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인 형태의 픽업트럭은 쓰임새가 정말 다양하다. 5인승 4도어 크루캡은 가족용 차로도 어색하지 않다. 이토록 매력적인 픽업을 국내에서 다양하게 만날 수 없다는 게 아쉽다
거친 환경에서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픽업트럭은 가히 세계인의 차라고 할 만하다. 자동차 브랜드마다 픽업트럭을 한 대씩 내놓고 있는데, 간단하고 값싼 구조 덕분에 제3세계에서도 수요가 많다. 트럭 형태의 차는 짐을 실어 나르거나 사람을 태우는 버스가 되기도 하고, 정부군과 반군이 모두 애용하는 군용차로도 널리 쓰인다. 원초적인 형태의 픽업트럭은 쓰임새가 정말 다양하다.
그런가 하면 짐 실을 필요가 전혀 없는 데 픽업트럭을 타기도 한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차가 바로 픽업트럭인데 그들은 정말 아무 이유 없이 픽업을 탄다. 꽁무니에 커다란 적재함이 달렸지만 짐이 가득 실린 걸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들에게 픽업트럭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카우보이가 말을 타야 하듯 픽업을 타는 거다.
미국에서 픽업트럭의 역사는 오래됐다. 포드 모델 T부터 픽업으로 만들었다. 픽업 트럭은 간단한 탈것이었다. 차값이 저렴한 데다 보험료도 싸 젊은이들이 쉽게 살 수 있었다. 컨트리 웨스턴 음악을 들으며 농장을 달리는 트럭은 비닐 시트에 옵션도 변변히 없었다. 창문은 기다란 레버를 손으로 빙빙 돌려 열어야 했다. 하나로 이어진 벤치 시트에는 세 명이 나란히 탈 수 있었다. 네바퀴굴림이 당연한 것 같지만 오히려 뒷바퀴만 굴리는 모델이 많았다.
시간이 흐르고 수요가 늘면서 픽업은 대형부터 중형, 소형까지 종류도 다양해졌다. 20세기 말부터 SUV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픽업트럭에도 비싼 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동차 회사는 잘 팔리는 차에 부가가치를 더하고 싶었고, 고객은 안락하고 성능이 좋은 트럭을 원했다. 둘의 요구가 맞물리면서 픽업은 점차 짐 싣는 차에서 승차감 좋은 고급차로 바뀌었다. 과거엔 바닥에 카펫을 깐 픽업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여느 고급차가 부럽지 않을 만큼 편의장비가 호화로운 픽업도 많다.
픽업트럭은 처음엔 2인승뿐이었지만 나중에 2+2 형태의 캐빈이 더해졌다. 뒤쪽 캐빈엔 조그만 의자를 달아 임시 의자로 쓰거나 짐 싣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5인승 4도어 모델은 크루캡(Crew Cab)이라고 한다. 이런 픽업이 승용차처럼 쓰이면서 가족용 차로도 어색하지 않게 됐다. 포터 더블캡이 시골에서 온 가족을 위한 차로 쓰이는 것과 같다. 크루캡은 짐을 싣는 것보다 승객을 태우는 역할이 커지면서 옵션이 점점 풍성해졌다. 크루캡을 처음 소개한 미국 포드 광고에서 함박웃음을 짓는 인부 다섯 명이 공사장으로 향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때는 포드도 크루캡 모델이 이렇게 널리 사랑받을 줄 몰랐을 거다.
승객이 타는 공간이 늘어나면 짐 싣는 공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적재공간이 줄어든 픽업은 짐 싣는 차로 쓰기에 애매한 면이 있다. 모터사이클을 실으면 꽁무니에 달린 뒷문을 열고 달려야 한다. 4도어 5인승 픽업 트럭을 SUT(Sport Utility Truck)라고도 한다. SUT는 짐 싣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다. 다섯 명이 타는 승용차에 큼직한 트렁크가 달린거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서 터프한 트럭의 매력을 한껏 누리는 거다. 품위는 어떨지 몰라도 쓰임새는 훨씬 넓어진다.
FORD F-150
1948년 데뷔한 포드 F시리즈 픽업은 이제 13세대에 이르렀다. 지난 한 해 글로벌 판매대수가 100만 대를 넘었으며, 미국의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베스트셀러인 만큼 모델 종류도 많고, 다양하게 치장하거나 옵션을 넣는 것도 가능하다. 풀사이즈 모델인 F-150은 길이가 5.9미터에 달하고, 너비는 2미터가 넘는다. 프런트그릴에 달린 두 개의 크롬 바가 보여주듯, 선이 굵은 디자인은 안팎으로 모든 것을 두텁고 든든하게 보이게 한다. 덩치가 우람하지만 미국의 광활한 대지를 배경으로 선다면 풀사이즈 트럭은 결코 큰 차가 아니다. 미국인, 특히 미국 시골 사람 중에는 덩치가 큰 사람들이 많아 커다란 트럭이 잘 어울린다. 자동차는 환경에 따라 만들어진다.
시승차의 문을 여는 순간 도어 아래쪽으로 ‘스르륵’ 발판이 나온다. 작동이 부드럽고 빠르다. 차고가 높은 차는 발판이 필요하다. 오늘 온 시승차는 V6 에코부스트 엔진을 얹은 고급형 플래티넘 모델이다. 트럭에서 보기 드문 파노라마 선루프 등 모든 옵션을 갖추고, 110V 소켓과 USB 단자도 듬뿍 챙겼다. 단, 미국에서 직수입한 모델이라 안테나가 봉이다. 내비게이션도 작동이 안 된다. 다행히 계기반 눈금은 마일이 아닌 킬로미터로 표시된다. 두툼한 센터콘솔이 보여주듯 실내가 여유롭지만 차의 너비는 생각보다 부담스럽지 않다. 뒷자리 안전벨트에는 요즘 포드가 자랑하는 에어백이 들어 있다. 뒷자리 시트 쿠션을 들어 올려 등받이에 붙이면 공간을 더욱 널찍하게 쓸 수 있다. 아마도 미국인들은 여기에 기관총을 둘 거다.
2015년 데뷔한 지금 모델은 알루미늄 차체로 유명하다. 무게를 줄여 연비와 성능을 높이는 것이 목적인데 워낙 큰 차라 효과는 미미하다. 3.5리터 V6 에코부스트 엔진의 375마력은 공차중량 2.5톤의 차에 넘치는 힘은 아니지만 충분히 여유롭다. 트윈터보 엔진은 0→시속 97킬로미터 가속을 약 6초에 마친다. 58.0kg·m에 달하는 최대토크가 어느 순간에도 묵직한 힘으로 밀어낸다. 휘발유 엔진이라 대체로 조용하지만 가속할 땐 그윽한 배기음을 토해낸다. 10단 기어는 변속이 매우 부드럽다. 킥 다운을 하면 한 번에 여러 단을 내리면서 박력을 더한다. 10단 중 3단이 오버드라이브인 변속기는 라이벌인 GM과 함께 개발했다고 한다.
저속 기어를 갖춘 4WD 시스템은 다이얼을 돌려 간단히 바꿀 수 있다. 차가 클수록 오프로드 능력도 커진다. 예를 들어 같은 도랑도 커다란 타이어가 쉽게 건넌다. 시승차는 견인에 필요한 모든 장비도 갖췄다. F-150은 마냥 부드럽다. ‘무슨 트럭이 이러냐?’ 푸근하고 조용한 감각이 여느 고급차 부럽지 않다. 이래서 많이 팔리는가 싶다. 부드러운 승차감에 취해 어떻게라도 이 차와 살아볼 궁리를 한다. 그냥 확 지를까? 그런데 커다란 덩치는 주차에 문제가 없을까? 이마트 주차장에 들어갈 수 있을까?
부드러운 차는 코너에서 조심스럽다. 운전이 쉽고, 조작이 가볍지만 날카로운 핸들링은 아니다. 뒷바퀴에 리지드 액슬과 판 스프링을 단 차의 클래식한 터프함을 즐긴다. 공인연비는 리터당 12.3킬로미터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가속을 하면 은근한 배기음이 시쳇말로 죽여준다. 지붕을 드러내며 옆을 지나는 모든 차들이 하찮아 보인다. 한국에서 SUT는 조금 값싼 SUV를 타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높이 앉아 달리는 포드 F-150에선 위엄이 넘쳐흐른다. 미국산 SUT는 롤스로이스도 부럽지 않다.
SSANGYONG REXTON SPORTS
F-150과 나란히 선 렉스턴 스포츠는 왜소해 보인다. 미국 기준으로 중형 픽업에 속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G4 렉스턴의 디자인이 이전보다 간단해지면서 오히려 나아진 듯하다. 솔직히 이 디자인도 충분히 복잡하다. 오랜만에 만난 쌍용차는 엠블럼이 또 바뀌었다. 음,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다. SUT는 보통 캐빈과 적재함이 떨어져 있는데 렉스턴 스포츠는 뒷문을 늘려 하나의 보디처럼 보인다. 이음새를 단순하게 만들어 깔끔하게 처리했다. 그런데 쌍용 디자이너는 적재함 보디에 무언가 그려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듯하다. 항상 ‘ㄱ’자로 그리는 수직 캐릭터 라인이 거슬린다. 트럭 적재함은 그냥 놔둬도 괜찮다.
SUT는 구조상 적재함 공간이 충분치 않은데, 그나마 무쏘 픽업트럭 때부터 트럭으로 인정받기 위해 짐칸을 늘렸다. F-150의 적재함 도어가 알루미늄이라 그런지 렉스턴 스포츠의 도어가 상대적으로 무겁게 느껴진다. 적재능력은 커다란 F-150이 300킬로그램이라는데 렉스턴 스포츠가 400킬로그램이라고 한다. 도어를 열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발판은 F-150의 것을 닮았다. 높이를 생각하면 발판이 필요한 차는 아니다. 성인 남자는 없어도 타는 데 별문제가 없다. 이상한 건 차가 이렇게 큰데 탈 때마다 A 필러에 머리가 부딪힌다는 거다.
운전석에서 F-150과 비교하니 모든 것이 작고 가볍게 느껴진다. 섬세하면서 승용차 같은 느낌이 트럭에 과분하다는 생각이다. 앞뒤 자리를 채운 갈색 시트가 무척 고급스럽다. 앞뒤로 넉넉한 공간이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시승차는 디젤 엔진을 얹었는데 조용하고 부드러운 게 승용차를 모는 것 같다. 2100킬로그램의 공차중량에 181마력은 적당하다. 서스펜션이 노면에 지나치게 민감한 듯싶지만 전체적으로 부드럽다. 고속으로 달리면 조금 허둥대는 모양새지만 일반도로에서 이 정도면 훌륭하다. 6단 아이신 변속기 역시 부드럽다. 4WD 조작은 다이얼을 돌려 간단히 바꿀 수 있다. 렉스턴 스포츠 역시 프레임 보디에 저속 기어를 갖춘 정통 오프로더다. 생각보다 가볍게 달리는 게 마음에 든다. F-150보다 콤팩트하고 다루기 편해 일상적인 차로 탈 만하다는 생각이다.
미국의 SUT 기준에 맞추려면 뒤 시트도 접을 수 있어야 하고, 뒤 범퍼에 발판도 필요하다. 뒤쪽 캐빈에 조그만 창도 달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렉스턴 스포츠는 아직 부족한 면이 꽤 있다. 그렇지만 G4 렉스턴보다 1000만원 정도 싼 덕에 상대적으로 가치가 크게 느껴진다. 생계형 차도 아닌데 자동차세는 1년에 2만8500원만 내면 된다. 나도 한 대 사볼까? 이래서 요즘 이 차가 인기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