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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도의 역사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6112
한말의 철도 부설 과정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군사 행동상의 이유로 서울∼부산 간, 서울∼인천 간의 군사철도 부설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그 해 8월 20일 이른바 한일잠정합동조관(韓日暫定合同條款)을 강요할 때 “경부선 · 경인선 간의 철도 수축 공사는 한국 정부가 재정이 아직 충분하지 못함을 고려하여 일본 정부 또는 일본의 한 회사와 체결하고, 시기를 보아서 이를 기공시킴을 희망한다.”는 조항을 포함시킴으로써 철도부설권을 확보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내정간섭을 자행하였으며, 1896년에 우리나라 정부는 「국내철도규칙」을 새롭게 제정하여 공포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부설 경영하는 일반 철도에 관해 준수할 내용을 규정한 것이다. 그 뒤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과 이에 따른 친러내각이 수립됨으로써 러시아의 국방책에 따른 「국내철도규칙」으로 개정하였으나 1898년 들어 다시 1896년의 제도로 환원되었다.
1895년 청나라의 패전과 친러파 · 친일파의 각축 등 국내외 정세가 복잡 미묘해지는 사이 러시아 · 미국 · 프랑스 · 독일 · 일본 등은 광산채굴권과 철도부설권 등 주요 이권을 우리나라 조정으로부터 획득하였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1889년 주미조선공사인 박정양(朴定陽)을 수행하였던 이하영(李夏榮)이 귀국 시에 철도모형을 구입하여 고종에게 보여주면서 철도의 편익성과 효용가치를 역설하면서부터 철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1896년 3월 29일 미국인 모스(James R. Morse)가 경인선 철도부설권을 획득한 후 1897년에 본격적인 건설공사가 인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모스의 자금난으로 1898년 5월 10일 일본인이 경인철도합자회사를 설립하였고, 1899년 9월 18일에 제물포∼노량진 간의 경인선(33.2㎞)이 최초로 개통되어 영업을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기관차 4대, 객차 6량, 화차 28량이 이용되었고 7개소에 역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우리나라의 철도는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토대를 다지는 군사적 차원과 식민지 경제수탈을 위한 경제적 차원에서 부설되기 시작하였다. 한강철교의 준공과 함께 1900년 7월 7일에 노량진에서 남대문역까지의 구간이 개통되었고, 1901년 8월 20일에는 서울의 영등포와 부산의 초량에서 경부선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을 전후하여 1월 1일에 경부선 서울∼초량 간 445.6㎞ 구간이 개통되었고, 이듬해 4월 3일에 서울∼문산 간 46.0㎞ 구간이 개통되어 일제의 식민지 정책수행은 탄력을 받게 되었다. 1908년 4월에 초량∼부산 구간이 완성됨으로써 경부선 전구간이 개통되었고, 1909년 4월 3일에 문산∼신의주 구간이 완공되어 경의선 또한 전구간을 개통하게 되었다.
1914년 1월 11일에는 대전∼목포 구간의 호남선이, 같은 해 8월 16일에는 서울∼원산 구간의 경원선이 각각 개통되어 운행을 시작하였다. 당시 대전은 ‘한밭’이라 불리는 한적한 시골마을이었지만,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의 분기점에 역이 세워지면서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1928년에 원산∼상삼봉 간의 함경선, 1929년에 조치원∼봉양 간의 충북선, 1931년에 천안∼장항 간의 장항선, 1936년에 이리∼여수 간의 전라선, 1942년에 청량리∼경주 간의 중앙선이 각각 개통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의 철도교통로는 서울을 중심으로 X자형의 노선망을 구축하게 되었고, 일제는 이 노선을 활용하여 대륙침략의 기회를 엿보는 동시에 우리나라의 자원을 손쉽게 수탈해 갈 수 있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에는 경인철도합자회사가 설립되어 경인선을 운영하였고, 1901년에는 경부철도주식회사가, 1902년에는 영남지선철도회사가, 1903년에는 대한철도회사가 각각 설립되어 철도의 경영주체로 등장하였다. 1904년에 경의선 부설을 위한 임시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府)가 설치되었으며, 1905년에 호남철도회사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906년에 통감부 철도관리국이 설치되면서 운영이 하나로 통일되기 시작하였다. 1917년에 우리나라 철도 경영을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에 위임하였다가 1925년에 위탁 경영을 해제하고 조선총독부가 직영으로 광복이 될 때까지 운영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철도 발달
조선총독부의 직영 당시에 총독부는 이른바 산업 증식 및 기타 각종 산업의 진흥에 관한 계획을 세웠는데, 철도도 이러한 방침에 호응하여 물자개발 · 문화융흥 · 대대륙연락(對大陸連絡) 및 국방경비 강화라는 슬로건 아래 교통 시설의 정비 · 확충을 기도하였다. 이 가운데 건설과 개량 사업은 큰 진전이 있었다.
즉, 1927년 이후 철도12개년계획에 따라 종전의 함경선과 평원선 등 2개 노선에 더하여 도문선 · 혜산선 · 만포선 · 동해선 · 경전선 등 5개 노선과 백무선을 건설하였다. 건설 계획이 진척됨에 따라 국유선 간을 운행하던 사설철도를 매수하고 매수된 노선 가운데 궤도의 폭이 좁은 협궤선을 광궤로 개축하는 등 대규모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와 같은 계획은 재정형편으로 인해 제대로 시행되지는 못하였지만, 1928년 함경본선, 1933년 도문선, 1937년 혜산선, 1939년 만포선 등이 부설되기도 하였다.
한편 1912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증가하는 운송수요를 충족시키고 각 지방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개발하기 위하여 사설철도의 보급에 노력하여 1913년부터 사설철도가 부설되었다. 최초의 사설철도는 전주∼이리 간에 부설되었으며, 이후 1916년에 신의주∼개천 간, 1918년에 대구∼하양∼포항 간에 부설되었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경제호황과 맞물리면서 사설철도 부설은 급증하였다. 1919년까지 새로 인가된 선로 연장은 2,024㎞이고, 신설된 회사는 7개에 달할 정도로 철도 건설은 활기를 띄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번잡한 종래의 보조 방법을 지양하고 장기간에 걸친 일정한 보조책을 수립하였으며, 1921년부터 「조선사설철도보조법」을 제정하여 시행하였다.
1923년에 조선중앙철도(朝鮮中央鐵道), 남조선철도(南朝鮮鐵道), 서선식산철도(西鮮殖産鐵道), 조선삼림철도(朝鮮森林鐵道), 조선산업철도(朝鮮産業鐵道), 양강척림철도(兩江拓林鐵道) 등 6개 주식회사를 합병하여 새롭게 탄생한 조선철도주식회사(자본금 7,200만 원)가 각 철도회사의 사업을 인수하였다.
1935년에는 다사도철도주식회사(多獅島鐵道株式會社)가 설립되어 다사도선(양시∼남시 간) 부설권을 획득하였고, 1936년에는 삼척철도회사(三陟鐵道會社), 경춘철도회사(京春鐵道會社), 단풍철도주식회사(端豊鐵道株式會社), 평안철도회사(平安鐵道會社) 등의 4개 철도회사가 새롭게 설립되었다. 1940년 당시 14개사의 사설철도회사의 선로는 개업선이 1,510㎞, 미개업선이 349.8㎞에 달하였다.
통감부에서는 철도의 통일 경영을 위하여 사설철도에 대한 매수작업을 1926년부터 시작하였다. 1927년 이후 6년간 국유철도 사이를 연결하며 운행하던 전북철도(全北鐵道)의 4개 노선을 매수하였으며, 1933년에 차용 영업 중이던 개천철도(价川鐵道)를, 1936년에 남조선철도를, 1940년에 조선철도의 경북선을 각각 매수하였다. 이렇게 매수된 노선의 총연장은 653.7㎞, 매수가액은 4410만 5000여 원에 달하였다. 나머지 사설철도는 광복 후 1946년에 국유화되었다.
광복 이후의 철도 건설
1973∼1975년 사이에는 강원도의 지하자원을 수송하는 산업철도인 중앙선 · 태백선 · 영동선 등의 구간에 대한 전철화 사업이 이루어졌다. 1974년에 수도권(서울∼수원, 구로∼인천, 청량리∼성북) 전철이 개통됨으로써 도시 교통의 새로운 전환점을 이룩하였다. 1984년에는 1978년에 착공된 서울지하철 2호선 54.3㎞가 개통되었으며, 1985년에는 1980년에 기공된 서울지하철 3호선과 4호선 59.2㎞가 개통되었다.
1975년에 영동선의 황지∼백산 간이 전철화되었고, 1978년에 호남선의 대전조차장∼익산 간의 88.6㎞가 복선화되었다. 1980년에 진삼선의 사천∼삼천포 간 운수 영업이 중지되었으나 충북선의 조치원∼봉양 간 113㎞의 복선화가 이룩되었고, 1981년에 스팀관광열차(부산∼경주 간)의 운행 및 경부선의 영등포∼수원 간 복복선 개통, 경인선의 구로∼인천 간 복복선 개통, 1982년에 경원선의 성북∼의정부 간 13.1㎞의 복선 전철 개통 등이 있었다.
1985년에 착공된 광양∼제철소 간 광양제철선 19.7㎞가 1987년에, 호남선의 익산∼송정리 간 101.2㎞의 복선 철도와 1986년에 착공된 안산선(금정∼원곡 간 11.3㎞)은 1988년에 개통되었다. 복선화와 전철화도 꾸준히 진행되어 1987년에 제천∼단양 간 29㎞, 1988년에 단양∼영주 간 34.9㎞가 전철화 되었다.
1991년에는 영등포∼구로 간의 3복선이 개통되었고, 경인선의 구로∼부평 간 14.9㎞ 복복선구간이 1999년에, 부평∼주안 간 복복선구간은 2002년에 개통되었다. 2003년에는 경부선 수원∼병점 간 복복선 구간이 개통되었으며, 2004년에는 호남선 복선전철이 완공되었다. 1988년에는 중앙선(제천∼영주 간) CTC(열차집중제어장치) 전철이 개통되었고, 1992년에는 경부선 CTC가 전면 개통되었다.
우리나라 철도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은 고속철도(KTX)의 건설이다. 1992년 6월 30일에 기공식을 가진 경부고속철도를 시작으로 2009년 7월 23일에는 호남고속철도가 착공되었다. 경부고속철도는 2004년 4월 1일에 부산발 서울행이 첫 운행을 시작하였으며, 2010년 11월에 경부고속철도 2단계 구간이 개통되었다. 새마을호를 이용하면 4시간 10분이 걸리던 서울∼부산 구간의 통행시간이 2시간 20분대로 크게 단축되었다.
충청북도 오송역에서 전라남도 목포역까지 건설된 호남고속철도는 2015년 4월에 개통되었다. 이는 호남지방의 성장잠재력을 극대화하면서 국가 균형발전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들 고속철도의 개통은 도로혼잡의 문제를 해결하고 실질적인 전국 반나절 생활권을 실현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에서는 1989년에 제2기 서울지하철 기본계획이 확정된 이후 1995년에 5호선 강동 구간 개통을 시작으로 1996년에 지하철 5호선의 나머지 구간과 7·8호선이 차례로 개통되었다. 2000년에는 지하철 6호선, 2009년에는 민간자본으로 건설된 지하철 9호선이 각각 개통되었다.
부산에서는 1985년에 지하철 1호선이 개통한 것을 시작으로 1999년에 2호선이 개통되었고, 2005년에 3호선, 2011년에 4호선이 각각 운행을 시작하였다. 인천에서는 1999년에 1호선이 운행을 시작하였다. 대구에서는 1997년에 지하철1호선이 운행을 시작한 이후 2005년에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었고, 2015년 도시철도 3호선이 개통되었다. 광주에서는 2004년에 1호선이, 대전에서는 2006년에 1호선이 개통되어 운행을 시작하였다.
수도권에서 운행하는 전철은 분당선(1994년), 중앙선(2005년), 경원선(2006년), 경의선(2009년), 인천국제공항철도(2010년), 경춘선(2010년), 신분당선(2011년), 수인선(2012년), 의정부경전철(2012년), 용인경전철(2013년) 등이 있다. 부산권에서는 2011년부터 부산-김해경전철이 운행되고 있다.
광복 이후의 철도 운영
광복 당시 우리나라 철도의 영업시설을 보면 영업거리 총연장이 6,362㎞, 역설비 762개소, 차량은 기관차 보유대수 1,166대, 객차 2만 7027량, 화차 1만 5352량을 보유하였고 종업원수는 10만 527명이었다. 그러나 국토분단으로 남한의 영업거리 총연장은 2,642㎞로 절반도 안되게 줄었고, 역수도 300개소로 감소하였다. 차량은 기관차 517대, 객차 1,280량, 화차 8,424량만이 남았고 종업원수도 5만 5960명으로 줄어들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으로 운수부는 교통부로 개편되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철도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데 그 피해 상황을 보면, 기관차 51%, 객차 50%, 화차 34%, 건물 41% 등 대부분의 시설과 장비가 파손되었다. 1951년에는 디젤기관차(35대)가 처음으로 등장하였고, 1959년에는 국내에서 최초로 객차 제작에 성공하여 전쟁 복구와 철도 재건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전후 복구에 힘쓴 결과 우리나라의 철도 시설은 산업철도 건설을 비롯하여 국산 객차의 대량 생산, 차관에 의한 차량 도입, 철도 침목의 PC화 등 여러 부문에 걸쳐 획기적으로 발전하였다. 1962년부터 실시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따라 철도 건설은 한층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때 사회간접자본 부문의 수송 능력 확충을 비롯하여 산업철도의 건설과 지역 사회 개발에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1963년에 철도의 전문적이고 합리적인 운영을 위하여 교통부의 외청(外廳)으로 철도청이 발족되었다. 철도의 운영 주체는 철도청으로 바뀌고, 철도사업 특별회계는 기업 회계 방식에 의거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또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추진으로 급격히 증가한 수송수요를 감당하기 위하여 기존 철도시설의 근대화 개량사업에 치중하게 되었다.
시설면에서는 레일의 중량화와 장대화, 보수방식의 기계화, 신호의 자동화, 그리고 전철화 등이 진행되었고, 동력의 근대화를 위해 전기기관차 및 디젤기관차화를 비롯하여 차량의 경량화에 초점을 두었다. 뿐만 아니라 자동열차제어장치(ATC), 자동열차정지장치(ATS), 열차중앙집중제어장치(CTC), 열차무선전화설비 등 안전시설과 승차권 발매 전산화, 승차권 자동판매기, 자동 개집표기, 승차권 전화예약제도 등 서비스시설의 현대화를 이룩하였다.
대도시에서는 인구의 도시집중으로 교통여건이 열악해짐에 따라, 교통문제 완화를 위해 서울을 비롯한 부산, 인천, 대구, 광주, 대전 등지에 도시철도가 운행되고 있다. 그동안 철도는 여객과 화물 수송 분담의 대부분을 점유하여 육상교통 수단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려왔으나, 1970년대 이후 경부고속도로 · 호남고속도로 · 영동고속도로 등 잇따른 고속도로의 개통과 자동차 산업의 성장에 의한 공로의 경쟁력 강화로 철도의 수송 수요는 감소하였다.
또한 철도 운영의 경직성으로 인한 만성적인 경영 적자로 수입은 감소되었다. 철도청은 철도 재건 계획 · 경영 합리화 계획 등 철도 재정의 자립을 위한 장 · 단기 계획을 수립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2005년 1월에 건설부문을 담당하는 한국철도시설공단과 운행부문을 담당하는 한국철도공사(코레일)로 분리되었다.
철도를 합리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민간투자를 활성화하였는데 이는 노선에 대한 민간투자와 역사에 대한 민간투자로 나뉜다. 노선에 대한 민간투자는 서울지하철 9호선을 비롯하여 부산-김해경전철, 의정부경전철, 용인경전철 등이 있다. 인천국제공항으로 연결되는 공항철도는 민간자본으로 개설되었으나 수요부족으로 인한 적자의 규모가 커지고 너무 많은 적자보전금이 발생하여 2009년에 코레일에서 경영권을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철도 경영에 민간 기법과 민간 자본을 도입하여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1983년에 민자역사 건립 계획이 확정되고, 1984년에 민자역사 건립 법안이 공포된 이후, 1989년에는 서울역 민자역사와 동인천 민자역사가 개관되었다. 1991년에는 영등포 민자역사가 개관되었고, 1994년에는 부평 민자역사 공사가 착공되어 2000년에 완공되었다.
2008년에는 서울 왕십리역 민자역사가, 2010년에는 청량리역 민자역사가 각각 준공되었다. 민자역사의 건설은 상업시설의 유치를 통해 역세권을 확보하고 철도공사에서는 열악한 역사의 개선과 함께 새로운 역무시설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1966년 경부간 화물 열차가 최초로 운행된 이후 1972년에 컨테이너 화물 수송이 시작되었고, 1983년 수원에 컨테이너 화물기지가 준공되었다. 1992년 화물 운송을 위한 철도컨테이너 내륙기지 운영회사(ICD)가 설립되고, 그 해 자동차 생산 제품의 철도 수송이 시작되었다.
한국철도공사에서는 컨테이너 수송시장을 확대하기 위하여 컨테이너화물 장치장(CY)을 확충하고 철도역의 물류기지화 등을 추구하였다. 또한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됨으로써 기존의 경부선을 화물수송 중심으로 운영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세계적으로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의 연계 및 남북경협활성화에 따라 경기북부지역에 철도물류기지를 구축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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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본보다 우리가 먼저다뭘 일본대문이라는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