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30일 연중 제3주간 목요일
<등불은 등경 위에 놓는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을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1-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1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22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23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2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25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 마음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사람의 뇌의 크기를 재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뇌가 크면 사람의 머리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사람의 뇌의 무게는 통계학적으로 대략 1,200g - 1,500g정도 한다고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그보다 훨씬 큰 사람도 있고, 가벼운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문헌으로 무게를 재서 기록에 남긴 사람은 러시아의 문호 투르게네프가 2,012g 이라고 하고, 독일의 철학자인 칸트는 1,650그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죽은 다음에 해부해서 그 무게를 달아보고 그렇게 보고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뇌의 무게를 가지고 머리가 좋고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코끼리의 뇌는 대략 4,000그램이나 나간다고 하고, 향유고래는 대략 9,000그램이나 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코끼리보다 훨씬 적지만 코끼리 머리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기들은 태어나자마자 400그램 정도 나간다고 하지만 성인이 되었을 때는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150그램 정도 더 무거워진답니다. 그렇지만 여성들보다 남성들이 머리가 더 좋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법시험이나 공무원이나 교원에 합격한 사람들의 비율을 보면 여성들이 월등히 높고, 고등학교와 대학에서도 성적 우수자들은 여성들이 훨씬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공부를 잘하는 것은 여성들이 더 잘한다는 것이 시험성적으로 입증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남성들이 뇌가 많아서도 아니고, 여성들이 뇌가 작더라도 더 집중력이 강하고 학습 분위기가 더 좋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머리가 좋은 사람들을 “골 찬 사람” 이라고 하고,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들을 “골 빈 사람”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골이 찬 사람들은 그만큼 뇌도 무거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뇌의 밀도에 따라서 말할 수 있다고 하는데 사람의 뇌의 밀도는 3.12, 침팬지는 1.79, 사자는 0.67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뇌의 밀도도 머리와 관계가 깊을 것이라고 생각은 한답니다. (나카하라 히데오미/홍성민 옮김/ 뇌력사전 참조)
내가 아무리 내 컴퓨터를 잘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5-10%도 활용하지 못하고 마냥 업그레이드만 해서 용량만 키우고 있지 사실은 5%도 사용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사용하는 나의 뇌도 5%도 사용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자주 느낍니다. 그래서 머리통이 유난히 커서 어떤 모자도 맞지 않아 언제나 모자를 살 때 고민하는 것이 나인데도 머리가 좋은 것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좋은 머리와 나쁜 머리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고, 내 머리가 점점 나빠지고 있는데도 머리통은 전혀 줄지 않기 때문에 내 골이 지금 텅텅 비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뇌의 양과 뇌의 크기와 뇌의 밀도에 대하여 사진을 찍고, 무게를 잴 수 있는 기술들이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의 크기를 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심장의 무게는 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 허파와 뼈들의 무게까지도 전부 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묘한 인체의 구조 중에서 아마 측정할 수 없는 것은 마음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내 뇌의 크기는 대충이라도 알 수 있겠지만 내 마음은 아무도 측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마음의 크기를 나름대로 재고 살아가지만 아무도 정답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한 뼘만 할까? 팔을 벌린 것 만할지, 한 아름이 될지, 바위덩어리 만할지, 작은 물 컵 만할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나는 호수처럼 큰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물 컵 보다도 더 작고, 적은 것인 줄 요즘 겨우 알게 되었답니다. 사람들이 나를 생각하는 것을 대하다보면, 나는 그보다는 훨씬 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들보다 너무 작고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되나 말로 담아서 내 마음을 담아서 표현한다면 아마 작은 됫박에도 미치지 못함을 깨닫게 됩니다.
내 마음을 되나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내 행실은 금방 되나 말로 표현할 수 있답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나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 행동이나 말은 금방 밖으로 표출됩니다.
아무리 큰 소리로 떠들어도 자신의 진심을 마음에 숨기고 살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무리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니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면 그 마음도 무한정으로 커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람이 출중하지 못하고 용렬(庸劣)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좁은 문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건 하느님의 마음을 닮지 못하고 지금 내 마음의 빗장을 잠그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능출불유호? 하막유사도야?’(誰能出不由戶? 何莫由斯道也?)라는 말이 있습니다. 논어의 옹야 편에 있는 말입니다. <누가 문을 통하지 않고 나갈 수 있는가? 어찌하여 올바른 도를 따르지 않는가?> 주님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하늘나라에 갈 수 있으며, 주님을 통하지 않고 어찌 도를 따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행하라는 선행을 외면하고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가? 어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어찌 내가 한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은 조금도 반성해 보지 않는 것인가? 내가 도를 따르지 않고, 선행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찌 선행을 실천하라고 하는가? 또 내가 따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따르지 않는다고 책망할 수 있는가? 그건 자신과 자식들에게도 같은 이치라는 생각입니다. 용렬한 내 마음을 탓하지 않고, 됫박으로 야박하게 되어 주면서 고봉으로 받으려고 하는 ‘밴댕이 창자’ 같은 내 마음을 탓하지 않고 사는 내가 내 아집의 문을 닫아걸고 있는 모습을 다시는 보기 싫습니다.
매일 그렇게 결심하면서 벌써 인생의 후반부에서 망설이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따라야하는 그 길에서 나는 문을 닫아걸고 그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주님, 제 마음을 더 크고 넓게 가지도록 자비의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제가 넘치도록 되어주고, 넘치도록 자신을 나누게 하소서. 빗장을 벗겨 버리고, 당신께 뛰어 달려가는 길을 깨닫게 하소서. 자비와 사랑의 주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