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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되라] 성경에는 왜 ‘미사’라는 말이 없나요?
가톨릭교회의 중심은 미사인데 성경에 미사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궁금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미사’라는 명칭은 5세기 중엽부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이전에 쓰인 성경에는 나오지 않을 수밖에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한 제자들이 오순절에 예루살렘 교회를 창립하면서 만든 예식이 세례와 성만찬입니다. 특히 오늘날의 ‘미사(Missa)’라 할 수 있는 성만찬례는 예수님께서 서기 30년 4월 6일 저녁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만찬을 본떠 만들어진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최후만찬을 거행하시면서 하신 말씀들을 전승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으며, 그 말씀들 속에 담겨 있는 의미들을 되새겼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다 또 다른 의미들을 덧붙여서 성찬례를 거행하였습니다.
가톨릭교회 전례의 핵심이 되는 성만찬의 명칭은 다양합니다. 우선 초대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기념하여 매주 한 번 함께 나는 공동체 회식을 일컬어 ‘주님의 만찬’(1코린 11,20)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이 회식을 할 때는 가장 또는 주빈이 빵을 들고 하느님께 찬양기도를 바친 다음 빵을 떼어 참석자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여기서 ‘빵을 나눔’(루카 24,35; 사도 2,42) 또는 ‘빵을 뗌’(사도 2,42.46; 20,7.11; 1코린 10,16)이라는 명칭이 생겨났습니다.
1세기 말엽부터는 ‘감사제’(디다케 9~10장)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명칭은 유다교 회식 시작 때 ‘찬양기도’(히브리어로 ‘브라카’)를 드렸는데, 이를 그리스어로 옮길 때 ‘찬양’(에루로기아)이라고도 직역할 수 있지만 ‘감사’(에우카리스티아)라고 의역할 수 있는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실제로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성만찬기에선 “빵을 드시고 찬양하신 다음”(14,22)이라 했는데, 사도 바오로의 성만찬기에선 “빵을 드시고 감사하신 다음”(1코린 11,23.24)이라고 했습니다.
5세기 중엽부터 사용된 ‘미사(Missa)’라는 용어는 아직까지 그 어원의 유래와 의미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라틴어 미사 시 예식을 마치면서 사제가 ‘이테, 미사 에스트(Ite missa est’라는 말을 한 데서 생겨난 명칭이라는 게 정설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는 ‘미사가 끝났으니 해산하라’는 뜻인데, 단순히 해산을 선언한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만찬은 최후만찬에서 주님의 만찬으로, 빵을 나눔에서 감사제로, 그리고 오늘날에는 미사라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이어받아 교회가 거행한 예식을 ‘성만찬’ 또는 줄여서 ‘성찬’이라 부르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성만찬에 담겨 있는 베풂과 나눔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빵을 나눔’이라는 명칭이 아름답습니다.
[빛이 되라] 하느님의 이름
인간에게 이름이 있듯 하느님께서도 이름을 가지고 계실까요? 하느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시라 이름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구약성경에서는 여러 호칭으로 하느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였습니다. 히브리어는 본래 모음 없이 22개의 자음만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은 처음에 자음으로만 기록되었던 것입니다. 자음으로만 쓰인 구약성경에 대략 5~9세기경에 모음 부호가 붙여졌습니다. 모음 부호가 누구에 의해서 언제 붙여졌는지 알 수 없고, 다만 이런 작업을 한 이들을 ‘마소레트’(Masoretes)라고 부릅니다. 이는 ‘전승자’라는 뜻입니다. 이 전승자들에 의해서 모음이 붙여진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마소라 성경’(Masoretic Text: 약호 MT)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크게 두 가지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하나는 일반 호칭으로서 ‘하느님’(God)인데, 히브리어로는 ‘엘로힘’(Elohim)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히브리어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입니다. 엘로힘은 ‘엘로아’의 복수로 추정되는데, 엘로아는 욥기에는 42번 나오고 그 밖의 성경에서는 15번 나옵니다. 야웨와 더불어 하느님을 가리키는 데 가장 많이 쓰이는 이름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유한 호칭으로, ‘신명사문자’(神名四文字)로 된 야웨(YHWH)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에 따라서 하느님 이름 ‘YHWH’가 나오면, 그 본래 발음을 하는 대신에 히브리어로 ‘나의 주’(主) 또는 ‘나의 주인님’이라는 뜻을 지닌 ‘아도나이’(Adonay)로 고쳐 불렀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 ‘YHWH’라는 이름의 정확한 발음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음으로만 되어 있던 히브리어 성경에 모음을 붙이는 과정에서 유다인 성경 학자들은 ‘YHWH’라는 이름에 ‘아도나이’(Adonay)의 ‘a,o,a’ 모음을 붙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명사문자는 표기상 ‘야호와’(YaHoWaH)가 되어야 하겠지만, 후대의 성경학자들이 첫 번째 모음인 ‘a’를 ‘e’로 약간 바꾸어 ‘예호와’(YeHoWaH)로 고쳐 적었습니다. 그러나 ‘YHWH’의 본래 발음은 ‘예호와’보다 ‘야웨’(Yahweh)에 가깝습니다.
옛 히브리인들이 이 신명사문자 ‘YHWH’를 어떻게 발음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마다 ‘야웨’, ‘야훼’(공동번역 성서), ‘야붸’라고 발음하기도 합니다. 특히 ‘예호와’라는 잘못된 명칭은 16세기 레오 10세 교황의 고해 사제였던 갈라티누스(Petrus Galatinus)라는 신부에 의해 전해졌고, 약간 변형된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개신교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가 2005년에 펴낸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이름 ‘YHWH’를 ‘주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알렐루야’는 ‘야웨를 찬양하라’, ‘엘리야’는 ‘야웨는 나의 주님이시다’. 그리고 ‘오바드야’는 ‘야웨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모두 끝에 ‘야웨’라는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빛이 되라] 가톨릭과 개신교의 경전 수가 왜 다른가요?
본래 ‘구약’이라는 말도 ‘성경’이라는 말도 없었습니다. ‘신약’이라는 말이 생기면서 ‘구약’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하 세파림’이라 불리는 ‘성경’은 단순히 ‘그 책들’이라는 뜻이며, 그리스어로 ‘타 비블리아’로 번역되었고 그 후 라틴어와 영어를 거치며 ‘바이블’, 곧 ‘성경’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약 1천 년의 기간을 두고 쓰인 책 들인데, 후에 정경화(正經化) 작업을 거쳐 경전이 되었습니다. 모세오경은 기원전 450년경, 예언서는 기원전 200년경에 정경으로 채택되었고, 90년경에 유대인 랍비들이 야브네(그리스어로 얌니아)에서 종교회의를 열어 성문서를 정경으로 확정했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히브리어로 쓰인 39권의 책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를 ‘팔레스티나 정경’ 또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이라 부릅니다. 유다인들은 모세오경인 토라(Torah), 예언서(Neviim: 네비임), 성문서(Kethuvim: 크투빔)의 머리글자(T,N,K)를 따고 거기에 모음을 붙여, 구약을 ‘타낙’(TaNak)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기원전 33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물리친 후 고대 근동은 헬라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리스어가 통용어로 사용되자 팔레스티나 본토에서 사방으로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변역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작업은 기원전 3세기 중엽 당시 헬라 문화의 중심지였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뽑혀 각기 번역 작업을 했는데, 번역이 끝난 뒤 서로 대조해 보니 내용이 똑같았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라틴어로 70을 뜻하는 ‘셉투아진타’(LXX)라는 번역본의 이름이 붙여졌으며, 이를 ‘70인 역’ 또는 ‘알렉산드리아 정경, 그리스어 구약성경’이라 부릅니다.
70인 역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겼을 뿐 아니라 야브네 종교회의에서 제외시킨 15권의 책을 덧붙였습니다. 따라서 팔레스티나 정경의 입장에서는 이 15권의 책은 정경 밖의 책, 곧 외경(外經)이 됩니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탄생한 초대 교회는 그리스어 구약성경을 정경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통해서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다가 6세기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한 후 경전을 정하는 과정에서 15권의 책을 외경으로 제외하고, 히브리어로 된 39권만을 정경으로 채택했습니다. 이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1548년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개신교가 제외시킨 책들 가운데 7권을 경전으로 확정했습니다. 이때부터 가톨릭은 알렉산드리아 정경인 그리스어 구약성경에 따라 46권을, 개신교는 팔레스티나 정경인 히브리어 구약성경에 따라 39권을 경전으로 공식화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경우,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397년 튀니지의 카르타고에서 경전으로 확정한 27권을 똑같이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빛이 되라] 성경의 장(章)과 절(節)
오늘날 우리는 성경 본문을 편리하게 읽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본문이 장과 절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성경이 장과 절로 구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오로를 비롯하여 많은 성경 저자들이 편지나 복음서를 썼을 때 장과 절을 구분하여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 성경의 장 · 절 구분은 언제 생긴 것일까요?
신약성경은 모두 27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책들은 서기 50~125년 사이에 그리스어로 쓰였습니다. 물론 성경 저자가 처음에 쓴 원본은 현재까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성경 저자가 손으로 쓴 책을 후대의 사람들이 손으로 베낀 필사본들만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필사본은 그리스어 필사본만도 5천 종이 넘는데, 그중 어떤 사본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 수천 개의 사본들을 비교 연구해서 성경 원본을 재구성하는 일을 성경학계에서는 ‘사본학’ 또는 ‘원전비평’이라 부릅니다. 많은 사본 학자들이 원전비평 연구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어 신약성경 27권을 완성한 것입니다.
이 신약성경 27권은 15세기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면서부터 출판되기 시작했습니다. 라틴어 성경이 1452년과 1456년 사이에 인쇄되었고, 1514년 스페인 톨레도의 대주교 시메네스의 위임을 받은 학자들이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완성하여 출판했으나, 교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2년 뒤인 1516년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가 바젤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신약성경을 출판하여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1551년 프랑스 파리의 인쇄업자이자 출판업자였던 로베르 에티엔느가 그리스어 성경을 출판하면서 절(節) 구분을 도입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1206년에 이미 파리 대학의 이사장이며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스티븐 랑톤이 장(章)을 표시하여 성경 본문을 구분했습니다. 구약성경의 장과 절 역시 스티븐 랑톤이 13세기에 파리에서 라틴어 성경을 펴내면서 처음으로 구분을 했습니다. 이 라틴어 성경에 붙인 장과 절의 숫자가 히브리어 구약성경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로 성경 본문의 장과 절의 구분이 이루어졌으며, 이때 생긴 장, 절 표시가 오늘날의 성경 번역에까지 적용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노력으로 우리는 성경 본문을 편리하게 구분하여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장과 절의 구분이 어떤 사상적인 원칙과 객관적인 근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본문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성경이 수중에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노고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원전비평에 종사하는 이들은 성경의 원문을 복구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성경을 경외심을 가지고 읽고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들의 기쁨과 삶을 담은 사도행전 읽기 30] 애정의 코린토 교회(18,1-23)
아테네 선교를 마친 바오로는 남쪽으로 내려가 코린토 지역에 도착합니다. 아테네에서 복음 선포가 문화적 차이 때문에 힘들었듯이, 코린토 지역은 문란한 삶의 방식 때문에 힘겨웠습니다.
코린토는 아드리아해와 에게해를 잇는 운하가 있던 항구도시이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대륙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지리적 조건 때문에, 문화와 학문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습니다. 그러나 빈부격차가 심했을 뿐만 아니라 문란한 삶을 대표하는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코린토 서간을 보면, 불륜과 성적 타락에 대한 바오로의 따가운 지적을 볼 수 있고,(1코린 5,1-13; 6,12-20 참조) 교회 모임 때 가난한 이들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해 나눔이 없는 식사를 했다는 기록도 보입니다.(11,17-22 참조) 바오로는 편지를 보내 그들의 생활을 바로 잡아주고자 노력했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편지는 코린토 첫째와 둘째 서간밖에 없지만, 학자들은 적어도 4통의 편지를 보낸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렇게 많은 편지를 보낸 것으로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에 얼마나 큰 애정이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코린토에서 새로운 동료를 만난 사실을 전해 줍니다.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라는 부부입니다. 이들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추방 명령으로 로마를 떠나 코린토 지역에 온 사람들입니다. 황제의 추방 명령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에서 벌어진 메시아에 관한 논쟁 때문에 나왔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메시아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이들 부부와 함께 선교 활동을 열심히 하였고, 그 결실은 코린토 첫째 서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크리스포스와 가이오스, 스테파나스 집안의 사람들을 얻게 된 것입니다.(1코린 1,14-16) 바오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내라는 주님의 환시 후, 1년 6개월 동안 코린토에 머물면서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후 바오로는 유다인들에게 이끌려 아카이아 총독이었던 갈리오에게 붙잡혀 갑니다. 갈리오는 로마인으로, 바오로와 유다인들 사이에 종교적인 문제로 다툼이 있는 것을 알기에 재판을 열기 전에 그들을 법정에서 몰아냅니다. 이를 통해 그 당시 로마 관리자들이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유다교의 한 분파로 보는 시각입니다. 바오로는 한동안 코린토에 머물다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와 함께 에페소로 갔고, 이 부부를 에페소에 남겨 놓은 다음, 카이사리아까지 혼자 내려갔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인사한 다음, 안티오키아로 돌아갑니다. 이로써 바오로의 두 번째 선교 여행이 마무리됩니다.
바오로는 끝인사로 자신의 사랑을 전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1코린 16,24) 코린토 신자들이 신앙 안에서 잘 살지는 못했지만, 바오로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으로 삶을 바로 잡아주었습니다. 엄격한 아버지처럼 때로는 따스한 어머니처럼 격려해 주었습니다. 회개란 엄한 훈계와 충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에 같이 아파하고 공감하는 사랑이 동반되어야 완성될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이 회개를 완성하는 근원입니다.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36) 사무엘기
이스라엘의 임금은 주님, 인간은 대리자일뿐
사무엘기 상ㆍ하권의 히브리어 성경 명칭은 ‘쉐무엘’입니다. 사무엘기는 본디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이 책의 헬라어 번역본 「칠십인역」은 상ㆍ하권 둘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상권을 ‘바실레이온 알파’(Βασιλειων Α, 제1왕국기), 하권을 ‘바실레이온 베타’(Βασιλειων Β, 제2왕국기)라 이름 붙였습니다. 라틴어 대중 성경인 「불가타」는 칠십인역을 따라 사무엘기를 상ㆍ하권으로 나누지만 ‘왕국’이라는 이름 대신 ‘Ⅰ Samuel’과 ‘Ⅱ Samuel’로 표기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간행한 우리말 「성경」은 ‘사무엘기 상권’, ‘사무엘기 하권’으로 표기했습니다.
사무엘기는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 제목은 마지막 판관이자 사제이며 예언자로 이스라엘을 왕정으로 이끈 사무엘의 이름을 따릅니다. 사무엘은 판관 시대와 왕정 시대를 연결해 사울과 다윗을 기름 부어 임금으로 세운 인물입니다.
사무엘기는 대략 기원전 1070~970년 사이 100년에 걸쳐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시기 이집트, 아시리아, 페니키아, 히타이트 등 이스라엘 주변 강대국들은 별다른 분쟁 없이 평화롭게 보냅니다. 반면, 에게 해에서 건너온 필리스티아인들은 가나안 해안 지역을 거점으로 활발히 영토를 넓혀 갔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늘 이스라엘에 커다란 위협이었습니다.(1사무 4,1-7,17 참조)
사무엘기는 △ 필리스타아인들의 억압(1사무 1-7장) △ 사무엘과 사울(1사무 8-15장) △ 사울과 다윗(1사무 16-31장) △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이 유다 임금이 됨(2사무 1-4장) △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임금이 됨(2사무 5-12장) △ 다윗을 거스르는 반역(2사무 13-20장) △ 부록(2사무 21-24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사무엘기의 줄거리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판관인 엘리와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필리스티아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맙니다. 오히려 ‘실로’ 성소에 모셔둔 ‘계약 궤’를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빼앗기고 맙니다.(1사무 4장) 계약 궤는 일곱 달 뒤에 되돌아왔지만, 성소 파괴로 오지 마을 창고 안에 보관됩니다.(1사무 6,1-7,1)
필리스티아인들의 억압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과 에돔인들처럼 임금을 달라고 사무엘에게 아우성을 칩니다.(1사무 8장) 사무엘은 유다인들에게 “이스라엘의 운명은 유일한 임금이신 하느님께 충실하고 순종하는 데 달려 있다”고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인간 임금은 백성으로 하여금 ‘말과 마차’를 신뢰하도록 해 하느님과 멀어지게 할 뿐”이라고 질책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의 갈망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어 벤야민 지파 출신 사울을 임금으로 선택합니다.(1사무 9-10장) 사울은 하느님의 요구에 복종하지 않아 하느님께 버림받습니다.(1사무 15장)
이와 대조적으로 사울의 계승자 다윗은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탄 예언자를 통해 다윗 왕조가 영원히 지속할 것이며, 다윗 가문 임금들을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할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다윗 가문과 맺으신 계약입니다.(2사무 7장)
이 계약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하느님의 대리자, 진정한 임금이 됩니다. 또 다윗을 계승한 임금들이 하느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지만, 그계약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리라는 확신을 표현합니다. 사무엘기에서 다윗은 하느님의 벌을 받은 죄인이자 아들들을 잃고 고통을 겪는 비극적인 인물로 묘사되면서도 구원자 이미지와 결합됩니다.
사무엘기는 기원전 9세기 통일 이스라엘이 남북 왕국으로 갈라진 직후 흩어져 있던 여러 자료를 모아 처음으로 편집 작업을 한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이 시기 특별히 다윗 왕조와 그 왕권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주장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기는 다윗이 어떻게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임금이 됐는지, 왜 그의 왕조와 왕권만이 하느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1사무 16,1-2사무 8,18 참조) 이후 히즈키야가 다스리는 동안 (기원전 715-687년) 재편집돼 마지막으로 기원전 6세기에 신명기계 역사가들이 개정했으리라 추정합니다. 이런 이유로 사무엘기는 이스라엘 왕정 제도와 초기 왕정을 예언자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역사 문학 작품’이라고 학자들은 평가합니다.
사무엘기가 말하는 왕정 제도의 핵심 사상은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주님이시며 임금이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기에 따르면 인간은 하느님의 대리자일 뿐 결코 백성의 주인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임금의 첫째 임무는 백성이 하느님과의 계약과 율법에 충실하도록 다스리는 것이라고 소개합니다.(1사무 12,2) 아울러 하느님께서 당신이 선택하신 인물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1사무 7,6)
사무엘기는 또한 다윗과 그 후손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을 알려줍니다. 하느님과 다윗 가문의 특별한 관계는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메시아’, 곧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다윗의 후손으로 올 새 임금에 대한 약속과 희망으로 발전하게 됩니다.(이사 7,1-11,16; 예레 23,5-6; 시편 89,2-53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