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0-17
그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임신부님 강론
연중 제16주, 7월 21일, 목, 마태오13,10-17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13,16)
+찬미예수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13,16)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을 달리 보는 사람입니다. 생각과 보는 방식이 다르니 다른 삶을 삽니다.
“지식과 분석을 통해서는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으론 변화의 힘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담배와 술의 유해성에 대해 잘 알면서도 정작 끊지는 못합니다. 이유는 해롭다는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진짜는 모르는 겁니다. 그런 지식 안에 갇혀서는 깨달음으로 갈 수 없습니다.
애벌레의 삶과 나비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애벌레에게는 자신 앞에 있는 것들이 다 문제입니다. 앞을 가로 막고 있는 돌덩이도 문제고 냇가도 문제고 막대기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나비에게는 그런 것들은 구경거리가 됩니다. 애벌레가 막대기를 치우고 돌을 치워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의 삶이 인간의 의로움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삶의 형태라면,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살아가려는 삶인 영성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애벌레가 막대기를 치우고 돌을 치우고 냇가에 다리를 놓고 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식으로는 인간 구원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애벌레가 변하여 나비가 되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없어지고 오히려 그런 문제나 장애가 구경거리고 은총이 된다는 이 거듭 태어남의 신비,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영원한 생명의 삶 방법입니다.
산행을 하려 했는데 비가 와서 망쳤다고 합니다. 날씨는 충실히 자기 일을 했는데 날씨가 자기 기분을 망쳤다는 것입니다. 잘 살펴보십시오. 망친 것은 날씨가 아닙니다. 망치고 상한 것은 자기 마음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날씨를, 날씨가 자기를 망쳤다고 하는 마음이나 날씨를 내 원하는 대로 어떻게 해보려는 삶의 태도로 세상사를 보니 다 문제로 보이는 것입니다.
깨어난다는 것은 내 안에 이미 형성된 그런 조건들을, 규정들을, 틀들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떠남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가르침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떠났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동안 형성된 자기 틀, 규정, 사고방식, 라이프 스타일을 떠나 그분께서 지시하는 대로 새롭게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형성된 조건들을 알아차리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면 거기에서 저절로 변화는 일어납니다. 내가 변하고 싶어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는 저절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삶은 느끼고 즐겨야 할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삶을 신비로 보는 눈이 열릴 때에 비로소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장길석, 삶을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또한 성령의 이끄심으로 새롭게 세상을 봅니다.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사람입니다. 아멘
무태 성당 이민락 라우렌시오 신부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
아멘 !!
아멘.
+ 찬미예수님
살아오면서 나름대로의 언행들로
길들여진 행습을 바꾼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잘못된것
고치고 , 거기서 벗어나려면 지금까지
' 내 가 만든 생각의 틀을 깨고 바뀌어야 한다 ' 는 것을 깨닫기는 하지만
그대로 실천 한다는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밍그적 거리면서 온전히 떠나지 못해
계속 반복 되어 온 잘못된 생각이
만들어 낸 삶의 굴레에 갇혀 ,
그 속에서 맴돌며
살아 온 시간들 이였습니다.
' 하느님을 믿는다. ' 고 말은 하면서도
세상에 발목 잡혀 , 하느님께로 마음이
바르게 열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였습니다.
말씀을,
" 들어도 듣지 못 하고 ,보고도 바로
보지 못 하는 ' 청'맹과니' 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인위적인 세상 모든것을 ,
보고생각하는 눈과 마음을
성령께서 함께 하시어 ,
주를 알고 , 주님안에서 또한
저 자신을 바르게 알므로서 ,
하느님 나라 의 신비안에서 살 수
있을 은총 허락 하여서 주시기를
간구 합니다.
아 멘.
신부님 감사합니다.
.
김인호신부님의 건강한 그리스도인되기 강의를 듣고 내가 믿는 하느님에 대한 정말 잘못된 인식을 반성했습니다.
책한권을 읽은 사람과 하느님을 조금 아는사람이 제일 무섭다.하였습니다.
심판관 하느님 .
사돈어른 하느님.
자판기 하느님.
하느님 아저씨로 만들어 살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하였습니다.
성격유형에 따라 강박형 은둔유형 의존형 연극유형에 하느님을 만들어
믿어 하느님을 너무 몰라 하느님께서 이만년 동안 삐쳤셨다가 예수님을
통해 바로 알려 주셨다 합니다.
성서에서 하느님께서 화내시는 비유는 주신 탈란트를 두려워 땅에 묻고 아무것도 하지않은 종에거 악하고 게으르다며 화내십니다.
저에게 주신 탈란트를 그은혜를 감사하며 온힘을 다해 키워 모두가 행복하게 하소서.
내가만든 하느님을 찾고 믿는게 아니라.
나를 만드신 하느님을 찾고 믿게 하소서.
하느님과 함께 걸은 토빗과 노아가 가장 행복하게 살았음 을 알게 하소서.
제 일생 하느님 함께 걷게 하소서.
너희가 주어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 실천하게 하소서.
성가446번 (우리는 주의 사랑을)
우리는 주의 발자취를 이웃에서 보네
가난한 우리 위한 사랑 불태우심에서
가난한 우리 형제들을 위로 하심에
서
정의를 위해 젊음을 바친 자 에게서
돌같이 차고 가진것없는 우리 마음속에 주님은 빛과 사랑으로써 채우러 오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