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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9일에 선거를 치른 뒤에 공화정부는 의회에서 이제 막 업무를 시작했다. 사회주의자들이 117석, 급진당이 94석, 카탈루냐 공화좌파(ERC)가 26석, 가예가 자치공화조직(ORGA)이 21석을 획득했다. 즉 좌파와 중도 좌파가 의회의 470석 가운데 400석을 차지했다. 7월 14일 사회주의 계열의 지식인 훌리안 베스테이로 의장이 첫 번째 회기의 개회를 선언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 내 사회주의자들은 이번에는 오랜만에 하나가 되어 라르고 카바예로와 빌바오 출신 온전주의자 인달레시오 프리에토가 서로 협력했다. 프리에토는 중도 좌파와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자들의 연합을 저귺 지지했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자신의 최우선 관심사인 노동자총동맹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사회주의자들의 정부 참여에 동의했다. 카바예로가 이끄는 노동자총동맹은 비록 급속하게 성장하고는 있었지만 그 세력이 전국노동연합에는 미치지 못했는데, 전국노동연합이 그 전 해 다시 합법 단체가 되면서 눈부시게 세력을 확장했기 때문이다.
8월 말에 “스페인은 모든 종류의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선언이 포함된 첫 번째 헌법 초안을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다. 특히 종교 교단 해산에 관한 제26조와 제27조가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문제는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으나 마누엘 아사냐의 설득으로 고비를 넘겼다. 즉 열띤 논의 끝에 예수회만 해산하고 그 재산을 국고에 귀속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당시 예수회는 스페인에 2500명의 교인을 두고 있었으며,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정확한 규모는 예수회만이 알 수 있었다. 교회는 처음으로 ‘교회는 곧 스페인’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부정하는 행정부를 상대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에 빠졌다. 스페인 사람들의 미사 참석률이 다른 기독교 국가들보다 낮다는 객관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세구라 추기경은 “스페인 국민은 가톨릭교도이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이다.”라고 선언했다. 스페인 전체 인구 가운데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은 20%를 넘지 않았다. 과다라마 산맥 남쪽 대부분 지역에서는 5%도 안 되었다. 그와 같은 통계 수치도 “공화 정부가 교회를 박해하기로 작심했다.”라고 말하는 스페인 국내와 교황청 지도부의 주장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1931년 6월 3일 교황 비오 11세는 스페인 교회의 상황을 멕시코와 소련에서 교회가 당한 박해와 비교하였다.
교황 비오 11세
사회주의자들의 요구인 ‘국익을 위해’ 토지를 몰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제44조를 둘러싼 논쟁은 더 큰 위기를 초래했는데, 이 문제 또한 다시 한번 알칼라 사모라를 사임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갔다. 이 토지 개혁은 토지가 없는 농민들에게 비경작지를 나누어주는 내용일 뿐이었는데도 중도파와 우파는 그 조치들이 결국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몹시 우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12월 9일, 결국 헌법 초안이 투표로 통과되었고, 니세토 알칼라 사모라가 공화국 대통령으로 공식 선출되었다. 12월 15일에 아사냐는 새 정부를 구성했다. 마누엘 아사냐가 총리 겸 전쟁부 장관을 맡았고, 호세 히랄(공화 행동)이 해군부 장관, 루이스 슬루에타가 국무부 장관, 자우에 카르네르(공화 행동)가 재무부 장관, 마르셀리노 도밍고(공화 연합)가 농업,공업,상업부 장관, 산티아고 카사레스 키로가(갈리시아 자치당)가 내무부 장관, 페르난도 데 로스 리오스(사회주의노동자당)가 교육부 장관, 알바로 데 알보르노스(공화 연합)가 법무부 장관, 인달레시오 프리에토(사회주의 노동자당)가 공공사업부 장관,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사회주의 노동자당)가 노동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자였던 마누엘 아사냐는 날카로운 위트와 우울한 비관주의를 지닌 반(反)교권 성향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스스로 공화 정부의 강력한 지도자로 여겼지만 그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일관성과 추진력이 부족했다. 아사냐의 주요 지지 기반은 교사, 의사 같은 진보적 중간계급과, 중하층의 기능공과 회사원들이었다. 아사냐를 제치고 정부 수반이 되고 싶어했던 급진당 당수 알레한드로 레룩스는 사회주의자들에게 거부 대상이었다. 급진당이 부패했다는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은 충분히 근거가 있었다. 그러자 레룩스는 우파에서 동맹 세력을 찾으려고 했다. 레룩스의 주요 지지 기반은 알폰소 13세를 싫어하기는 했지만 왕정에 뿌리깊은 반감을 품고 있지는 않았던 보수파와 사업가들이었다.
공화 정부의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 대토지 소유자, 성직자, 군대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의회에서 자처하고 있는 의석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전통적 스페인’을 수호하려는 노력을 접은 것은 아니었다. 1931년 10월 안토니오 고이코에체아를 수장으로 하고 알폰소 13세를 지지하는 왕당파는 ‘국민행동당(Accion Nacional)'을 창당했다. 이 조직은 나중에 ’국민행동(Accion Popular)'이 된다. 반면 알폰소 카를로스를 짖하는 카를로스파 왕당파는 그들 자신의 조직인 ‘전통적 교우회(Comunion Tradicionalista)에 속해 있었다. 고이코에체아는 후에 다른 왕당파 사람들, 라미로 데 마에스투, 페드로 사인스 로드리게스, 호세 마리아 페만 등과 함께 ’에스파냐 혁신(Renovacion Espanola)'을 창설했다. 1933년 3월에는 국민행동당에서 떨어져 나온 힐 로블레스가 의회 내 주요한 가톨릭 우파 연합 세력을 하나로 집결했는데, 이것이 ‘에스파냐 자치우익연합(Confederacion Espanola de Derechas Autonomas, CEDA)’이었다. 파시즘은 이때만 해도 두드러진 현상은 아니었고, 두어 개의 잡지와 소수 우익 지식인들이 죽은 독재자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아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를 중심을 집결해 있는 정도였다.
고이코에체아와 호세 마라 힐 로블레스
전통적 교우회의 회원증
에스파냐 혁신의 주요 인물들. 가운데가 안토니오 고이코에체아
에스파냐 우익 자치 연합의 창설을 선언하는 힐 노블레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공화정부가 출범한 뒤에 아나키스트들은 앙헬 페스타냐(Angel Pestana)와 호안 페이로(Joan Peiro)가 이끄는 ‘트레인티스타스(Treintistas)’로 대표되는 생디칼리슴 노선 혹은 노동조합 노선을 추구하는 집단과 ‘이베리아 아나키스트연합(Federacion Anarquista Iberia, FAI)’ 계열에 속한 집단으로 분열되었다. 후안 가르시아 올리베르(Juan Garcia Oliver)와 부에나벤투라 두루티(Buenaventura Durruti)를 중심으로 한 이베리아 아나키스트연합에 속한 사람들은 국가에 대항한 투쟁을 열정적으로 지지했으며,, 사회 혁명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일명 ‘혁명의 체조’로 불린 파업과 폭동에 호소했다. 그러나 공화 정부의 첫 번째 중대 위기는 농촌에서 발생한 사소한 사건에서 왔다.
앙헬 페스타냐
호안 페이로
후안 가르시아 올리베르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포르투갈 국경과 인접한 바다호스 주의 작은 마을 카스틸블랑코는 1931년 12월 말 파업에 돌입해 있었다. 치안대 분견대가 질서 회복을 위해 이 마을에 투입되었고, 대원 하나가 쏜 총에 지역 주민 1명이 사망했다. 농민들의 반발은 격렬했다. 농민들은 4명의 치안대 대원들에게 보복을 가했다. 즉각 폭력의 소용돌이가 이어졌다. 멀리 떨어진 북쪽 리오하 지역 치안대원들이 카스틸블랑코에서 동료들이 당한 것을 복수한다면서 민간인 11명을 살해하고 30명 이상에게 부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아사냐는 치안대 최고 책임자인 산후르호 장군을 불러 대원들의 행위를 크게 질책하고 그를 사령관직에서 해임했으며, 계급을 강등하여 카라비네로(Carabineros, 19세기에 창설된 스페인의 국경 지역 경찰) 책임자로 임명했다. 아사냐는 미겔 카바네야스(Miguel Cabanellas) 장군을 산후르호 대신 치안대 수장으로 임명했다.
산 후르호 장군과 아사냐 수상
1892년 피레네 산맥의 카라비네로
미겔 카바네야스
그해 4월 국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함으로써 공화 정부 수립에 기여했던 산후르호 장군은 이러한 조치에 심한 모욕감을 느꼈고, 쿠데타를 모의하던 다른 고위 장교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그들의 동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8월에 산후르호가 실제로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세비야에서 일부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산후르호 자신이 움직이지 않았고, 전국노동연합이 즉각 총파업을 선언함으로써 쿠데타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산후르호는 포르투갈로 도망치려다가 우엘바에서 체포되었다.
마드리드 정부는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와 라미로 데 마에스투(Ramiro de Maeztu)를 비롯한 다른 공모자들도 체포하고 140명의 가담자를 서(西)사하라 지역 비야시스네로스(villa Cisneros)로 추방했다. 이 쿠데타 음모에 다수의 귀족들이 가담했기 때문에 정부는 스페인 대귀족들이 소유한 토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했는데, 그 조치가 무차별적이고 초법적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귀족들의 정부에 대한 반감이 더욱 거세졌다. 산후르호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 뒤에 징역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레룩스가 집권하면서 사면을 받아서 수감 생활을 그리 오래 하지는 않았다. 산후르호는 출감하자마자 리스본으로 망명을 떠나 그곳에서 ‘스페인을 파괴와 불명예로부터 구하기 위한 범국민운동’을 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다.
라미로 데 마에스투. 스페인 우익의 대표 인물로 1936년 내전 중 마드리드에서 공화군 병사들에게 총살당한다.
비야 시스네로스. 스페인의 요새가 있던 마을로 지금은 휴양 도시이다.
산후르호의 쿠데타 시도는 의회의 입법 과정을 가속화하는 즉각적인 효과를 낳았다. 그 후의 입법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카탈루냐의 자치와 토지 개혁 안건이었다. 우파는 카탈루냐의 자치를 맹렬하게 반대했으나 아사냐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명연설로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카탈루냐 자치법은 산후르호의 쿠데타가 실패한 덕을 보기도 해서 9월 9일에 통과되었고, 그해 11월 20일에 열린 카탈루냐 의회를 구성하는 선거에서 유이스 콤파니스가 이끄는 카탈루냐 공화좌파(ERC)가 승리를 거두었다. 토지개혁법은 살라망카, 에스트레마두라, 라만차, 안달루시아 지역에만 적용되었다. 안달루시아에서는 250헥타르가 넘는 대규모 영지들이 전테 토지 면적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매번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쳤기 떄문에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개혁 과정은 토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농민들의 분노를 샀다. 1934년 말까지 11만 7천 헥타르의 토지만 수용되었고, 원래 계획에 들어있었던 20만 명 가운데 1만 2천 명만 정주한 상태였다.
1933년은 아사냐 정부에게 불길한 징조로 시작되었다. 당시 안달루시아 지방에서는 폭동이 빈발하였으며, 1월 초 카디스에서 격렬한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아나키즘 운동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소도시 카사스비에하스(Casas Viejas)에서 ‘그날’의 도래, 즉 절대자유주의적 공산주의를 들여오려는 시도가 있었다. 1월 11일 한 무리의 아나키스트들이 치안대 지소를 포위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카디스에서 치안대원들과 돌격대원들이 증원군으로 도착했으며, 그들은 ‘육손이’라고 알려진 고참 아나키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한 무리의 아나키스트들이 저항하던 가옥 한 채를 포위했다. 치안국장은 돌격대 대장 마누엘 로하스(Manuel Rojas)에게 교착 상태를 빨리 끝내라고 명령했다. 로하스가 가옥에 불을 질렀고, 화염을 피해 집에서 뛰쳐나온 두 사람은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이어 로하스는 냉혹하게도 그 전에 체포되어 수감 중이던 12명의 아나키스들도 함께 처형했다. 모두 22명의 농민과 3명의 치안유지군 병사가 카사스비에하스에서 목숨을 잃었다.
아나키스트의 집을 포위한 치안대와 돌격대
카사스비에하스 사건 당시 돌격대 대장 마누엘 로하스
카사스비에하스 사건 후의 사진
그동안 단호한 조치를 내려 질서를 회복하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던 우파는 이제 야만적인 진압 행위를 책임지라며 아사냐를 공격했다. 아사냐는 직접 농민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비난을 받았으며(물론 근거없는 주장이었다), 평판이 땅에 떨어졌다. 의회에서 우파 의원들은 카사스비에하스 사건이 농촌의 급속한 사회적 변화가 큰 문제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산업 관련 분야에서 정부가 내놓은 사회주의적 개혁 조치에도 비난을 퍼부었다. 아사냐 정부는 4월에 치른 지방 선거에서 패했다. 그해 가을쯤 되자 아사냐와 그 동료들은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알칼라 사모라 대통령은 레룩스의 동료 디에고 마르티네스 바리오(Diego Martinez Barrio)에게 새 총선을 치를 새로운 내각 구성을 위임했다.
디에고 마르티네스 바리오
우파는 현 정부를 패배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에 한껏 고무되어 10월 12일에 한자리에 모여 ‘우파와 농민 연합(Union de Derecha y Agraria)'이라는 연합체를 구성했다. 알레한드로 레룩스가 이끄는 급진공화당은 중도 온건 세력을 자처했다. 그에 비해 좌파는 선거가 시작될 무렵 분열되어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공화파 동료들의 신중한 개혁주의 노선에 불만을 품었고, 노동자총동맹은 아사냐 정부의 ’반동적 탄압‘을 저지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반(反)국가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고 치안대의 살인 행위에 분노를 감출 수 없었던 아나키스트들은 선거 불참을 주장했다.
선거는 1933년 11월 19일에 치러졌다. 공화 정부의 새 헌법에 따라 여성들도 스페인 역사상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했는데, 여성들 가운데 다수가 중도 우파에 표를 던진 덕분에 중도 우파가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자치우익연합이 총 투표의 24.4%, 급진공화당이 22%를 각각 획득했다. 의석으로는 우파가 204석, 중도파가 170석을 차지한 데 비해 좌파는 93석밖에 차지하지 못했는데, 의석 분포가 그렇게 나타난 것은 대체로 선거법이 연합 세력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알칼라 사모라 대통령은 레룩스에게 내각 구성을 맡겼다. 레룩스는 내각을 전원 급진공화당 의원으로 구성했지만 의회에서 자치우익연합의 지지가 필요했다. 자치우익연합은 사안에 따라 협력하는 대신 여러 가지 양보를 얻어내려고 했다. 자치우익연합 지도자 호세 마리아 힐 로블레스(Jose Maria Gil Robles)는 초등교육, 교회 관련 조치, 농업 개혁, 노동법 같은 전임 정부가 실행한 개혁 가운데 일부를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조치들을 요구했다. 레룩스와 힐 로블레스는 또한 산 후르호 장군의 쿠데타에 연루된 사람들을 모두 사면한다는 데에도 합의했다.
총리 알레한드로 레룩스, 대통령 알칼라 사모라, 자치우익연합 지도자 힐 로블레스
첫댓글 재밌네요 스페인 근현대사
별로 재미없나봐요. 조회수가 100도 안되네요.
첫 글부터 잘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