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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이웃을 가진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마음을 고양시키는 좋은 글들을
보내주는
좋은 벗은
보석처럼 귀합니다.
제게 선배님이시지만
여러 좋은 글들을
잘 정리하여
귀한 선물처럼
건네주시는 좋은 분이 계십니다.
보내어 주시는 좋은 글들은
어려울 때 힘이 되고,
외로울 때 친구가 되어주는
참 든든하고 좋은 영혼의 비타민과 같습니다.
“민들레 홀씨”라는
작은 소책자에 담아
많은 이들에게
사랑과 정성과 열정으로
무료로 배포하는 참 좋은 분이 계십니다.
김천교회에 시무하시는
권영섭 목사님이신데요.
대구 교도소
포항 교도소 교정위원을 역임하셨고
지금은
김천 교도소 교정위원을 맡고 계시는
연못속의 연꽃같은
귀한 사역을 하시는 분이신데
오늘은 그분이 보내주신
“민들레 홀씨”의 한 구절을
담아봅니다.
스무고개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말 못하는 짐승입니다. 나는 그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꾸준히 앞만 보고 가야하는 매인 몸이 되었습니다. 내 뒤에는 젖 먹는 자식들이 엄마를 부르면서 엄마 젖 안주고 어디로 가느냐고, 엄마가 가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목이 터지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식들이 젖 달라고 애타게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도 아예 못 들은 척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앞만 보고 가야하는 무정한 모성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몰인정한 어미가 또 있을까요? 그러면, 몰인정한 어미인줄 알면서 왜 그렇게 했느냐고요? 글쎄요. 왜 그렇게 했는지나는 모른답니다. 다만, 내가 끌고가는 새 수레 위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얹어놓은 법궤가 있답니다. 그럼 나는 어디로 가는 무엇이겠습니까?
정답은 “벧세메스로 가는 어미소”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여호와 의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삼상6:10-12)
이 시간 제목은 벧세메스로 가는 어미 소의 사명입니다. 우리도 벧세메스로 가는 소의 사명을 공감하면서 벧세메스로 가는 소의 사명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통해 주님께 영광 돌리는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법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가는 데는 잘 달리는 말도 있고, 나귀도 있고, 노새도 있고, 각종 짐승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소가 선택을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점에 유념하면서 그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은 반드시 소라야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기에 소를 택한 것이라고 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 소는 어떤 동물인가요?
(1). 소는 온유한 동물입니다.
큰 덩치와 큰 힘을 가진 짐승이 어린아이의 손에 끌리어 가자는 데로 따라갑니다. 신통한 일입니다.
이 온유한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2) 소는 인내심이 강합니다.
태산 같은 짐을 달구지에 싣고 수십리 길을 묵묵히 끌고 갑니다. 힘들다고 꾀병 부리지 않고 사람에게 불만으로 대항도 하지 않습니다. 말은 짐을 싣고 가다가 벅차면 무릎을 꿇고 쉽니다. 심한 놈은 그 자리에 누워버리고 채찍질해도 날 죽여라 하고 고집을 피웁니다. 그러나 소는 그렇지 않습니다. 짐이 무거워도, 길이 멀어도 꾹 참고 뚜벅뚜벅 꾸준히 허리에 땀을 줄줄 흘리면서 묵묵히 짐을 끌고 갑니다. 이렇게 소는 인내심이 강합니다.
(계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손은 인내하는 백성입니다.
(3) 소는 순종심이 강합니다.
어린아이들이 가자는 데로 따라갑니다.
(삼상 15:22)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과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순종은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 가운데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해달라고 3번이나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절대순종의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4) 소는 평화의 동물입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하지만 소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소는 전쟁에 사용하지 않습니다.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사9:6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평강의 왕이라고 말씀합니다.
(5) 소는 주인을 알아보는 동물입니다.
사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소를 오래도록 자식처럼 길러오신 박병준 장로님은 이렇게 말하십니다.
“소는 주인이 오는 소리를 듣고 알아본다.”
주인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마치 낳은 부모님께 '나는 스스로 생기고 태어났습니다.'하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이 얼마나 서운해 할까요?
시14:1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6) 소는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입니다.
시1:2 복 있는 사람은...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묵상은 영적 되새김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설교를 듣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말씀을 날마다 연구해야 합니다.
(7) 소는 희생하는 동물입니다.
땀 흘려 죽도록 일하고 죽을 땐 사람의 영양공급을 위해 몸을 바칩니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마가복음은 소처럼 일하시다 죽으시는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8) 소는 용맹이 있는 동물입니다.
소는 온유하고 평화만 가지고 있는데 그치지 않고 유사시에는 주인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는 용맹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시골에 농군 한 사람이 봄에 못자리 풀을 하러 등에 질매를 싣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현장에 당도해서 질매를 내려놓고 고비 줄을 소목에 얹어놓아 자유로이 풀을 뜯어 먹게 하고 주인은 열심히 풀을 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풀을 뜯어 먹고 있던 소가 웬일인지 식식 거리면서 주인에게로 달려옵니다.
주인은 웬일인가 하고 소가 달려오는 쪽을 바라보니 글쎄 건너 산 등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소가 주인에게 달려 온 것은 호랑이에게 잡아먹힐까 겁이 나서 구원을 요청하러 온 것이 아니고 주인이 호랑이에게 해를 입을까 해서 주인을 보호하러 온 것이었다.
소는 뒷다리를 벌리고는 뒷다리 사이에 숨으라는 모습을 합니다. 주인은 호랑이를 보자 겁이 났든지소가 하라는 대로 뒷다리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리고 소 꼭지를 잡고는 눈을 꼭 감았습니다. 소는 주인을 뒷다리 사이에 숨겨놓고는 호랑이가 오는 대로 뿔로 막아냅니다. 이리 오면 이리 막고저리 오면 저리 막고 그런데 주인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젠 영락없이 죽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순하고 미련하게 보이던 소가 산중의 왕이라는 호랑이에게 이기리라고는 손톱만치도 생각이 안 가는 것입니다. 소가 죽는 시간이 자기가 죽는 시간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니 온 사지가 와들와들 떨립니다. 간이 두 근 반 세근반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콩팥이 콩만 했다가 팔만 했다가 합니다. 아래윗니가 더득더득 다물리지가 않았습니다. 양 무르팍이 따닥따닥 충돌합니다. 그야말로 혼비백산할 지경입니다.
그러는 중에도 호랑이를 막아내면서 뒷걸음을 쳐서는 큰 소나무 밑에까지 왔습니다. 그제야'옳지. 나를 나무에 올라가라는 게로구나 농부는 재빨리 다리 사이에서 나와서 나무 위에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주인이 나무 위에 올라가니 이제 소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호랑이와 일대일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얼마나 잘 싸우는지 소가 그렇게 잘 싸우리라고는 옛날에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소와 호랑이가 한참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주인의 머릿속에 옛날 어른들의 이야기가 번쩍 떠올랐습니다. 산 중에서 소가 맹수와 싸울 때에는 응원을 해주어야 잘 싸운다는 이야기입니다.
옳지. 나도 응원을 해주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손뼉을 치면서 응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겨라! 이겨라! 우리 소 이겨라! 우리소 두 뿔은 무쇠 뿔이다!
호랑이 발톱은 호박발톱이다.
무쇠 뿔 우리 소 문제없다. 짝짝짝 짝짝짝!
호박발톱 호랑이 문제없다. 짝짝짝 짝짝짝!"
하고 신나게 응원을 했더니 소가 힘이 나서 얼마나 잘 싸우는지...
그런데 호랑이란 놈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성이 잔뜩 났습니다.
혈압이 머리끝까지 올랐습니다.
'무엇이 내 발톱이호박발톱이라고? 어디 한 번 호랑이 발톱 맛을 보여줘야지'라고 하면서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소의 복부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꽉 할퀴었습니다. 소 배가 호랑이 발톱에 할퀴어 좌우로 쫙 갈라지면서 선지피가 펑펑 쏟아지는가 했더니. 번개같이 날래게 몸을 피한 소는 오히려 힘 있는 무쇠 뿔로 호랑이의 목덜미를 찔렀습니다.
할퀴고 찔리고 쫓고 쫓기고 그야말로 일대 공방전이 벌어졌습니다. 두 마리 짐승이 눈에 불을 켜고 얼마나 잘 싸우는지 주인은 더욱 신나게 응원을 했습니다.
“우리 소 무쇠 뿔 문제없다 짝짝짝 짝짝짝
호랑이 호박발톱 문제없다 짝짝짝 짝짝짝.”
그런데 호랑이가 싸우다보니 자기는 혼자인데 상대방은 둘이란 말입니다. 둘다 만만찮은 적수입니다. 일대일로 해도 이길 똥 말 똥인데 2대1로 싸우니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36계 줄행랑이 제일이라고 그만 비실비실 산등을 향해 달아났습니다.
2마리 짐승의 싸움에 어느 한쪽의 KO승은 없었지만 전원일치 판정승은 소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제야 주인이 나무 위에서 내려와서 정말 잘 싸웠다. 고맙다. 하고 등을 툭툭 치면서 칭찬을 해 주었더니 소가 콧등을 주인의 몸에 문지르면서 대단히 만족해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소는 주인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용맹이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라도 바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소는 사명의 멍에를 맨 소입니다. 본문 7절에 수레를 소에 매우고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명의 명예를 두 마리소에게 메게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명의 멍에를 소에게 매게 하느냐가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첫째, 이 소는 하나님의 법궤를 싣고 벤세메스로 가야하는 사명의 멍에를 매었습니다.
9절 벧세메스로 가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재앙을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연이다. 그 소들은 자식의 울부짖는 소리도 불사하고 구경꾼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 소들은 어깨에 메인 사명을 깨달았음인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식의 부르짖는 소리도 못 들은 척 한 걸음 두 걸음 벧세메스로 향했다.
오늘날 우리도 법궤를 메고 가는 백성들이다. 계 14:12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다. 롯의 처는 뒤돌아보다가 멸망하였고 부자법관은 재물이 아까워서 하늘 영생의 길에서 돌아가고 말았다. 우리가 가는 길은 힘든 길이지만 묵묵히 앞만 바라보며 목적지인 하늘까지 가야합니다.
히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둘째, 이 소는 하나님의 살아 계시고 참 신인 것을 증거하는 사명을 매었습니다.
https://youtu.be/ccJjNtsowf0
재앙을 우연에 돌리려는 블레셋인들의 방해는 대단합니다.
① 그들은 모성애 이용합니다. 젖 나는 소 둘을 송아지와 때어 놓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삼상 6:10)
② 멍에 매어보지 않은 소입니다. 훈련받은 경험도 없고, 게다가 두마리니 서로 연합이 어려운 것등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삼상 6:7)
③ 구경꾼들을 동원합니다. (시끌벅쩍 떠드는 소리를 듣고 소가 겁에 질려 제 갈길을 못하게 합니다.).
④ 아마다 잡초를 가지고 식욕을 돋구며 그 길을 바로 가지 못하게 방해했을 것입니다.
https://youtu.be/LWnEEFrmXnk
그들은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부인하고 우연으로 돌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차대한 사명을 진 암소들은 사이좋게 발을 맞추어 가면서 진 양쪽에 맛있는 풀도 많이 있었지만 곁눈 팔지 않고 갈대에 울면서 목적지까지 도달했습니다. 가만히 조용히 가지 않고 울면서 갔습니다. 이 울음은 자식이 보고 싶어서 운 울음이 아닙니다. 자식이 보고 싶었다면 뒤를 한 번이라도 돌아보았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보라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외친 선지자의 목소리였습니다. 우리도 울면서 외치며 가야합니다.
조지 휘필드는 눈물 없이는 설교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마지막으로 이 소는 번제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삼상 6:14)
과연 이 두 마리 암소는 장한 일을 하였습니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사명완수를 잘 이행했습니다. 그리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눅17:10 '나는 무익한 종이니 내 몸을 받으소서' 하고 그 몸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린바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부름 받은 성도들의 사명임을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깊이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 소는 우리를 위해 번제 제물이 되신 십자가에 참혹한 형벌을 당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마지막 피한방울가지 남김없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우리는 소의 특성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우리들 어깨위에 매워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벧세메스까지 최후 목적지인 하늘본향에 이르는 재림 때까지 울면서 씨를 뿌리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말씀을 따라 나아가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시키고 주님의 재림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서 묵묵히 눈물의 씨를 뿌리며 앞만 바라보고 전진해야 합니다.
https://youtu.be/qkUOxDJpRlE
그리고 우리는 번제의 제물이 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날 위해 죽으셨으니 이 몸뚱이라도 주께 드립니다. 제물로 사용하여 주소서! 우리는 지금 몸을 불태울 수는 없지만 시간과 물질과 몸을 희생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거울 수도 있지만 먼저 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면 최후의 승리의 면류관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https://youtu.be/1t_kPov1MZM
