하였지만―의 성립을 전제로 하고 있다.))
포드주의의 특징은 극단적인 분업에 기초하여 직무를 파편화하고, 컨베이어 벨트와 같은 기계장치의 성격에 노동자의 배치를 완전히 종속시킴으로써 높은 생산성을 보장하는 한편, 그로 인한 노동자의 정신적·육체적 피로에 대해서는 높은 임금과 소비수준을 제공함으로써 보상하는 데에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동시에 하나의 작업장에서 일할 정도의 대규모 생산체제 하에서 노동자들의 주거지역은 공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통근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자동차의 보급이 필수적이었다. 더구나 노동현장에서 피로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퇴근 후에 돌아오는 가정은 각종의 내구소비재를 갖춘 안락한 형태의 표준주택이어야만 했다. 노동자들이 내구소비재와 주택, 자동차를 하루라도 빨리 구입할 수 있도록 신용카드를 비롯한 각종 형태의 소비자신용이 은행 등의 금융기관을 통해 제공되었다. 즉, 포드주의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결합에 기초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다.
포드주의의 한계 - 새로운 유연한 축적양식의 등장?
그러나 포드주의는 내재적인 한계에 부딪힌다. 물론 오일쇼크라는 외부적인 충격 탓도 있지만, 포드주의의 기술적 기초를 이루는 노동조직 및 규율은 결국 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힘으로써 생산성은 정체되기 시작한다. 아울러 노동자들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 반드시 제공되어야 하는 의료서비스나 교육 등의 이른바 '집합적 소비(collective consumption)'는 원천적으로 표준화된 대량생산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그 생산비용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고 이것을 정부의 재정부담만으로 충당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고 나자, 대중의 소비패턴은 다양성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즉, 단일품종(소품종) 대량생산이라는 포드주의적 방식보다는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방식이 필요하게 되었다.((주: 예를 들어 대량생산방식의 시대를 열었던 포드 자동차의 모델 T는 검정색의 T자 모양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동차가 희소하던 시대에는 모델 T의 보급만으로도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었지만, 자동차가 충분히 보급되고 난 뒤에는 소비자들마다 서로 다른 색상, 서로 다른 기능을 갖는 자동차를 갖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다.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모델이 개발되어야 하는 것이다. ) 따라서 하나의 생산라인에서 하나의 생산물만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유연한 생산체계(FMS : flexible manufacturing system)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대안적 축적체제가 모색되기 시작하였고 이때 주목받은 것은 패전의 상처를 딛고 1970년대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일본의 새로운 생산방식이었다. 전통적인 관리직 노동자를 최소한의 규모로 줄이고 노동시간과 작업공간 및 재고의 낭비를 극소화함으로써 높은 생산성을 유지하며, 파편화된 직무만을 수행하는 포드주의적 노동자와는 달리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풀 줄 아는 기능의 다면성을 특징으로 하는 도요타(豊田)자동차의 노동자들은 포드주의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유연한 생산방식―이른바 일본적 생산방식, 린(lean)생산방식 또는 도요타주의―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생산라인의 각 부분에서 필요한 부품의 양을 그때그때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간판(Kanban)시스템에 기초하여 수많은 하청기업들로부터 필요량만을 적시에 공급받는 적기생산(Just-In-Time)시스템 등은 포드주의 하에서 일반화된 대량재고의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하였다. 또한 도요타의 생산방식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요인 중에는 품질관리(QC)써클과 제안제도로 상징되는 소집단활동을 통해 생산현장에서 직접 품질관리를 수행할 수 있는 분권화된 체계였다는 점도 포함된다. 개선(改善)을 의미하는 일본어 '카이젠(Kaizen)'이 나타내는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수많은 경영학자와 경제학자, 경영컨설팅 회사들은 앞다투어 미국기업에도 일본적 생산방식을 적용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일본적 방식의 도입은 또다시 산업사회의 망령이라 할 수 있는 실업의 증가를 초래할 따름이었다. 실업의 증가는 구매력의 하락을 수반함으로써 포드주의의 번영을 지탱해주던 대량소비라는 중요한 한 가지 축을 무너뜨렸다.
포드주의의 위기 이후, 그것을 대체할만한 새로운 축적체제로서 모색된 것을 총괄하여 포스트포드주의(Post-Fordism)라 부른다. 한때, 포스트포드주의의 유력한 후보였던 도요타주의가 1980년대 이후 일본경제의 침체에 따라 그 한계를 드러내면서, 아직까지 포스트 포드주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명확한 답을 내리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도요타주의로 상징되는 일본적 생산방식에 대해서는, 일본인 특유의 집단주의적 의식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노동자간 경쟁과 상호감시를 통해 과도한 노동을 강요함으로써 노동자를 착취하는 체제라는 극단적인 비판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도요타공장의 노동자들은 68초마다 자동차 한 대를 조립하도록 규정되었는데, 이 68초란 시간은 노동자의 작업속도나 리듬으로부터 계산된 것이 아니라 시장수요로부터 역산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노동자는 쉴 새 없이 일해야만 하였으며, 이른바 도요타 매뉴얼에는 노동자가 작업 중 발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까지 상세하기 규정되어 있을 정도로 전형적인 테일러주의적 시간·동작연구에 기초하여 노동과정이 통제되고 있었던 것이다.((주:테일러(F.W. Taylor)와 그의 제자인 길브레스(F. Gilbreth)는 시간연구(time study)와 동작연구(motion study)를 통해, 모든 노동자의 동작을 잘개 쪼개어 가장 기본이 되는 23개의 동작으로 구분해내고, 각각의 기본동작이 그리는 동선(動線)에 대해 치밀하게 연구하였다. 따라서, 어떤 노동자의 어떤 구체적인 노동도 기본동작의 결합형태로 환원될 수 있었고, 각 동작에 소요되는 시간과 에너지를 면밀하게 계산하여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많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테일러의 연구를 흔히 '과학적 관리'라 부르는데, 이것은 포드주의적 생산과정의 기초원리를 이루고 있다.)
결국 포스트포드주의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한 것이건간에 포드주의나 도요타주의와는 달리 노동의 인간화(humanization of work)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는 점에 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2. 노동의 유연성
노동의 유연성(labor flexibility)이란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자본주의 경제의 변동에 대응하여 고용량의 규모나 임금수준, 노동력의 재생산, 숙련의 재편성 등이 얼마나 신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노동의 유연성은 다양한 사회적·역사적 수준에서 정의될 수 있는 문제인데,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해고를 얼마나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 임금이나 노동시간 등의 근로조건을 얼마나 신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라는 수량적 유연성(numerical flexibility)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몇 년전부터 경영자단체 등에서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정리해고제나 변형근로제, 근로자파견제 등의 실시는 노동의 수량적 유연성을 증대시키는 요인이 된다.
대체로 선임권(seniority)을 수반하는 일시해고(layoff) 등이 노사간의 관행으로 정착되어 있고 노동자들의 직장이동이 자유로우며 직장보다는 직업(또는 직무)개념이 강조되는 미국은 일본이나 유럽국가들에 비해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한때는 종신고용제 등과 같은 일본식의 노사관계가 전후 일본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주목받은 적도 있었으나, 최근에는 상당수의 경제·경영학자들이 미국적인 유연한 노사관계가 성장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 주장한다. 자주 언급되는 근거 중의 하나는 노동시장이 유연한 미국에 비해 경직적인 유럽 등의 실업률이 오히려 더 높고 경제도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적어도 IMF위기 이전까지는 정리해고가 자유롭지 못하고 노동자들의 직장이동도 상당히 제한되어 있으며 직무보다는 연공서열이 강조되는 일본적 스타일에 가까웠기 때문에, 노동시장이 경직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량적 유연성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노동력이 생산과정 내에서 얼마나 신축적으로 편성될 수 있는가라는 기능적 유연성(functional flexibility)이다. 포스트 포드주의에서 추구하는 노동과정에서의 기능적 유연성이란, 노동자가 변화하는 생산여건에 맞게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다양한 능력을 갖출 것, 즉 이른바 다능공(多能工 : multi-skilled worker)일 것을 요구한다. 도요타공장의 노동자가 주목을 받았던 이유도 포드주의적 노동자와는 달리 파편화되고 단순한 직무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상황에 임기응변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량적 유연성만 강조되는 것은 불합리하며, 기능적 유연성을 갖추기 위한 사회적 차원에서의 재교육이나 직업훈련프로그램 등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노동력 재생산의 유연성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노동자가 일정 부분 임금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미국이 낮은 실업률을 보이는 것이 반드시 긍정적인 현상이라고만은 보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상당수의 노동자들이 임시직이나 파트타임 등의 불안정한 취업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통계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실업자까지 감안하면 미국의 실업률은 훨씬 더 높아질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챦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노동자들은 사회복지제도가 잘 갖추어진 유럽의 노동자에 비해 수량적 유연성은 뛰어나지만, 노동력 재생산의 유연성은 오히려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경우 유럽의 복지국가는 물론이고 미국보다도 사회보장제도의 수준이 훨씬 낮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은 고사하고 생계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흔히 말하는 사회적 안전망(social safety net)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즉, 노동력 재생산의 유연성은 현저하게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 즉 수량적 유연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의도하건 않건간에 자본의 논리만을 대변하는 것일 가능성이 많다는 데에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