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민감국가’ 지정과 한국의 근본 대응
편집실
2025년 4월 15일, 미국 에너지부(DOE)가 한국을 '민감국가(Sensitive Country)'로 공식 지정했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인 지난 1월 한국을 '기타 지정 국가(Other Specified Country)'로 분류한 데 따른 예고된 조치다. 양국 간 과학기술 협력, 한국 원자력, 인공지능(AI), 양자기술 등 한국의 첨단 분야에서 대한국 제재가 본격화되었다. 한국 출신 연구자가 미국 DOE 산하 연구소를 방문하려면 최소 45일 전 관련 자료를 제출하고 별도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하며, 미국 측 연구자가 한국을 방문하거나 협력할 경우에도 추가 보안 절차가 요구된다. DOE는 이러한 조치가 기술 보안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 밝혔지만, 실질적으로는 첨단 기술 분야의 협력 전반에 제한을 가하는 조치이다.
1. ‘민감국가’ 지정의 영향
1) 첨단 기술협력의 제약
민감국가 지정은 기술이전, 공동 연구, 인력 교류에 대한 엄격한 제한을 부과하며, 그 결과 핵융합·핵분열 기술을 포함한 주요 기술협력 프로젝트들이 중단되거나 지연되고 있다. 한국 연구자의 미국 DOE 산하 주요 연구소 방문은 장기 심사 대상이 되었고, 승인 비율도 크게 낮아졌다. 양자 정보, 고성능컴퓨팅, AI 등 분야에서도 협력이 축소되었으며, 2024년 기준 312건에 달하던 한미 공동 R&D 과제는 2025년 1분기에 254건으로 감소했다. 특히 자립도가 낮은 핵심 기술 분야에서는 미국 기술 의존도가 심화되며 전략적 기술 주권 확보에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
2) 반도체 산업에 대한 타격
한국 반도체 산업은 미국의 장비·소재 기술에 크게 의존하는 구조로 되어 있어 이번 조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다. 미국 장비업체들과의 협력이 위축되면서 EUV·DUV 노광장비 수급에 문제가 생겼고, 삼성전자의 평택 EUV 라인은 가동률이 하락할 것이다. 분기 기준 반도체 수출은 7% 감소하고 외국인 직접투자(FDI)는 12% 줄어들었으며, 미국과의 공동투자 프로젝트 일부도 지연되거나 재조정이 진행되고 있다. 이는 결국 한국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위상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3) 외교적 신뢰도 하락과 안보 불안
이번 지정은 한국이 중국, 러시아, 북한 등과 동일 선상에 놓이는 외교적 상징성을 지니며, 이는 미국 내에서 한국의 핵무장론과 전략적 자율성 강화에 대한 불신으로 연결되고 있다. 특히 윤석열 정부가 대외적으로는 한미동맹 강화를 주장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핵무장론에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온 점이 미국의 불신을 초래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한국이 '신뢰할 수 있는 기술·안보 파트너'로서의 이미지를 손상시키고 일본 등과의 비교 속에서 외교적 위상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4) 경제적 불확실성과 민간기업 타격
지정 이후 미국 내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기술이전, 인허가 절차에 지연이 발생하며, 실제 생산 차질이 보고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조지아주 공장에서 원자재 공급 문제로 일부 생산라인을 축소했고, 두산에너빌리티의 미국 원전 수출 관련 기술교류도 연기되었다. 첨단소재, 에너지, 항공우주 분야에서 활동하는 72개 한국 기업은 현재 기술이전 지연과 인증 절차 문제로 인해 손실을 겪고 있으며, 일부는 생산기지를 제3국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PwC는 이러한 조치로 인해 한국이 향후 2년간 최대 23억 달러의 FDI 손실을 볼 수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2. 정부 대응의 한계
1) 대미 외교력의 약화 및 전략적 모순
한국 정부는 대외적으로 한미동맹 강화를 강조하면서도, 핵무장론이나 전략적 자율성 관련 이슈에서는 일관되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전략적 모호성은 미국 정부와 정책 커뮤니티의 신뢰를 약화시키며, 지정 해제 협상에서 한국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미국의 정책 결정 구조상, 단순한 외교적 언급만으로는 민감국가 지정 해제를 이끌어내기 어렵고 정책의 일관성과 신뢰성 확보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 기술 자립 역량 부족과 산업 구조의 미국 의존성
반도체, AI, 양자기술, 원자력 등 분야에서 한국은 핵심 기술과 장비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2024년 기준 한국의 반도체 장비 수입 중 38%, 원전 설계·제어 시스템의 41%, AI용 반도체 칩의 46%가 미국산이다. 대체국으로 EU, 인도, 캐나다 등과의 협력이 모색되고 있지만, 실제로 미국 기술을 완전히 대체하기에는 기술력·시장성 모두에서 시간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ASML과의 협력은 진행 중이나, 일부 공정기술은 여전히 미국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3) 국내 R&D 예산 증액의 한계
정부는 R&D 대응으로 2025년 예산을 6.3% 증액했으나, 이는 총 GDP 대비 4.6% 수준으로 정체되어 있고, 민감기술 분야에 대한 집중 투자도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기술자립은 10년 이상 장기 투자가 필요한 사안임에도, 한국의 정책 주기성과 단기성과 중심의 정책운영은 일관된 전략 수립에 장애가 되고 있다.
4) 민간기업 피해에 대한 구조적 대응 부족
대기업은 자체 대응 능력을 갖추고 있으나, 중소·중견기업은 공급망 단절, 수출 차단으로 직접적 피해를 받고 있음에도 정부의 지원은 미비하다. 현재까지 구조적 지원보다는 개별 대응 중심이며, 산업은행, 무역보험공사 등 전략금융기관의 대응도 늦어지고 있다. 위험 예측 시스템과 정보 공유 체계도 부실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5) 미국 내 정치·행정적 복잡성
DOE의 조치는 단순한 외교 협상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미국 내에서는 국방부, 국무부, 상무부, 백악관 NSC 등 여러 행정부처와 의회, 싱크 탱크가 얽혀 있어 복합적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 미국의 정권 교체 가능성, 대중국 전략 내 한국의 위치 등 외부 변수도 협상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린다. 현재 미국은 일본, 인도, 호주를 중심으로 대중 봉쇄전략을 재정비하고 있으며, 한국은 점차 주변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6) 국내적 합의 부족과 정치적 불신
정부의 대미 외교에 대한 국내적 합의도 부족하다. 야당과 시민사회 일부는 저자세 외교와 종속적 대응이라는 프레임으로 정부를 비판하며, 대미 협력정책에 대한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있다. 국회 차원의 초당적 대응이나 과학기술 전략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부재하여 내부 전략 수립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3. 한국의 대응 전략
미국이 한국을 '민감국가(Sensitive Country)'로 지정한 것은 단순한 외교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기술 주권과 전략적 자율성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다. 따라서 단기적인 외교 협상이나 국면 전환식 대응에 그칠 것이 아니라, 중장기적 구조 개편과 자립 전략 중심의 대응이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근본 대응 방안은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방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첨단 기술의 전략적 자립을 구축해야 한다.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반도체 장비, 원전 설계 기술, 인공지능(AI), 양자칩 등 핵심 기술과 소재를 중심으로 '10대 민감기술 리스트'를 선정하고, 이에 대한 집중 투자와 자립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2025년 현재 한국의 반도체 공정장비 자립률은 29%에 불과하고, AI 및 양자 컴퓨팅 인프라도 대부분 외국산이라는 점에서, 자립 기반 확충이 시급하다.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R&D, 상용화, 인력양성 등 전 주기를 포괄하는 ‘국가 전략기술 특별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경제안보추진법’처럼 기술안보와 산업주권을 결합한 법적 체계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둘째, 대미 기술·외교 종속 구조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미국 중심의 기술·안보 동맹에 편중된 전략을 넘어, 유럽연합(EU), 동남아시아, 중동, 브릭스 및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기술 협력을 다변화하고, AI·원자력·반도체 등 전략기술 영역에서 ‘비미국 중심 블록’을 병행 구축해야 한다. 또한, 미국이 한국을 민감국가로 분류한 배경에는 핵무장 관련 논의에 대한 우려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비확산 체제 내 전략적 입장을 보다 명확하고 일관되게 정립해야 한다. 불필요한 외교적 혼선을 방지하고, 신뢰 회복을 위한 체계적인 메시지 관리가 필요하다.
셋째, 국가 R&D 시스템을 구조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현재 관료 주도로 분절되어 있는 국가 연구개발 체계를 탈피하고, 산업·과학기술·외교가 연계된 거버넌스로 전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 기술전략위원회’와 같은 총괄 기획·조정 기구가 필요하다. 또한,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장기 지속 가능한 10년~15년 단위의 전략기술 프로젝트를 운영할 수 있는 제도화를 추진해야 한다. 독일의 ‘산업 4.0 전략’이나 중국의 ‘중장기 과학기술계획’처럼 체계화된 정책 틀을 통해 일관된 연구 개발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기술 인력의 양성과 이탈 방지가 병행되어야 한다. 미국 연구소나 글로벌 기업으로의 두뇌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 전략기술 보유 인력에 대한 처우 개선과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2024년 기준, 국내 박사급 인력 중 약 35%가 해외 취업을 희망하고 있는 상황은 경고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와 함께, 병역특례 제도의 확대나 연구기관 기반 대체복무 제도 도입을 검토하여, 젊은 이공계 인재들이 조기에 핵심 연구 분야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산업 전략 및 공급망을 전면 재편해야 한다. 첨단 부품·장비에 대한 해외 의존도를 줄이고, 중소기업 중심의 기술 자립 생태계를 조성함으로써 공급망의 복원력을 높여야 한다. 특히, 미국이 수출 규제를 가할 수 있는 장비·소재에 대해서는 비미국 원천 기술로 대체하거나 제3국 생산기지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다변화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 초기 기술이 시장에 진입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정부 주도의 공공조달과 테스트베드 정책을 통해 국내 시장 형성을 지원해야 한다.
여섯째, 초국가적 기술안보 협력체계를 주도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핀란드, 인도, 브라질, 이스라엘 등 중견 과학기술 국가들과 함께 ‘중견국 기술안보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비패권적 기술협력 모델을 주도할 수 있다. WTO, OECD, G20 등 다자 협의체를 통해 기술 통제의 투명성과 인권 기반 기술 보호 원칙 등을 제안함으로써, ‘정상국가형 기술외교’로 나아가야 할 시점이다. 이는 미국의 일방적인 기술 통제에 대한 대응 차원을 넘어, 기술 외교의 국제규범을 새롭게 형성해가는 주체로서의 역할까지 포함한다.
이러한 일련의 대응 전략은 단기적 수습책이나 외교적 협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한국이 주권국가로서 기술과 산업의 자립 기반을 확고히 하고, 미래 전략 경쟁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근본적인 전환 전략이자 국가 생존 전략으로 작동해야 한다.
미국의 ‘민감국가’ 지정과 한국의 근본 대응 요약
| 구분 | 주요 내용 | 세부 내용 및 통계 |
| 1. 지정 배경 | DOE,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 (2025.4.15) | - 미국 기술보안 강화 목적 - 한국 핵무장 논의와 전략적 자율성에 대한 불신 |
| 2. 주요 영향 | 첨단기술 협력 제약 | - 한미 공동 R&D 과제: 312건(2024) → 254건(2025.1Q) - 방문 시 45일 전 신청, 사전 승인 필요 |
| 반도체 산업 타격 | - 반도체 수출 7% 감소 - FDI 12% 감소 - 삼성 평택 EUV 라인 가동률 하락 |
| 외교·안보 신뢰도 하락 | - 한국, 中·北·러와 동급 취급 - 전략적 모호성이 미국 불신 초래 |
| 민간기업 피해 | - SK이노베이션, 두산 등 생산 지연 - 기술이전 지연 기업 72곳 - 최대 23억 달러 FDI 손실 예상 (PwC) |
| 3. 정부 대응의 한계 | 외교 전략 부재 | - 핵심 전략 이슈에 일관성 부족 - 미국 내 설득력 약화 |
| 기술 의존 구조 | - 반도체 장비 수입 중 미국산 38% - AI칩 46%, 원전 제어시스템 41% 미국산 |
| R&D 예산 부족 | - 2025년 예산 6.3% 증가 - GDP 대비 4.6%로 정체 |
| 중소기업 대응 미비 | - 전략금융기관 대응 지연 - 정보 공유 체계 부재 |
| 국내 정치적 분열 | - 야당·시민사회 반발 - 초당적 합의 부재 |
| 4. 근본 대응 전략 | ① 전략기술 자립 | - ‘10대 민감기술’ 선정 및 투자 - 국가전략기술특별법 제정 추진 |
| ② 외교 다변화 | - EU·인도·브릭스 등과 협력 확대 - 비확산 전략 입장 정립 |
| ③ 국가 R&D 시스템 개편 | - ‘국가 기술전략위원회’ 신설 - 정권 교체와 무관한 장기 전략 수립 |
| ④ 기술 인력 양성·이탈 방지 | - 두뇌 유출 방지 위한 처우 개선 - 병역특례 및 연구기반 대체복무 검토 |
| ⑤ 공급망 재편 | - 비미국 원천기술 확보 - 중소기업 중심 생태계 구축 |
| ⑥ 초국가적 협력체계 주도 | - ‘중견국 기술안보 네트워크’ 구축 - 기술외교 국제규범 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